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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渤海硏究』는 작년에 논문 투고할 때 회비를 내고, 올해에는 회비를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학보가 알아서 연구소로 날아온다(-.-;). 그래서 무심코 지나치다가 눈에 띄는 논문이 있어 읽어보고, 여기에 몇자 적으려고 한다. 논문 제목은 「榮留王의 對外政策과 政局運營」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 수료하신 정원주 선생님이『高句麗渤海硏究』第40輯에 실은 것이다 .
뭐 전체적인 내용을 다 옮길 생각은 없고, 중간중간 원문을 옮기고, 필자가 생각하는 바를 간략하게 적어보기로 하겠다.
논자가 논문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영류왕이 남다른 정치적 · 국제적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그가 왕권강화와 이를 통한 강력한 고구려 건설을 추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뭐 영류왕이 단순히 온건적이었으며, 친당적인 인물이라고 간단하게 평가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래서 예전에 '영류태왕은 정말 친당적인 인물이었나?'라는 제목의 글을 간단하게 적어보기도 했고(물론 군대가기 전에 썼던 글인지라 손발이 오글거리고, 헛점투성이의 글이지만 일단 소개해둔다. -.-;). 기본적으로 논자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에 동의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궁금한 점, 혹은 필자랑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시조묘 親祠
논자는 영류왕이 왕의 이복동생이라는 점, 영양왕대 태자(논자는 세자라고 썼지만 고치겠다) 책봉 기사가 보이지 않는 점, 전왕에게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 등이 의문이라고 했다. 즉, 영류왕의 후사 결정이 영양왕의 임종시에 급박하게 이루어졌거나, 이 기사를 후대에 고의로 삭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영류왕을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넣은 연개소문이 그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영류왕의 대수 전쟁에서의 공로를 중국사료에서는 다루고 있으나,『삼국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한다(물론 사료의 한계에 대한 부분도 지적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측면에서 영류왕은 왕위에 오른지 8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졸본의 시조묘에 친사하는데, 두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영류왕이 도성에 없음에도 고구려에 변고가 없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즉, 영류왕이 영양왕의 배다른 동생이었지만 그의 왕위 계승이 지배층이나 왕실의 불만을 초래하지 않은 정당한 계승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가 적장자 계승에 의해 즉위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고, 이후 그가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널리 확인받고 이를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한다. 그 방법으로는 안원왕 말기부터 외척 일부가 제거되고 평원왕 시기에 신진세력이 대거 등용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 귀족세력을 억제할 새로운 정치집단의 확보, 시조 추모(논자는 주몽이라고 썼지만 고치겠다)의 권위를 빌려 내외에 신성한 권위를 과시하는 것, 그리고 고씨 왕실의 지지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즉, 논자는 시조묘 친사를 곧 영류왕의 강력한 왕권 확립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류왕은 왕권이 약하거나 지지기반이 약한 임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영류왕 23년(640) 봄 2월 세자(태자가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환권이 당에 입조해 조공하고, 자제를 당의 국학에 입학할 것을 청했으며, 가을 9월에 해가 빛이 없다가 3일이 지난 뒤 다시 밝아졌다는 기록을 제시한다. 즉, 9월의 기사를 보면 고구려의 태자 입조가 분명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건이어서 귀족들이 반발했지만 이내 강력한 왕권에 진압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정변을 영류왕의 왕권 강화에 대한 반발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류왕이 강력한 왕권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시각은 아닐런지 싶다. 이미 평원왕대 이후로 고구려 왕권은 전대의 혼란스러움을 딛고 강력하게 구축되기 시작했고, 수나라라고 하는 거대한 적과 싸우면서 영양왕대 고구려 왕권은 절정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배경 속에서 영류왕이 기존의 방식이 아닌, 이복동생으로서 다음 보위에 오를 수 있었고, 정치적으로 별탈이 없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상황에서 시조묘 친사가 이뤄진 것이고, 불과 영류왕 즉위 8개월만에 이뤄진 것을 보면...이는 영류왕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고 뭘 했다거나 이게 그 8개월 사이에 이뤄진 일이 아니라 그냥 고구려의 강력한 왕권 상황 속에서 영류왕이 즉위했다고 봐야 적절하지 않나 싶다. 즉, 이러한 시조묘 친사가 영류왕 개인의 의지(왕권을 강화하겠다는) 혹은 그의 능력(혼란한 정국을 바로잡고 고구려 왕권을 강화하는)을 대변해주는 행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2. 영류왕의 당에 대한 조공
영류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건국된지 책 1년도 안 된 신생국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데, 이를 두고 논자는 고구려 나름의 정책적 계산이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한다. 논문의 19쪽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구려는 자연환경과 지리적 위치로 인해 그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중원 왕조와의 교류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우선 이들 왕조와의 교류를 통해서 경제적 이점을 얻을 수 있었는데, 외교라는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중원 정부만이 취급하는 일정한 물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43. 즉 조공과 하사의 형식을 통해 물자교역이 가능하였고, 이에 따른 경제적인 이익이 보장되었다. 또한 이러한 대중국 교류는 문화 수입의 필요성에 의해 제기되기도 하였다. … 이렇듯 영류왕의 대중국교류는 경제적 · 문화적 필요성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각주 43)에서는 '고구려가 중원 왕조들과 맺은 교역의 형태와 물자에 대해서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빈약하다. 그러나 조공 무역이라는 형태는 생활 필수품이라기보다는 각국의 특산품을 위주로 상대국에 헌사하는 형식이므로 역시 하사라는 형식으로 받아오는 것도 일정 정도 사치품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얼마나 모순된 말이란 말인가. 그럼 영류왕은 일부 사치품을 포함한 당의 특산품을 얻기 위해서 외교라는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중원 정부'만'이 취급하는 물품을 획득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것이 고구려라는 나라의 국가 발전과 직접적으로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당에서 나오는 어떤 특산품이 그렇게 고구려 국가 발전에 이득이 되길래, 1년도 안 되는 신생국에 먼저 조공사절을 파견한단 말인가. 이는 문화적 필요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불교와 도교를 배우기 위해서 당에 조공을 보냈다는 것인데, 신생국의 불교와 도교 문화가 그 정도로 고구려에 절박하게 필요했다는 말인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얘기가 이어진다. 고구려가 중원왕조와 교류를 맺은 이유는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여러 군웅 세력 중 멀리 떨어져 있는 당과 화친을 맺은 이유로 '요해 지역으로 세력을 뻗쳐오던 돌궐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 뒤 문맥을 살펴보면 조금 아리송하다.
고구려는 오래도록 요동지역을 확보하려고 했고, 확보한 뒤에도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 했기 때문에 요해제족(거란, 실위 등)과 말갈에 영향력을 뻗쳐오는 돌궐에 대한 경계심이 컸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갔다. 그리고 논자는 당시 중원에서 봉기한 각지의 군웅들이 돌궐과 연결되어 칭신하고, 돌궐의 봉호를 받는 상황이었다고 전하면서 당도 돌궐의 위협에 시달렸지만, 당시 당의 안보상 돌궐은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역시 이해가 갔다. 그런데 왜 하필 당과 교류했다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답은 없다. 단지, 돌궐은 당과 고구려 모두에게 공동의 적이었고, 돌궐을 거꾸러 뜨려야만 양자가 자신이 원하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달성했고 그 둘은 친한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당이 강력해져 고구려에게 뭔가를 요구하기 이전까지)...이것이 논자의 주장이었다. 잉?? 이거 좀 이상하다. 이건 너무 결과론적인 해석이 아닌가?
필자가 듣고 싶었던 것은 어째서 수많은 군웅들 중 고구려가 딱 '당'을 선택했느냐? 이었는데, 그 '어째서?'가 빠져 있었다. 그냥 당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돌궐이 위협스러운 존재였으므로' 정도의 대답은 그 근거로 적절하지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 당시 영류왕은 어떤 선견지명이 있어서, 당'만'이 돌궐을 격파하고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봤던 것일까? (마치 고구려가 왜 신라가 아닌, 백제와 손을 잡아서 멸망을 초래했을까요? 라고 묻는 질문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야 결과를 아니깐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는 거겠지만 당시 신라는 백제보다 한참 약한 나라였는데 왜 고구려가 신라와 손을 잡겠는가?) 어떻게 당은 다른 군웅과 달리 돌궐을 격파할 수 있었고, 고구려에게 어떤 부분이 어필이 되었을까? 이 부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영류왕이 왜 '건국 1년도 채 안 된 신생국 당에게 조공했는가?'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논자는 뭔가 이것저것 얘기를 하긴 했지만, 딱히 확실한 것은 없어보였다.
즉, 결론을 말하자면 논자는 영류왕이 경제적 · 문화적 필요성에 의해서, 혹은 당이라고 하는 군웅이 앞으로 다른 군웅들과 돌궐을 제치고 대국으로 성장할 줄 알고 신생국인 당과 미리 알아서 교류를 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식의 접근은 무리한 추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신생국 당과 고구려의 경제-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객관적으로 비교한 바가 없고(만약 고구려가 더 우수했다면 왜 굳이 당에게서 경제적 · 문화적으로 무언가를 보충하려고 노력했겠는가?), 당이 다른 군웅들과 달리 더 나은 점, 더 뛰어난 장점 등을 부각시키지 않는다면 왜 하필 영류왕이 당과 손을 잡았는지에 대한 확실한 답이 될 수 없을테니 말이다.
3. 봉역도와 천리장성
논자는 봉역도를 고구려가 주체적으로 우리 땅 이만큼, 너네 땅 이만큼이니깐 신경꺼! 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는 필자도 동의한다. 그런데 천리장성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그는 천리장성이 기존의 산성을 연결한 방어선이 아니라 평원상에 구축된 군사방어선일 가능성이 높다는 여호규 선생님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러면서 당과의 전쟁에서 천리장성이 방어선으로서 당의 군대를 저지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지 못 했고, 오히려 고구려 예하의 말갈이 이탈하지 못 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즉, 봉역도와 천리장성 모두 고구려의 세력권을 주장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 역시 일견 일리는 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한번 따져보자.
봉역도야 지도 한장 혹은 목판 하나 정도일테니 그렇다치자. 단순히 우리 세력권을 주장하기 위해 16년이나 걸려 장성을 쌓는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 그 16년 동안 말갈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은 '아~저거 다 완성되면 우리 이제 꼼짝없이 고구려에 붙잡혀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깨갱~하고 고구려가 시키는대로 다 했겠는가? 혹은 만리장성도 유목민족이 수없이 넘어 중국 북부지방을 유린한 사례가 많은데, 지금 흔적조차 남지 않은 천리장성을 말갈을 비롯한 요해제족들이 넘어가지 못 했겠는가? 만약 천리장성이 내부 세력의 이탈을 막기 위한 경계선과 같은 의미였다면 여기에도 적지 않은 국경수비대가 주둔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흔적들이 확인되는가? 더군다나 여호규 선생님의 견해를 따라온 논자는 이를 분명 '평원상에 구축된 軍事防禦線'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군사방어선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필자가 잘못 이해한 것인가????
4. 경관
논자는 23쪽 각주 69)에서 경관이 세워진 곳이 수와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던 요동성 부근, 내호아 군을 크게 무찌른 평양 부근, 우문술 등의 별동대가 크게 패한 살수 지역 등 여러 곳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당의 장손사가 파괴한 경관은 요동성 부근의 경관이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일단, 경관이 여러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필자가 미처 하지 못 했던 것이라 참신했다. 충분히 가능성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또한, 경관이 고-수 전쟁 당시 큰 전투가 벌어진 곳마다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장손사가 파괴한 경관이 요동성 부근에 있던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의아하다. 왜?
암튼, 그걸 떠나서 이 경관 파괴 사건을 두고 많이들 영류왕이 친당적인 인물이다, 온건파의 수장이다...등등 얘기하는데 당연히 논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왜 아닌지에 대한 근거는 빈약했다. 원문 23~24쪽의 일부를 발췌해보겠다.
고구려가 봉역도와 천리장성 축조를 통해 고구려의 세력권을 주장하자 당은 고구려 경내에 들어와 京觀을 파괴함으로써 이에 대응하였다. 당이 경관을 파괴한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당이 수의 정통을 이은 국가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 당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수를 이은 국가로서의 인도적인 차원의 명분을 내걸기는 했지만 결국 고구려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다. 비록 당의 명분이 타당하더라도 그 장소가 타국의 영내라면 적절한 외교적 절차를 밟아서 행해져야 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경관은 고구려인들에게는 수의 대군을 맞아 싸우던 절대절명의 국난을 이겨냈다는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당의 이러한 태도는 고구려를 독립적인 국가가 아닌 당의 패권 하에 들어있는 존재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고구려가 언젠가는 당에 복속되어야 하는 대상임을 알리려는 것이다. 고구려는 당의 이러한 의도에 조공사절 파견을 중단함으로써 고구려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 그들이 서역의 고창국을 멸망시키던 640년 무렵에 이르기까지는 대고구려 정책을 더 이상 강화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이처럼 당시 당과 맺은 조공관계는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공관계를 맺고 싶은 나라에서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언제든 끝낼 수 있는 관계에 해당하므로 실질적인 우열을 가리는 조공관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음...뭐가 좀 이상해...맞는 말 같은데, 뭔가 이상한건 느낌 탓일까? 아닐 것이다. 한번 살펴보자.
1. 고구려가 봉역도와 천리장성 축조를 통해 고구려의 세력권을 주장함
2. 당이 고구려 경내로 들어와 경관을 파괴함. 당이 수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이자 고구려의 세력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무례한 행동임
3. 고구려가 당에 조공사절을 파견하지 않음
4. 당시 고구려와 당은 조공관계가 아니었음. 주체적으로 고구려가 원할때만 할 수 있는 것이었음
일단 문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1~2는 무리없이 연결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논자가 1~2의 내용을 주장하고, 그에 대해 영류왕이 왕권강화에 힘썼고 친당적이지 않았으며, 국제적인 외교감각이 뛰어난 군주였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면! 3번의 내용이 바로 나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더불어 4번은 3번과 연결될 내용일 뿐, 1~2번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1번의 고구려 행동에, 2번의 당의 반발이 일어났고, 3번에 다시 고구려의 반발이 있었어야 한다. 그게 조공사절을 파견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위에 적은 것처럼 고구려의 자존심을 짓밟고 뭉개놓고 겨우 사진파견을 끊어 '이제 너네랑 얘기 안해!'라는 식으로 행동했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지 모르겠다.
당의 관리가 고구려 땅에서 고구려의 경관을 허물동안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은 점, 경관을 허물고 돌아갔어도 어떠한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지 않은 점, 고구려가 논자가 말한 것처럼 저렇게 자존심에 타격을 받았는데도 당에 어떤 손해배상청구나 보복을 가하지 않은 점 등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점 때문에 영류왕이 친당적이다, 당에 우호적이었다, 하나를 양보하다가 계속 양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등등의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논자는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의도적인 회피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다만, 조공을 끊었고 이를 보면 고구려는 당 중심의 천하관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조공사절을 끊은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신라가 만약 그랬다면 '오오~' 할 수도 있겠으나, 고구려는 당과 동급으로 놀던 帝國이 아닌가? 그런데 고작 조공사절 파견을 안 하는 걸로 고구려의 자존심을 회복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3번에 해당하는 부분에 영류왕의 다른 적극적인 대처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영류왕은 기존의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5. 신라에 대한 견제와 말갈 경략
논자는 영류왕이 즉위 초기부터 계속 신라를 공격해 어느 정도 군사적 성공을 얻었으나 낭비성을 잃고, 칠중성 공격에 실패함으로써 동-남 면향으로의 안정화를 이루지는 못 했다고 보았다. 또한 말갈에 대해서도 지배력 강화와 영향력 확대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 근거로『수서』에 나오는 '동서 2천리, 남북 1천 여리' 기록과『구당서』의 '동서 3천 1백리, 남북 2천리' 기록을 제시하고 있었다. 즉, 영류왕에서 보장왕 시기에 영역이 확장되었는데, 남북으로 2배 가량 영토가 확장되었으니 이는 신라와 말갈 방면으로 고구려가 상당히 확대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라는 주장이다.『통전』에 의하면 고구려 영토가 동서 6천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럼 이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즉, 단순히 중국 사료에 나온 영토에 대한 묘사만으로 영류왕이 집권 시기 내내 적극적으로 대외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논자는 28쪽에서 '따라서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류왕 시기에 신라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말갈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영류왕 시기의 이러한 노력은 동북아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미도 있지만, 이후 전개될 당과의 관계에서 일정 정도 유리한 입장에 서고자 하는 점도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적고 있는데, 고구려가 영류왕 시기에도 신라와 말갈 등 주변 諸國들에 대해 여전히 帝國으로서 우위에 있었다, 혹은 그럼으로써 이후 당과 대립했을 때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고 그랬다는 주장을 하려면 다른 근거들을 제시하는 것이 어땠었나 싶다. 의도는 좋고, 필자 또한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접근 방법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6. 천리장성이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논자는 영류왕 시기 고구려의 관리들이 진대덕 일행을 환대했다거나, 태자를 입조시키고 당의 국학에 자제들을 입조시키는 식의 저자세 외교가 연개소문의 직접적인 정변 원인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러한 불만이 2년 뒤에 바로 터지기에 연개소문의 정변은 규모도 크고, 준비 기간도 짧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무슨 근거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한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의 정변은 보다 이른 시기부터 왕실과 귀족세력 간의 불만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논자의 생각이다.
논자는 천리장성 축조에 들어가는 비용 중 상당부분을 귀족들이 담당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다소 모순적인 이야기를 한다. 수나라의 침략을 경험한 고구려 지배층이었기에 당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방어체계의 재정비에 공감하게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천리장성 축조에 귀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응? 이상하다. 분명 앞에서는 천리장성이 평원에 구축된 군사방어선임에도 불구하고 당과의 전쟁에서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 했고, 오히려 내부의 말갈족이 이탈하는 것을 막는데 사용되었다고 보지 않았는가? 그럼 고구려 귀족들은 전쟁에 쓸모도 없는 걸 몰라서 천리장성을 구축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을까? 아니면 천리장성이 설마 전쟁에서 그렇게 쓸모가 없었을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참여했을까? 뭔가 앞뒤가 안 맞는 해석이었다. 더군다나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주체가 국가인만큼 그 비용과 축성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음에도 이를 추론에 근거해 '귀족들이 상당 부분 참여했을 것이다'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논자가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는, 천리장성 축조로 인해 고구려 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를 얘기하고 싶어서이다. 그렇게 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고, 고구려 왕실은 그만큼 힘이 강력해졌다는 어찌 보면 단순한 논리를 적용하고 있는데, 이는 논자가 처음부터 꾸준히 얘기하려는 부분 '영류왕은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왕실을 중심으로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고, 이 계획이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라는 부분과 맞물리고 있다. 그러면서 논자는 이렇게 끝맺음하고 있다.
어?? 이상하다. 분명 논자는 2년 만에 연개소문 정변이 준비되어 성공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이전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며 그것이 천리장성 축조 장기화에 따른 귀족 세력 약화였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왕실이 1년 차이를 두고 처음의 반발을 진압했지만, 그 이듬해의 반발은 진압하지 못 했다고 적고 있다.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이 1년 만에 세력이 팍 꺾일만한 이유라도 있었단 말인가? 또한, 천리장성과 귀족세력과의 상관성이 뚜렷하게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설정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필자는 여기까지 논문을 읽고 그럼~지금 연개소문의 정변 원인이 '영류왕의 지나치게 저자세적인 친당 외교라는 거야?' 아니면 '천리장성 축조 장기화 등 오래도록 지속된 귀족세력 억압에 따른 반발이라는 거야?' 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 논자는 34쪽에서 이렇게 에둘러 말한다.
이러한 불만은 대당관계에 대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영류왕의 귀족세력 억압에 따른 반발이 대당관계에 있어서 고구려의 외교 방식을 빌미로 난을 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1번 말미에서 말한 첫번째 반발).
그런데 문제는 문헌상 영류왕이 귀족세력을 억압했다고 볼만한 꺼리가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조묘 친사가 강력한 왕권과 상관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귀족세력 억압과 직결된다고 생각치는 않으며, 영류왕이 대외적으로 영역을 크게 확장해 왕실의 위엄을 세웠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논자가 32~33쪽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오히려 연개소문 시절까지도 고연수와 고혜진 등 왕실의 원로가 15만이라고 하는 대군을 지휘한 것을 보면, 왕실의 권위와 힘은 고구려 말기까지 상당히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연개소문이라는 절대 권력자가 있는 상황에서도. 즉, 왕권 강화와 귀족 세력 억압이 반드시 같이 가는 것은 아닌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논자의 '연개소문은 영류왕이 왕권강화를 위해 귀족세력들을 제거하고 계루부 왕실 주도의 정국을 만들려고 하는데 대한 반발에서 정변을 일으키고 영류왕을 살해하였다'는 주장은 조금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나 싶다. 굳이 추론해서 얻은 이런 결론보다는, 문헌에 나와있는 그대로 영류왕이 당에 대해 저자세 외교를 했고, 제국으로서의 고구려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정책을 펼쳤으므로 고구려 내부의 지지를 받지 못 하고 정변으로 시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7. 연씨 진압과 연나부
논자는 33~34쪽에 걸쳐 이런 이야기를 한다.
연씨 가문이 고씨가 아니면서 몇 대에 걸쳐 막리지를 역임했다는 것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왕의 외척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124. 이는 고구려 초기의 왕비족과의 관련을 생각해 볼 수 있따. 이러한 왕비족이 고구려 후기에까지 이어졌는지 연씨가 바로 고구려의 왕비족인 연나부였다고 볼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몇 대에 걸쳐 왕실과의 혼인을 이어왔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연개소문의 가문이 연못에서 나왔다고 하는 가계 전승이 존재하게 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하백의 딸로 물과 관계 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 왕비족과 관련된 전승은 이러한 물과 관련된 전승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영류왕은 여타의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같은 왕실 세력인 고씨 가문의 지지 뿐 아니라 외척인 연씨가의 세력도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타의 귀족 세력을 중앙 권력에서 배제시킨 후에는 연씨가의 세력에 대한 우려도 높았을 것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뒤를 이을 연개소문에 대한 견제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왕실 세력들도 언제 자신들을 위협할지 모를 연씨가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의 섭직을 방해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을 쌓는 감독을 맡김으로써 그의 집안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영류왕을 중심으로 한 집권층의 의도를 파악한 연개소문은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도를 구하게 되었다.
음...이 부분을 읽고 순간...이건 뭐임? 이라고 느꼈다.
첫째, 연씨 가문이 대대로 막리지를 역임했다고 이들이 외척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중간 과정 없는 단순한 연결은 무엇인가? 물론 논자는 각주 124)에서 고구려 멸망시 신라로 망명한 안승이 연정토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외손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병도 선생님의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지만(이건 필자가 직접 보고 판단해야겠다. 처음 듣는 내용이라 신선하다), 그것 갖고는 연결고리가 너무 부족하다.
둘째, 연나부와 연씨 가문을 직접 연결하는 것에 주저하지만, 이미 논자는 연씨 가문이 연나부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기운 상태다. 고구려 왕비족이 물과 관련이 깊은데, 연씨 집안도 가계 전승이 연못 아니냐? 이거다. 겉으로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지만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다음 논의를 전개하고 있으니 그 전개과정이 어떤지는 뻔하다. 오히려 연개소문의 가계 전승이 이처럼 불확실한 신화적 소재로 채워진 것은, 왕실과 오래도록 관련이 없는 공신가문이 아니라 득세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신진세력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셋째, 영류왕이 왕실 뿐만 아니라 외척인 연씨 가문의 도움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몇줄 뒤에는 귀족들이 견제하고 왕실에서도 연씨 가문이 왕실을 위협할까 두려워 제거하려 했다고 한다. 다른 것은 다 떠나서, 왕비를 계속 배출한 왕비족이라고 한다면 다른 귀족들이 지나치게 견제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테고, 귀족들이 견제한다고 왕실 또한 왕비족 혹은 연씨 가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양자 사이가 협력에서 대립으로 바뀌는 계기는 무엇인가? 이런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없이 단순히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는 식의 논리는 어디에도 쓸떼가 없다. 그냥 논자만의 생각일 뿐이지, 다른 이의 동의를 구하기는 어렵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용만 선생님이 이미『새로 쓰는 연개소문傳』에서 세세하게 기존 견해들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러한 연구성과에 대한 참고가 없는 걸 보니, 이미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다 알고 있는 필자 입장에서는 다소 이 논문이 지루하고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이제 끝을 맺겠다.
논자는 기존에 어떻게 보면 평가절하된 영류왕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려고 다양한 방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분명 좋다고 필자 또한 생각한다. 한때 필자도 그런 기존의 시각이 너무 획일화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논자는 이제는 너무 극으로 치달은 주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기존의 견해와 극과 극 대립 구도를 형성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주장들도 하게 된 감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영류왕이 개인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가진 군인 출신의 군주임은 필자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정치판에서도 그가 우수한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못 한다고 본다. 그가 재위 기간 내내 말갈과 신라를 공격해 영역을 넓혔다고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고, 단지 중국 사서의 면적과 관련한 기록 뿐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영역이 가장 넓게 기록된『통전』은 인용조차 되어 있지 않다. 경관을 허문 당에 대한 대응책도 어물쩡 넘어간 것 같고, 천리장성에 대한 의미 역시 기존 견해와 별다를게 없어 진부했다. 그런 천리장성을 귀족과 연계해 해석하고 있는데 그 역시도 추론에 의존한 부분이 많아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설득력이 높지 않다. 즉, 영류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고구려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라고 제시한 근거들이 모두 빈약한 것이 사실이었으며, 그가 당에 대해 저자세 외교를 취한 것 또한 어떻게 제대로 변호하지 못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당의 수도 장안이 돌궐과 가까워 돌궐에 대한 평정이 당의 국가 안위에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은 안다. 그리고 고구려가 돌궐이 요해 제족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니 이것을 저지해야만 했었고. 그러나 양자의 국가목표가 일치한다고 해서 고구려가 당을 선택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당을 제외한 여러 군웅들이 모두 돌궐에 대해 그러한 생각을 했을 가능성은 높으며,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걸 성공한 나라는 당 뿐이다. 즉, 결과론적으로 당이 그러했으므로 그런 당을 선택한 영류왕은 대단한 인물이다~라고 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영류왕이 그때 신생국 당의 저력을 간파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야만 논자의 주장이 더욱 힘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결과론적인 접근이라면 기존의 견해들과 별다를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어 주목받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영류왕이 시해된 것을 자꾸 그의 저자세 외교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다 보니 무리한 해석들이 나오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영류왕이 귀족을 억압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자세 외교를 벌인 것이 사실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정작 논자도 그러한 저자세 외교에 대해서는 별말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말은 곧 저자세 외교가 영류왕 정책의 가장 큰 방향이었고, 동시에 가장 큰 오점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며, 그것에 대해 굳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영류왕이 왕제로서 출전해 내호아의 수군을 작살내고, 태왕이 된 뒤에 고구려의 전후 복구를 위해 노력한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그가 당에 저자세 외교를 한 것 또한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상이다.
덧글. 지난번에 첨부 못한 논문 파일을 첨부한다. (수정)
영류왕의 대외정책과 정국운영-정원주(2011,고구려발해연구40,고구려발해학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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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류왕으로 표현되는 고구려의 대당인식이 지나치다라는 논지를 보이셨는데, 그 교류형태는 불문하고, 신생 1년이라하지만 당시에나 이후에나 중원정부에 대해서 고구려는 심각하게 그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단지 신생정부일 뿐이지 중원이라는 큰 존재를 무시할 정도로 당시 고구려가 독립적으로 패권을 쥐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아...이 부분은 약간 오해를 낳을 수도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갖는 생각을 정리하자면. 고구려는 4세기, 중국에서 남북조 시대라는 큰 혼란기가 찾아왔을 때 오히려 왕권이 안정화되면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박경철 선생님은 지역적 군사강국이 이 시기 비로소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제국이 되었다고 했는데 저 역시 동의합니다. 그리고 5세기 북중국과 남중국이 二强 체제로 굳어질 때 고구려 역시 동방의 제국으로서 다원화된 천하관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하게 됩니다. 즉, 5세기 때의 경험이 있었기에 고구려로서는 중원에서 다시 통일된 국가가 들어서는 것에 늘 신경을 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수나라가 건국되면서 한번 고구려는 큰 전쟁을 치룬 바 있습니다. 물론 결과가 좋아서 고구려로서는 큰 손해없이 자신의 천하관도 지키고, 중원의 일원적 천하관도 박살을 냈죠. 그런데 이후 당이 들어서는 시기에, 고구려가 과연 어떤 마인드를 갖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 여기에서의 포인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당시 영류왕이 고구려와 교류한 것이, 그들로부터 뭘 인정을 받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뭔가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것이 있어서...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 뿐입니다. 더군다나 수나라처럼 전국을 다 통일하지도 못한 신생국한테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글루스의 한단인님은 당시 고구려가 여러 군웅 중 당
나라하고만 교류했을까?(http://chiwoo555.egloos.com/3222603)하는 의문을 갖기도 하더라구요(문헌에 기록이 없으니 모르는 일이지만요). 다시 말해 저는 오히려 고구려는 중원이라는 큰 존재를 알고 있기에,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늘 예의주시하고, 그들의 동향을 살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다원적 천하관에서 갖고 있는 위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도 있을테고요(5세기때처럼 말이죠). 그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조공과 같이, 중원왕조가 우위에 서는 시각으로 당시 상황을 봐서는 안 되지 않나~하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꼬비에뚜님 말씀대로, 중원이라고는 하지만 당은 말 그
대로 신생국가였지 않습니까? 아무리 중원왕조가 잘났다 한들, 고구려가 자신의 천하관을 놔두고 굳이 신생국에게 머리를 조아렸다고 보는 해석 자체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김용만 선생님 같은 경우, 고구려가 왜 신라와 달리 당과 싸울 수 밖에 없었냐는 질문에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춘 제국으로서 그렇지 않을 경우, 자국의 천하관과 위상이 무너지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을 보면(『새로 쓰는 연개소문傳』참고) 더더욱 위와 같은 시각은 의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론을 정리하자면...당시 고구려는 중원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너무 신경썼기에 신생국과도 교류를 잽싸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은 제가 참고서적을 좀 보고 말을 해야겠습니다. 상당한 의문이 생기네요.
아~네...
그리고 종교문화적인 측면을 좀 약하게 보시는 것 같은데, 당시 뿐만이 아니라 고대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불교(고구려의 경우 도교 포함) 교류는 핵심적인 컨텐츠였고, 오체투지하면서서 전수해주십사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상대정부의 시혜가 없으면 있을 수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불교의 컨텐츠가 있다면 비록 신생이었다하더라도 머리는 조아려야 할 분위기가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요.
음...위에 불교나 종교문화적인 얘기를 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그 부분에 대해서 전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일단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4세기라고 했을때 그 불교가 의도적으로, 정치적으로 도입되었으므로 제대로 된 종교로서 전파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실제, 장수태왕 시기만 해도 중국 아해들이 고구려 애들은 불교를 제대로 모른다~고 평할 정도로, 불교는 기존의 통설 이상으로 한국 고대사에 미친 영향이 적었다고 생각합니다(그럼에도 한국 고대사에서는 불교가 들어와 마치 고구려인들이 갑자기 수준높은 정신세계 속에서 살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하죠). 그리고 고구려가 제국화의
길을 한창 걷고, 왕즉불 사상이 치솟는 시기가 되면(대체로 광개토태왕-장수태왕-문자명태왕) 불교는 고구려 내에서 상당히 번창하게 됩니다. 단, 이때까지도 불교가 고구려의 국교로 칭해질만큼 전지역적인 포교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더군다나 왕권이 안정화되고, 낙랑군-대방군과 같은 중국계 세력을 흡수한지 오래 지나자 고구려에서는 더 이상 불교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야만 하는 종교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고 봅니다. 고구려 후기 도교라든가, 오두미교 같은 녀석들이 다시 판을 치는 것을 보면 말이죠. 암튼, 당이 신생국일 적에 고구려의 불교나 도교 수준은 이미 상당히 수준높은 단계였고, 그걸 굳이 당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야 하는 상황이었을까? 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수나라 말기 군웅들이 판을 칠때, 그리고 당이 막 건국되고 지방의 군웅들이 채 진압이 덜 되었을때, 중원왕조에서 고구려에 더 수준높은 불교 혹은 도교를 전수해 줄 정도의 정신이나, 여력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당 건국 직후 고구려와 당의 종교 문화 교류에 대해서 제가 따로 자세히 공부한 바는 없지만...현재까지 알기로는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당이 중원을 통일한 이후라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말이죠.
이상입니다. 가르침까지 갈 것도 없고...그냥 제 생각이 이 정도라는 것만 알아두시면 될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