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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문학세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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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의 생가를 찾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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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 석가의 ‘님’이듯 그리운 건 모두 ‘님’이라…
홍성 만큼 출중한 인물을 배출한 고장도 드물 것이다. 고려말 화포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최영 장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 대항하다 끝내 죽음을 맞은 사육신 성삼문, 전 세계를 깜짝놀라게 했던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그리고 만해… 아산만과 천수만 사이 예산 서산 당진 홍성 보령으로 이루어진 이곳 ‘내포’에 예로부터 난세의 위인이 나온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 듯 싶다. 추사 김정희, 토정 이지함, 윤봉길, 이순신이 모두 이곳 내포 출신이니 이 고장의 내력을 짐작케 한다. 내포 가운데서도 중심은 홍성이다. 잔잔한 천수만이 길게 드리우고 그 건너편에는 안면도가 방파제처럼 놓여있어 천혜의 어장이며, 오서산과 용봉산 사이로 펼쳐진 예당평야까지 이른 곡창지대에다 해산물과 곡식, 산간지방의 특산물이 집결하는 호서의 중심지역이었으니 조선조말 충청도를 홍충도 충홍도로 바꿔부른 까닭을 알만하다. 그뿐인가 수덕사 서산 마애삼존불 등 백제시대 사찰과 지금의 홍성읍 곳곳에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대찰 광경사, 읍의 북쪽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는 용봉산을 수놓는 미륵불상들 …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보우스님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더욱 위력을 떨쳤던 홍성의 불교는 지금도 완연하게 남아 있다. 조국을 잃은 청년 한용운이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고 그 사상의 연원을 불교에서 찾은 것은 바로 그가 나고 자란 고향 홍성의 혼을 그대로 이은 것이리라. ‘님의 침묵’을 저술한 백담사를 두고 홍성땅을 찾은 연유도 여기에 있다. 홍성읍에서 만해스님의 동상을 만나고 21번 국도를 따라 예산쪽으로 돌아와서 서산방향으로 가다가 닿는 생가로 가는 길은 몇 년 전만 해도 비포장도로라서 눈이 많이 쌓인 날이면 자동차가 들어가기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처마 끝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생가엔 금새라도 스님이 방문을 열고 툇마루에 서서 객을 맞아줄 듯, 마당에 들어서니 훈훈한 기운이 돈다. 영정과 친필글씨가 놓인 방안 왼편엔 이 고장 출신 화가인 고암 이응노 화백의 모조그림이 걸려 있다. 이 나라와 사회가 나를 승방에 몰아넣어
1905년 26세 때 설악산 백담사에서 김연곡(金蓮谷)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만해스님은 해방을 얼마 앞두고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할 때까지 “내가 태어난 이 나라와 사회가 나를 중이 되지 아니치 못하게 하였던가. 또한 인간 세계의 생로병고 같은 모든 괴로움이 나를 시켜 승방에 몰아 넣고서 영생과 탐욕을 속삭이게 하였던가”라던 출가 당시의 초발심을 꺾지 않았으니, 만해가 없었다면 이 민족과 불교의 자존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독립운동가며 문학자인 스님을 지탱하고 규정한 것은 역시 불교다. 스님이 소리쳐 부르던 ‘님’이 무엇인가. 역사를 제하면 ‘님’은 연인이요, 수도자만을 내세우자면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중생’이며, 독립운동가로만 대하면 님은 ‘조국’이 되지만 스님의 님은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그 모두이기도 하다. 티끌 한점에 수미산이 가득하다는 불교의 화엄연기 사상을 압축한 것이 바로 ‘님’인 것이다. 또한 성(聖)과 속(俗)을 무시로 넘나들면서도 장부의 본분사를 정확히 꿰뚫는 선사가 깨친 도리가 ‘님’이기도 하다. 1926년 내설악의 밤 문풍지 소리에 수많은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낳았을 88편의 시 ‘님의 침묵’ 서문에서 만해는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긔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양이 긔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고 했다. “선생은 불학(佛學)의 석덕(碩德)”이라고 말한 시인 조지훈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님의 침묵’은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선가적 어법으로 소멸과 생성의 모순, 소승적 집착과 대승적 자비의 상반된 불교의 변증법적 논리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두두물물·불이사상 짙게 깔려 강철같은 의지와 대쪽같은 절조로 서릿발같은 기상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한치도 물러섬이 없었던 스님에게 손과 발이 되었던 것은 이처럼 문학이다. 한국문학사에서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만해스님의 시문학은 보편적인 시대정신을 안으로 갈무리하고 인간의 애별리고(愛別離苦)와 자연을 함께 보듬은 짙은 서정성을 담보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위대한 ‘시적유산’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불교문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는 불이(不二)사상과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것이 다 부처라는 만민평등주의 사상을 짙게 깔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문학사측면에서 볼 때 근현대 불교 시문학의 출발이자 완성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타고 남은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수없어요 中〉 만해스님의 시는 ‘관능적’이고 ‘감각적’이다. 온통 만남과 이별 그리고 사랑을 노래한 연가(戀歌)다. 그러면서도 수행자로서 가야할 길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식민지현실에서 조선민중이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만해시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다. ‘전체’와 ‘개인’, ‘현실’과 ‘이상’, ‘종교’와 ‘사회’에 대한 포괄적 물음과 답을 한꺼번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만해스님의 시가 불교적 카테고리를 뛰어넘어서 모든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진리 즉 깨달음을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의 가르침이, 불교의 문학이 도달해야 할 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스님은 보여주고 있다. 세찬 바람 부는 광야에서 흰 눈을 뒤집어쓴 채 저녁놀에 물들어가는 생가를 뒤로하고 잠시전 눈길이 머물렀던 시비를 떠올려본다. “나는 나루ㅅ배 당신은 행인…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마지며 밤에서 낫가지 당신을 기다리고 잇슴니다…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줄만을 아러요…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감니다…” 홍성=하정은 |
첫댓글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I return to Buddha, Law, and Seung Sambo.
I pray with all my heart that the holy and merciful Buddha's skin and mercy light will be reflected. Thank you.
Holy Fa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