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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배우오민애와 삶 원문보기 글쓴이: 오민애
이번에 살펴볼 내용은 1987년 6월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이 전국을 휘감었던 6월 항쟁입니다.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발표에 대한
전국민의 반대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대학생 박종철 군 고문살인사건과 이한열 군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었던 투쟁.
오늘 살펴볼 역사현장은 당시 뜨거웠던 6월항쟁을 어떻게 새기고 있을지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시죠.
6월항쟁을 알아보기 위해 찾은 첫번째 역사현장은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이한열 기념관입니다.
리포터 안녕하세요. 교수님(인사나누고) 오늘 저희가 배워야할 역사는 이 땅의 민주화하면 빼놓을 수 없는 6월항쟁입니다. 6월
항쟁이란 어떤 것인지 직접적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전문가 1980년대에 들어와서 민주화운동이 굉장히 격렬해졌습니다. 그러면서 탄압이 굉장히 심해졌습니다. 그런 속에서 87년 1
월에 (테이블을)탁치니 그냥 억하고 죽었다더라로 유명한 서울대 박종철학생의 고문 치사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되면서 국민들이 분노하게 되고... 그 다음이 4.13호헌조치를 통해서 헌법개정을 안하겠다고 하니까 국민들이 또 분노하게되면서 그런 속에서 국민운동분부가 6월 항쟁을 시작하게 하는 계획을 세우고 그런 계획에 의해서 6월 10일 6월 항쟁을 시작하게됩니다.
리포터 지금 이곳에 관련 사진자료들이 많이 있는데요. 직접 보면서 설명해주세요.
6월항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열사 이한열
대한민국 학생운동가이자 반미반전운동가로 알려진 그는
당시 반전두환운동에 가담해 활동했습니다.
1987년 역시 시위 참여하던 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면서
6월 항쟁과 6.29선언의 도화선이 된 인물인데요
#당시 상활설명/전경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하자, 같이 옆에 있다 도망치던 한 학우가 교문 안 15m~20m쯤에서 일어서다 다시 쓰러지는 이한열군의 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일으켜 세웠다. 이 때 이한열군은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이를 본 또 한 학우가 들쳐업고 10m정도 뛰었을 때 2명의 학우가 팔다리를 부축했고 외신기자들은 사진을 찍었다. 이때 이한열군의 상황은 코에서 계속 피가 나오고 뒷머리부분에서 피가 옆으로 흐르고 있었다. 병원 응급실까지 옮길 때의 의식은 어느 정도 있는 상태. 이한열군은 "힘드니까 쉬어가자 뒷통수! 뒷통수!" 등의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온몸을 쥐어 뜯으면서 신음하고 있었는데 윗도리를 벗기고 전화번호를 물으니 대답할 만큼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으로 온몸을 떨며 '뒤통수! 뒤통수!"라고 외쳤다. 이 때 의사가 와서 살펴보고는 지도교수와 부모님께 빨리 연락을 취하라고 했으며 의사가 돌아가자 "뒷통수! 전신마비!" 하면서 괴로워했다.
전문가 이 사진이...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들어올리는 사진입니다. 6월항쟁의 유명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리포터 이한열이 어떤 인물이고 당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요
전문가 이한열군은 당시 연세대 학생이었는데 6.10전날, 6월 9일날 연세대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경찰의 최루탄 직격탄
을 맞아가지고 쓰러지게 되고 그 뒤로 계속해서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그 결과 6월 29일날에 대통령 직선제가 발표되게 됩니다만 7월 5일에 결국 이한열군은 사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한열군은 6월항쟁을 상징하게 되는 그런 인
물이 되었습니다.
리포터 6.10항쟁과 관련한 다른 장소를 방문해보고 싶습니다.
전문가 6.10 국민대회의 상징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성공회 대성당으로 가보시죠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성공회 서울성당
지금은 믿음과 평화로 가득한 정숙한 공간이지만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항해 6월 항쟁이 시작된 곳으로
당시 이곳에서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회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리포터 교수님 당시 6.10 국민대회식이 이곳에서 개최되기로 했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전문가 여기에서 그 날 국민대회식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경찰들이 원천 봉쇄를 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못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들어오신 분들 40여 명 정도가 6시에 여기서 식을 조촐하게 했습니다. 그 때 타종을 하면 국민들이 본격적으로 행동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밖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가지고 굉장히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그럼 명동성당으로 가보실까요?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또 다른 장소, 명동성당
1987년 6월 10일 당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항쟁은
6만여 명의 경찰병력으로도 막지 못했고
시위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산발적인 야간시위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지속적 투쟁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리포터 6월항쟁이 지속적이고 전국적으로 확산된 데에는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있었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진행과정은
어땠나요?
전문가 그 당시 명동거리하고 을지로 이쪽에서 시위하던 분들이 경찰에 밀려서 명동성당에 들어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800
명 정도가 들어왔는데 그 분들중 약 300명 정도가 남아가지고 농성투쟁을 했습니다. 시위대와 경찰이 5일동안 대치하면서 농성투쟁이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었고 계속해서 시위가 이어질 수 있는 그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별첨....그러나 이때까지 어느 누구도 6.10 대회가 단 하루의 운동이 아니라 보름이상 전국을 뒤흔들 대항쟁으로 발전하리라는 것을 예상치못했다. 원래 명동성당은 6.10대회가 실패했을 때 모일 장소였고 대회는 성공적으로 치뤄진 상태였기 때문에 모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퇴계로와 종로에서 접전을 벌였던 시위대들이 계속투쟁을 위해 자발적으로 성당에 모여든 것이었다. 우연하고 자연발생적이며 비계획적으로 모인 상태에서 11일 아침 국민운동본부는 오히려 당혹해했다. 계획도 없었고 통제할 수도 없는 투쟁이었다. 더구나 명동성당측으로부터 어떻게 한마디 사전연락없이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항의전화를 받고 더욱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는상황. 당시 이명진 대변인은"6.10대회는 끝났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사실상 해산을 종용했다. 당시 서울역의 학생운동을 이끌던 서대협(서울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일반시민참가자들의 강경한 결사항전 주장에 통제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농성자들은 난처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우습게도 활로를 열어준 것은 전두환정부였다. 조종석서울시경국장은 "명동성당 집단난동사태는 6.10폭력시위와는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는 체제전복적인 국기문란행위로 간주한다....이들은 좌경운동권의 핵심세력으로 추정되며 명동성당이 '성역'임을 선언하고 좌경공산혁명의 본거지인 '해방구'로 설정하여 경찰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경찰은 치안질서와 시민생활보호차원에서 빠른 시간안에 단호히 대처할 방침이다...." 그러나 크나큰 오산이었다. 이러한 발표가 온 국민의 시선을 명동성당으로 향하게 했다. 또한 오랜 기간 뻔한 좌경용공타령에 익숙해진 국민들에게는 이런 발표가 반독재 민주화의 열망을 모독하는 전두환정권의 음모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사람들은 6.10대회의 정신을 지키기위해서는 명동성당농성을 지켜야한다는 보호본능이 솟구쳐 올랐다. 여기에 명동성당주인인 신부들이 "민주화투쟁을 적극 지지 동참하여 사제로써 끝까지 보호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전두환정권의 협박은 힘을 잃었다. 어마어마한 격려와 지원이 명동성당으로 몰렸다. ...생략)
-87년 6월 항쟁, 민주화를 이야기하다. 에서 발췌
17,19대 국회의원 유기홍 http://blog.naver.com/youngkor/10089051843)
#1987년 6월 15일 농성해산 뒤 수녀들이 미사를 올리고 있다.
리포터 범국민대회가 그 뒤로도 두 차례 계속되었다고 하는데요 이런 사회적 움직임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요
전문가 6.10 국민대회 이 후 6월18일날 최루탄 추방대회라고 하는 큰 대회가 있었는데 그 때는 전국에서 150만 명 정도가 모였습
니다. 그리고 6월 26일날 국민 평화대행진이 전개됐었고 그 때도 150만명 정도가 모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결국 전두환 독재정권쪽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게 되는 6.29선언을 발표하게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6월항쟁이 성공하게 됬습니다.
치열하고 침혹했던 6월항쟁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전제해야했던 역사는
내내 마음을 숙연케 합니다.
#이한열기념관의 방문자기록중에
# 이한열 기념관의 방문자기록 중에
리포터 정치적 민주화가 받아들여지면서 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요구도 일어났다고 알고 있는데요. 어땠나요?
전문가 6월항쟁이 끝나고 나니까 국가의 억압력이 상당히 완화가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노동자들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하
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울산의 영남지역에서 시작해가지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까지 확산이 되는데 7월, 8월, 9월까지 3개월 동안 약 3천군데 이상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거기에 약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습니다.
리포터 교수님 마지막으로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주시죠
전문가 사실 우리가 건국이후에 40년에 이르는 동안 독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6월 항쟁을 통해서 우리가 민주주의로 넘어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6월 항쟁 이후에 본격적으로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리포터 말씀 감사합니다.(인사하고) 민주화를 열망한 전 국민의 저항 운동이었던 6월 항쟁. 지금의 평화로운 모습 속에서 당시의
치열함을 찾아보기란 힘들었지만 그래도 우리 가슴에서 절대 지워서는 안되는 역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 역사를 어떻게 써 나갈 것인지 후손인 우리의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성공회대 정해구교수님과>
당시 6.10항쟁에 직접 참여하셨기에 보다 더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어서 실감났습니다. 당시를 떠울리며 눈시울을 살짝 적시기도 하셨지요.
첫댓글 위 글의 작성자인 오민애님은 함께 공부한 동기분이신데 방송대학 TV 프로그램 제작차 작성한 글인것 같군요.
'87년 6월 16~17일
서울 대성당 청년회원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강데레사와 저는
그 와중에도 눈을 맞춰 결혼했쉼다!!! ㅋㅋㅋ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살벌한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그 위대함을 많은 영화에서 보여주었듯
저희도 그날
목숨 걸고(?) 시청 앞 도로에 누웠던 덕분에
지금껏 한 이불 아래 누울 수 있었쉼다~~~^^*
그해 저는 시골 산골짜기에서 살며 탁탁두들겨야 잘 나오는 흑백TV를 보면서 데모하는 나쁜 사람들을 욕하던 중삐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