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 살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이 잘되고, 좋은 직장을 갖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큰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살고,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고, 뜻하지 않은 좋은 기회를 얻게 되면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유교에서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다섯 가지 복으로 꼽기도 합니다. 유호덕과 고종명 대신 귀貴와 자손중다子孫衆多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복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삶에 좋은 일이 많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며, 평안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경 역시 건강, 물질, 자녀, 평안 등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인정하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환경이나 많은 소유로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뜻의 계획 속에 주어져 있는 고난도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복된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오히려 여호와의 율법이 그의 기쁨이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읊조린다.”(시1:1-2)라는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삶을 거부하는 동시에 가장 선하고 아름다우며 좋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탁월한 악장이었던 아삽 눈에 비친 세상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악인들은 형통했습니다. 복을 받아야 마땅한 의인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흔들렸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면서 세상의 형편보다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주님 외에 제가 누구를 원하겠습니까?...주님 외에 저에게 기뻐할 것이 없습니다.”(시73:25)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계시면 제가 가진 것이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제 삶의 가장 큰 복입니다.”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모세는 성민 이스라엘을 향해서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켜 주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라고 축복했습니다. 여호와가 주어입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부어주십니다.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평강을 허락해 주십니다. 복은 저와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는 열리지 않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 떼는 간데없고 목장에는 소 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호와 안에서 환호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합3:17-18)라는 선지자의 외침에 따르면, 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모든 조건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다 사라져 버린 상황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도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조건이 기쁨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고 한결같으신 여호와가 기쁨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받아 누리고 있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은 가장 큰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받아 누리고 있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허락해 주시는 여호와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큰 복입니다.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잃어버려도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해 주시는 여호와를 잃지 않는다면 가장 귀하고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가장 큰 복 여호와와 동행하고 있습니까?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상관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인자חֶסֶד(헤세드)”는 문맥에 따라서 “인애, 자비, 사랑, 신실한 사랑, 언약에 근거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 등으로 번역됩니다. 열방 가운데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당신 백성 삼아주신 성민 이스라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무지막지한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라는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당신 자녀로 세워주신 저와 여러분과의 관계에서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성실하고도 충성스러운 사랑입니다. 당연히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나 갖추고 있는 조건이 아니라 언약에 근거하여 행동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상태가 아예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상태보다 저와 여러분과 맺은 언약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시험했습니다. 배신했습니다. 떠났습니다. 범죄 했습니다.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무려 열 번이나 그랬습니다. “열עֶשֶׂר(에세르)”은 “완전한 수량, 충분한 횟수, 반복적으로 주어진 기회”를 가리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 주셨음에도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맺은 언약에 성실하셨습니다. 충성스러우셨습니다. 그들을 한 번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놓지 않으셨습니다. 끙끙 앓아야 할 정도로 힘들어하면서도 참고 또 참아주셨습니다. 그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보호해 주셨습니다.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해 주셨습니다. 이는 곧 성민 이스라엘의 역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그림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당신의 자녀로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 곧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려 놓아 주셨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까지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진실אֱמֶת(에메트)”은 “진리, 신실함, 확고함” 등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되지 않으십니다. 신뢰할 수 있으십니다. 한번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지키십니다. 이루어주십니다. 아버지 곁에서 왕자처럼 생활하고 있던 요셉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집트로 종이 되어 팔려 갔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현실은 하나님의 꿈 곧 약속과는 정반대로 흘렀습니다.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집트 총리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수직상승 되었습니다. 전무후무한 흉년 속에서 이집트와 주변 국가들은 물론 그들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였던 가족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들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끔찍한 현실을 선으로 바꿔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한 번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놓지 않으셨습니다.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당신 뜻의 계획대로 완성하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그 과정이 보이지 않을 때도 일하셨습니다.
마치 철저하게 외면하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일하셨습니다. 끝까지 진실하셨습니다. 끝까지 신실하셨습니다. 끝까지 한결같으셨습니다. 요셉의 눈물과 인내와 믿음을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취하기에 합당하실 정도로 충분히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시115:9a, 10a, 11a)라고 외칩니다. 무려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외치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믿으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의지하라고 외쳤습니다. “의지하다בָּטַח(바트흐)”는 “신뢰하다, 확신하다, 맡기다.” 등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지적 동의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에게 자신의 안전은 물론 미래까지 온전히 맡기고 기대한다는 관계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의자 하나가 있습니다.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앉을 때는 다릅니다. 몸의 무게 곧 자신을 의자에 온전히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앉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차원을 넘어 자신을 온전히 맡기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우상들은 은금이나, 돌, 나무 등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상은 입은 있지만 말하지 못합니다. 눈은 있지만 보지 못합니다. 귀는 있지만 듣지 못합니다. 코는 있지만 냄새 맡지 못합니다. 손은 있지만 만지지 못합니다. 발은 있지만 걷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도 없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어내고 의지하는 자들은 결국 자신이 만든 우상처럼 됩니다. 무엇을 예배하느냐가 저와 여러분을 결정합니다.
예배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자신의 시간과 돈과 감정과 능력과 삶을 투자합니다. 그것이 결국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 돈의 논리에 맞춰지기 쉽습니다.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 다른 사람의 평가에 자신이 종속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 사람을 수단으로 보기 쉬워집니다. 자신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 자기 욕망이 궁극적 기준이 되기 쉽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예배하면, 예배하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저와 여러분이 누구인지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외치듯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상은 단순히 사물이 아닙니다. 돈, 성공, 명예, 권력, 인정과 칭찬, 자신, 쾌락, 안전, 학문, 철학, 사상, 심지어 종교적인 업적까지 하나님 아닌 무엇인가를 궁극적인 존재로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고, 신뢰하고, 자신의 미래까지 맡기는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은 우상처럼 됩니다. 당장에는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맡길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무엇을 사랑하고 의지하느냐가 사람을 형성합니다.
우상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우상처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우며 인자와 진실로 무장하신 하나님처럼 됩니다. 무엇을 사랑하고 의지할 것인지, 또 자신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오, 너희의 방패시로다.”(시115:9b, 10b, 11b)라는 외침 역시 세 번씩이나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도움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할 수 없는 부분을 조금 거들어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고난이 필연적인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유일하게 의지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근원이 되어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방패는 단순한 군사 장비가 아닙니다. 적의 공격을 막고, 생명을 보호해 주는 장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십니다. 위험할 때 보호해 주십니다. 시인의 외침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시115:12-13)라고 이어집니다.
“생각하다זָכַר(자칼)”는 “기억하다, 잊지 않고 마음에 두다, 기억하고 언약에 따라서 행동하다.” 등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단 일분일초도 잊지 못하십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기억하십니다. 거기서 끝내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얼마나 신실한 분인지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우상은 기억하거나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대로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언제, 어디서나, 한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십니다.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행동하십니다. 복을 주시기 위하여 행동하십니다. “복을 주시다יְבָרֵךְ(예바레흐)”는 미 완료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영광 돌리고, 자신을 당신께 온전히 맡기는 백성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십니다. 지켜 주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번성하게 해 주십니다. 무너졌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선을 베풀어 주십니다. 고난이 필연적인 힘든 인생을 사는 동안 필요한 은혜를 쉬지 않고,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남녀노소는 물론 빈부귀천과는 전혀 상관없이, 위대한 자나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거나 차별하지도 않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지도 따지지 않고 베풀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시115:14)라는 외침대로, 대대손손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우상은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옮기고, 인간이 세우고, 인간이 관리합니다.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도, 옮길 수도, 세울 수도, 관리할 수도 없습니다. 통제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오히려 저와 여러분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이해하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고 외쳤습니다.
시인은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시16:2b)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소유가 많아서,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서, 사랑하고 아끼며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복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복되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복을 주어...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창12:2a)라는 선포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는 저와 여러분의 도움입니다. 방패입니다. 의지할 유일한 분입니다. 복의 근원입니다. 가장 큰 복입니다. 여호와를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자신을 통째로 맡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고난이 필연적인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여호와께서 때에 따라 도움이 되어주시는 축복, 대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축복, 삶의 필요가 생길 때마다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축복, 무엇보다 복의 유일한 근원 되시는 하나님으로 충만한 축복을 대대손손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