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적 자본가와 악덕 자본가 사이에 놓인 카네기
뛰어난 사업가인 형 앤드류 카네기 때문에 기를 펴지 못했던 동생 톰 카네기는 폐렴과 시름하고 있었다.
톰은 평생 형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술만이 그의 위안이 됐다.
결국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돼 버렸다.
톰은 병상에 누운 지 3일 만인 1886년 10월19일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홀로 남은 아내가 9명의 자녀를 키워야 했다.
77살의 카네기 어머니 앞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심장이 약해져 고생하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다.
카네기는 그런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다 심한 오한에 시달렸다.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다.
카네기 역시 병상에 드러눕게 된다.
카네기와 약혼한 루이스는 카네기 비서와 매일 전보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해 11월 루이스에게 카네기 어머니의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아들과 어머니의 남다른 관계를 알고 있었던 담당 의사는 카네기에게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카네기의 몸 상태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머니의 관이 아들의 방을 지나지 않도록 창문으로 관을 내려 보낼 정도였다.
카네기가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전해들은 건 그가 몸을 회복한 뒤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17일이 지났을 때다.
카네기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큰 슬픔을 느꼈지만,
며칠이 지난 뒤 신기하게 어머니를 찾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 살았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카네기는 자유롭게 루이스와 사귈 수 있었다.
카네기는 루이스에게 편지를 썼다.
“루이스, 전 이제 전부 당신의 것입니다.
모두가 나를 떠나고 당신만 내 곁에 있군요.
이제 당신 안에서 살고 싶습니다.
죽을 때까지 당신의 유일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4월22일 오후 8시 결혼했다.
53살의 앤드류 카네기가 30살의 루이스 윗츠필드의 결혼에 세상은 주목했다.
그러나 그들은 30명의 손님만을 초청해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카네기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꿈같은 신용여행을 떠났다.
이즈음부터 카네기는 기부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런 말을 즐겨했다.
“돈을 많이 안고 죽는 사람은 불명예를 안고 죽는 것입니다.”
그는 1889년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역설한 <부의 복음 The Gospel of Wealth>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당대에 크게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되던 당시는 자본주의의가 발전함에 따라
부의 극단적 불균형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급진적인 사상가들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의 전환을 주장했고 노동운동도 확산됐다.
미국 작가 잭 런던이 쓴 <강철군화>는 그런 시대상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소설에선 7개의 트러스트가 전체산업과 행정부·의회·법원·군대 등
국가기구는 물론 언론·학교·교회까지 완전 장악해 과두지배체제(강철군화)를 굳혀나간다.
이 체제 아래서 노동자는 빈곤·실업·재해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채 노예로 살아간다.
대안을 제시해야 할 지식인들은 지배체제의 공고화에 앞장선다.
파업투쟁 같은 노동자들의 저항 움직임이 있으면 ‘강철군화’는
경찰과 민병대, 어용노조를 동원해 총칼로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잭 런던은 소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본가들이 언론과 군대를 지배하고, 법 또한 있는 자들을 위한 껍데기일 뿐이다.
강철군화를 신은 그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들에게 저항하는 정의롭고 진보적인 노동자들이 있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는 글을 신문 칼럼에 쓰며
계몽적 자본가라는 이미지를 쌓아갔던 카네기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체제의 변화는 많은 희생이 뒤따른다고 지적했다.
대신 백만장자들이 자신이 쌓은 어마어마한 부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베풀고 지원해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카네기가 <부의 복음>에서 말한 부자들의 역할이었다.
그는 책에서 너무 많은 부를 자녀에게 넘겨줘 자녀의 삶을 망치지 말 것,
생전에 사회문제의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현명한 기부를 할 것,
조금만 이끌어주면 자립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디딤돌 방식의 지원이 최선의 자선활동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이 책에서
“부자는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육적, 문화적 기관을 제공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카네기는 미국의 신흥부호가 자신의 충고를 다를 수 있도록
미국 정부는 백만장자에게 거액의 재산세를 부여해야 한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카네기는 회사가 많은 이익을 올리면 임금을 인상하는 것보다
전체 사회를 위해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현명하게 돈을 쓰는 방법은 단순히 월급을 올려 개인에게 작은 이익을 주는 것보다
공익을 위한 큰 이익이 더 낫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신념으로 카네기는 임금 인상으로 개인의 생활수준을 올려주기보다
교육이나 예술과 같은 공익 기금을 제공하는데 충실했다.
카네기는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실제로 행동으로 움직였다.
피츠버그와 앨러게니에 카네기 무료 도서관을 세웠다.
사업에서의 열정만큼이나 카네기는 자선활동에도 성의를 보였다.
서가를 장식할 그림을 손수 선택했다.
1만달러 파이프 오르간을 음악 감상실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는 개장할 때마다 대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
“저도 어린 시절 경험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하루 종일 밤늦게까지 노동에 시달리는 가난한 시민, 가난한 남성, 가난한 여성이
이 도서관에서 전시된 책을 고르고 오르간 연주를 들으며
갤러리에서 미술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이것은 백만장자나 어떤 갑주가 누리는 즐거움이지만,
보통 시민도 이 즐거움을 함께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다!’고 외치십시오.”
그러나 카네기의 이런 생각에 비판도 잇따랐다.
자선가인척 하는 악덕 자본가라는 비판이었다.
공공이익을 위한다는 대의명분만 외칠 뿐 낮은 임금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임금을 올려주기는커녕 노동자들의 밥값을 줄여 남은 돈으로 자선사업이나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생계와의 전투를 뒤로 미루고 도서관을 이용하겠느냐는 비아냥거림도 뒤따랐다.
일부 노동자들은 임금이나 올려줘서 생필품이나 사도록 도와주지 않는 카네기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네기는 그들의 불만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논란 속에 그의 명성에 치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홈스테드 제강소 사태였다.
1889년 1월 ‘카네기 브라더스’의 사장으로 헨리 프릭이 임명됐다.
카네기는 그의 추진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카네기는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고, 프릭이 자신의 경영관에 동의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후계자로 여겼던 프릭은 회사 경영진만이 고용과 임금을 다뤄야 한다고 믿었다.
가장 무자비한 고용인으로 악명이 높았던 그는 카네기의 인사정책 실패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얼마 뒤 회사의 홈스테드 공장 임금계약기간이 만료됐다.
생산하는 강철의 톤수에 따라 임금을 받은 218명의 직원은 임금이 60%정도 오르게 됐다.
이때 카네기는 수백만 달러를 들여 홈스테드 제강소에 설비투자를 해
강철 생산량이 60%가량 증가했다고 강조하며 이들의 임금을 30% 정도 밖에 올려주지 못하겠다고 통보했다.
카네기는 임금협상을 프릭에게 맡긴 채 1892년 여름 해외 여행길에 올랐다.
카네기는 프릭을 믿었지만 프릭은 미국 노동 역사에 영원히 오점으로 기록될 유혈 사태를 만들고 말았다.
처음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홈스테드 3800명의 노동자 중 단지 218명만이 새 임금 체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카네기가 떠난 8주 뒤 프릭은 노조 대표를 만나 협상을 진행했다.
노조는 단호했다.
그들은 일단 1895년까지 현재의 임금구조를 그대로 해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프릭은 거절했다.
노조는 조금 양보해 일주일에 1달러씩을 기존 월급에서 삭감하자고 제안했지만 프릭은 2달러 삭감을 고집했다.
팽팽한 줄 당기기가 한동안 지속됐다.
긴 협상에 지친 프릭은 마지막으로 자기주장만 던진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1892년 6월30일 프릭은 공장을 폐쇄해 버렸다.
그는 5킬로미터 길이의 담 위에 가시가 달린 철사를 친 뒤 포탑을 세웠다.
공장 노동자들은 이를 ‘프릭의 요새’라고 불렀다.
노동자들은 자신만 방어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프릭의 행동에 분개했다.
프릭은 더 나아가 핑커턴 경비대를 300명 고용했다.
핑커턴은 단순한 보안경비업체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서남부의 항구 도시인 글라스고우 출신 앨런 핑커턴은
미국으로 건너와 시카고에서 형사와 보안관 대리 등의 업무를 하다 미국에서 최초로 탐정 기관을 설립했다.
그 뒤 기차 강탈사건 등을 해결해내면서 명성이 자자해진 뒤
링컨 대통령을 경호하고 남북전쟁 때는 재무부 비밀 검찰국의 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핑커턴의 탐정기관은 사람들의 비난을 사기 시작했다.
70여건의 파업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잔인무도한 수법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홈스테드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억압받는 노동자를 대표해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수천 명의 노조원들이 공장 주위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7월5일 새벽에
핑커턴 대원들은 노동자 진영을 파괴하기 위해 거룻배를 타고
기습적으로 노동자 진영으로 들어가려 했다.
노동자들은 접근하지 말라는 표시로 공포를 쏘았지만 핑커턴 대원들은 무시하고 상륙하려 했다.
노동자들은 돌과 병을 던졌고, 몸싸움은 총싸움으로 확대됐다.
핑커턴 대원들이 미처 해안에 상륙하기도 전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일대는 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훈련된 핑커턴 대원들은 3명만이 중상을 입었지만,
노동자 쪽에선 5명이 사망하고 중상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수적으로 적었던 핑커턴 대원들은 끝내 항복했다.
프릭은 그 뒤 미국역사상 최대의 공공의 적이라고 알려질 만큼 미움을 받았다.
그는 사무실에서 기습을 당해 총탄을 여러 발 맞고 칼에 되풀이해 찔리기도 했다.
홈스테드 사태는 신문 1면을 장식할 만큼 심각한 사회적 이슈가 됐다.
<일러스트레이터 위클리>는 파업자 가족이 핑커턴 대원에게 마구 돌을 던지는 모습을 찍어 보냈다.
반면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는 카네기를 “불명예스러운 자본가의 표본”이라고 비난하며
“카네기를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는 ‘비굴한 사람’이다”라고 지적했다.
거의 모든 언론매체가 홈스테드 사태를 특집 기사로 다뤘다.
기사 대부분은 비록 파업 사태가 노동자들에게 이득을 주진 않았지만,
카네기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고 썼다.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계몽적 자본가라는 이미지를 훌륭히 쌓아온 그였다.
그런 카네기의 공장에서 이런 불미스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고 전국적으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스코틀랜드에서 홈스테드 사태를 듣게 된 카네기는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홈스테드 사태는 카네기가 노년기 남은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과오임이 분명했다.
상당한 자선 행적에 비해 영원한 오점을 남긴 것이다.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고 있었으므로 사건이 발생한 이틀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평생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일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사업을 하면서 받은 그 어떤 상처도 홈스테드 파업 사태만큼 큰 고통을 남기지는 않았다.”
기부천사로 변신한 카네기
20세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상 최대의 인수합병이 일어난다.
1901년 1월말 카네기는 금융계의 실력자이자 세계적인 투자은행 JP모건의 설립자인
JP모건에게서 카네기철강회사 매각 제안을 받는다.
카네기의 나이 67살 때였다.
당시 카네기는 사업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내 루이스도 남편이 사업을 그만두고 가정과 자선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4년 전 카네기의 아내 40살 루이스는 귀여운 딸을 출산했다.
아기는 할머니의 이름을 따 마가렛이라고 이름 지었다.
늦둥이 딸이자 외동딸이었다.
카네기는 딸아이가 옹알거리는 모든 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딸아이가 말을 하게 되자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문학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해 주었다.
아빠가 집을 떠나 멀리 가게 되면 마가렛은 온갖 재미난 얘기와 사랑이 듬뿍 담긴 편지와 메모를 받았다.
카네기는 강철사업 자본의 58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제 노령인 그는 사업이 일대기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고 판단했다.
중대한 결정이 절실했다.
카네기는 자신의 나이와 자선에 대한 소망 때문에 사업체를 매각하고는 싶어 했다.
그렇다고 사업을 통째로 넘기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무렵 카네기철강회사 사장인 슈왑이 카네기를 찾아왔다.
그는 JP모건한테서 카네기가 진심으로 은퇴할 생각인지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회사 매각을 주선해주겠다고 덧붙였다.
카네기의 동업자들도 모건이 제시한 조건에 마음에 들어 했다.
카네기는 동업자들이 매각을 원한다면 이의가 없다고 대답했다.
카네기의 말이다.
“강철은 질이 떨어지는 다른 모든 금속을 제치고 왕좌에 올라 있었다.
분명 강철의 미래는 매우 밝았다.
그러나 노년에 들어선 나에게는 부의 분배를 실현하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카네기는 사상 최대의 거래를 하기 위해 JP모건을 만날 의향이 있음을 통보했다.
카네기는 메모장에 자신이 생각한 매각금액을 일목요연하게 연필로 적어 슈왑에게 건넸고,
슈왑은 그것을 모건에게 가져갔다. 매각금액은 4억6000만달러였다.
어마어마한 액수가 스왑을 통해 모건에게 전달됐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카네기의 서류를 훑어 본 모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가격이 적정선에 있다고 봅니다.”
미국 사업과 금융 역사상 가장 큰 액수의 거래였다.
모건은 거래를 성사하고자 월스트리트 23번지에 위치한 자신의 거처로 카네기를 초청했다.
이 초청에 대해 자존심이 강한 카네기는 자신이 그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모건이 51번가 서부 5번지의 자기 거처로 와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모건이 카네기 쪽으로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카네기, 세계 최고 부자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회사는 카네기제강회사, 페더럴스틸, 내셔설스틸 등
10개사를 통합해 미국 사상 최초 14억 달러의 자본금으로 창립됐다.
이 회사는 석도강판, 박판, 철사 및 못 등의 모든 최종 철강제품을 생산했다.
또 전국적인 교량건설연합회사였고 록펠러가와 카네기의 슈피리어 호 철광과 철광석 수송 사업도 포함했다.
그때까지 역사상 가장 큰 기업이었다.
바로 US스틸이다.
US스틸은 미국 최대 '철강공룡'이 돼 순식간에 미국 철강업계를 장악했다.
전 미국 조강생산량의 약 65%를 차지했다.
이 합병은 많은 자산을 결합했을 뿐 아니라 짧은 시간에
300명의 투자 신디케이트를 규합한 것은 투자 은행계의 역사에 남는 이벤트였다.
모건이 처음부터 카네기 회사를 인수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모건이 제안을 하기 전까지, 카네기의 경쟁사와 연합해 카네기를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카네기는 특유의 방식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오히려 카네기는 모건이 장악하고 있던 강철파이프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밝히며 오히려 모건을 압박하시 시작했다.
카네기는 항상 불도저처럼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모건으로선 카네기와 맞서 싸우는 것보다 그를 달래 합병하는 게 더 이익이 된다고 여겼다.
일부에선 그 모든 것이 카네기의 계획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카네기가 완제품 생산까지 나서겠다고 일부러 발표하자,
당시 2위 철강 업체의 소유주였던 모건이 과당 경쟁을 우려한 나머지 매각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카네기가 이에 적극적으로 응했던 까닭은 은퇴에 대한 열망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너무 비대해진 사업을 정리하는 문제로 내심 고민하던 까닭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여하튼 카네기는 ‘때가 됐다’고 여겼다.
67살의 카네기는 30년 전 세인트 니콜라스 호텔에서 자신과 했던 약속을 지켜야 했다.
12월의 밤 자선사업을 하겠다는 그의 약속 말이다.
사실 카네기는 은퇴하기 전부터 열정적으로 기부를 해왔다.
그는 이미 피츠버그의 카네기 도서관과 카네기 학회, 뉴욕의 카네기홀을 건설하는데 막대한 자금을 기부했다.
은퇴 뒤 카네기는 자신의 재산 3억6000만달러에서 부인과 딸의 몫을 뺀 나머지를 몽땅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카네기의 발표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카네기의 지갑이 어디로 향해 열리게 될지는 전 세계적인 관심사가 됐다.
영국의 한 제과회사는 이런 공모대회를 열기도 했다.
“카네기가 그 돈을 어디에 쓰면 가장 좋을 것 같은가?”
4만5000통의 아이디어가 접수됐다.
그 중에서 자신에게 달라는 내용이 가장 많았다.
카네기의 친구인 작가 마크 트웨인도 편지를 썼다.
‘자네는 요즘 잘 나가는가 보군. 내가 찬송가를 살 수 있도록 1달러50센트만 빌려 주면 안 되겠는가?
자네가 내 청을 들어준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자네와 함께 할 것이라 믿네.
암, 꼭 그렇게 되고말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자네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네.
하지만 다음에 내가 또 부탁을 하게 되면, 지금 나를 도와줄 돈은 계산에 넣거나 생각하지도 말게나.
추신: 찬송가를 보내지 말고, 꼭 돈을 보내도록 하게. 선택권은 내가 가지고 싶다네. ‘
이 편지를 읽은 뒤 카네기는 돈을 쓰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각지로부터 수많은 제안을 받았다.
카네기가 생각한 것은 도서관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책을 읽고 싶었지만, 책을 살 돈도 없었을 때였다.
그때 앤더슨 대령이 일하는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책을 개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앤더슨 대령 덕분에 그는 주머니에 항상 책을 넣어 가지고 다니며 고된 육체노동의 시름을 달랠 수 있었다.
그는 어렵고 힘든 이들이 자신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수단을 책이라고 여겼다.
그런 책을 무료로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어린 시절 하루 12시간씩 노동을 했지만
도서관에서 읽은 책들이 그의 출세에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기부에 대한 카네기의 생각은 이랬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위해 기부를 해야 한다고 여겼다.
자신을 계발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을 지원한다는 거였다.
사회발전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빵을 나눠주는 식의 기부는 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작정 돈을 나눠주지 않았다.
그럴 경우 아마 무익한 활동에 낭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순히 “가정의 안락함을 조금 더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카네기는 적고 있다.
이렇게 카네기는 5000만달러가 넘는 돈을 들여 11개국에 2811개에 공립도서관을 지어 기증했다.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패러디한
“카네기 도서관은 결코 해가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모든 도서관 건물에 창세기의 이 구절을 새겨 넣을 것을 요구했다.
‘빛이 있으라.’ 그가 책이 지닌 계몽능력을 얼마나 숭배했는지 보여주는 말이다.
카네기는 자신이 과거에 공장 노동자에게 한 행동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보상하고 싶었다.
그는 은퇴한 뒤 제일 먼저 400만달러로 카네기 부조 기금(Carneige Relief Fund)'을 만들었다.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다 은퇴할 때나 상해를 입었을 때 생활이 궁핍할 때 제공하는 가족연금이다.
카네기는 이를 시작으로 유수한 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또 은퇴한 대학교수들을 위한 교사보험 및 연금협회(TIAA) 설립에 1500만달러를 지원했다.
오늘날 미국의 모든 대학교수들이 이 연금 혜택을 보고 있다.
그는 1902년 워싱턴에 ‘카네기 학술회’를 설립하고자 1000만달러를 기부했다.
1905년에는 교육 진보를 위한 ‘카네기 학회’를 설립해
퇴직연금재단을 후원해 교사들의 고등 교육을 장려했다.
그가 기부로 1900년 피츠버그에서 공업기술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1912년 카네기 기술학회로, 1967년 카네기 멜론 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인종차별을 극도로 혐오했던 그는 소규모 흑인대학에도 많은 돈을 기부했다.
그는 제일먼저 스펠만 칼리지의 창설을 도왔고 부커 워싱턴이 세운 터스키지대학도 지원했다.
이렇게 끊임없는 기부에도 카네기는 상류층 대학의 기부금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프린스턴대 총재의 기부금 요청도 거절했다.
효율성을 가장 우선시했던 카네기는 자신의 돈이 진화적 측면에서 커다란 결실을 거두길 원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카네기는 워싱턴 D.C.에 국립대학을 창설하도록 도와달라는 요청도 거부했다.
조지 워싱턴이 설립하려 했던 대학이었고, 그런 대학의 설립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 지역에는 존스홉킨스대를 비롯해 명문대학이 많기 때문에
굳이 새 대학을 설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카네기는 또 퀴리부인 같은 개별연구가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신문에 실린 어느 과학기사를 읽고 곧장 그 사람에게 수표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기부를 내 만든 기금 중에는 1000만달러로 11개국에 설립한 ‘영웅기금’이라는 것도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창조적인 자극제를 제공하는 취지에서 마련한 이 기금은
영웅적 행동을 높이 사고 그에 대해 보상을 해주자는 것이었다.
월리엄 월레스가 자신에게 미쳤던 영향을 떠올리며 카네기는 젊은 사람들에게 영웅을 만들어주면
그들의 포부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또 용기 있는 행동을 하다가 숨진 영웅의 경우, 가족들이 대신 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좋은 의미에서 기부를 본 것은 아니었다.
카네기의 기부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관심과 유명세, 불후의 명성을 갈망하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홈스테드 사건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러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분명 그런 생각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이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럽다
카네기는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철강사업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대신 그는 3가지 분야에 집중했다.
하나는 미국의 가치관을 설파하는 것, 두 번째는 반제국주의 운동에 나선 것,
마지막은 세계 평화를 위한 헌신이었다.
카네기는 자신이 사업을 했을 때처럼 이 3가지에도 열정적으로 나섰지만
사업만큼의 성과를 거둬들이지는 못했다.
이 시기 카네기는 자신이 쓴 책 <민주주의의 승리>에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신하며
이런 제도를 갖지 못한 영국을 비판했다.
그는 이 책 서문을 “내가 태어난 땅에서는 거부된 정치적 평등이 실현되고 법에 따라
누구나 동등한 권한과 지위를 누릴 수 있는 내가 사랑하는 나라 미국에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썼다.
카네기는 이 책에서 미국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승리를 입증해주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카네기는 맨몸으로 미국에 가서 맨손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됐다.
왕과 귀족이 군림하는 영국에서 살았더라면 그처럼 성공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카네기는 미국에선 경영자가 되느냐, 노동자가 되느냐는
그 사람의 배경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업무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미국인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규칙만 존재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쟁취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말까지 하며 자신의 조국인 영국인의 마음을 끓어 놓았다.
“미국인 1000명과 영국인 1000명이 어느 날 갑자기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다면
미국인은 곧바로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착수할 것이다.
그러나 영국인은 누구의 지위가 더 높은지, 누구의 자손인지,
누구에게 리더의 자격이 있는지를 따지며 논쟁을 벌일 것이다.”
하지만 카네기는 미국의 문제점은 외면한 채 자화자찬에만 빠졌다는 비판을 들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선 매 맞는 아내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술독에 빠져 사는 사람도 거의 없다”와 같은 것들이다.
카네기가 존경했던 스펜서도 미국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인정했지만
그 성공이 바로 진보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엔 어떤 제한이나 구속도 받지 않고 항상 자신의 야망에 들떠 있는 미국인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단조로운 일상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것 같지도 않다.”
카네기는 더 나아가 캐나다가 스스로 미국에 합병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캐나다가 자국의 운명을 인식하고 미국 연방의 일부로 편입된다면
캐나다인은 물론 캐나다에 있는 모든 것의 가치가 두 배로 상승할 것이다.”
물론 캐나다 정부는 불쾌하게 여겼다.
카네기가 은퇴 뒤 관심을 가진 또 하나는 반제국주의 운동이었다.
당시 미국도 제국주의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 승리했다.
그 뒤 스페인 정부는 필리핀을 미국에 2000만달러에 넘기는데 동의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카네기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는 미국의 필리핀 합병이 늙은 유럽국가의 식민지 정책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카네기는 맥킨리 대통령에게 자신이 그 돈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공개 제의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필리핀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카네기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카네기는 여론을 만들어 나가면서 미국의 제국주의에 제동을 걸려고 했다.
그때 미국 군대는 필리핀 민족주의자와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의 한 부대의 병사들은 토착병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밀림에 지쳤다며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편지를 카네기에 보내왔다.
카네기는 즉시 이 편지를 <뉴욕 트리뷴>에 보내며
“참으로 기쁘다. 제국주의의 빛이 깨졌다.
제국주의가 처음으로 일격을 당한 것이다. 치명타이긴 하지만
그래도 미국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계속 항의편지를 보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네기의 예상과 달리 민심은 잠잠하기만 했다.
그러자 카네기는 매킨리에 반대하는 선거운동에 나섰다.
골수 공화당원이었던 카네기는 민주당에 대선 후보이자 역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게 연대를 제의했다.
카네기는 브라이언이 선거에서 이길 것으로 여겼다.
예상은 또 빗나갔다.
매킨리가 압도적 표차로 승리를 거두었다.
카네기가 죽을 때까지 신경을 쓴 것은 세계평화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들에게 이용만 당하며 그의 명성을 훼손당하게 된다.
제국주의 열강의 탐욕이 커지면서 전쟁 움직임이 일고 있을 때,
카네기는 자신이 할 일이 세계평화를 지키는 일이라고 여겼다.
강대국이 군비를 줄이고 국제법원을 만들어 전쟁이 아닌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되려는 것은 잘못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자신 스스로가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매킨리 다음으로 대통령이 된 시이도어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하며 간접적으로 카네기를 비판했다.
“나도 카네기를 좋아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는 사람은 신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인간과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전쟁을 비난하는 인간이다.”
노벨평화상을 받긴 했지만 루스벨트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무조건 평화만을 외치는 사람을 바보 천치라고 봤으며,
선이 됐든 악이 됐던 그냥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카네기는 루즈벨트에게 연일 편지를 썼다.
대부분이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카네기의 순진함을 잘 보여주는 예는 독일의 빌헬름2세를 향한 존경심이었다.
빌헬름 2세는 호전적이고 어리석은 사람이었지만,
카네기가 바라본 것은 빌헬름 2세가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의 꿈이었다.
그의 꿈이란, 벨헬름 2세와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함께 한 회의석상에서
카네기 자신의 세계 평화 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카네기는 세계 평화를 위해 카네기는 자신이 나서서 독일황제를 중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독일로 세계평화가 깨지는 것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1912년 베를린 왕국에서 거행된 독일 황제 재위 25주년 기념행사에서 카네기는
“평화의 전도에 앞장서서 황제 폐하께 감사드립니다”란 말이 새겨진 황금상자를 선물하기도 했다.
카네기의 생각은 이랬다.
루즈벨트와 독일황제의 협력을 이끌어 낸다면
두 사람이 세게 각국의 견해 차이를 원만히 조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두 사람의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런 노력 덕에 두 사람의 면담이 실제 이루어지기도 했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였다.
1907년 카네기는 평화회담 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빌헬름 황제가 유럽평화에 위협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아셔야 할 점은, 그분이 거의 20년 동안 옥좌에 머무르는 동안
피를 뿌리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평화를 목표로 한 카네기의 행보는 수백만 달러가 들어간 ‘평화의 궁전’ 건립으로 이어졌다.
카네기는 평화의 궁전이야말로 자신이 쏟아온 세계평화의 최종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궁전을 헤이그에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헤이그가 새로운 국제법원의 본부가 돼 모든 국제 분쟁은
전쟁터 대신 신성한 국제법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카네기의 의지대로 평화의 궁전으로 명명된 건물은 헤이그에 세워졌다.
헌정식은 1914년 8월 중순에 열릴 예정이었다.
카네기의 흉상 제막식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러나 1914년 8월4일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카네기는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카네기의 아내는 남편의 자서전 서문에서
“8월4일 날아든 운명적인 소식이 남편을 완전히 산산 조각냈다”고 썼다.
결국 그는 인간의 침략행위를 자신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사업이 그의 전공이라면 정치는 아마추어였다.
세계정세가 어두워질수록 카네기에게는 모든 세상이 환하게만 느껴졌다.
카네기는 순진하고 오만을 일들을 많이 저질렀지만
그래도 우리의 미래 세대가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히 유효하다.
1919년 4월22일 정오 카네기 집안은 사위를 맞는 경사로 분주했다.
자신의 결혼 32주년 기념일에 카네기는 딸을 사위인 로즈엘 밀러에게 건네주었다.
그 뒤 그는 결혼식장의 웅장한 계단을 천천히 밝고 내려왔다.
기자들은 카네기가 자동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가던 딸과 사위에게 손을 흔들던 모습을 취재했다.
이것이 카네기가 언론에 보도된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와 딸은, 카네기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애증의 관계였다.
카네기가 워낙 바쁜 사람이다 보니 딸과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아내 루이스는 남편이 집에 있을 때는 딸을 너무나 사랑했던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딸은 아버지의 진정한 모습을 놓치기 일쑤였다고 했다.
딸 마가렛은 아버지의 전기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인생, 있었던 그대로를 써주세요.
전 아버지의 산타클로스 행각에 지쳤습니다.”
1919년 8월9일 카네기는 폐렴 진단을 받았다.
이승에서 보낸 마지막 일요일, 그는 현관에서 자신의 집 앞 호수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카네기의 곁에는 아내가 함께 있었다.
일요일 이후 카네기의 잠은 점점 깊어갔다.
11일 아침 7시 짧고 거친 숨을 몰아쉰 뒤,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8월14일 새도브룩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가까운 친지와 친구들이 모인 가운데 카네기는 땅에 묻혔다.
카네기는 살아생전 친구들과 저녁 만찬을 끝낸 뒤 얘기를 나눌 때마다
묘비명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를 농담처럼 물어봤다.
그럴 때마다 카네기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을 주변에 모으는 방법을 터득한 사나이가 여기 잠들다."
그게 그의 묘비명이 됐다.
카네기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남겼다.
그가 사망할 때 남겨 놓은 재산은 3000만달러였다.
그 중 3분의2인 2000만달러는 뉴욕에 있는 카네기 주식회사에 양도됐다.
나머지 1000만달러는 사회로 다양하게 환원됐다.
그러나 카네기는 그 보다 더한 기부를 남겼다.
1919년까지 카네기가 자선한 가금은 3억5069만5653달러(현재가치로는 30억달러)였다.
카네기의 기부금은 과거에 멈추지 않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카네기는 개인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에 엄청난 부를 남겨 놓았다.
카네기가 제강업계에 뛰어들 당시 전 세계 철강시장에서 영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1870년대 말엔 영국의 철강 생산량은 나머지 모든 국가의 생산량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았다.
그러나 카네기는 자신의 모국인 영국을 엄청난 속도로 뒤쫓았다.
카네기가 은퇴하기 직전 1900년경 미국의 철강 생산량은 영국을 2배나 앞섰다.
카네기는 자신의 영웅인 윌리엄 윌레스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참하게 영국을 무너뜨렸다.
카네기가 일구어낸 철강 산업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의 공장에서 뿜어내는 철강은 철도의 레일을 만드는 데 들어갔고,
철도는 교통과 물류라는 동맥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은 철도 건설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서부 발전을 가져왔다.
철도를 통해 재화와 노동력이 쉽게 이동하면서 미국 경제는 서서히 성장하게 된다.
미국 도시들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카네기의 강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브룩클린교, 뉴욕과 시카고의 고가 지하철, 워싱턴 기념탑,
미국 최초의 최고층 빌딩을 모두 카네기의 제강소에서 생산된 강철로 만든 것들이다.
도시가 발달되면서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도시 중심가로 몰려들었고
자연히 인구밀도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은 더 이상 농업 중심 국가가 아니었다.
이제는 그 자리를 제조업에 내주고 있었다.
카네기의 철강은 재화를 값싸게 생산하게 만들도록 했다.
이는 미국 경제에 미친 파급 효과는 실로 컸다.
값싼 재화는 미국을 실질 임금 면에서 부유한 나라로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발전 단계는 1960년 일본, 1970년 한국, 1990년 중국이 뒤따르게 된다.
카네기는 최초의 ‘현대적 산업주의자’였다.
그는 항상 “더 빨리, 더 빨리”를 부르짖으며 효율성에 몰입했다.
그의 경영철학은 포드의 조립라인으로 이어졌고, 다른 나라까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첫댓글 3월의 첫날!!~~~
봄이오는소리에 귀 기울이고, 벗꽃이 활짝 피는 봄이오면 추억의 거리도 생각이 나겠죠?~~~~~~
3월 한달 내내 즐거움과 행운이 가득함이있는 날들로 계속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