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37편1절 –9절 2012 2.26 묵상
종을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종의 비천함을 영생의 문으로 인도하는 계기로 삼아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함이니이다. 가나안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이제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대로 받은 심판으로 인해 바벨론에 끌려간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참되고 의로운 심판이셨습니다. 이제 그 공의의 심판을 찬양합니다. 바벨론의 포로에게와 같이 오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처해 있는 종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당신의 심판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한 것임을 다시 한번 알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에 종에게 다가오신 말씀의 위력에 종이 엎드리오니 주여 종에게 말씀하시옵소서. 아멘
흔히 시편 137편을 바벨론의 포로기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비통하고 애절한 상황을 토로하고 바벨론과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원한 저주시라고 하고 있다(그랜드 종합주석).
또한 이 저주시에 대해 마치 현대의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기원하는 시라는 정도로 해석하고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어찌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여진 바벨론이나 에돔에 대한 또는 나를 핍박하는 자에 대한 저주시라고만 보는 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이 들 뿐이며 영생에 대해 무지한 소치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기에 그 고통의 상황과 고향에 대한 애절한 심정을 노래 한 것이라도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자가 자신의 현상황을 토대로 회개하고 있음을 보이며 영원의 고향 시온(영생)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영생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이제 그 영원의 고향 시온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이며 그 심판은 자기에게 마땅하고 당연한 것이므로 심판을 당할 때 사용된 도구인 바벨론이나 에돔은 당연히 하나님에 의해 따로이 심판을 당할 것이므로 그에 대한 저주의 내용을 이 시의 주된 해석으로 삼는 것은 본말을 벗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시인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영원의 고향 시온을 생각하며 그 시온에 거할 때의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불순종을 기억하면서 회한의 마음과 회개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통곡한다(1절).
현재 시인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다.
이스라엘이 까닭없이 당하는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깨뜨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불순종의 대가인 것이다.
심판에 거하며 무덤 속에 거하는 자로서 그들의 현재의 상황은 그들이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고
바벨론 인들에게 사로잡혀 수모를 당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바벨론인들의 유흥을 위해 청함을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3절).
이방 땅 무덤 속에서 거하는 그들이 어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바벨론인들을 위해서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시에서의 상황은 오히려 그들은 바벨론인들에 의해서 그런 수모를 겪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간접적 반어법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고서 그 오른 손이 그 재주를 잊고 시온의 노래를 바벨론인들을 위해서 부르고 싶지 않았으나 오히려 현실은 바벨론인 들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상황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5절).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의 상황을 겪고 있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서 차라리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아니하였으나 현실은 그들에게 가혹하여 그들의 입술로 바벨론인 들을 위하여 시온의 찬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6절).
그들의 심중은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예루살렘은 그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것임에도 현실의 상황은 그 즐거워함을 넘어서 바벨론인 들을 위해 더 즐거워하는 혀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이제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다.
그들에게 오히려 필요한 것은 이제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공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심판을 참되고 의로운 것으로 고백하는 것뿐이다.
에돔 자손을 하나님이 치시기를 기원하는 것과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기원은 당연한 것이므로 그들이 심판 중에 내뱉은 한탄의 기원일 뿐이다(7절내지 9절).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심판이 끝나기도 전에 복음을 선포한다(렘46:27-28).
현실적인 복음은 그들이 바벨론 포로의 생활 중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것이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이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선포하시며 (렘31장31절 이하)
그들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새 언약 관계를 선포하신다.
심판 중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새 언약의 복음이 선포된 것이며 이것이 이스라엘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시는 저주시라고 볼 것이 아니라 공의의 심판 가운데 거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기 위한 전제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회개의 시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심판 가운데 거하는 자가 진정으로 드리는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심판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시는 인자하심을 보이시는 것이다(136:23).
그들은 이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뜻과 세계만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받아들이고 시온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신 영원한 새언약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과 죽음이 바로 나의 고통과 죽음임을 고백해야한다.
고백하고 그 삶을 살아내야 한다.
바벨론포로생활에서의 그들의 고통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다.
십자가의 삶은 고통과 수치의 삶이다.
현세에서의 행복과 부요함과 안락함이 십자가의 삶의 대가가 아니다.
그 삶의 대가는 영원한 생명이다.
바벨론에서의 고통을 당하는 포로들에게의 복음은 시온에로의 귀환이다.
그 시온은 영원한 생명이지 현실의 고통을 덜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고통은 오히려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더욱 더 영원의 빛나는 삶을 견고히 할 뿐이다.
십자가의 고난의 삶이 없으면 영생의 삶의 누릴 수 없다.
고난의 삶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말씀에서의 이스라엘은 심판을 당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심판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 심판이 나에 대한 심판인 줄을 모르고 이웃에 대한, 예수믿지 아니하는 자에 대한 심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자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깨뜨려 말씀에 불복종하고 있는 자에 대한 말씀이다.
나는 영생에 대해 무지하고 십자가의 삶과 죽음에 대해 무지한 자였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지나던 동안에도 옛날의 영광만을 회상하며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던 자였다.
포로로 지나던 동안에도 바벨론에 굴복하여 그들을 위하여 이방 땅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던 자였다.
겉으로의 모습은 경건하였을 지는 몰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은 없던 자였다.
그저 그렇게 세상의 신앙인들처럼 세상의 풍요로움과 안일함만을 추구하던 자였다.
깊은 층의 목마름을 느끼면서도 수가성 여인처럼 이곳 저곳 기웃거리기만 하던 음란한 자였다.
이런 나를 하나님은 그래도 불쌍히 여기시고 차근차근 나에대한 자신의 구원섭리를 전개해 나가셨다.
나에게 영생의 도리와 복음을 알게 해 주셨다. 십자가 복음과 장사지냄 부활의 복음을 알려 주셨다.
그런데 그 과정은 나에게 가해진 혹독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무지한 나를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은 그 언약대로 나에게 혹독한 심판을 가하셨다.
광야에서의 나의 기도는 이제 바벨론 포로들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은 기도와 같은 것이 되었다.
나의 기도는 철저한 회개의 기도였고 무덤 속에 거하는 자의 기도였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내게 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은혜 베푸시어 나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되게 하셨다.
나의 무덤속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삶은 영생을 소유하게 하신 것이요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는 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상황은 여전히 비참한 가운데 처해 있다.
여전히 비천하다. 하나님과 분리되려는 육신의 소욕속에서 여전히 비천한 가운데 거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비천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게 은혜 베푸셔서 나로 당신의 영원을 알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귀한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비참한 상황이나 빈곤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제하시고 내가 이방 땅에서 부르던 나의 더러운 노래를 이제 깨끗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노래를 하나님에 향한 것이 아니라 이방 땅 바벨론을 향해 하였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제 드리는 찬양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귀한 찬양이 되었음을 나로 알게 하시고 나로 귀한 시온의 영광을 노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뒤틀린 내영혼을 바로 잡아주시고 주의 길로 온전히 나아가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비파와 재주를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Oh-
첫댓글 아멘! 성령의 능력으로 계시되는 말씀의 깨달음은 동일함에 전율합니다. 현재의 고난, 무덤의 시간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생의 복에 비교할 수 없음에 아멘합니다. 날마다 주안에서 복된 날 되소서! 샬롬!^^
아멘!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들인 경건한 무리들입니다(렘 27:8-11).
그들은 심판 중에서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예루살렘을 사모합니다.
성령은 구약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무덤, 부활로 증거합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들인 자는 새 예루살렘 영원을 앙모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영생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이제 그 영원의 고향 시온을 그리워한다"는 그리스도 중심의 통찰은 성령의 조명이며, 그로 인해 시 137편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공의가 성취되는 심판을 즐거워하는 자에게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