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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 불교의 연기론과 중도
이언 김동수
고전물리학에서의 과학 지식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量子力學)이 나타나 ‘과학적 지식’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가변성’을 지닌 것으로 재정립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문을 활짝 연 인물이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여기에서 그동안 파동(波動)이라고 생각했던 ‘빛’이 입자(粒子)의 성질도 지닌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뉴턴조차 몰랐던 새로운 물리학의 세계가 열렸던 것이다.
이는 마치 삼라만상을 ‘있다(色)’거나 ‘없다(空)’라고 결정적으로 보지 않고 색이 공으로, 공이 다시 색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연기적(緣起的) 중도관(中道觀)과 다르지 않는 인연가합(因緣假合)의 세계다. 그러기에 중도(中道)는 가운데 길이 아니라 이러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열반(涅槃)에 이르는 수행자의 길이다.
1. 양자역학(量子力學)
-입자(粒子)와 파동(波動)
에너지의 최소 단위인 작은 알맹이를 양자(量子)라고 부른다. 이 때 양자(Quantum)'의 '양'은 음양의 양, 음수, 양수의 양이 아니라, '양(量) 좀 많이 주세요'할 때의 '양'이다. 양자의 뜻은 원래 기묘하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기묘한 결과를 보이는 아주 작아 보이지 않는 분자, 원자(양성자, 중성자, 전자) 소립자들이다.
그런데 이 양자(量子)의 알갱이들이 관찰을 하(관심을 갖)는 순간 입자가 되어 나타났다가, 관찰을 하지 않으면 파동이 되어 사방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양자는 애초부터 입자(粒子)이자 동시에 파동(波動)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측정 행위와 무관하게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라 하였고, 보어는 불확정성 원리가 모든 물리량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입자와 파동은 어떤 개념일까? 입자(粒子)는 아주 작은 알갱이다. 크기만 작을 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물질과 같은 개념이다. 입자에는 전자, 양자, 중성자 등이 있어 원자핵의 구성요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파동의 성질과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쓰인다.
입자는 물질이 움직이면서 에너지도 같이 가져가는 것이고, 파동은 소리나 물결처럼 물질을 움직이지 않고 에너지만을 전달하는 현상이다. 저수지에 돌을 던지면 잔물결이 퍼져 나가듯 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는 않지만 그 파동이 움직여 나간다. 파동은 물질을 운반하지 않으면서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에너지를 이동시킬 수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거시세계’에서의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량은 속도와 이동한 거리를 가지고 정확히 측정할 수 있지만, ‘미시세계’에서는 입자들이 너무 작기 때문에 우리가 빛을 이용해 전자(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관찰하려고 하면 전자의 위치가 계속 변하기 때문에 그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지 못하게 된다.
2. 아인슈타인의 등가성원리와 불생불명의 세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는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느 모든 것은 에너지(파동)와 질량(입자)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형(有形)인 질량과 무형(無形)인 에너지가 둘이 아니라 불일불이(不一不二)한 하나, 곧 전일체(全一體)라는 것이다.
유형인 질량(입자)과 무형인 에너지(파동)가 같다는 아인슈타인의 ‘등가성원리’는 유형·무형의 모양이 바뀐다 해서 그 본질이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는다’는 불생불멸설(不生不滅說)과 결과적으로 같은 학설이다.
물과 얼음처럼 만물은 모양이 바뀐다 해도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질량은 얼음에 비유한다. 물 한 그릇이 얼음 한 그릇이고 얼음 한 그릇이 물 한 그릇이 된다. 유형인 질량이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하고,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하니, 유형의 색(色)이 무형의 공(空)으로 전환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세계라 하겠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나는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 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 조금도 증감(增減)이 없다. 곧 부증불감(不增不減), 불생불멸의 세계다. 이처럼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계는 근본적으로 에너지(波長)와 질량(粒子)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여서 아무리 전환을 하여도 증감이 없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세계,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법칙(E=mc²)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E:에너지, M:질량, C:속도) 질량과 에너지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건만 맞으면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고 에너지가 질량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국화 옆에서」 전문, 1956년
하찮은 생명이라도 그 탄생을 위해서는 우주적 에너지가 있어야 함을 국화 한 송이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그게 바로 우주 자연의 실상이다. ‘국화 한 송이’가 그러한 우주관의 상징물로서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국화 한 송이가 되기까지에는 그동안 ‘햇빛’과 ‘소쩍새와 천둥’ 그리고 잠이 오지 않은 ‘불면의 밤’이라는 열망의 에너지(파장)들이 모이고 쌓여 비로소 한 송이의 국화꽃(입자)으로 피어나는 불생불멸의 극적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물은 / 나뭇가지로 기어올라 / 파란 잎과 예쁜 꽃을 / 피게 하고 / 사과 알을 굵 게 한다. / 이슬 되어
/ 풀잎에 앉아 쉬고 / 거미줄에 달려서 / 대롱대롱 그네 뛰다가 / 따스한 햇살 타고/ 하늘로 오르면/ 구름 되어 어디론지/ 훨훨 날아간다.
―김종상, 「물」 부분, 1964
세상의 모든 존재가 원인과 결과의 이법(理法)에 의해 서로 이어지면서 물이 수증기로 기화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어 땅으로 스며들어 그 모습(相)을 달리하고 있다, ‘물- 구름- 나뭇가지- 잎- 꽃- 사과’ 로의 변신이 그것이다. 그야말로 ‘에너지- 질량 –에너지- 질량’으로 변화무쌍한 변전을 거듭하고 하고 있기에 여기에서 물[水]이 언제 어떻게 변해 갈지 우리는 알 수 없는 불확정 세계에 놓여 있다.
그 ‘물’이 ‘나뭇가지’도 될 수 있고, ‘꽃’이 될 수도 있고, ‘사과 알’이 될 수도 있고, 수증기가 되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입자에서 파장으로, 파장에서 입자로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 갈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불생불멸의 세계요, 질량-에너지 등가의 세계라 하겠다.
3. 양자역학과 불교의 공성(空性)
양자역학은 입자 단위의 미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로 1905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빛은 파동(波動)의 성질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입자(粒子)이기도 한 사실’이 밝혀졌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과 유사하다. ‘세상 모든 것은 상호 의존적이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연기(緣起)요 윤회다. 그러기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 이를 불교에서는 ’공(空)‘ 또는 ’공성(空性)‘이라 한다. 이는 빛이 실체가 있는 입자이면서 동시에 실체가 없는 파동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양자역학과 상통한다. 마치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물질의 이중성과 같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미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 같은 양극단은 인간의 어리석은 분별심에 의한 작용일 뿐, 모든 것은 변하고 무상하며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을 오래전부터 전해주고 있었다.
20C에 들어 물리학자들이 밝힌 양자들의 변화무쌍한 ‘불확정성 이중’의 미시세계가 ‘모든 사물에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공성(空性)’과 이처럼 일치하고 있다.
4. 시와 과학과 예술은 하나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 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인간의 무한한 관심, 그리하여 과학으로 밝혀내지 못하던 거대한 우주는 그런데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우주도 관찰하지 않으면 의미가 생(生)하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서로 만나 관심 갖지 않으면 의미가 생(生)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관측하지(관심 갖지) 않으면 소멸된 것과 같다.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에는 유형의 질량과 무형의 에너지(힘, 빛, 열, 소리 등)로 구성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시(詩)도 그렇다. 우리들의 생각도 하나의 파장 에너지가 되어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
ㅇ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에서
* 이름을 호명[파장, 空 → 꽃(입자, 色)]
ㅇ 하늘이 /하도나 /고요하시니 / 난초는 / 궁금해/ 꽃피는 거라
-서정주. 「난초」 ,전문
* 궁금한 마음[空 → 꽃(입자, 色)]
ㅇ 저, 가을 꽃 자리 /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서정주. 「푸르른 날」에서
* 지쳐(空 → 단풍(입자, 色)
ㅇ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 그 꽃
-고은, 「그 꽃」, 전문
* 무관심(空 → 꽃(입자, 色)
ㅇ 송두리째 뽑히지 않도록 / 상처 난 자리에 서둘러 푸른 세포들을 채웠다.
-이희섭. 「꽃상추」 전문
* 상처 난 자리[空 → 푸른 상추(입자, 色)
ㅇ 양인이 잔을 드니 山꽃이 망울 버그네(兩人對酌山花開)
- 이백. 「여산중유인대작(與山中幽人對酌)」에서
* 술잔을 함께 드니[마음.空→ 꽃이 개화(색, 입자)]
5. 시와 선(禪)
-심경일여(心境一如)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
아래의 시는 당나라 때의 시인 우량사(于良史)의 오언율시(五言律詩) 춘산야월(春山夜月)이다.
春山多勝事 (춘산다승사) 봄을 맞는 산에는 즐거운 일이 많아
賞玩夜忘歸 (상완야망귀) 즐겁게 노느라 밤 되도록 돌아가기를 잊었네.
掬水月在手 (국수월재수) 물을 움키니 달이 손 안에 있고
弄花香滿衣 (농화향만의) 꽃과 놀다보니 향기가 옷에 가득하네.
'
봄 산의 달밤'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봄날 산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에 취한 정취를 빼어나게 묘사한 시다. 이 시에서 특히 ‘물을 움키니→ 달이 손 안에 들오고’(掬水月在手), ‘꽃과 놀다 보니→ 옷에 향기가 가득하다’(弄花香滿衣)'는 초월적 상상의 세계, 이 또한 보이지 않는 파장(에너지)의 힘이 가시적 물질(입자)로 전환되는 양자역학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이 구절은 불교에서 마음(心:파장)과 경물(물질:입자)과 하나가 되는 심경일여(心境一如) 또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우주적 신비가 감지된 초월적 상상의 세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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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는 마치 삼라만상을 ‘있다(色)’거나 ‘없다(空)’라고 결정적으로 보지 않고 색이 공으로, 공이 다시 색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연기적(緣起的) 중도관(中道觀)과 다르지 않는 인연가합(因緣假合)의 세계다. 그러기에 중도(中道)는 가운데 길이 아니라 이러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열반(涅槃)에 이르는 수행자의 길이다.>
<아인슈타인의 ‘등가성원리’는 유형·무형의 모양이 바뀐다 해서 그 본질이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는다’는 불생불멸설(不生不滅說)과 결과적으로 같은 학설이다.>
<‘세상 모든 것은 상호 의존적이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연기(緣起)요 윤회다.
그러기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 이를 불교에서는 ’공(空)‘ 또는 ’공성(空性)‘이라 한다.>
<보이지 않는 파장(에너지)의 힘이 가시적 물질(입자)로 전환되는 양자역학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이 구절은 불교에서 마음(心:파장)과 경물(물질:입자)과 하나가 되는 심경일여(心境一如) 또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우주적 신비가 감지된 초월적 상상의 세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언 교수님!
<양자역학과 불교의 연기론과 중도>
그냥 글이 아닙니다.
바로 聖人의 經典입니다.
많이 배우고, 익히며,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중생에겐 아주 귀한 가르침입니다.
삼가 敬意를 표합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보다 항시 먼저 한 발 앞서 정문일침 그 본질을 꿰뚫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시니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파동에서 입자 중간에 의식이 꼭 필요합니다
최초 의식 (관찰)에 의한 우주탄생
그 우주의식 (사랑)에 의한 입자가 우리 사람입니다
다시 우리 사람의 의식에 의하여 우주 의식이 되고
그 우주의식(사랑)에 의한 생명력에 의하여 다시 우리 사람은
사랑의 의식 (관찰)이 우주에 사랑을
우리 의식 (기)가 우주의 파동(質料)를 입자화 하여 우리 의 삶 (生命力)을 이룹니다
어줍잖은 글 용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 다
의식도 하나의 파동으로서 이 의식을 집중하면 큰 힘이 생긴다고 보는데
이가 곧 우주 의식(神?)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