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스도가 만드신 차이 – 스탠리 하우어 워스
*복음서들 초반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저 존경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회개하고, 익숙한 것에서 떠나 제자도를 훈련받아야 한다. 그래야 변화가 있다. 그 변화는 단순히 새로운 신념에 새로운 행위를 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우리가 믿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와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거나 다르게 이해하게 되는 정도의 사안이 아니며, 영적인 존재가 되거나 교회에 출석하는 문제도 아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메시아, 곧 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자신의 삶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고백하는 분, 우리가 충성을 다 바치는 대제사장이자 왕이신 분을 반영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며(고후 5:16-17), 변화되어 예수님이 시작하신 새 시대의 빛 가운데 걸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초대하신다. 그 역사는 우리의 세상을 뒤흔들며, 동시에 하나님이 세상과 어떻게 화해하고 계신지를 보여 준다. 예수님의 생애 이야기는 단순히 그분의 삶을 보여 주고 가르침을 기억하게 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며, 그분과 우리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훈련시킨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원하시지 않는다. 단순히 그분에 대한 몇 가지 특정 신념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믿음'은 우리 삶의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기독교의 진리와 삶을 분리하려는 유혹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나오는데, 이는 우리 믿음을 갉아먹는 이중성을 낳는다.
예수님은 우리가 맺는 열매로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마 7:15-20).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복음서에 담긴 이야기가 진실인지 여부는 그 이야기가 어떤 삶을 만들어 내는지에 따라 판가름 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예수님의 목적은 그분의 삶에 따라 우리 삶을 다시 쓰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이야기의 관점에서 확신을 가지고 즐거이 사는 것이다. 이렇듯 진리이신 그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방식으로만 그리스도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가 진실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토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어떤 폭풍우도 견뎌 낼 견고한 기초 위에 삶을 세운 셈이다.
*예수님은 늘 그렇듯이 손을 내밀어 물에 빠진 그를 건져 주신다.
많은 이들이 베드로가 충동적이고 "믿음이 작으며" 의심이 많다고 비난하는데, 그가 예수님께 "오라"는 명령을 내려 달라고 직접 요청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는 절대 물 위로 걸을 수 없음을 안다. 예수님의 능력을 받지 않는 한 그에게는 그분께로 갈 능력이 없다. 베드로의 믿음은 작지만, 적어도 믿음이 곧 순종인 것은 알았다. 믿음은 어디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본회퍼(Bonhoeffer)가 말한 대로, 믿음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삶으로부터 온전히 불안정한 삶으로(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보호받는 더없이 안전한 삶으로) 끌려 나오는" 것이다.
우리도 베드로 못지않게 의심이 많기에 그에게 충분히 공감한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겁에 질린다. "오라!" 하고 명령하시는 분 대신 우리 자신이나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우리의 두려움을 지배하지 않는다. 헤롯과 빌라도처럼 우리도 하나님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선하다고, 혹은 적어도 정상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면서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이라는 무게에 눌려 가라앉고 만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곧 기적 없는 세상에 살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결코 정상적일 수 없다.
나중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택하시고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신다(마 16:18).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방주지만, 종종 물가에서 멀찍이 떨어져 바다 한복판에서 거센 바람과 파도의 위협을 받는다. 안전하게 물가에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배에 있는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는 물가에서 멀리 떨어져 폭풍우의 위협을 받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신실하다면, 그들은 언제나 물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바다 한복판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중 몇몇은 심지어 안전한 배를 떠나 물 위를 걸으라는 명령까지 받을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삶이다.
*하나님 나라는 윤리적 이상이 될 수 없다. 성경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분과 그 나라를 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의 말을 빌리자면,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다. 오리게네스(Origen)의 고전적 표현을 따르자면, 예수님이 '오토바실레이아', 곧 몸소 하나님 나라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인정은 같이 간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드러나며, 그 관계에서 나온 권위가 그분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 한다. 예수님의 권위와 정체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예수님은 메시아 역할을 그분이 연기해야 하나의 배역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신다. 오히려 그분의 온 존재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참여하는 행위 그 자체였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시고, 구현하시며, 이루시는 최고의 행위자이시다. 이는 이 사람 예수의 이야기를 알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 길이 없다는 뜻이다. 그분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규정하며, 그 통치가 그에 걸맞은 '세상'과 사회를 어떻게 창조하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기독교 윤리의 틀에 대해 논할 길이 없다. 그분이 몸소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행하시는 통치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비유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도록 초대하신다. 그분께 반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증언할 수 없다.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드러났다. 그분은 우리 삶과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들과 정면으로 맞서시며 물리치신다(눅 11:20). 또한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그 나라의 실재가 나타났다. 그분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정의'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질서를 보여 주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첫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에서 나타난다. 이 첫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회개의 선포 사역에 동참하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목적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안락과 재산, 일상의 관습과 습관을 철저히 끊는다(막 3:13: 마 10:5-42).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길은 아주 단순하게 말해, 끊임없이 내려놓음을 배우는 훈련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에 힘을 실어 준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훈련 말이다. 여기에는 많은 불만과 폭력의 근원이 되는 우리 재산도 포함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것을 노린다고 두려워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정당화에 빠지고, 그 결과 강제력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불의의 패턴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예수님은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하신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그분의 평화를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여정과 모험을 제안하신다. 일단 그 여정을 시작하면, 우리는 한때 가치 있게 여겼던 것, 심지어 우리 '자신'과 과거에 우리를 얽매던 맘몬과 이 세상 것들이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 진정한 목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구원자는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힘을 지닌 사람이다. 구원이란 통제력을 쥐거나 쥐려고 시도한다는 의미인데 예수님은 그 어느 쪽도 아니시다. 예수님의 권세는 다른 종류의 힘이다. 이 세상 권세자들은 권력에 대한 위협이 어떤 것인지를 베드로보다 더 잘 알기에 그분을 죽이려 들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분이 계신다. 그 나라는 자기희생과 나눔과 섬김의 능력이 드러나는 나라다. 이 세상 권세자들은 그런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거기에 반대할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분의 이름은 알지만 그 이름의 의미를 결정하는 그분의 인격이나 이야기는 알지 못하는 베드로를 꾸짖으신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몇몇 사람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르셨듯이, 우리 중 누구라도 그분을 따르려 한다면, '그분을 위해' 고난받고 목숨을 잃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가족이나 조국, 혹은 다른 고귀한 이유로 목숨을 잃는 상황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막 8:35).
자기희생이 그 자체로 고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예수님의 진리가 아니면 진정한 해방이 아닌 것처럼, 희생도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의 이름과 형태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분을 초월하는 진리는 없다. 그분의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의 진리이고, 그 진리는 십자가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의 죽음은 평범한 죽음이 아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 삶의 목적이자 성취였기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주님은 죽음을 통해 그분이 이루어야 할 소명을 완수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의 우회로나 장애물이 아니라, 도래한 하나님 나라다(눅 9:23-25).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순종하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사회 질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질서의 근본 원리가 복음서에 담겨 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사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훈련을 제공하는 매뉴얼이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기본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분의 이야기를 알고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삶이 이 창조 세계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드라마 속으로 말 그대로 흡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삼는 것이며, 그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가르쳐 준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탐욕과 기만, 강압과 폭력을 통해 안정과 의미를 갈구했던 우리를 용서해 주실 권세와 능력을 지닌 분을 만난다. 예수님을 따르는 법을 배우는 것은 그런 용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인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죄와 연약함을 인정해야만 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서받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다른 이들의 삶을 위협이 아닌 선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공동체는 공유된 분노와 두려움 위에 세워진 다른 모든 사회와 대조된다. 이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타인의 타자성(otherness)을 하나님 나라의 용서하는 특징의 표지로 신뢰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로 형성된다.
*그리스도가 사랑을 설교하는 분에 불과했다면, 어째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런 가르침에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는 그분의 사랑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의로우심은 우리에게 고통과 변화를 불러오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기 힘들어 보이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도록 요구한다. 사랑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실제로 사랑을 행할 능력은 그분과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따르는 쉽지 않은 과제에 달렸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면, 먼저 십자가까지 그분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셨을 때처럼(요 13:1-10) 우리도 그보다 못한 모든 하찮은 사랑으로부터 깨끗이 씻겨야 한다. 예수님의 길은 겸손과 용서, 제자도와 훈련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뿐 아니라 우리 삶 자체도 하찮게 여기게 되며, 십자가는 우리가 선행이라 여기는 작은 희생을 상징하는 데 그치고 만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자아라고 여기는 착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가 정말 사랑하기 힘들다고 여기는 조건을 정직하게 맞닥뜨린다.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우리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눈이 멀 수 없다. 사랑은 제대로 보는 것이다. 사랑하려는 인간적인 노력 가운데 우리가 자신과 서로에 대해 가진 환상이 드러난다. 우리와 가까운 사람보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더 솔직할 때가 많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낯선 사람에게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도 잃을 게 별로 없다.
*산상수훈에 대해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이것이 정말 세상을 살아가는 실용적인 방법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정말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인가?'이다. '실용적이거나 '현실적'이라는 것은 결국 현실과 연결된다. 만일 세상이 강하고 독립적이며 자유롭고 성공한 사람들만 복을 받는 사회라면, 우리는 그에 맞게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실제로 가난한 자들, 굶주린 자들,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복 주시는 곳이라면, 우리도 그 현실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죽음을 늘 경계하며,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맞서 울타리를 쳐야 하는 곳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진리 앞에서 우리 죽음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깊이 성찰해야 하는 곳인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미래가 이 땅에 침투해 들어온 존재가 아니시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명령들뿐이며, 그것들은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불길하게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이혼에 관한 명령은 무시하면서,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진리를 알고 그에 따라 삶을 꾸려 나가는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인 공동체라는 올바른 맥락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극히 비현실적이거나 지나치게 무거운 짐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가 산상수훈대로 살고자 애쓰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본성이요,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도록 정해진 운명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우리를 그 목적지로 이끄는 공동체다.
*이렇게 시작하는 설교를 상상해 보자.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실직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별거 중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청중은 깜짝 놀란다. '이게 무슨 소리지?' 세상 나라에서는 실직자를 마치 사회적 질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취급한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를 의료 체계에 부담을 주는 사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치워 버려야 할 존재로 여긴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설교자는 말한다. “죄송합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씀드려야 했군요. 저는 지금 세상 나라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왕족이며, 아픈 자가 복받은 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설교자가 설교를 듣는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이 누구를 복 주시는지 보여 줄 때' 우리도 복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팔복은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가 침투해 들어오는 하나의 그림이자 비전이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 주는 직설법이며, 약속이고, 실제 사례이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본보기다. …
우리는 성경이 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는 책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산상수훈의 기본 메시지는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룬다. 한쪽 빰을 친 자에게 다른 뺨도 돌려 대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배은망덕하고 이기적인 사람에게도 자비로우시다. 예수님이 곧 산상수훈이다. 그분의 가르침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한 전략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을 우리가 보았기에 우리가 행할 수 있게 된 삶의 모습이다. 즉, 우리가 화해를 추구하는 것은 이웃과 화해하면 마음이 편해져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고 계신 일이기 때문이다.
팔복은 우리가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 이상으로 둔갑할 때가 많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더러 심령이 가난하거나 온유하거나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해 애쓰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로 부름받은 많은 사람이 그런 존재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 (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은 "가난한 자 중에 가장 가난하고 시험당한 자 중에 가장 시험 당하며 굶주린 자 중에 가장 굶주린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주님밖에 없다. 그렇다. 그분과 함께라서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분과 함께이기에 모든 것을 가진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통을 보시고 느끼셨으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신 이들은 단순히 불행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생명으로 이끄는 주님의 부르심에 그들이 응답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세상의 미련한 것들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심을 말한다(고전 1:27). 그러니 주변을 둘러보라.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박해를 받은 자가 있는지 살펴보라.
십자가로 이룬 나라에서 섬기도록 부름받은 당신이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법을 배운 사람들(미 6:8) 사이에 있게 되더라도 놀라지 말라. 당신이 세상의 지혜에 대한 대안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려면, 겉으로는 그다지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이런 은사들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과 서로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 이루는 공동체만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룬 지혜를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주님은 복이 있다고 하신다.
*산상수훈에 담긴 예수님의 메시지가 좋은 소식인 까닭은 그것이 세상이 이미 아는 것, 세상이 좋은 행위로 정의하는 것, 누구에게나 상식인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은 그 선언과 요구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성을 만들어 낸다. 이는 제자들이 다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산상수훈을 믿고 살아 낼 때 우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상한 곳은 오히려 세상이다. 세상은 모든 이에게 타당한 것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맞서고 있음이 드러나는 기이한 곳이다. 예수님은 세상이 타당하다고 여기는 말이나 행동을 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사회에 만연한 흐름과 정반대의 길을 따르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다. 만약 예수님이 누가 당신 뺨을 칠 때 다른 편 뺨도 돌려 대는 행위를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을 끌어내는 데 유용한 전략으로 옹호하셨다면, 그분은 윤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순진하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했을 것이다(마 5:39). 만약 그분이 로마 군인의 짐을 자발적으로 더 멀리까지 대신 져 주는 일이 로마 점령군 속에 숨은 기본적인 인간성을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니 타당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낭만주의자라는 정당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주장은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마태복음 5장의 결론부에서 분명히 밝히듯이, 제자들이 한쪽 뺨을 맞고도 다른 쪽 뺨을 돌려 대고, 강제로 로마 군인의 짐을 지고 5리를 가게 할 때 자발적으로 10리를 동행하며, 성적 문란함을 피하고, 결혼 서약을 충실히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관습을 떠나 하나님의 성품에 삶의 기초를 두는 사람들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그들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려는]" 이들이다(마 5:48).
* 다시 말해, 산상수훈의 목적은 상호 의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산상수훈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든다. 만약 서로가 없다면, 믿음은 수많은 조건들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이는 교회라는 몸에 속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산상수훈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진정한 인간이라면 독립해야 한다고, 자기를 돌보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우리 사회에서 특히 그렇다. 따라서 산상수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공동체의 습관으로 형성된 사람들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해진 공동체'와 동떨어진 개인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른바 난해 구절은 전부 우리가 타인의 지지와 신뢰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그분의 메시지를 살아 낼 수 없음을 일깨우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말하는데, 그래야 나누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성경은 염려하지 말고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애쓰지 말라고 말하는데, 그래야 의식주를 위해 서로를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판단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그래야 서로 정직하고 진실하며 자비롭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순결한 삶, 이혼을 생각하지 않는 결혼 생활, 맹세가 필요 없는 삶,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 모두는 고립된 개인에게는 불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우리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마치 불안해하지 않으려 의지로 억누를수록 오히려 불안이 더 커지는 것과 같다. 새 시대에 속했다는 기쁨 속에서 두려움을 잊을 만큼 매혹적인 모험으로 형성된 공동체에 속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질서란 어떤 종류의 질서인가? 어떤 사회적 대안이며, 어떤 전복적 공동체인가? 이것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회였다. 거기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으로 그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회개하고 그 왕이신 예수님께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해야만 그 사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태어난 것만으로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 즉, 부모 세대가 그곳에 있다고 해서 다음 세대가 자동으로 포함되는 일은 없었다. 또한 구성원이 혼합된 사회였다. 인종과 종교가 다양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을 열광적으로 준수하는 사람과 온갖 형식에서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 철저한 유일신 교도와 우상숭배에서 이제 막 벗어나기 시작한 과정에 있는 여러 다른 사람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다양해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참여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함께 부르시면서 그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주셨다. 범죄자들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주셨다.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다. 폭력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주셨다. 고난받는 것이다. 돈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주셨다. 나누는 것이다. 리더십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주셨다.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의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다. 부패한 사회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주셨다. 옛 질서를 깨부수지 않고 새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주셨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새 시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관계였다. 주님은 그들에게 국가와 '원수의 나라'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주셨다.
이 비전이 산상수훈의 핵심에 자리한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48). 여기에 소망이 있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 미워하는 것을 금하신다. 율법도 늘 이런 것들을 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불러 내신 공동체는 율법이나 율법이 금하는 내용에 따라 정의되거나 동기가 부여되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의보다 더 크시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틈입하여 우리 삶을 바꾸어 놓으시기에 그분의 의가 실현될 수 있다.
*바벨탑 -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창 11:7)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 각기 다른 고향과 땅, 역사를 가진 채 더는 협력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 흩으심은 사실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로 갈라져서 다른 언어와 장소가 만들어 낸 타자성을 경험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와 피조물 됨을 깨닫는 데 필요한 자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고귀하게 만들 겸손을 다시 배우는데 필요한 은혜였다.
그러나 우리 선조는 이 선물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런 분리를 무기 삼아 모든 민족에게 자기 부족의 언어를 쓰도록 강요하려 했다. 그래서 바벨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타자에 대한 공포가 각 집단을 지배하는 열정이 되어, 다른 이들을 자신들의 이야기 속에 포함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멸망시키려는 동기가 된 것이다. 가인이 시작한 살인이 이제 확장되었다. 인류는 그것이 설사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더라도 타인을 말살할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전투를 기준으로 우리의 날을 헤아리면서, 인류의 역사는 충돌과 정복과 전쟁의 역사가 되었다.
우리는 바벨이라는 배경이 있어야만 오순절의 특별한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새 창조의 신호였다. 성령의 불이 깨끗이 태워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셨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각자 자기들의 언어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여러 부족 가운데 흩어져 살면서 언어를 배운 하나님의 백성이 이제는 공통의 이해로 다시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임재의 징표로 세워진 바로 그 사람들 가운데서 바벨탑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분열을 치유하려고 하나님이 교회를 창조하셨다는 내용이 빠지면 그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오순절에 하신 일을 지금도 계속해서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존재를 새롭게 하고 지키셔서 바벨의 대안이 있음을 세상에 알리신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바벨의 대안이 있다. 혼란의 대안, 서로에 대한 두려움의 대안, 전쟁에 대한 대안이 있다. 우리에게는 대안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로 존재하는 한 우리가 곧 대안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새 언어다.
*그런데 진실한 말이란 단순히 정직함만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정직함은 진실함을 가리키지만, 정직함은 대개 직설적인 행동 방식을 암시한다. 흔히들 "그 사람은 정직하게 행동했다"라고 말한다. 진실하려면 정직함이 꼭 필요하지만, 정직은 진실한 상태의 온전한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 속이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고 거짓말은 속임수의 한 형태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참된 것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대상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가 없을 때도 반드시 할 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는 뜻이다.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진실함과 노골적인 솔직함을 혼동하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때로 상처를 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것이 곧 진실을 말한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진실은 사랑 안에서 전해질 때에야 상대를 자유롭게 한다.
진실함은 성품과 끊임없는 훈련 그리고 깨어 있음이 요구되는 기술이다. 우리는 해야 할 말을 하되, 상대가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요건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변명이 될 수도 있다.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한 말이 진실하고 좋을 수 있지만, 다른 때와 장소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런 배움은 고립된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며, 완성이라는 것도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계속되는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 진실을 말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반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더욱이 참된 말을 하려면 우리는 서로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 또한 세상에 만연하여 우리를 통해서도 말하려 드는 거짓을 드러낼 교회가 필요하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공동체적 삶의 재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적으로 형성되지 않은 '자아'가 과연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애정과 헌신을 줄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면 진정한 자아는 성장하지 않고 도리어 쪼그라들고 만다. 하지만 진실한 삶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품을 빚어내는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서는 이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우리는 타인의 삶이라는 선물에서 소외되고 만다. 공동체가 없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양, 또 우리 스스로가 충분한 존재인 양 살도록 유혹하는 거짓들 속에서 우리는 결국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교회는 우리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훨씬 더 풍부한 선택권과 헌신, 의무, 때로는 문제까지도 제공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회는 우리의 성품이 자라고 우리 안에 믿음, 소망, 사랑이 심기는 하나님의학교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훌륭한 어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신앙을 고백하며 용기를 냈고, 필요할 때는 훌륭한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베드로가 진정한 개인,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통합된 자아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가 스스로 완전한 '자아실현'에 도달해서가 아니라, 메시아와 메시아 공동체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그는 자신의 삶을 붙잡을 수 있었고, 혼자였다면 누리지 못했을 훨씬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다.
우리가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죄 사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경험해야 한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아래 있는 공동체가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서로 사귀며, 자유롭게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이다(요일 1:6-7). 용서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창조하려는 헛된 시도에서 벗어나, 참평안을 주시는 그분 안에서 비로소 자신에 대한 진실을 발견 하게 된다.
*가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과제다. 그런 실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나라에 합당한 방식으로 서로 섬기는 법을 알게 하신다. 그분의 나라는 단체나 관료 조직에 의존해 일을 처리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저 밖 어딘가에서' 실현해야 하는 이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관심을 갖지만, 우리의 과제는 그리스도와 동떨어진 세상을 사랑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자선이 진리의 형태를 취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자선을 지속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것을 지속하게 하는 이야기'로 형성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자선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국가가 스스로 세운 정의의 기준을 지키도록 요구해야 하지만, 국가의 정의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인 우리에게 요구되는 정의와 같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최근의 많은 정치 철학이 범한 실수는, 정의를 사회적·도덕적 삶의 근본적인 기준이나 덕목으로 여긴 것이다. 교제, 공동체, 우정, 충성, 진실성 또한 좋은 사회가 지녀야 할 똑같이 중요한 덕목이다. 실제로 우정이 그 핵심 미덕으로 번성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의의 요구를 어느 정도 조정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이 '부가적인 것'도 아니고 정의를 '넘어서는 행위도 아니다. 자선은 정의가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어떤 형태를 가져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선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이방인들은 "저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라"라고 말했다. 특정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정의의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 생활을 통해 구현하도록 배운 정의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법과 국가의 강제력에 의존하는 더 넓은 사회가 아직 배우지 못한 정의의 실천들을 앞장서서 펼치는 것이 교회의 과제가 된다. 때로는 교회도 사회를 보며 더 정의로운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세상이 될 수 있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모습을 보여 주는 모범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신실하게 헌신한 결과, 곧 결혼의 열매가 사랑이다. 결혼식에서 주례자는 "신부는 신랑을 사랑합니까?"라고 묻지 않고 “신부는 신랑을 사랑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여기서 사랑은 결혼의 원인이 아니라 결혼이 미래에 맺을 열매다. 사랑은 한 사람의 결단이요 약속이며, 모든 사람이 아닌 일부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헌신이자 약속이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대에게 주는 선물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에게 결혼은 부부의 상호 쾌락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결혼은 제자도의 영역 안에 있다. 결혼 생활은 자녀 양육, 청년들의 회심, 노인 돌봄을 포함한 우리의 사역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서 궁극적인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결혼 안에서 서로에게 진실할 수 있는 것은 결혼이 순간적인 감정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혼 생활은 즐겁고 기쁠 수 있지만, 그 기쁨과 즐거움은 사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공적인 헌신과 서로에 대한 섬김에서 시작된다. 새 생명과 자녀에 대한 열린 태도가 성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생육하라'라는 태초의 행동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그분의 창조성에 참여하는 데서 기쁨을 발견한다.
*성은 단순히 애정의 깊이나 강도의 문제가 아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줄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성은 단순한 쾌락에 불과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조차 마음속으로는 잘 안다. 성은 신성하며 우리는 그 신비를 즐겨야 한다. 그것이 왜곡되었을 때 그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성행위는 서로에게뿐 아니라 언약을 만드시고 지키시며 (두 사람을 포함하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께 헌신한 두 사람이 서약한 온전하고 배타적인 관계의 신비를 누리는 것이다.
성행위는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언약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언약은 서약으로 시작되고, 신실함으로 이행되며,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에 대한 섬김, 그리고 특히 서로와 우리가 세상에 낳은 자녀들을 섬기는 삶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바로 신비로운 성의 즐거움과 진지함 그리고 모험이다.
상대방에게 충실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혼전 성관계는 이전에 경험해 본 어떤 것보다 더 깊고 강렬한 관계와 흥분을 약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사랑은 순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은 결혼 관계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온전히 누릴 수 있고, 결혼 생활은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온전히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통해 부부는 평생 정절을 지키고, 자신들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성도이기 이전에 죄인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모험은 당신이 결혼한 상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 가는 것이다.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한 다음에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결혼을 통해 사랑이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모험인지를 배운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변명할 것이다. 우리는 부자가 아니에요. 진짜 부자는 재산이 어마어마하지만 우리가 가진 건 얼마 안 된다고요. 더군다나 이 얼마 안 되는 돈을 여기저기 기부하죠. 야고보의 말씀 같은 그런 가혹한 비판은 당치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어떻게든 알뜰하게 살아 보려고 애쓰고 있다고요."
우리가 자신의 부에 대해 진실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받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감추고 싶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거짓말과 부는 서로 손발이 잘 맞는 것 같다. 실제로 부자가 되려면 자신에 대한 진실을 숨기는 편이 유리하다. 예를 들어, 내가 원해서 이 모든 재산을 다 갖게 된 것이 아니라거나 자녀들에게 좋은 삶을 준비해 주려는 것뿐이라는 가정보다 더 자신을 속이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성경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라고 말씀하는데,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씀이 항상 우리 삶에 실현될 수는 없다고 믿는 바로 그만큼, 우리는 도둑이 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Saint John Chrysostom)가 선언했듯이, "우리 소유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도둑질하고 그들에게서 삶을 박탈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는 우리 것이 아니라 그들 것이다".
우리 자신도 그 문제에 깊이 얽혀 있기에 쉬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다만 적어도 우리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멈춰야 한다는 것은 안다. 장 칼뱅(Jean Calvin)은 부자가 구원을 받으려면 자기 소유를 더 늘리려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오히려 우리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손에 맡기신 재물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마음을 재물에 빼앗긴다면, 결국 우리는 언제나 도둑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도 소유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대단한 고수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소유, 혹은 적어도 그중 상당 부분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소유물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절제와 정의라는 덕을 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늘 생각해 왔다. 절제란 세상 물질에 적당히 초연한 태도이며, 정의의 추구란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고 그들의 온당한 몫을 그들에게 제공하려는 열망을 키우는 것이다. 이러한 덕목들은 우리가 도둑질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는 길을 배우는 방식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웃의 필요를 우리 소유에 대한 요구로 보는 것은, 훌륭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덕이다. 우리 삶을 사로잡는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이러한 덕이 꼭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고 가르치신다. "일용할"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충분한'이다. 더 많이 구하는 건,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에 따라서만 살지는 않으려 하는 유혹이 될 수 있다. 광야에서 만나를 받은 히브리 백성은 하루에 먹을 만큼의 양식만 거둘 수 있었다(출 16:16). 날마다 우리에게 손 내미시는 하나님께 우리도 날마다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로써 매일같이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다면, 우리 삶이 어떤 의미와 중요성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날마다 주시는 선물 덕분이라는 깨달음에 눈뜬다.
이 기도는 우리를 정직한 고백으로 이끌어야 한다. 솔직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다수 사람, 적어도 이 책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 양식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양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쳐 나서 죽는다. 마음속을 좀먹는 공허함을 끝없는 소비로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유한데, 예수님은 부자들이 큰 문제에 봉착한다고 말씀하신다.
온두라스 작은 마을에 사는 한 여성은 매일매일 힘들게 산에 올라가 요리에 사용할 나뭇가지를 모으고 물을 긷는다. 그다음에는 남편이 기른 옥수수를 한 알 한 알 소중하게 간다. 올해 수확한 옥수수로 겨울을 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여인의 손에서 토르티야가 만들어진다. 토르티야를 팬에 넣고 구워 아이들에게 하나씩 먹인다. 아이들의 굶주린 배를 채울 그날의 유일한 음식이다. 이 여성이 드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지금 기도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는 전혀 의미가 다를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과소비가 넘쳐 나는 사회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이만하면 적당한 때를 아는 은혜를 주시옵고." "세상이 우리를 지나친 소비로 유인할 때 거절하도록 도와주시옵고." "자신에게 너무 많이 소비한 것을 용서해 주시옵고." 이렇게 기도하면서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바라는 것 대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하도록 훈련받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대부분의 사람이 가룟 유다에게 공감할 것이다. 그는 도둑이었지만 맞는 말을 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쏟아붓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닦은 그 값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어야 했다. 그렇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이런 결론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유다의 말이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오늘날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 때문에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믿음직한 동맹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교회를 경멸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이 반동적인 신념에도 불구하고 선한 일을 행한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를 위한 열정에 불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억압하는 체제의 피해자들을 위한 열정으로 타오르는 것도 좋은 일이다. 다만 그런 열정이 우리를 가룟 유다의 편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이 유다에게 하신 반응에 불쾌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은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우리는 예수님이 이 말씀만큼은 하시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뒷받침할 성경 구절이 필요하다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라는 이 구절로 충분하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이 땅에서 가난하셨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곧 죽음을 맞이할 이 가난한 분에게 값비싼 향유를 바친 것은 분명 기념할 만한 일이다.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값진 선물을 받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높임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가난한 사람이라면, 마리아의 행동은 선한 일이다.
*우리 원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면하라고 요구하고 계신 그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그분은 우리가 당한 잘못을 곱씹으며 살아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우리에게 죄를 범한 사람들을 대면하는 어려운 과제에 참여하라고 명하신다. 그런 대면은 우리도 우리가 대면하는 상대처럼 약해져야 하는 일이기에 힘들다. 즉, 그 과정에서 우리가 실수하거나 오해했음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더 괴로운 점은, 우리가 부당한 취급을 당했더라도 그 형제나 자매를 대면함으로써 요나가 말씀을 전했던 니느웨 백성처럼 그 사람도 회개하고 따라서 우리와 화해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을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증오의 대상이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평화를 이루는 일은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과업이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기독교 공동체에는 갈등과 잘못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가정하신다. 그런 일들을 없앨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 어떻게 다룰 것이냐가 문제다. 갈등으로 죄를 범한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주신 평화가 안식이나 부정이 아닌 진리에서 나오는 온전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죄를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신다. 우리가 죄를 지은 사람에게 도전하지 못할 때, 사실상 그들을 죄와 그에 따른 결과에 내버려두는 것이다. 진실한 평화를 세우는 어려운 일에 참여하기를 꺼림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를 드러낸다.
그러한 우리의 행동은 또한 우리가 '용서받은 공동체'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상대한다는 것은 용서하기 위한 과정임을 전제로 한다. 베드로는 얼마나 많이 용서해야 하느냐고,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마 18:21). 우리는 베드로의 질문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데, 항상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건전한 상식에 반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당연히 용서해 준다면 어떤 공동체가 지속되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용서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용서가 없으면 평화도, 공동체도 없다.
*복음의 사회적 취지, 그리고 그에 따른 기독교 사회 윤리의 주요 목표는 더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사회 윤리와 관련하여 교회의 최우선 과제는 바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 세상에서 평화의 나라를 신실하게 구현하는 것임을 기억하기 전까지는 그런 주장은 자기 잇속만 차리거나 적실성이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 사회 윤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곧 사회 윤리다.
교회는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실천하며 듣는 곳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고 세상이 그 이야기를 진실하게 들으려면, 우리는 특별한 종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는 거짓과 두려움의 세상에서 교회가 끊임없이 평화와 진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는 실행 가능한 사회 윤리가 무엇인지 정하도록 세상에 주도권을 내줘서는 안 된다. 교회 스스로 그 의제를 정한다. 먼저, 교회는 이 세상의 불의와 폭력 가운데서 인내하면서 과부와 가난한 자와 고아를 돌봐야 한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그런 돌봄이 정의라는 대의에 기여하는 바가 별로 없는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그런 돌봄에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우리도, 세상도 하나님의 정의가 어떤 모습인지 알 길이 없다.
이런 사회적 과제를 고려할 때 교회의 분열은 한층 더 고통스럽다. 평화의 나라를 세상에 미리 맛보여 주라는 소명을 받은 우리가 정작 우리 내부에서조차 평화를 사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만다. 또 교리나 역사나 실천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교회 내 분열은 그런 것들에만 근거하지 않는다. 교회를 괴롭히는 가장 깊고 고통스러운 분열은 우리가 죄악되게도 세상의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여 온 계급과 인종, 국적에 근거한 것들이다.
*교회의 첫 번째 사회적 과제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이 자신을 세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은 물론 하나님의 세상, 곧 그분의 선한 창조물이다. 그렇기에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에 묶여 있으면서도 죄로 인해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는 반(反)세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로서 세상이 원래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려는 시도다.
세상은 교회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더 순조롭게 돌아가게 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돕기 위함이 아니다. 세상에 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교회가 없으면 세상은 세상이 어떤 곳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자신이 구원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구세주를 가리켜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이 자신이 망가지고 타락하여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여 세상이 그 대안에 강력히 반응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 '대비되는 모델'이 없다면 세상은 생존을 위해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를 알고 느낄 방법이 없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형성된 공동체가 존재하는 덕분에 세상은 개인의 재능과 다양성의 성장에 헌신된 사회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그런 공동체에서는 타인의 다름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고 선물로 반길 수 있다.
교회에 대한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의 자의적이고 거짓된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타인을 하나님 나라의 동료 구성원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쳐 준다. 그런 생각은 관용이나 평등 같은 손쉬운 교리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받는 우리의 공통의 경험에서 나온다. 교회의 보편성은 예수님 이야기의 특이성과 그분의 이야기가 우리가 서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도록 훈련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렇게 훈련받았기에 우리는 성도를 서로 갈라놓는 편협한 충성을 알아차리고 비판할 수 있다.
*사람들이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의제가 세속 보수주의를 자들의 정치 의제와 너무나도 비슷해 보이고,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진보주의자들과 같은 사회적 입장을 지지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세상 속'에 존재하기 위해, 적실성을 잃지 않고 주목받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교회는 '세상에 속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제 교회는 모호한 종교적 색채만을 살짝 핀 관습적인 정치적 견해를 따분하게 주장하는 존재가 되었다.
좌파 우파든 정치 신학은 대체로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그 안에서 교회는 때로 불평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국가를 돕는 유익한 버팀목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교회는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진척시키는 그분의 비전이 기존 권력에 달려 있다고 간주한다.
여기서 기독교 세계가 저물어 가는 것은 교회에 유익하다. 공공 광장에서 기독교가 사라진 것을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한탄하지만, 사실은 국가의 여러 버팀목 중 하나로 국가에 봉사하려 할 때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보여 줄 자유를 되찾을 기회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넓은 사회에서 지위와 권력을 잃을 때 그 상실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 더는 잃을 게 없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기꺼이 살 수 있다. 통제하려 하거나, 통제 수단을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아도 된다.
진리는 중요하다. 우리는 진리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진리는 우리가 민주주의든 아니든 그 어떤 사회 질서에서도 환영받을 운명이 아닌 백성이라는 의미다. 오해하지 말라. 나는 사회 조직이나 정치 조직 중에 더 나은 형태나 더 나쁜 형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가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민중이 말하는 것'만이 진리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세워진 정권과는 때때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적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종교다(딤후 3:12). 실제로 기독교의 핵심은 제대로 된 적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사회에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지위에 안주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여러 군대에 맞서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황제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적은 내부로 들어왔다.
우리의 문제는 더는 교회가 정치 질서에 위협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의 싸움터는 교회 안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주'(Lord)는 민주주의적 호칭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순종하는 분에 대한 참된 명칭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라는 진리를 증언할 권세를 받았다. 이 진리는 아무나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의 증인만이 알 수 있는 진리다. 그렇기에 기존 질서에 대한 심오한 도전이다. 기존 질서는 '진리는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가정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아무나'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미움을 받고 심지어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고 하신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그분이 말씀하신 분이라면,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다.
*"형제들"이란 표현은 때가 찼다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새로운 현실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그 새로운 현실의 이름이 '교회'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이 하신 일과 어떻게 그 일이 모든 것을 바꾸는지를 세상이 알 수 있도록 시공간을 초월하여 한 백성이 존재하게 되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무력화되어, 실체가 없는 허수아비로 십자가 앞에 드러났다(골 2:15).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에 머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새로운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바로 '지위와 권력의 허영'에 의해 움직이는 삶의 방식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자유다.
그리스도인들은 의와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토피아주의자는 아니다. 유토피아주의자와 이상주의자들은 자신의 이상을 달성하지 못하면 냉소주의자가 되기 쉽다. 그러면 이들은 좌절한 나머지 정당한 이유를 내걸면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혁명가들이지만, 그 혁명은 이미 이루어졌고 우리가 그 혁명이라고 믿는다. 혁명은 비밀리에, 끈질기게, 소리 소문 없이 이루어진다. 국가가 우리에게 주는 지위와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울의 말처럼, 자의로 이루어진다(몬 1:14).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실 일, 우리와 함께 하실 일에 놀랄 준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식사나 같이 하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 세례 요한과 바울이 그랬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된다는 것은 우리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교회로 존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다. 형제자매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일이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