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에 빛을 :
쿤달리니 요가에서 두뇌의 여러 부분이 챠크라와 연결되어 있다는것이 발견되었다.
어떤 부분은 물라다라와 또 어떤 부분은 각기 스와디스타나, 마니퓨라, 아나하타, 비슈다, 아즈나와 연결되어 있다.
전구에 불을 켜기 위해서 전구에 손을 댈 필요가 없다.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켜면 그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두뇌를 각성시키기 위해서 두뇌 자체를 건드릴 수는 없다.
챠크라에 위치한 스외치만 탁 치면 된다.
사하스라르는 쿤달리니의 실제적 장소다.
비록 고대 고전에서 물라다라에서의 쿤달리니 각성에 큰 중요성은 부여했지만
쿤달리니가 그곳에서만 깨워지고
그것으로 차례차례로 차크라를 깨워야한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있다.
사실은 쿤달리니가 위치한 실제 자리는
사하스라라 이다.
물라다라는 다른 차크라처럼 조정하거나 켜는 센터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센타를 가동시키는것이 더 쉽다.
각각의 챠크라는 독립적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만일 쿤달리니가 물라다라에서 각성되었다면 곧바로 사하스라르로 가서 두뇌의 특정부분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스와디스타나에서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곧바로 사하스라르로 간다
이는 다른 챠크라들도 독같다.
쿤달리니는 각각의 챠크라에서 독립적으로 각성될수 있고 모든 챠크라에서 동시에 각성될수도 있다
각각의 챠크라로부터 각성된 충격은 사하스라르 정상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 각성은 유지되지 않고 이들 두뇌센타는 다시 잠으로 빠진다
신비한 나무 :
바가바드 기타 15장에 뿌리가 위에 있고 줄기와 잎이 아래로 자라는 불멸의 나무가 나온다.
이 나무를 아는 자는 진리를 아는 자이다.
이 나무는 인체와 신경의 구조와 작용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 나무를 알고 나무로 올라가 진리에 도달해야 한다.
생각 감정 등은 뿌리가 머리 자체요, 줄기가 척추인 나무에서 나온 잎에 불과하다는것으로 이해된다
뿌리를 자르려면 이 나무 꼭대기에서 밑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일컬어진다.
이 나무는 완전히 거꾸로 된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모든 신비 진리와 비의 지식의 정수가 들어있다.
이것을 지성적으로 이해할수 없고 영적 각성을 통해서만 이해할수 잇다
영적 이해는 항상 지성 능력으로 볼 때에는 역설적이고 불합리한 방식으로 동트기 때문이다.
이 나무는 카바라에서는 생명 나무로 부르고 성경에는 지식의 나무라고 부른다.
이 나무의 이해가 기독교와 유대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으나 불행히도 오랜 기간동안 다수에 의해 오해되었다.
따라서 물라다라에서 사하스라르로 움직이는 사람은 언제나 뿌리로 올라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정상에 있는 두뇌의 사하스라르다.
물라다라는 결코 뿌리 센터가 아니다
따라서 만일 스와디스타나에서 사하스라르 또는 마니퓨라에서 사하스라르로 올라가면
사하스라르의 정상인 뿌리를 향해 올라가는 셈이다.
이것이 쿤달리니가 물라다라로 돌아갔다는 말의 뜻이다.
쿤달리니가 각각의 챠크라에서 개별적으로 각성되면 챠크라에 특정적인 경험(체험)이 의식에 나타난다.
이런 현상을 개별 챠크라의 수련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사하스라르와 삼마디 :
사하스라르는 보통 생각되듯이 챠크라가 아니다
챠크라는 심령의 영역속에 있다.
우세하게 활동하는 챠크라에 따라 의식은 다른 수준으로 나타난다. 사하스라르는
아무것에 작용하지도 않고 또 모든것에 작용한다
사하스라르는 넘어선것 마저 넘어서서 있고 또 바로 여기에 있다.
사하스라르는 여러 챠크라를 통한 개화의 절정이다. 그것은 확장된 각성의 금관이다.
챠크라의 파워는 챠크라 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사하스라르에 있다.
챠크라는 단지 스위치다.
모든 잠재력은 다 사하스라르에 있다.
ㅡ 쿤달리니 선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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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는 물라다라가 아니고 사하스라르에 있는것이며
사하스라르라가 뿌리이기 때문에 이곳이 진정한 쿤달리니가 있는곳이며
물라다라 센터는 단지 스위치에 불과하고 진정한 힘은 사하스라르에 있읍니다.
챠크라는 물라다라 부터 순차적이 아닌 어떤것이든 먼저 수련이나 각성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천태대사는 3가지의 삼종지관(三種止觀)
1. 점차지관 : 얕은곳에서부터 점차로 깊은곳으로 가는 방법
2. 원돈지관 : 단박에 깊은 세계를 표명하는 방법
외에
3. 부정지관(不定止觀) : 근기나 소질에 따라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
등의 3가지 삼종지관(三種止觀) 을 설하였읍니다.
각성은 사람들이 흔히 알듯이 아랫쪽부터 위로 가는 방향이 있으나
위에서 아래이거나 머리부터 각성시키는 방식이 있으나
오히려 스승에 따라 이 방식이 더 빠르고 쉽다하여 이 방식을 취하거나 추천하거나
어떤 이유들로 인하여
정통성있는 수련처나 마스터들은 이곳부터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곳부터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 의미하듯이
이것은 수련의 끝이나 궁극이 아니며 수련의 시작이자 입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힘이나 쿤달리니가 어디에 있든 수련의 시작을 어디부터 하든
사람들은 대부분 깨달음을 최후의 궁극으로 알고 있는것이 현실입니다.
이에대해 부처님은 사람들이 바르지 못한 법에 빠지지 않도록
옳바른 법을 전해주시고자 하는것이 법화경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