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3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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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23 서입니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사실 익명입니다. 한편 요한2서와 3서는 장로라고 불리는 이가 기록했죠. 그런데 세 서신들의 언어와 문자는 모두 동일할 뿐 아니라 요한복음과도 일치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 서신들 모두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썼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그는 12사도 중 하나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거나 예수님의 초기 제자 중 장로 요한으로 알려진 다른 요한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되었든 간에 그는 지금 노년이며, 고대의 에베소 주변에 있는걸로 짐작 되는 가정교회 공동체들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와 이 서신들에서 발견되는 단서들로 볼 때, 이 공동체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최근 어떠한 위기를 겪었고, 그게 동기가 되어 요한이 이 서신들을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 교회들과 관계를 끊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더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하지 않았고, 신실하게 교회의 남아있던 성도들 사이에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는데요. 실제로 요한 2서와 3서는 분명하게 이 갈등을 다루었죠.
요한 2서는 특정한 가정교회를 위한 경고입니다.
요한이 ‘미혹하는 자들’로 부르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이 교회에 찾아올 텐데 그들에게 어떤 인정이나 후원도 제공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 3서는 사실 이들 가정교회 중 한 곳의 성도인 가이오라는 사람에게 쓴 글로서 요한은 그에게 곧 도착할 진짜 선교사들을 환대해주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이렇게 요청해야 하는 이유는 이 교회의 지도자 디오드레베가 한심하게도 장로 요한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이 사신들은 요한이 이 교회들에서 직면했던 긴장과 갈등을 들여다보는 창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요한 1서는 이 모든 문제에 대처하고 수습하기 위해서 쓰였는데요. 요한은 여전히 메시아이신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진리를 고수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심어 줍니다.
이 모든 것은 요한일서의 독특성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사실 이 글은 전혀 서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교회들의 보낸 시적인 설교와도 같죠.
요한은 자신이 새로운 계명을 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요한일서에 거의 모든 핵심 개념과 단어들은 바로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가르침(요 13-17장)에서 온 것인데요.
요한의 목표는 이 교인들에게 이를 상기시키고 ‘그들이 이미 믿는다고 고백한 내용에 충실하라’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설교는 시적인 측면에서 아주 멋집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순차적 또는 논리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그 대신 잘 알려진 고대의 수사학 기법인 부연법을 사용합니다. 요한이 삶과 진리와 사랑에 대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 개념은 몇 되지 않는데요. 그는 이 개념들을 순환적으로 반복하되 매번 반복되는 각도나 강조점에 조금씩 차이를 둡니다. 그는 과정법을 많이 사용하며, 빛과 어둠, 사랑과 증오, 선과 악이라는 단순하면서 매우 강력한 대비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 단순함에 속지 마십시오. 이 글은 매우 심오합니다.
요한일서는 명확한 서론과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순환적인 설교의 흐름은 어떠한 엄격한 문학적 구조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개의 큰 단락을 볼 수 있는데 각각은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이라는 도입절로 구분됩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미지가 반복되는데 먼저는 빛 다음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두 단락의 모든 내용은 이 두 개의 핵심개념으로부터 나와서 거기로 되돌아갑니다.
서론은 요한복음의 도입부와 매우 유사한데요. 창세기 1장과 잠원 8장을 연상시킵니다.
요한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생명의 말씀에 대해 말합니다. 요한에게 하나님이란 아버지와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신 아들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보고 듣고 만진 사람들을 ‘우리’라고 부르는데 이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요한 자신과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여러분’ 즉 예수님을 따르는 다음 세대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사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 역시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과 교제하게 됩니다.
여기서 교제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인데 ‘참여’ 또는 ‘나눔’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사도들을 통해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과 참된 관계를 갖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진정으로 참여하도록 해주죠.
이는 곧바로 첫 번째 단락으로 이어집니다.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하나님은 빛이시라.”
사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계시되신 하나님을 빛이라고 전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길 원하는 사람은 계속 빛가운데 걸어야 합니다.
참 멋진 이미지인데요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요한에게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죠. 그러기에 당신이 실패할 때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이 당신의 죄를 덮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는 일어나 예수님의 가르침의 순종하고 부름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르침을 말이죠? 요한은 교회들에게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오래 됐으나 새로운 계명을 상기시킵니다. 그분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말이죠. 일을 행하는 것이 빛 가운데 걷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빛이 예수님을 통해 비추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 어둠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죄와 악과 죽음에 대해 지금 이미 승리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요한은 교회들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 또한 사라질 테니까요. 그가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구체적으로 교만과 성적 타락인데요 아마도 이게 그 교회들에서 일어나던 갈등과 연관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교회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부인하고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는 그들을 메시아의 적대자요 미혹하는 자라고 부르죠.
반면 그는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이며 아버지께 사랑받는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들은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나타낼 것입니다.
분노와 다툼 분열을 일으키는 미혹하는 자들과 달리요.
이제 설교의 두 번째 단락으로 넘어갑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하고 증오를 멀리하며 창세기 4장에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그는 증오에 이끌려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의 정의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며 그게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을 향한 사랑을 신뢰할 때 그 사랑이 그들을 변화시킵니다.
요한은 다시 한번 미혹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면서 이번에는 그들을 ‘거짓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힘을 부인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영들을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고 말이죠.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들은 모든 삶의 중심을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죠. 십자가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한 자기희생의 사랑이심을 봅니다. 또한 그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때 두려움과 불안은 영원히 사라집니다.
이는 요한이 “세상에 대한 승리”라고 말하는 것 중에 하나죠. 당신의 가장 심각한 결정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사랑은 당신의 삶 전체에 토대가 됩니다.
이 사랑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옵니다.
또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하시는 증언 곧 사도들이 예수님에 대해 전하는 소식을 믿음으로써 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붙을 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하며 지금부터 시작되어 영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요한은 그의 설교의 절정인 결론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참되신 분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5:20)
잠깐 좀 헷갈리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참되신 분이 누구죠?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 인가요? 하나님인가요?
요한의 대답은 물론 둘 다 ‘네’입니다. 요한에게 예수님과 상관없는 하나님이란 없으니까요.
그와 사도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 없이는 존재하지 않도록 하셨음을 발견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참 놀랍고 예측할 수 없으십니다. 이에 요한은 끝으로 우리에게 “우상을 멀리 하라”고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놀라우신 하나님을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고 싶은 어떠한 유혹도 물리치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아는 것은 창조적이고 생명을 주며 이타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분이 한 분이신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요한의 세 서신들이 전하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