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유람기(遊水落山記) - 홍직필(洪直弼, 1776~1852)
징악장인(澄岳丈人)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청절사(淸節祠) 앞에 수석(水石)의 경관(景觀)이 도봉산보다 나은 듯하다.”라고 하셨으므로, 도봉산에서 장인을 따라 청절사를 찾으니, 청절사는 수락산 아래 서계(西溪) 가에 있었다.
날아갈 듯한 정자가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기에 난간에 기대어 조금 쉬다가 사당 뜰에 들어가 참배하고 사당에 올라 봉안된 화상(畵像)을 살펴보니, 바로 두타(頭陁 승려)의 모습인데 삭발을 하였으나 수염을 남겨두었으니, 또한 이상하게 여길 만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김밀암(金密菴)이 절하지 않은 것은 확고한 것이나, 저는 마땅히 농암(農巖)을 따라 절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이어서 예전에 이곳을 지나갈 때 지은 시의 “그대의 머리 위에 털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부끄럽다.〔愧君頭上不存毛〕”라는 시구를 외니, 장인이 옳다고 동의하셨다.
사당의 관리인이 심원록(審院錄)을 올렸는데, 장인께 이름을 써야 하는 지의 여부를 물었더니, 장인이 굳이 쓸 것이 없다고 하시므로 마침내 쓰지 않았는데, 나는 장인의 은미(隱微)한 뜻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정자 위에서 쉬다가 정자를 내려와 바위에 기대어 시냇물에 임하니, 붉은 벼랑과 푸른 절벽, 맑은 물과 하얀 바위가 어느 한 가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흐르는 물은 직문(織文 무늬를 넣어 짠 비단)과 같았고 물 흐르는 소리는 거문고를 타는 듯하였으며, 바람이 산꼭대기에서 불어오자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시켰다. 시력(視力)을 동하지 않자 청력(聽力)이 비로소 멀리까지 미치니, 더욱 가을의 경색(景色)과 서로 어울렸다. 이에 높은 하늘과 아득한 대기(大氣)를 바라보노라니,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워 돌아가기를 잊게 하였다.
예전에는 이곳에 맑은 못이 있어서 그 물빛이 시퍼렇고 수면은 마치 기름처럼 고요하고 물이 깊고 깊어 소리조차 없었는데, 큰 홍수를 만나 어지럽게 흘러 내려온 바위에 막히고 부서져서 한 구역의 뛰어난 풍경이 파괴되었으니, 이것이 흠이 될 만하였다.
또 구역의 국세(局勢)가 가파르고 험하고 좁으며 수원(水源)이 또한 얕고 짧으니, 이는 참으로 도봉산에 비하면 다소의 손색이 있었다. 그러나 그 크고 작음과 치우치고 바름을 논하지 않고 다만 체세(體勢)만을 논한다면 과연 도봉산보다 나으니, 장인의 평이 참으로 잘 살핀 것이었다.
동문(洞門) 서쪽에 산봉우리 하나가 웅장하게 우뚝 솟아 있어 그 형세가 마치 조회하는 듯하니, 바로 이른바 만장봉(萬丈峰)이라는 봉우리이다. 그 신령스럽고 깨끗한 기운이 모여 감아 돌고 성대하게 서려 있어서 천지(天地) 사이에 쌓였는데, 이는 다른 산이 얻지 못한 것으로서, 마치 이 구역에만 전적으로 속한 듯하다.
이제 이것들이 나의 책상에 나열되어서 삼라만상을 지극하게 하니, 사람에 비유하면 우뚝하고 기이하여 만물의 밖에 홀로 선 자일 것이다.
내가 손가락으로 만장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천 장 높이로 우뚝 선 암벽이라는 것이니, 선비가 말세에 태어나 마땅히 이러한 기절(氣節)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익에 유혹되고 가난에 핍박당하여 동쪽으로 넘어지고 서쪽으로 떨어져서 몸의 지조를 잃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생육신(生六臣)이 사육신(死六臣)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말하자, 장인이 “당일에 자정(自靖)하는 도리로 보면, 살아남으신 분이 죽은 분보다 처신이 더 어려웠다.”라고 하셨다.
아! 이것이 김열경(金悅卿 김시습)이 된 소이일 것이다. 이 어른이 일찍부터 높은 명성을 얻어서 다섯 살의 어린 동자로서 온 나라에 알려졌으니, 관면(冠冕)을 찢고 부수지 않았다면 능히 몸을 지키고 해로움을 멀리할 수가 없었을 것이며, 공문(空門 불문(佛門))에 자취를 의탁한 것은, 스스로 자정하여 그 뜻을 영릉(英陵 세종)에게 바친 것이다.
그 뜻을 낮추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것은 은(殷)나라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와 같고, 몸이 깨끗함에 맞고 벼슬하지 않음이 권도(權道)에 맞은 것은 오(吳)나라의 태백(泰伯)과 우중(虞仲)과 같아서, 태백과 우중, 백이와 숙제가 합하여 한 사람이 되었다.
인극(人極 사람이 지켜야 할 준칙)이 이미 확립되어서 하늘의 기강이 실추되지 않았으니, 생육신 가운데 이 어른처럼 하는 것이 더욱 어려움이 된다. 아! 김열경은 사람 중의 만장봉이요 만장봉은 산 중의 김열경이다. 기절(氣節)이 서로 나란하니, 마땅히 천지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스스로 드러날 수가 없어서 사람을 통해 드러나니, 만약 이 구역이 이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면, 바로 높고 큰 산과 깊은 물이 텅 빈 산의 풀과 나무 가운데 묻혔을 것이다. 중간에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 점유되어서 구름 낀 숲과 물과 돌이 오염되어 거의 훌륭한 자취가 매몰되게 되었는데, 이는 이 산의 수치가 된다. 그러나 수락산 한 구역은 예전 그대로 매월옹(梅月翁)에게 소속되어 주인으로 삼고 있으니, 누가 감히 그 사이를 범하겠는가.
때 마침 지나가는 승려가 있어서 금류동(金流洞)과 옥류동(玉流洞)의 여러 아름다운 경치를 극구 말하였는데, 이곳에서 거리가 수십 리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곧바로 비석(飛錫)들을 따라 가서 구경하고 싶었으나, 해가 저물어서 함께 골짝을 나오면서 산중에 약속을 남겨 두어, 후일에 빚을 갚을 핑계로 삼노라.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창효 (역) | 2019
------------------------------------------------------------------------------------------------------------------------------------------------------
[原文]
遊水落山記
澄岳丈人嘗云淸節祠前水石之勝。勝似道峯。自道峯隨丈人尋淸節祠。祠在水落山下西溪之上。有亭翼然。臨于其間。憑欄少憩。入祠庭而拜。升堂而審厥像。卽頭陁形也。削髮而存髥。亦可異焉。余謂金密菴之不拜固也。然當從農巖而拜。仍誦昔年經過時詩愧君頭上不存毛之句。丈人以爲然。祠僕進審院錄。余問題名當否。丈人謂不必書。遂不書。其微意可知也。更憩于亭上。下亭而倚巖臨澗。丹崖翠壁。淸泉白石。無一不可意者。而其流若織文。其響若彈琴。風動山頂。韻動陵谷。視之旣靜。其聽始遠。尤與秋容相宜。於以見天之高氣之迥。使人樂而忘返也。舊有澄潭。黛蓄膏渟。沈沈無聲。値大水爲亂石塞破。壞了一區形勝。是爲欠事。且當局峭嶮狹隘。水源亦淺短。此固少遜於道峯也。不論其大小偏正。秖論體勢則果勝於道峯。丈人之評。眞善觀也。直洞門之西。有山傑然特立。勢若來朝。卽所謂萬丈峯也。其淑靈淸淑之氣。扶輿磅礴。委積於兩間者。他山之所不能得。而若專屬於玆區。參我几案。以極萬類。譬諸人則卓犖魁奇。獨立於萬物之表者也。余指點曰此所云壁立千仞。士生末路。當認取此氣節。不然則怵迫而倒東墜西。失身乃已。因言生六臣不下於死六臣。丈人曰當日自靖之道。生者難於死者。嗚呼。斯其爲金悅卿也歟。斯翁早得盛名。至以五歲童子。爲通國之所知。苟不毁冠裂冕。罔克守身遠害。托跡空門。所以自靖獻于英陵者也。不降志不辱身。如殷夷齊。身中淸廢中權。如吳伯仲。伯仲夷齊。合爲一人。人極旣立。天綱不墜。生六臣中斯翁爲尤難也。嗚呼。金悅卿人中之萬丈峯。萬丈峯山中之金悅卿。氣節相參。當與天壤俱弊也。美不自美。因人而彰。苟使玆區不遇斯翁。則卽此寥廓泓渟。蕪沒於空山草樹之中矣。中間被匪人所占。雲林泉石。若被汚衊。幾使盛跡欝堙。是爲玆山之羞。然水落一區。依舊屬梅月翁爲主。則疇敢干乎其間哉。時適有過僧。盛說金流玉流諸勝。距此爲數十里。直欲隨飛錫往賞。而限于日力。相將出洞。留約山中。爲異日了債之資云。<끝>
매산집 제28권 / 기(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