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로 죽음의 흔적, 〈스틸 라이프〉와 〈고독사〉
제제 다카히사의 영화 〈고독사〉(2011)는 유품정리업체에서 일하게 된 쿄헤이(오카다 마사키)와 유키(에이쿠라 나나)의 이야기입니다. 초보답게, 선배의 충고와 규정을 무시해가면서까지 유족들에게 유품을 직접 전달하려고 애쓰는 쿄헤이에게 이 일은 “깨끗해지는” 일이었습니다. 쿄헤이보다 2년 먼저 입사한 유키는 손목에 자해의 흔적을 지닌 여성입니다. 어느 날 어린 아이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유키는 격해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회사를 뛰쳐나갑니다. 그는 “흔적이란 그렇게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라고 말해요.
쿄헤이와 유키는 모두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다른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질병처럼 안고 살아가던 인물들입니다. 타인의 죽음을 정리하는 일을 통해 자신들의 과거까지도 깨끗하게 만들고 싶었던 두 젊은이는, 흔적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흔적으로 덮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에겐 고통의 흔적이 누군가에게는 선물의 흔적이 된다면 가장 좋겠지요. 〈고독사〉의 원제는 “그때의 생명”(Life Back Then)입니다. ‘그때’ 잃어버린 생명 대신 살고 있는 ‘지금’ 나의 생명의 의미를 묻는 영화입니다.
〈스틸 라이프〉(2013)에서 22년차 구청 공무원인 존 메이(에디 마산)는 정물화(still life)처럼 변함없고 고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고독사 한 사람들의 유족을 찾아 사망 사실을 알리는 것이 그의 임무인데요. 무연고자의 경우 규정에 따라 화장하면 그만이지만, 메이는 고인의 생전 종교에 따른 장례 의식을 매번 정성스럽게 준비합니다. 흔적을 정리하고 없애는 것이 중요했던 〈고독사〉의 인물들과 달리 메이는 고인들의 흔적들을 모아 삶을 재구성해내는 데 열심이었어요.
새로 부임한 상관이 보기에 메이의 성실함은 괜한 낭비이고 손실이었습니다. 결국 정리해고를 통보받은 그에게는 이제 마지막 임무가 한 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험난한 인생을 살다 간 빌리 스토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메이의 정물화 같던 삶에서 동작이 감지되기 시작합니다. 가족 없이 홀로 살던 메이가 고독사한 자신의 고객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성실했던 이유를 명확히 알려주지는 않지만, 영화는 그의 삶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으로 존 메이의 이야기를 마감합니다. 그에게는 그가 애도하고 추모한 사람들 수만큼의 가족과 이웃이 남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요.
잠재적인 고독사에 노출된 그들 또는 우리,
〈죽여주는 여자〉, 〈그대를 사랑합니다〉, 〈시선 사이〉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2016)와 추창민 감독의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에는 고독사가 두려워 스스로 죽음을 택한 노인들이 등장합니다. 〈죽여주는 여자〉에서 주인공 소영(윤여정)은 파고다공원에서 노인들에게 성을 파는 소위 ‘박카스 아줌마’인데요. 고객이었던 노인들이 소영에게 살아있는 것이 너무 비참하니 제발 죽여달라고 사정하기 시작하면서 소영은 진짜 ‘죽여주는’ 여자가 됩니다. 아들을 잃고 상처한 재우(전무송)도 그런 노인들 중 하나였어요. 혼자 죽기 두려우니 자신이 죽을 때까지 곁에 누워있어만 달라며, 재우는 소영에게 수면제를 한 알 쥐어줍니다. 그리하여 재우는 조금 덜 쓸쓸하게 죽었을지는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고스란히 그를 도운(?) 소영에게 남습니다. 마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의 대안 가족처럼, 코피노 소년과 장애인 청년과 트랜스 젠더 이웃과 함께 갓 이룬 공동체의 꿈도, 그래서 어쩌면 최소한 그 자신은 고독사를 면할 수 있었던 기회도 그렇게 사라져버린 거겠지요.
|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장군봉(송재호)은 치매환자인 아내(김수미)가 말기암 선고를 받자 홀로 남게 될 것이 두려워 아내와 동반 자살을 택한 경우입니다. 그는 친구인 김만석(이순재)에게 자살의 흔적을 없애달라고 부탁했어요. 자식들에게 부담과 불명예를 안겨주고 싶지 않다는 나름의 배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친구 만석에게 지운 무거운 짐이 상쇄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마지막으로, 옴니버스 영화 〈시선 사이〉(2016)의 “소주와 아이스크림” 편에서 이광국 감독은 주변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누군가가 고독하게 죽어가는 현실뿐 아니라 그 고독한 죽음의 책임과 무게에 눌린 이들에게도 성큼 다가섰습니다. 이 영화에는 가족과 단절되어 살다가 고독사 한 여인의 사건과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엄마를 둔 생명보험 설계사 세아(박주희)와 일찌감치 그런 엄마를 떠난 세아 언니의 사연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어 있어요. 세아 모친과 언니, 그리고 언니가 죽었을까봐 엄마가 혼자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세아는 모두 잠재적으로 고독사의 공포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 자신이면서 이웃입니다. 사적인 보험제도 외에는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야 하는 취약한 구조 안에 있는 개인들 말입니다.
일본 영화가 고독사의 뒤처리를 사업체(거래 관계)에 맡기고, 영국 영화인 〈스틸 라이프〉가 국가의 임무 아래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 반면, 한국 영화들은 이 문제를 사적인 부탁 또는 유언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대한민국에 유품정리업체가 없는 것이 아니고, 구청에 복지과 직원이 없지 않음에도 그렇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는 한국영화와 한국 사회가 아직은 고독사 또는 노인 자살을 고령화 핵가족 사회의 ‘정상적인’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저항하며 대책을 묻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혹시 마음이 동하신다면 세계 최강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날아온 <오베라는 남자>(2015)를 더 챙겨보시기를 권합니다. 한계에 다다른 복지시스템과 냉랭한 관료제도에 상처 입은 까칠한 노인네지만, 어쨌거나 오베는 가까스로 고독사를 면한 인물이니까요. 그를 살린 것은 도무지 혼자 죽을 틈을 안 주는 부산하고 오지랖 넓은 이웃과 ‘성가신’ 마을 공동체였다는 것 정도만 미리 귀띔해드리렵니다.
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