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거부하고 귀가하던 광주고보생들과 일본 학생들 충돌로 일어난 1차 광주학생운동
1929년 11월 3일 제1차 광주학생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당시는 며칠 전 일어난 ‘나주역 사건’으로 광주지역 한일 학생들 간의 집단적인 충돌로 치닫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날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명치절 행사와 더불어 전남지역 누에고치 증산[産繭] 6만석돌파축하식이 거행되던 날이었다. 광주고보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 참석한 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귀가하는 길에 일본인 중학생들과 맞닥뜨렸다. 격앙되어 있던 광주고보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에 격투가 벌어졌고, 이때 일본인 학생이 휘두른 단도에 광주고보 학생들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한일 학생들 간의 충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양 측의 학교 교사들이 나서고 경찰들이 출동하면서 해산되었다.
학교로 돌아간 학생들은 선후책을 논의하였고, 그 자리에 참석한 전남청년연맹 학생부 책임자 장재성은 독서회 학생들을 통해 시위운동을 지도하였다. 광주고보·광주농교 학생들은 교가와 운동가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장작·곤봉·배트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광주중학교를 습격하고자 했지만, 일본 경찰과 소방대의 강력한 저지에 무산되자 시위행진을 벌인 뒤에 해산하였다. 경찰 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주동학생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착수하여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 중 60여 명을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검거 선풍은 한일학생뿐만 아니라 광주지역 사회단체 인사들을 자극하여 제2차 시위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불길을 전국 학생시위로 확산시키자.” 학생투쟁지도본부 만들고 신간회와 협력
전남청년연맹 상임집행위원장이던 선생은 1929년 11월 4ㆍ5일에 걸쳐 각계 사회단체 책임자들을 불러 모은 뒤에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때 장재성은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시위운동을 제안하였고 참석자들이 모두 이에 찬성하여 제2차 시위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학생시위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투쟁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학생투쟁지도본부’를 만들고 각기 업무를 분담하여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전국적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된 선생은 광주 및 전조선의 학생 지도를 전담키로 하였다.
한편,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를 겸임하고 있던 선생은 전문을 통해 신간회 본부에 광주학생 시위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신간회는 광주·송정·장성 지회에 광주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는 한편, 집행위원장 허헌을 책임자로 하여 광주로 파견하였다. 선생은 신간회 나주지회 위원장인 김창용 등과 함께 이들을 맞아 광주사건의 진상을 보고하였다. 이때 선생은 허헌과 대책을 협의하는 가운데 시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것이라는 계획을 알렸고, 허헌으로부터 신간회 차원에서 이에 적극 협조할 것이며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논의는 이전에 조선청년총동맹에서 파견된 부건·권유근 등과도 논의하였던 문제였다. 선생은 그들과 함께 시위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한 뒤에, 장성청년동맹 집행위원 강영석으로 하여금 권유근과 함께 상경하여 거사를 준비토록 하였다.
한편, 장재성은 제2차 시위운동을 위해 학생들에게 배부할 전단을 작성하고, 각 학교 독서회 관련 학생들을 불러 모은 뒤에 앞으로의 계획을 알리며 이에 적극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학생들은 이에 적극 찬성을 표하는 한편, 임시휴업이 끝나는 11월 11일에 수업시작 시간을 기하여 세 학교가 일제히 선전 전단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감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선생은 나름대로 완도 출신의 고보 5학년생인 김향남을 통해 학생들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11월 10일 밤 광주고보생 6명을 규합하여 시위운동에 대해 논의하던 중, 장재성이 거사일을 11일로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12일로 날짜를 변경토록 하였다. 11일은 임시휴업이 끝나고 첫 등교하는 날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등교여부를 확인하기 어렵고, 또한 12일이 장날이기 때문에 시위운동을 벌이기에 적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조선 민중이여 궐기하자.’ 격문 작성해 광주의 학교들에 배포하고 시위 확산시켜
거사 하루 전날인 11월 11일, 장재성은 일반 민중들에게도 배포할 ‘조선 민중이여 궐기하자’라는 제목의 새로운 격문을 작성하였다. 장재성이 작성한 격문은 독서회원들에 의해 4천부가 인쇄되어 각 학교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밤이 되자 선생은 장재성·강석원·박오봉·국채진 등을 불러 모은 뒤 제2차 시위운동 계획을 최종 점검하였다. 11월 12일 아침, 농업학교의 교실에서 격문 전단이 배포되면서 시위가 촉발되었다. 광주고보에서는 선생의 지시를 받은 김향남이 5학년 을반 교실에서 학생들을 독려하면서 시위운동이 개시되었다. 이에 광주고보와 농업학교는 곧바로 임시휴교에 들어갔지만, 13일에 광주여고보, 전남사범학교로 시위운동이 확산되어 갔다. 일본 경찰들은 즉각 학생들 검거에 나섰고 시위운동의 배후세력을 캐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 결과 광주형무소에 시위운동 가담자 2백여 명이 수감될 정도로 탄압이 혹독하였다.
광주에서의 제2차 시위운동은 일제의 보도통제로 인해 밖으로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는 오히려 광주에서 “조선인 여학생 2명이 코를 일본 군인에게 절단 당하고 한인 남학생 12명이 피살되었다.”는 풍문이 나돌면서 세상을 더욱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선생의 지시로 1929년 11월 8일 서울로 올라온 강영석은 서울의 청년운동 조직인 중앙청년동맹원들의 지원을 받아 서울지역의 학생 시위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그는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장인 차재정을 비롯하여 이항발·황태성 등과 운동방안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총동맹휴학·시위운동·격문살포 등 시위운동 방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여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논의 끝에 격문을 살포하기로 어렵게 의견을 모았다. 총동맹휴학보다는 시위운동이 낫지만 현실적으로 시위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차선책으로 격문 살포가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11월 17일 선생이 서울로 올라온 이후에 시위방식을 두고 또다시 격론이 벌어졌다. 선생은 광주에 이어 서울에서도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고, 차재정·이항발 등은 시위운동에 반대입장을 고수하였다. 서울에서는 경계가 엄중하여 시위운동을 일으키기 어렵고 많은 희생자가 따른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렇듯 각자의 입장이 팽팽한 가운데 황태성이 시위운동에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논의는 급진전되었다. 결국 학생들을 동원한 시위운동과 격문살포를 동시에 추진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에 차재정·곽현 등은 격문 제작에 책임을 지기로 하고, 선생과 황태성 등은 시내 각 중등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경성으로까지 번진 학생 항일 시위…30여개 학교 1만2천여 명 참여…1천4백여 명 검거돼
그 뒤 선생은 허헌을 만나 시위계획을 전달하며 신간회의 동참과 시위의 전국확산을 논의하였다. 선생과 황태성은 각 중등학교의 학생들과 접촉하며 시위운동 동참을 적극 권유하였다. 선생은 11월 20일 이래 15회에 걸쳐 휘문고보·보성고보·경신학교·배재고보·경성제2고보·중동학교 등의 학생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구체적인 시위운동 방법 등을 지도하였다. 황태성 또한 11월 하순부터 12월 초까지 경성제2고보·중앙고보·보성고보·휘문고보 등의 학교를 찾아가 대표자들에게 시위운동에 적극 동참할 것을 종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