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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8 - 북위가 동성왕 때 백제를 침공한 사실의 진위와 고구려와의 국제 정세!
북위(北魏)는 남조의 역사서 양서 백제전에 동성왕의 백제를 484년, 488년, 490년 세차례나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왜 침공했는지, 육로로 침공했다면 왜 고구려가 길을 열어줬는지 의문이고, 기마부대로
편성된 유목민 군대가 해상으로 가기는 어려우니 중국 해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도 보지만 정작
당사자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魏書)에는 단 한줄도 기록 자체가 아예 없으니 허위인지 의문입니다?
백제의 요서경략은 중국 남조(南朝) 송서(宋書) 에 처음 보이기 시작하는데, 송서(宋書) 는
다음 왕조인 남제(南齊) 때 심약(沈約, 441∼513)이 편찬한 유송(劉宋) 의 사서로 본기는
아니고 열전인 백제전(百濟傳)에 나오는 기사 입니다.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점령하니,
백제는 요서(遼西)를 점령하고 진평군(晉平郡) 진평현에 이 지역의 통치 기관을 설치하였다.
이후 양서, 통전, 자치통감은 위의 남조(南朝) 송서(宋書) 백제전의 기사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晉)나라 때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지배에 대응해 요서·진평 두 군을
점령하고 그 땅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당 요사렴이 629년에 편찬한 『양서(梁書)』 백제전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이며, 마한(馬韓) 족속이다. 진(晉)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진평현을 경략하였다.”
- 양직공도(梁職貢圖 : 양나라에 조공해 온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설명을 곁들인 화첩) 의 백제국기(百濟國記)
요서·진평 두 군의 지역에 대해 “오늘날(7세기 말)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坪) 사이”라고 주석합니다.
- 당나라 재상 두우가 766년에 착수해 30년간 집필한『통전(通典)』 변방문(邊防門) 백제조
삼국시대 오나라 부터 남조 진(陳)나라 까지 400여년간 건강(建康 남경)의 역사와 지리를 기록한 20권
의 편년체 역사서로 당나라 시대 허숭(許嵩)이 편찬한 “건강실록” 에 보면 “영명 2년(484) 위로(魏虜)
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모도(동성왕) 를 크게 격파하였다. 永明二年, 魏虜征之, 大破百濟王牟都.”
“전에 부여가 백제의 침입을 받아 쇠약해져 서쪽으로 연(燕)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해왔는데 방어가
미비하였다.” - 북송 사마광이 1065-1084년 편찬한『자치통감(資治通鑑)』 효종목황제(孝宗穆皇帝)
영화(永和) 2년조, 346년 모용황이 부여를 공략할 때 당시 부여의 상황이며 또 자치통감에는 ” 위(魏)
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라고 나옵니다.
중국 기록에 백제가 요서지방을 경략하였고 이는 중국 동진(東晉 王朝:317∼419) 시대 인 백제 근초고왕
때로 추정하는데, 당시 요서는 강성하던 선비족 모용씨 전연(前燕)이 장악하고 있던 그 본거지고 심장부
이며, 342년에 모용황은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 환도성(국내성)을 함락하니 고국원왕은 단기로 달아났고
전연은 왕모와 왕비등 고구려수도 백성 전부라 할수있는 5만명을 잡아오던 때니 기사는 오류로 보입니다?
“345년 모용황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인 봉유(封裕)가 상소를 올려, 전연(前燕)의 팽창에 따라
포로로 잡아온 고구려인·백제인 및 선비족(鮮卑族)의 우문부(宇文部)와 단부(段部)
사람들이 전연의 수도인 용성(龍城 : 지금의 중국 조양) 에 너무 많이 집중되어
있어 우려가 된다.”- 당 태종때 방현령이 644년에 편찬한『진서(晉書)』 모용황재기(慕容皝載記)
정작 그 시기를 기록한 진서(晉書) 는 "전연(前燕) 의 팽창에 따라 (342년 고구려 수도
국내성을 함락하고) 포로로 잡아온 고구려인·백제인 및 선비족(鮮卑族)의 우문부
(宇文部)와 단부(段部) 사람들이 전연의 수도인 용성(龍城: 지금의 중국 조양)에 너무
많이 집중되어 있어 우려가 된다." 고만 하였지 백제의 요서진출 사실은 전혀 없습니다.
중국 사서에 어떤 이유로 백제 요서 경략이 기록되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오류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중국의 사서는 후대 왕조가 선대 왕조의 사료를 모아 정리한 것이 보편적
이니 고려가 삼국사기를 편찬했고, 조선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요서 경략은 중국 남조 유송(劉宋) 과 남제(南齊) 의 사료를 후대 사가
들이 정리하면서 백제 왕조에서 중국에 보낸 표문도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발생한 오류가 아닌가 추측되니, 전쟁의 당사자인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魏)서 에는 3차례 전쟁 중 단 한차례도 기록이 없고 백제측에도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484년과 490년 침공은 없고 “10년(488년)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는 한줄짜리 11개 글자의 기사가 있기는 한데,
그러나 삼국사기는 657년이나 지난 고려 때인 1145년에 쓰여진 사서로써 백제와 고구려가 전쟁으로
궁궐이 불타 자료가 유실된후, 오랜 시간이 경과하여 편찬 되었으니 저건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으로
자치통감에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라는 한줄 짜리 11글자 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①“이 해에 (서기 490년 백제 동성왕 12년) 위노 (魏虜 : 북위 오랑캐)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
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牟大 : 백제 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로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노군(虜軍:오랑캐)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② 건무(建武) 2년 (서기 495년 백제 동성왕 17)에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
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봉작(封爵)을 받은 이래 대대로 조정(朝廷)의 영예를
입었고, 더우기 절부(節符)와 부월(斧鉞)을 받아 모든 변방을 평정 하였습니다.
앞서 저근(姐瑾) 등이 모두 영광스러운 관작을 제수받아 신민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庚午:490년 동성왕12)에 험윤(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
(匈梨)가 당황하여 바닷물이 들끊듯 붕괴되었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 죽이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써 예기(銳氣)가 꺽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임시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 으로,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벽중왕' 으로, 해예곤을
'행무위장군 불중후' 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데다 누선(臺舫)을 깨뜨렸으므로 '행광위
장군 면중후' 로 삼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臣) 모견,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 '겸 삼군 행진위장군 조선태수' 신 장새,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臣)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의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관직을 올려주어야
마땅하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성조에서는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함과 아울러 장군의 호를 내려주었다.
(위의 ① 기사는 백제 동성왕이 올린 표문인 아래 ② 기사를 보고 중국측에서 작성했는데 위노
(魏虜)라는 표현을 씀으로서 후대의 다른 역사가들이 이를 북위(北魏)로 여긴 것 같습니다?)
동성왕 시대에 놀랍게도 백제가 탁발선비족의 북위(北魏)와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니 484년,
488년, 490년 총 3차례 충돌 기록이 있는데 놀라운 점은 북위는 명군이었던 효문제였던
반면, 백제는 불과 9년 전인 475년에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죽고 수도 한성
(위례성)이 불타버린 상황에서 중원의 제국이었던 북위를 상대로 싸웠고 승리했다는 점입니다.
개로왕등이 죽기전 신라에 구원병을 빌리러 갔던 아들 문주왕은 1만 신라군을 데리고 돌아와 10월
에 남쪽 웅진에서 왕에 올랐으나 1년 6개월후인 477년 4월 중신 해구에게 시해되었고, 13살
삼근왕이 이었으나 해씨들의 꼭두각시로 2년후 해씨들을 몰아낸 진씨들에 의해 시해되었으며
정권을 장악한 진씨들은 17살 무령이 국내에 있음에도 궂이 왜국에 왕을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전인 461년에 개로왕의 아들(동생?) 곤지는 일본으로 파견되어 왜국에서 무령왕과 동성왕등 아들을
낳았는데 475년 문주왕의 요청으로 무령을 데리고 귀국해 477년에 내신좌평을 맡았다가 해구에 의해
살해됐으니 479년 왜국의 유랴쿠천황(일왕)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고 2년전에 고아가된 14살 동성을
왜 왕실로 불러 머리를 쓰담으며 제왕의 길을 가르친후 왜병 500명의 호위를 붙여 한반도로 내보냅니다.
14살 소년 동성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국내사정도 모를뿐더러 인맥도 없으니 삼근왕을 죽이고 정권
을 장악한 진씨들의 허수아비로 있었는데... 481년(동성왕 3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
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해 격퇴한 것은 국정을 장악한 진씨들이 주도했다고 보여집니다.
위 481년 고구려가 침공한 기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는 보이지 않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일본서기에만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동성왕 원년인 479년에 일본에서 동성왕
을 호위해 나온 왜병 500명이 추쿠시 아치노오미의 지휘하에 선사(船, 배) 로 고구려를
쳤다는 기사가 보이며, 백제본기에는 482년 말갈(고구려)이 한산성을 침범해 왔다고 나옵니다.
19세가 된 484년(동성왕 6년)에는 삼국사기에 중국 남조(南朝)의 남제에 사약사를 사신으로 보냈으나
바다에서 고구려에 막혀 되돌아 왔으며, 이듬해 485년(동성왕 7년)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는데, 당나라 시대 허숭(許嵩)이 편찬한 건강 실록에 “영명 2년(484년) 위로
(魏虜)가 백제를 정벌해 백제왕 모도(동성왕)를 크게 격파하였다. 永明二年, 魏虜征之, 大破百濟王牟都.”
484년 19세 동성왕이 5년이 된 진씨들의 전횡에서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측 기록은 이
해에 북위의 1차 침공이 있었다지만, 정작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없으며 488년
(동성왕 10년) 에 유일하게 단 한번 북위군 침공 기사가 나오니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10년, 위 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단 한줄 뿐으로 중국 자치통감에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는 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484년과 490년 북위가 백제를 침공했다는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493년(동성왕
15년) 신라 왕녀를 맞이해 왕비로 삼고, 494년에 고구려가 신라를 치자 동성왕이 3천을 원군
으로 보냈으며 495년 고구려가 치양성을 포위하자 신라에 원군을 청해 장군 덕지가 구원왔다고
나오며 498년에 탐라국을 복속시켰고 501년(동성왕 23년)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 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이 시해당하니 역시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이복형 무령왕이 왕위를 잇습니다.
양(梁)나라 537년 소자현이 편찬한 남제서(南齊書) 기사에 험윤과 흉리는 북위(北魏)를 가르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건무 2년 (495년 백제 동성왕 17)에 동성왕이 남제에 표문을 올렸는데,
서기 490년 험윤(獫狁)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에 쳐들어 왔고, 이에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흉리(匈梨)를 무찔렀다는 내용이니 험윤과 흉리는 오랑캐의 뜻으로 모두 북위(北魏)로 해석
하는데 이유는 표문 앞에 ① 위노(魏虜)가 백제를 공격했으나 패배 했다고 쓰여있기 때문 입니다.
북위가 백제를 공격했으나 패했다는 사실은 전하나 공격한 이유는 밝혀지 않았는데 북위는
중국의 북조(北朝)로 한반도 남부의 백제를 공격하려면 고구려를 통하던지, 아니면
서해 바다를 건너야 하며 더욱이 북위가 머나머먼 곳 백제를 공격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다만 북위와 백제의 전쟁 이유로 북위의 조공 강요와 고구려의 위장술로 보는 2가지
견해가 있는데 먼저 북위 조공 강요는 고구려는 장수왕이 33차례나 조공했으며
488년과 489년에는 1년에 3차례나 조공하는데 비해 백제는 남조의 남제에는
조공을 하나, 북조의 북위에는 조공하지 않자 북위가 백제를 침략했다는 추측입니다.
백제는 개로왕 때 북위에 조공해 고구려를 쳐달라고 요구하나 북위가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475년
고구려 장수왕 공격을 받아 개로왕이 전사하며 한성백제가 멸망하였으며 이후 480년 백제 동성왕은
남제에 조공하는데, 북조의 북위에는 조공을 하지 않았으니 북위가 백제를 쳐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사서를 보면 490년 이전인 484년 488년에도 북위가 백제를 공격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미 475년에 고구려에 수도 한성(위례성)이 함락되어 한 차례 멸망하고
웅진으로 쫃겨내려간 바다 건너편 외로운 나라가 조공하지 않는다며 바닷길을 3차례나
건너며 공격한다는 것은 북위에 명분은 물론이고 실제적인 이득이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484년에 조공 문제로 북위의 공격을 받았다면 중국의 남북조에 수없이 조공을 한 백제가
굳이 북위와 전쟁을 무릅쓰며 조공을 회피할 이유도 없는데... 이미 백제는 개로왕 때 부터
북위에 조공했고, 백제의 대중국 외교는 고구려 견제이기 때문이니 조공을 회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나라 전쟁에 대해 고구려의 위장술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백제 개로왕이 북위를 끌어들어 고구려
침략 계획을 세운 사실이 있었으니 고구려는 475년 한성백제를 공격해 웅진으로 달아났는데,
고구려는 북위와 백제 사이가 멀어지도록 하려고 북위 군대로 변장해 백제를 공격했다는 추측입니다.
고대국가 전쟁은 칼과 창으로 서로 맞붙어 싸움을 하니 이때 적군과 아군이 뒤엉켜 싸우며 서로 욕하고,
회유하며 대화를 할수있는데 그럼 저 놈들 북위 군대 옷으로 변장했을 뿐이지 사실 고구려 놈이라는
것을 백제군이 쉽게 알게되고 백제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이걸 일러바칠 수 있으니 가능성은 없습니다.
남제서 내용 중 ② 부분이 백제 동성왕 표문이고 ① 부분은 중국 사가들이 표문을 인용하여
백제와 북위의 전쟁을 정리한 것인데, 남제서는 후대 양(梁)나라 537년 소자현에 의해
편찬되었으니 그럼 ② 부분은 서기 490년 백제 전쟁을 495년 백제에서 작성한
것이고 ① 부분은 537년 양나라에서 남제서를 편찬하며 ② 부분을 참고해 기록한 것입니다.
제나라에 보낸 백제 표문은 험윤(獫狁)과 흉리(匈梨)라고 하였지 북위(北魏)라는 표현이 전혀 없으며
남제서의 편찬자가 ①에서 선입견 탓인지 험윤(獫狁)이란 표현을 북위를 가르키는 “위노(魏虜)” 로
바꾼 것입니다. 중국의 남조는 북조를 험윤(獫狁)과 흉리(匈梨)로 낮추어 불렀는데, 백제가 이를
모방해 자신의 북방에 위치한 고구려를 험윤(獫狁)과 흉리(匈梨)로 낮추어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럼 백제 동성왕이 쓴 표문의 험윤(獫狁)과 흉리(匈梨)는 북위가 아니고 고구려를 뜻 하는데,
후대에 양나라에서 남제서를 정리하며 북위로 혼동했다는 추축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혼동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 “북위가 기병으로 백제를 공격” 하였다고 하니
백제가 북위와 접한 “요서”지역에도 있었다고 오인하였고, 그로인해 송서(宋書)에 백제
요서경략을 오기(誤記) 하였는데 후대 사가들이 이를 계속해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국 사서에는 전대의 잘못된 사실을 후대에 계속 인용하며, 오인에서 내용들이 점점 더 파생되는 경우가
다소 있으니... 다른 사례가 백제의 건국자 관련 기사로 북사(北史), 수서(隋書), 주서(周書)에는 백제의
건국자가 동명의 후손 “구태” 라 하는데 우리 삼국사기는 주몽의 아들 “온조” 를 건국자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에서는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 온조계와 부여 동명의 후손 구태계가 있었고
두 혈통이 엎치락 뒷치락 하며 왕위 교체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게 되었는데 이
사서들이 백제전을 수록하며 참고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나 후한서를
보면 구태는 부여 왕자로 살았고 부여왕으로 죽었을 뿐이며 백제 건국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책부원귀에 백제는 구태 사당을 짓고 매년 4계절 제사를 지낸다고 되어있으니 이로써 요즘 구태가
백제 시조의 증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데 구태는 백제의 건국 시조신이 아니었고
제사를 지낸게 사실이라면 백제가 부여를 계승했다는 의미에서 “국조신” 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백제는 고구려 견제를 위해 근초고왕 때 부터 남조의 동진과 교역하며 사대를 하는데, 475년 한성
백제 멸망 이후 남조의 도움은 더욱 절실했으니 그래서 송, 제, 양나라에 수시로 열심히
사신을 보내며 조공하는데, 후한서에 보면 부여왕 위구태는 한(漢)왕조로 부터 금과 비단, 인수
(印綬)를 하사받은 사람이니 부여 최초로 중국 천자에게 제후로 인정받고 책봉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 백제 입장에서 볼때 백제는 부여를 계승했으며 부여 처럼 중국을 모화하는데, 구태 왕자가 부여
왕실 최초로 중국 천자에게 책봉 받았으니, 백제 입장에서는 이 보다 더 모범적인 인물이 없었으니
그래서 구태를 국조신으로 모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니 즉 구태 사당과 묘는 백제의 대중국 외교
정책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백제에 있어서 구태는 조선의 기자와 같은 존숭하는 인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중국의 사가들은 백제가 구태 묘와 사당을 만들고 매년 4차례 제사를 지내자 구태를
백제의 건국자로 오인한 것으로 보이고, 한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부여 왕자 구태가
공손도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하였으니, 중국의 후대 사가들은 한걸음 더 나가 “동명의 후손
구태가 백제를 건국하였으며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과 혼인 했다” 고 추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중국 고대 사서에 보이는 백제 건국은 그 내용이 좀 더 추가되어 진화하는데
“백제는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 고지에 처음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의 딸과
혼인 하였으며, 점차 동이의 강국이 되었는데, 동진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요서· 진평현을 두고 백제군을 설치했다.”라고 적은게 아니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태는 부여 왕자로 태어나 부여 왕으로 살다 죽었을 뿐 백제를 건국하지 않았고, 요서지방
은 선비족 모용씨의 전연이 강성하던 시절인지라 백제는 요서· 진평현을 두고 백제군을 설치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남제서에 보이는 백제와 북위의 전쟁도 요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인데 후대 중국 사가들이 동성왕의 표문 중 험윤(獫狁)과 흉리(匈梨)
를 선입견에 위노(魏虜) 로 바꾼 탓에 북위(北魏) 로 오인하며 오기(誤記)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제-북위 전쟁이 성립되기 어려운 이유는 북위와 백제 사이 육상으로는 고구려가, 해상으로는 황해
가 있었으니 북위와 고구려 간의 전쟁이라면 모를까, 북위와 백제 간에는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었다고 볼수 있으며 북위가 백제를 공격하려고 육로를 선택했다면, 고구려가
북위 군대가 자국 땅을 지나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했는가? 라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물론 장수왕은 북위에 33차례나 조공하며 책봉을 받았고 2번이나 한해에도 3차례나 조공하며 훈훈
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가 허용해줄 수도 있으나, 육로로 통해서 고구려를 지난다면 북위군
이 평양성 인근을 지나간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다수의 병력이 수도 인근을 지나
가게 해줬다는 기록은 상식적으로 의문인데다가 한국사는 물론 중국사에서도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황해를 건너왔을 확률이 높은데, 유목민 선비족 출신인 북위는 물에 익숙하지 않아 황해
를 건너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니 이에 북위군이 쳐들어온 곳은 만주와 화북의 사이
위치한 요서 지방의 백제 식민지라며 이 사건을 백제의 요서경략설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북위가 왜 수십만명(과장임?)에 달하는 병력을 보내 백제와 교전을 펼쳤는가? 라는 의문점도
있으나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는데 다만 북위의 병력이 강력했고, 백제에서도 사태의 심각성
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동성왕이 남조의 남제에 보낸 표문에 기록된 백제군
지휘부에서 사법명, 해예곤, 목간나 등 대성팔족의 일원들이 참여한 것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5세기 후반은 백제가 한가롭게 대외확장이나 노리고 있을 시절이 아니라 불과 9년전인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쫃겨온 이후 문주왕과 삼근왕이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중신인 해씨와 진씨들에게 살해되고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14살 어린 동성이 진씨들의 허수아비로 왕의
자리를 지키던 중인데 한숨 돌렸다면 먼저 고구려에 뺏긴 한강의 한성(위례성) 수복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게다가 전성기를 맞은 대가야가 호남 동부까지 영향력을 넓히며 백제의 본토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
이고 구 마한 세력권인 전라북도 남원시, 장수군 등지에는 이 시기 가야 유적이 남아있고 487년
키노 오이와노스쿠네가 가야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일본서기” 에도 가야의 호남 진출을 시사하고
있으니 마침내 섬진강 유역을 장악한 대가야 하지왕은 479년에 중국 남제에 처음으로 단독 사절단
을 보내니 백제의 동성왕이 북위랑 싸울 여유가 있다면 당장 앞마당 호남부터 챙기는게 먼저 입니다?
또한 요서경략설 관점에서 위 전투가 요서에서 벌어졌다고 가정하더라도 사법명, 해예곤, 목간나
는 대성팔족에 해당하고, 기사에 등장하는 장군들이 승전 이후 받은 지역도 모두 전라도
지역으로 비정되는데.... 다시 말하면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 모두 근거지는 한반도
지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건이 타당하지, 요서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백제 입장에서도 호남 경영과 한성 수복이 가장 큰 목표일텐데,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 중
상당 부분을 요서에 배치해 둘 이유와 능력(최근에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이 연이어 살해됨)
도 없으니 그렇다면 위 전투가 설사 요서에서 벌어졌다고 가정하더라도, 백제군은 본토에서
해로(484년 남제에 보낸 사신도 고구려군에 막혔는데?)를 따라 요서 지방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고구려의 연안을 거쳐 가야 하니 북위와 같은 진격로의 난제가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475) 2월과 8월에 2차례 사신을 위(북위)에 보내 조공한후
9월에 왕은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온후 488년과 489년 각각
3차례나 위나라에 조공했으며 490년에는 위나라에 2번 송나라에 1번 사신을 보내 조공
했는데 동성왕은 고구려에 뺏긴 한강의 한성부터 탈환해야 하는데 엉뚱한 북위와 전쟁이라니?
마찬가지로 상당한 전력의 군대가 자국연안 바다를 통과해 가는데 고구려가 그대로 보고만
있었을까요? 해군력이 백제보다 훨씬 강했던 고구려가 당연히 견제활동에 나섰을
것이고, 설령 해로를 통한 진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육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북쪽 지역을 도발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나 위 전투를 전후하여 고구려
와 백제의 충돌을 암시하는 기록은 없고 494년과 495년에야 고구려군이 남침해 옵니다.
학계의 해석도 제각각인데 크게 보면 5가지로 분류되니 1. 요서경략설 : 공격자를 북위군으로 보는
것은 남조에 전쟁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공격자를 '위로((魏虜)' 로 지칭했기 때문인데, 이 말이
'위나라의 오랑캐' 라는 말이 아니라 '위나라에 붙은 오랑캐', 고구려를 의미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서경략설 부정론을 포함해서 이 시기 백제의 대외 관계를 주로 다루는 공주대 유원재 교수의 주장
이지만 근거가 미약한데, 백제가 고구려를 부르는 비칭은 '맥(貊)'이지 '험윤(獫狁)과 흉리(匈梨)'
가 아니었으며.... 남조에서는 일관되게 북조에 대해서만 저런 표현을 쓰고 있으니,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을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적고 있는데 위나라와의 전쟁만 누락할 리 없습니다.
2. 부정설: 백제-북위 간의 전투 자체가 아예 없었으며 백제가 남제에게 인정받기 위해 꾸며낸 기록이라
는 주장이니 일제 강점기 시절 도쿄제국대학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가 주장한 것으로, 근거가
미약한데다가 존재하는 기록들을 그냥 부정해 버리는 것이라 사실상 우리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3. 북위의 해로 공격설: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보고 그렇다면 북위의 공격루트
가 해로로 본 것이니 특히 490년 전투 중 동성왕이 남조에 직접 보낸 표찰에서 목간나의 공적
부분이 가장 큰 근거로 꼽히는데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으로 '舫' 은 말할 것도 없이 선박이고,
'臺' 는 성문 혹은 누각으로 볼 수도 있으나 공격자인 북위군에게 성문이나 누각이 존재할 리가
없다고 보면 '臺舫' 은 각 단어의 의미가 서로 통하는 단어인 '누선(樓船)'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4. 백제의 용병 참가설: 최근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가설로 이도학 교수의 주장인데 백제가 왜에 선진
기술을 전수해주고, 왜는 백제에 용병을 파견해 군사적 지원을 해주었듯이 남제가 백제에게 용병
을 요청했고, 백제가 이를 받아들여 바다 건너 중국에 주둔해 있다가 북위와 전쟁을 했다는 것입니다.
5. 각종 기록 주체는 북위가 백제(영토)를 침입했다는 기록과 결정적으로 '누선(臺舫)’이라는 북위의 배를
불태웠다는 기록 때문에 4번 설은 전반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하지만 고구려가 남조 유송에 마필을
배로 팔았다는 점에서 북위가 고구려 수군의 도움으로 백제로 상륙해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긴 하지만 북위가 1)수군도 미약한데 바다 건너편 2)머나먼 나라 백제로 부터 직접적인 위협이나
이해 관계도 없는 상태에서 3)인접 우방국인 고구려가 있음에도 무슨 이유로 전쟁을 개시했는지
부터 규명되어야 할 것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북위는 백제와 전쟁을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68년(480) 4월에 남제(南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장수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하니 왕
은 사신 여노(餘奴) 를 남제의 조정에 보내 수교하려고 하였는데, 위나라 광주(光州) 사람이 바다
에서 여노를 붙잡아 위나라 대궐로 보내니 위(북위)나라 고조가 장수왕에게 조서를 보내 책망하였다.
“소도성이 임금을 죽이고 강남에서 황제의 칭호를 도용하였다. 짐은 망한 나라를 옛 땅에서 다시
일으켜, 끊긴 대를 유씨(劉氏)에게 잇게 하려 한다. 그런데 경은 우리 국경을 넘어 외국과 교섭
하고, 찬탈한 도적과 통교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蕃臣)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하고 하겠느냐?
이제 한 번의 잘못으로 경의 이전의 정성을 덮을수 없어 사신을 돌려보내니 그 용서함에
감사하고 잘못을 새겨 법도를 받들어 지킬 것이며 그대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동정을 보고하라!
고구려 장수왕에게 보낸 북위의 조서의 어투가 엄중한데 이는 고구려가 예전부터 중국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전례에 기인하니.... 고구려는 한나라에 조공하기도 하고
한군현을 공격하기도 하니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로, 왕을 후(候)로 불렀지만
후한(後漢)이 들어서니 광무제는 대무신왕에게 고구려 국호와 왕제를 회복(?) 시켜 줍니다.
동천왕은 오나라에 칭신했다가 위나라와 화친한후 236년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냄으로써 두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였으나 이후 246년에 2만으로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
했다가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90% 가 죽고 2천명만 간신히 살아 도주하니.... 환도성
(국내성)이 함락됐으며 385년 고국원왕은 선비족 전연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왕모와
왕비등 5만이 사로잡혀갔는지라 신속(臣屬)하니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에 책봉됩니다.
광개토대왕은 396년 후연 모용보로 부터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에 책봉(양서 고구려전 : 以句麗王安爲
平州牧封療東帶方二國王) 되고 400년에 5만을 신라구원차 내려보낸후 1월에 조공했지만 2월에 후연
모용성이 모용희를 선봉으로 3만군이 침공해 신성과 남소성아 함락당해 700리 땅을 뺏기고 고구려인
5천호가 잡혀가지만 군대가 없으니 성을 구원하지 못하고 가야로 내려간 5만 고구려군을 철수 시킵니다.
서라벌을 거쳐 가야까지 내려가 왜군 및 김해가야군과 싸운후 황급히 귀환한 저 5만군은 부상자도 많은
데다 극도로 피곤하니 적군의 성을 공격할 수는 없는지라 휴식을 취했는데, 2년후 방비가 엄중한 신성
이나 남소성 대신에 멀리 있는 숙군성을 공격했으며 404년에도 연나라를 공격하니 삼국사기에 “十三年,
冬十一月, 出師侵<燕>” 달랑 한줄 뿐이라 자세한 내용은 알수가 없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이 해에 왜군
이 백잔과 함께 석성(석현성)을 점령하고 청목령을 거쳐 대방(황해도)을 침입하니 왕이 출진해 물리칩니다.
다만 광개토대왕비 3면 5행에는 404년이 아닌 407년 후연 모용희 建始(건시) 1년,
백제 전지왕 3년에 기사가 나오는데 정토 대상 국가는 논란이 있습니다.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 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甲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牛#*城, #城, ##### 17년 정미 교견 보기5만 왕사 사방합전,
참살탕진. 소획개갑일만여령, 군자기계, 불가칭수. 환파사구성, 루성, 우#*성, #성, #####
“왕이 보기 5만을 거느리고... 사방 포위 작전을 썼다. 적은 전부 참살되었으며 개갑
만여령을 노획하고 군자 기계는 수를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며 사구성, 누성, 우#성, #성, ...”
이후 연나라와의 전쟁기록은 없으며 413년에 돌아가시니 아들 장수왕이 왕위를 이었는데, 장수왕
은 북위에서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중랑장 고구려왕에 책봉되고 남조인 동진에서
사지절 도독 정동장군 낙랑왕에 책봉된후 다음 왕조인 송나라에서 정동대장군으로 승급됩니다.
북위 조정이 자국의 해안 세력을 정리하면‘토벌’에 해당하지만‘근거지’에 대한 조치를
구상하면 ‘전쟁’ 이니 북위로서는 이‘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 자국의 해안 세력은
물론 외국에 있는 배후까지 정벌하여 지배력을 확고히 한다는 것 외에 남제
수도 건강성의 앞까지 진출하여 남제와의 군사적 대립에서 큰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백제-북위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시점(488, 490년)은 남제의 2대 황제 무제(武帝
483~493) 시대인데 끊임없이 이어지던 남제와 북위 간 전쟁은 소강상태이고 남제의
정치는 유송(劉宋) 문제(文帝)의 ‘원가(元嘉)의 치(治)’에 버금가는 ‘영명(永明:
남제 무제의 연호)의 치’라고 불릴 정도로 안정적인 시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부터 백제-북위 전쟁이 정작 북조의 위서(魏書)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남조인 <남제서>
에 그것도 본기(本紀)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백제전이라는 열전(列傳)에만 기록된,
게다가 동성왕의 입으로만 전해진 배경이 짐작되기도 하는데 남제 조정은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면서 태평성대의 기록만을 남기고자 한 것일까요.
무제 시기에 남제 조정이 안정된 것은 내륙 농업 생산력에 기반을 둔 문치 귀족들이 해양
상업 부호들에 비해 잠시 권력의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니 해양 세력에 대한 북위의
공격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치 귀족들로서는 (북위가
자신들과 남제 조정을 겨냥하지 않는 한) 해양 세력의 쇠퇴를 내심 바랄 수는 있습니다.
남북조 시대에 삼국사기 기사를 보면 단 한차례만 기록된 북위가 2차로 백제를 침공한게 488년으로
삼국사기에는 491년 장수왕이 죽고 문자왕 8년(499)에 “백제 백성들이 굶주려 2천 명이 투항해
왔다. 양(梁)나라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여름 4월에 (문자)왕을 승진시켜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으로 삼았다. 겨울 11월에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1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 하였다.”
12년(503) 겨울 11월에 백제가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수곡성(水谷城)
으로 쳐들어 왔다. 13년(504)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위나라 세종(世宗)이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동당(東堂)으로 불러들여 만나니, [예]실불은 나아가 말하였다. “저희
나라는 정성을 대국에 잇대고, 여러 대에 걸쳐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바치는 데 어김이 없었습니다.”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흰 마노[珂]는 섭라(涉羅)에서 나는 것인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기는 바
되고, 섭라(제주도)는 백제에 병합되었습니다. 두 가지 물건이 왕의 창고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세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세세토록 상국(上國)의 도움을 입어, 해외에서
제멋대로 다스려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하였는데, 작은 술그릇이 비는 것은
큰 술병의 수치이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이전에 조공이 어그러진 것은 책임이 고구려
왕에게 있는 것이다. 두 읍으로 하여금 옛 터를 되찾아서 토산물을 빠짐없이 일정히 조공하게 하라.”
17년(508)에 양(梁)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구려왕 낙랑군공 모(某)는 정성이
두드러지고 조공하는 길이 서로 이어졌으므로, 마땅히 관작을 후하게 주고 조정의 의전을
넓혀 (문자왕을)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로 삼는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1년(512) 3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백제를 침략해 가불(加弗)·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24년(515)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6) 여름 4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안장왕 2년(서기 520) 정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양(梁)나라 고조(高祖)가 왕을
영동장군(寧東將軍) 도독영평이주제군사(都督營平二州諸軍事)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사신 강주성
(江注盛)을 보내 왕에게 의관, 칼, 패물을 주었으나, 위나라 군사가 바다 가운데서 그를 붙잡아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위나라가 왕을 안동장군(安東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
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봉하였다. 9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안장왕 11년(529) 봄 3월에 왕은 황성(黃城)의 동쪽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오곡(五谷)에서 백제와 싸워서 이기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안원왕 4년(534) 동위에서 조서를 보내 왕에게 표기대장군의 작위를
더하여 주고, 다른 관직은 모두 종전과 같게 하였다.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양원왕 4년(548) 정월, 예의 군사 6천명으로 백제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주진이 백제를 도왔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가을 9월, 환도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에 봉해집니다.
평원왕은 560년 북제에 조공해 사지절 영동이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에 책봉된후 565년과 573년에
조공하고 주나라에 577년 고구려왕에 책봉되었으며 581년 수나라 고조에 조공후 584년까지 5차례
조공했으며 561년 남조 진(陳)나라에 조공해 562년 영동장군 벼슬을 받는등 일곱 차례 조공을 합니다.
평원왕 32년(590) (남조의) 진(陳)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왕은 대단히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국방을 강화할 대비책을 세웠다. 수나라 고조는 왕에게 조서를
보내 "비록 스스로 번방이라고 하면서도, 성의와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 라고 책망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대 나라가 비록 국토가 좁고 인구도 적지만, 이제 내가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그대로 비워둘 수는 없을 것이므로, 결국은 다시 관리를 선택하여, 그곳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고쳐 우리법도를 따른다면 그때는 곧 나의 좋은 신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왜 힘들여 다른 인재를 보내겠는가?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고구려 인구가
진(陳) 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왕은 말하여 보라. 내가 왕을 용서하려는 심정이 없고, 왕의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기로 한다면, 한 사람의 장군에게 정벌을 명령해도 될 것이니, 어찌 큰 힘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간곡한 말로 타이르는 뜻은, 왕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바꾸도록 하려는데에 있다" 라 하였다.
왕이 이를 보고 황공하여 표문을 올려 사의를 표하려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재위 32년 겨울
10월(590년)에 죽었다. 호를 평원왕이라 하였다. 수나라에는 584년까지 5차례나 조공하다가
불과 6년 정도 쉬었는데...... 그 때문인지 이제 바야흐로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590년 영양왕은 즉위하자마자 장수왕이 북위에 33차례나 조공하고 그 다음 문자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등 여러 왕들도 조공을 거르지 않은 전례에 따라 수나라에 조공해 상개부의 동삼사 요동군공,
다음해 고구려왕에 책봉되고 592년과 597년에 조공했음에도 수나라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영양왕은 말갈
기병 1만기로 요서 임유관을 선제적으로 기습하니 598년 수문제는 30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했고... 다음
수양제도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무리한 장거리 원정으로 망하고 처절한 내란을 거쳐 당나라가 들어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