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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端宗
권력은 본질적으로 비정(非情)하다. 그 핵심적인 까닭은 그것이 재력(財力)과 함께 가장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가치(價値)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소유한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강력하고 오랫동안 유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만, 그것을 빼앗겼거나 노리는 사람은 그런 목적을 이루는데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가장 첨예하고 거친 충돌과 투쟁이 전개되는 국면은 권력의 공백기(空白期)이다. 그때 권력을 노리는 개인과 집단은 날 것 그대로의 욕망과 수단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조선의 제6대 국왕인 단종(端宗. 1441 ~1457. 재위 기간 1452 ~1455)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국왕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첨예한 권력 투쟁은 대부분 건국 초기에 빈발한다. 조선이 개창(開創)된 지 꼭 60년만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국왕은 권력의 공백(空白)이 빚어낸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세종 23년인 1441년 7월 23일, 왕세자빈 권씨(顯德王后)가 동궁인 창덕궁 자선당에서 원손(元孫 .. 단종)을 낳자, 세종대왕은 ' 세자(世子 .. 문종)가 장년(28세)이 돼도 후사(後嗣)가 없어 염려하였는데 적손(嫡孫)이 생겨 기쁘기 이를 데 없다 '라며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튿날 세자빈의 산후(産後) 통증이 심하다는 소식에 시아버지인 세종(世宗)이 친히 동궁으로 병문안을 갔으나 세자빈은 사망하고 말았다. 세종은 세자빈(世子嬪)의 장례 격식(格式)에 대하여 자신의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 .. 태종비)보다는 내리고, 직전 사망한 큰딸 '정소공주'보다 높여 도궁(東宮) 안에서 모시라고 명했다. 이는 세자빈에 대한 최고(最高)의 예우이었다.
어머니가 죽자 어린 세손(世孫)을 가련히 여긴 세종(世宗)은 자신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어린 단종(端宗)을 부탁하였고, 세종(世宗)의 후궁으로 작은 할머니뻘인 '혜빈양씨'의 보살핌 아래서 성장하였다. 1448년 8살이 되던 해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世宗)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할머니인 소헌왕후(昭獻王后)는 이러한 손자를 애틋하게 여겨 더욱 정성껏 돌보았다. 8세가 되던 해 4월 3일, 세종은 원손(元孫)에 대하여 ' 천자(天姿 .. 타고난 용모)가 숙성하고 품성이 영특하고 밝으며, 지금 나의 스승에 나아갈 만큼 되었다 '고 칭찬한 뒤 왕세손(王世孫)으로 명하였다.
병중(病中)이던 세종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병약(病弱)한 아들 문종(文宗)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염려때문에 늘 어린 손자 단종을 몹시 걱정하였다. 문종(文宗)마저 요절(夭絶)하고 나면 야심으로 가득 찬 둘째 아들 수양대군(首양大君)을 비롯한 혈기왕성한 여러 대군(大君) 사이에서 어린 손자가 아무 탈 없이 잘 살아 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생전에 황보인,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왕세손(王世孫)을 지켜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단종의 일생
세종(世宗)의 맏아들인 문종(文宗)과 현덕왕후의 외아들이며, 조선 왕조 최초의 왕세손(王世孫)이기도 하다. 폐위(廢位)되어 죽어서 시호(諡號)를 받지 못한 채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다가 이후 중종(中宗) 때에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당하였고, 숙종(肅宗) 대에 가서야 성리학자들의 건의로 정종과 함께 묘호(廟號))와 시호(諡號)가 올려져 정식 시호(諡號)는 '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이다.
1441년 ... 세종(世宗) 23년에 출생. 생모(生母)는 생산 후 3일만에 죽는다. 1450년 ... 9살의 나이에 世子로 책봉된다. 1452년 ... 문종(文宗)이 죽자 12세에 조선의 6대 王으로 즉위한다. 13세의 정순왕후와 결혼. 1455년 ... 6월11일, 수양대군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上王)이 된다. 1455년 ... 10월24일, 사약을 받고 죽는다. 17세.. 시체는 강물에 버려진다. 1516년 ... 중종(中宗) 11년,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를 찾으라고 지시. 우선 봉분만 만든다. 1521년 ...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죽는다. 1541년 ... 중종 36년, 노산군(魯山君)의 묘를 찾는다. 몰래 암장(暗葬)되어 있었다. 1580년 ... 선조(宣祖) 13년, 노산군의 묘에 상석, 장명등(長命燈) 등을 세운다. 1698년 ... 숙종 24년, 노산군(魯山君)에서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그리고 단종(端宗)으로 추존된다. 묘(墓)에서 장릉(莊陵)이 되었다. 1733년 ... 英祖 9년, 정자각(丁字閣)과 신도비(神道碑)를 세운다. 1791년 ... 정조(正祖) 15년, 우물을 파고 영천비(靈泉碑)를 내린다. 제단(祭壇)도 마련한다.
단종(端宗)은 1441년(세종 23년) 7월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휘는 홍위(弘暐)이다. 객관적 조건으로만 보면, 앙위 계승자로서 단종의 조건은 완벽하였다. 부왕(父王)인 문종(文宗)도 적장자(嫡長子)이었고, 자신도 적장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가장 비참한 운명의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단종이 밟은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1448년(세종 30) 4월 3일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었고 (그의 나이 7세), 2년 뒤에 아버지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즉시 왕세자가 되었다 (1450년 7월 20일). 운명의 변화는 문종이 즉위 2년만에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하자 단종은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왕통은 이었지만, 이때의 상황은 권력의 공백기로 급변할 수 있는 정황을 대부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제 6대 임금으로 즉위한 단종은 당시 12살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端宗)은 3년 2개월 동안의 재위(在位) 기간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할 만한 배경조차 없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단종은 방대한 양(量)의 교서(敎書)를 발표하였다. 이는 아버지 문종(文宗)이 어린 아들을 염려하여 종친(宗親)과 대신(大臣)들에게 부탁한 고명정치(顧命政治)의 내용이었다.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든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은 이른바 ' 황표정사(黃標政事) '를 하였다. '황표정사'란 일부 공신(功臣)이 관료 후보자 명단 가운데 의중에 두고 있는 사람을 노란색을 표시해 임금에게 올린 것을 가리킨다.
관료들의 인사(人事)는 임금믜 고유한 권한이었으나 단종이 어린 탓에 공신(功臣)들이 대신 인사권(人事權)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종사(宗社)가 위태로워지자,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政難)을 일으키게 된다.
우선 국왕은 너무 어렸고,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중심으로 한 숙부(叔父)들은 인생에서 가장 정력적인 시점에 와 있었다. 이때 수양대군은 35세, 안평대군은 34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뛰어난 능력과 커다란 야심(野心)을 갖고 있었다. 신하들은 대부분 세종 대의 인물들이었다. 삼정승(三政丞)은 세종의 고명(誥命)을 받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남지(南智)이었고, 그 아래 실무진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으로 대부분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四) 출신이었다.
1455년 계유정난(癸酉政難)으로 단종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이후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으며, 단종은 1457년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돼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된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이 때문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에서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복위 계획 실패로 청령포에 갇히는 신세가 된 단종은 끈질기게 자살(自殺)을 강요당하다가 1457년 10월24일에 영월에서 죽었다. 청령포는 동강(東江)이 삼면(三面)으로 휘돌아 흐르고 뒤로는 험악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감옥이었다. 단종이 영월읍 관풍헌(觀風軒)에서 사약(賜藥)을 받은 후 그의 시체를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수습하여 현 위치에 매장하였다. 수 십년 동안 단종의 묘(墓)는 제사도, 봉양도 받지 못하고 찾는 이도 없었다가 중종(中綜) 33년인 1538년,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朴忠源)이 이곳을 찾아 봉축하고 전물을 갖추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의 왕릉(王陵)은 현재 북한에 있는 2기(基)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성(都城)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4 ~ 40km에 조영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제 6대 임금인 단종(端宗)이 잠들고 있는 장릉(莊陵)은 유일(唯一)하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 133-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지(汚地)로 면적이 약 107여 만평이며, 완충지역까지 포함하면 약 150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다. 단종이 왜 이처럼 먼 곳까지 와서 묻혔는지는 ' 단종애사(端宗哀史) '라고 불리는 슬픈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장릉 莊陵
이 곳 장릉(莊陵)은 다른 왕릉에 비하여 많이 다르다. 우선 왕릉은 한양 百里 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이었지만 , 장릉은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이다, 그리고 낮은 구릉에 모셔진 다른 왕릉에 비하여 아주 높은 곳에 모셔져 있으며, 대부분의 왕릉이 봉분,장자각, 참도, 홍살문이 일직선(一直線) 상에 배치되었지만, 이 곳 장릉의 경우 신좌을향(辛坐乙向 .. 南西에서 北東向으로)으로 모셔졌고, 정자각(丁字閣)은 북쪽을 향하여 있어 정자각에서 능(陵)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할 수 밖에 없다.
장릉(莊陵)은 능침(陵寢)공간과 제향(祭享)공간이 여느 왕릉과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장유형의 능선 중간에 능침(陵寢)이 있으며, 능침 서쪽 수십 미터 아래에 평지를 이용, 'L'자형 참도(參道) 끝에 능침을 옆으로 하고 정자각(丁字閣)을 배치해 놓았다. 일반적 직선형 제향공간과 다른 형태이다. 이것은 단종이 몰래 암매장(暗埋葬)되고, 능침(陵寢) 앞이 좁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장릉 능침공간의 상설은 정릉(貞陵)과 경릉(景陵)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인석은 생략되었고, 세자(世子) 묘(墓)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능역(陵域)이 조성된 숙종(肅宗) 시대에는 임금 단종이 아니라 세자(世子) 노산군(魯山君)이었기 때문이다. 중종(中宗) 때 첫 능지(陵地) 확인 후 숙종 대에 이르러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 석호(石虎), 석양(石羊), 망주석 등 석물(石物)을 정비하고, 영조(英祖) 대에 제향공간을 만들고 정자각(丁字閣)과 수복(守僕), 수라간(水刺間) 그리고 산신석(山神石), 예감(刈嵌) 등을 배치하고 정려각과 배식단, 장판옥을 조성하였다. 이렇듯이 장릉(莊陵)은 수 세기(世紀)에 걸쳐 조영된 것이다.
단종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지은 사건인 계유정난(癸酉政亂)은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났다.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반만이었다. 그것은 태종(太宗)이 일으킨 제1차, 2차 왕자의 난(王子의 亂)과 함께 조선 전기의 가장 대표적인 권력 투쟁이었다.
계유정난의 과정과 결과는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수양대군(首陽大君)과 한명회(韓明澮) 등은 황보인, 김종서 등 주요 대신들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격적으로 거사했고, 그들을 대부분 숙청하였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수양대군은 실권을 장악하였다. 영의정부사 (領議政府事) 영집현전 경연 예문춘추관 서운관사 ( 領集賢殿 經筵 禮文春秋館 書雲觀事) 겸 판이병조사(兼 判吏兵曺事) 중외병마도통사(中外兵馬都統使) ..라는 유례없이 길고 어마어마한 관직은 그러한 권력의 크기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계유정난의 가장 중요한 숙청 대상이었던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즉시 강화(江華)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1453년 10월 18일이었다. 1455년 6월 또 다른 위험 인물인 금성대군(錦城大君)도 유배되었다. 이로써 위협이 될만한 이들은 거의 모두 제거되었다.
수양대군이 갖지 못한 유일하지만 결정적인 권위는 왕(王)이었다. 1455년 윤6월 11일 결국 수양대군은 단종의 선위(禪位 .. 왕이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를 받아들여 국왕으로 등극함으로써 그동안 갖지 못했던 명목상의 권위까지 모두 인수하였다. 정변(政變)의 성공부터 최종적 완성까지 1년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거린 이런 과정은 500여년 뒤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두 번의 군사쿠데타와 집권 과정의 어떤역사적 선례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로써 단종은 자신보다 24세나 많은 숙부의 상왕(上王)이되어 수강궁(壽康宮 .. 창경궁의 전신)으로 물러났다.
단종의 유배길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단종은 1457년 여름에 영월 청령포로 유폐되어 4개월여 후 한 많은 1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서울에서 강원도 영월(寧越)의 청령포까지는 자동차로 두 시간 남짓이다. 하지만 55년전인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端宗)은 의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과 중추부사 어득해(魚得海)가 이끄는 군졸 50여 명의 호송을 받으며 700여 리(里)에 달하는 유배길을 7일간에 걸쳐 가야만 했다.
그해 음력 6월22일 창덕궁을 나선 단종은 지금의 청계천 7가와 8가 사이에 있는영도교(永渡橋)를 지나 중랑천과 청계천이 합수(合水)되어 한양대학교 뒷편을 휘감아 흐르는 곳에 놓여 있는 ' 살곶이 다리'를 건너 할아버지 세종(世宗)의 별장이 있던 화양정(華陽亭)을 거쳐 지금은 광진교(廣津橋)가 놓인 광나루에 닿았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원주(原州) 흥원창(興元倉)까지 간 단종은 다시 걸어서 단강리를 지나 배재와 구력재를 넘어 치악산 줄기인 신림의 싸리치를 감아 넘고 다시 군등치와 배일치, 소나기재 등을 넘어 7일만인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한여름의 찌는듯한 더위와 싸우면서 단종이 피눈물을 삼키며 거쳐 온 유배길 700여 리(里)는 그야말로 '단종애사(端宗哀史)' 그 자체이었다.
낙촌비각 駱村碑閣
낙촌비각(駱村碑閣) ...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駱村 朴忠元)이 노산묘(魯山墓)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비(碑)로, 1974년 그 후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비문(碑文)의 요지는 ..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서 종친, 구신(舊臣) 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賜死)당하시니 엄흥도(嚴興道)는 충성으로써 단종의 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嚴戶將)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 길이 없어 풍설 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부임하면 원인모르게 죽기를 7인에 이르렀다.
중종(中宗) 36년에 박충원(朴忠元)이 군수로 부임한 즉 군리(郡吏)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운명이라고 하며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 사람에게 끌려 가 본즉 숲 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 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임금을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번째 서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 처형을 면하였다. 깨어보니 꿈 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 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 초에 죽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정령송 精靈松
단종비(端宗妃)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남양주의 사릉(思陵)에 묻혀있다. 죽은 영혼이나마 만나 함께 있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각 해당 자치단체의 이견으로 합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사릉(思陵)에 있는 작은 소나무 한 그루를 이 곳 장릉에 옮겨 심어, 두 사람의 영혼을 이어 주었다. 1999년에...
유배지 영월(寧越)에 남겨진 단종(端宗)의 자취와 충신들의 결의가 깃든 장소를 8폭의 그림으로 제작한 화첩이다. 그림은 정교하게 그려졌으며 특히 밝은 색채를 많이 구사하여 화사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매우 정교한 필치를 구사하여 경물(景物)을 정확하게 묘사하였으며 산악(山嶽)의 표현과 나무 묘사에서는 진경산수(眞景山水) 화풍의 여운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그림의 화격(畵格)이 높아서 어람용(御覽用)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1536호로 지정되어 있다.
8폭의 그림으로 제작된 이 월중도(越中圖)의 제 1면은 단종의 왕릉인 장릉(莊릉)을 산도(山圖)의 형식으로 그린 것이고, 제 2면은 단종의 유배지이었던 청령포를 과감한 구도로 묘사한 일종의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이다. 제 3면은 영월 객사(客舍)의 관풍헌(觀風軒)을 계화(界畵) 형식으로 그렸으며, 제 4면은 관풍헌 동남쪽에 위치한 자규루(子規樓)를 중앙에 그렸다.
제 5면은 단종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키며 숨진 사육신(死六臣)을 배향한 사당인 창절사(彰節社)를 가운데 배치하였고, 제 6면은 단종의 시녀(侍女)와 시종(侍從)들이 순절한 낙화암(落花岩)을 산수화 형식으로 그렸다. 제 7면은 영월읍 치소(治所)를 개화식 구도를 취한 회화식 지도의 형식으로 그렸으며, 제 8면은 영월(寧越)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각 면에는 오른편 윗부분을 위주로 화면에 등장하는 장소에 대한 간략한 기록을 적어 놓았다.
장릉 莊陵
청령포 청령포
영월 청령포는 평창강이 굽어 돌아나가며 삼면(三面)이 물길이고, 뒤로는 산으로 막혀 있는 지형이다. 어떻게 여기 이런 땅이 있는 줄 알고 단종을 유배보냈을까 ? 건국이후 조선정부는 전국적 통치(統治)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각도(各道)의 지리지(地理誌)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지리서(地理書)는 지형(地形), 특산물, 인물 등 정보를 수록한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에 해당된다.
세종(世宗) 시절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가 편찬되었는데, 이는 '세종실록'에 수록되어 있어서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부른다. 성종(成宗) 시절에는 '팔도지리지'가 부족하였던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기에 이른다. 단종이 유배되던 때가 세조(世祖) 2년이니까 각도(各道) 지리지의 편찬을 통하여 전국의 지역적 특성과 지형(地形)을 중앙조정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척박한 오지(奧地)를 단종의 귀양지로 택할 수가 있었다. 세종(世宗)은 아들인 수양대군이 손자(孫子)인 단종을 유배 보내는 데 그 지리지(地理誌)가 이용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사람이 하는 일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관풍헌 觀風軒
자규루 子規樓
자규루(子規樓)는 영월읍 중심가인 관풍헌(觀風軒)의 동남쪽에 있는 누각(樓閣)이다. 세종 시절인 1431년, 영월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다. 청령포에서 두 달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端宗)이 관풍헌으로 어소(御所)를 옮긴 후 이 누각(樓閣)에 올라 그 유명한 자규시(子規詩)를 남겼다. 이 누각은 선조 38년인 1605년, 호우(豪雨)로 유실되었으며, 정조 15년인 1791년, 강원도 감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중건하여 자규루(子規樓)라 하였다.
자규루(子規樓)는 관풍헌(觀風軒)과 더불어 옛 객사(客舍) 근처의 건물로, 관풍헌에서 동쪽으로 약 7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1단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圓柱)를 사용한 중층(重層)의 문루(門樓)인데 좌측 첫째 칸에 나무계단을 설치하여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영월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세종 10년에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고 칭하였으나, 후에 단종이 이곳 객사(客舍)에 거처하면서 누각(樓閣)에 올라 자신의 고뇌를 자규사(子規詞) 및 자규시(子規詩)로 읊은 것이 계기가 되어 누각의 이름이 자규루(子規樓)로 바뀌었다고 한다. 자규(子規)는 우리말로 소쩍새 혹은 접동새라고 하는 새로 짝짓기를 할 때에는 밤새도록 피를 토하도록 임을 부르며 우러대는데, 두견(杜鵑), 망제혼(望帝魂), 귀촉도(歸蜀道), 불여귀(不如歸) 등으로도 부른다.
창절사 彰節祠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사육신(死六臣)과 김시습, 남효온, 박심문(朴審問), 엄흥도(嚴興道) 등 10위(位)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창절사(창절사)는 장릉(莊陵) 경내(境內)에 건립하였던 육신사(육신사)에서 비롯되었다. 숙종 11년인 1685년, 강원도관찰사 홍만종(洪萬鍾)과 영월군수 조이한(趙爾翰)이 3칸의 사우(祠宇)를 세웠는데, 1698년 노산군에 대한 복위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면서 왕릉(王陵) 곁에 신하(臣下)들의 사당을 둘 수 있느냐가 논란이 되면서 1706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1709년 영월 유생(儒生)의 소청으로 '육신사(六臣祠)'를 '창절사(彰節祠)'로 고쳐 사액(賜額)을 내렸다. 당초에는 사육신만이 배향되었으나, 창절사로 사액되면서 이후로 김시습, 남효온, 박심문, 엉믛오가 추가로 배향되었으며,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개칭되었다.
낙화암 落花巖
치소 치소
영월읍 영월읍
단종의 죽음에 대한 실록(實錄) 기록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을 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 世祖 3년 10월21일, 실록의 기록이다.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 간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기록한 실록이었으니까 더 이상 어떤 말을 하여야했을까? 이 것이 정사(正史)인 실록의 한계이다.1698년 숙종 代에 이르러 노산군(魯山君)에서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복권되었고, 다시 단종(端綜)으로 추존되면서 노산군묘가 장릉(莊陵)으로 된다.
당시 '숙종실록'의 기록에.... "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천지(天地)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단종대왕이 영월에 피하여 계실 적에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 마침내 입시하였을 때 단종대왕께서 관복을 갖추시고 마루로 나오시어, 온 이유를 下問하셨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하였었다. 그가 봉명신(奉命臣 .. 왕의 명령을 받고 온 신하)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그 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貢生 ..관청의 심부름꾼) 하나가 차마 하지 못 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 즉시 아홉 구명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 문종의 비로 1441년 단종을 출생하고 3일 뒤에 23살의 나이로 죽었다. 문종이 즉위하면서 1450년에 현덕와후로 추숭(追崇)되고, 능호는 소릉(昭陵)이라고 명명되었다. 한편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몰아내고 즉위한 수양대군(世祖)는 세자들 두었는데 이름은 장(暲)이었다. 그는 월산대군(月山大君 .. 成宗의 형)과 成宗을 낳고 20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현덕왕후의 꿈에 관한 다음의 기록이 있다.
세조가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매우 분노하여 "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 두어라 "고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동궁세자(東宮世子)인 동궁(東宮)이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 왔다. 그 때문에 소릉(昭陵)을 파헤치는 변고가 있었다....
世祖의 命으로 실제 파헤쳐졌으며,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는데 경기도 안산에 있다.현덕왕후는 후일 중종의 지시로 문종의 현릉(顯陵)에 합장되었다.
조선중기의 문신 이자(李자. 1480 ~1533)의 음애일기(陰崖日記)
1457년 가을에 世祖가 궁궐에서 낮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린 괴이한 일이 생기니, 곧 소릉(昭陵)을 파헤치라고 명하였다. 사신이 석실(石室)을 부수고 棺을 끌어내려 하였지만 무거워 들어 낼 도리가 없었다. 군민(軍民)이 놀라고 괴이쩍어 하더니, 글을 적어 제를 지내고 나서야 관이 나왔다.사나흘을 노천(露天)에 방치해 두었다가 곧 명을 따라 평민의 예로 장사지내고서 물가에 옮겨 묻었다. 능을 파헤치기 며칠 전 밤 중에, 부인의 울음소리가 능 안에서 나오는데, 내집을 부수려 하니 나는 장차 어디 가서 의탁할꼬..이었다. 그 소리가 마을 백성들의 마음을 아프게 흔들었다
모든 기록으로 보아 단종이 사약을 받아 죽고, 世祖의 世子가 죽던 날의 사이에 현덕왕후는 世祖의 꿈에 나타났고, 실제 소릉(昭陵)을 파헤치라고 세조는 지시하였던 것이다.소릉(昭陵)은 후일 추존된 이름이고 현덕왕후는 문종의 세자빈으로 책봉은 되었지만, 가례(嘉禮)는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단종을 낳고 갑자기 죽었으므로 왕비의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후일 추존되었던 것이다.
단종, 죽음의 기록 1 .... 世祖實錄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을 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에 실려 있는 단종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이것 뿐이다. 단종의 장례(葬禮)에 관한 구체적인 방식이나 묘(墓)의 장소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단종의 죽음을 나무도 간략하게 처리하여 오히려 은폐의 의도가 다분하다.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의 기록도 '세조실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숙종실록'에 가서야 왕방연의 이름이 나온다.
숙종실록 숙종실록
단종, 죽음의 기록 2 .... 병자록(丙子錄)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금부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어픋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니와서 온 까닭을 물으니, 금부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魯山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 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 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이었다. 통인(通引)이 미처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卽死)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 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 할 수 없었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단종, 죽음의 기록 3 ... 아성잡설(鴉城雜說)
노산(魯山)이 해(害)를 입자, 명(命)하여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 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하는데, 갸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더 있었다. 아전(衙前)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 아전(衙前)이 집에 노모(老母)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관(棺)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는데, 얼마 안되어 소릉(昭陵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가 파헤쳐지는 변이 있어 다시 파서 물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다. 아전은 차마 파지 못하고 파는 척하고 도로 묻었다.
단종, 죽음의 기록 4 ... 영남야어(嶺南野語)
魯山이 항상 객사(客舍 ..관풍헌)에 있으므로, 촌 백성들로써 고을에 가는 자가 누(樓)아래에 와서 뵈었는데, 害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官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만나니 노산이 백마를 타고 동곡(東谷)으로 달려 올라가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알현하며 "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물었더니, 魯山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 태백산으로 놀러간다 "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官에 들어가니 벌써 害를 당하였다.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옥거리(獄街)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棺)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衙前)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郡) 북쪽 5리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 한다. 이 때 엄흥도의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니 엄흥도가 말하기를 " 내가 옳은 일을 하고 害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爲善被禍 吾所甘心 "고 하였다
단종, 죽음의 기록 5 ... 송와집기 (松窩雜記)
노산(魯山)이 영월에서 죽으매, 과(棺)과 염습(염습)을 갖추지 못하고 거적으로 초빈을 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슬피 울고 스스로 말하기를 " 이름을 통하고 구휼을 받은 정분이 있다 " 하며 며칠을 묵다가 하루 저녁에 시체를 지고 도망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 산골에서 불 태웠다 "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 강(江)에 던졌다 " 하여, 지금의 무덤은 빈 탕이요 가묘(假墓)라 하니, 두 말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점필재 (점畢齋 .. 金宗直)의 글로 본다면 江에 던져졌다는 말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漣)의 무리로써, 간신들의 지휘를 받은 자가 아닌가. 영원히 한(恨)이 그치랴. 혼(魂)이 지금도 떠돌아 다닐 것이니 참으로 슬프도다....
단종, 죽음의 기록 6 .. 음애일기(陰崖日記)
실록에서 말하기를 " 노산(魯山)이 영월에서 금성군의 실패를 듣고 자진(自盡)하였다 "하였는데, 이 것은 당시의 여우나 쥐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 후일에 실록을 편수한 자들이 모두 당시에 세조를 종용(慫慂)한 者들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애통하게 여겨 제물을 베풀어 제사지내고 길흉,화복에 이르면 모두 묘소에 나가서 제사를 지냈다. 부녀자가 오히려 전하기를 " 정인지 같은 간적(奸敵) 놈들에게 핍박받아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제 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 고 하였다. 슬프다. 옛부터 충신(忠臣), 의사(義士)가 대가세족(大家世族)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당시에 임금을 팔고 이익을 꾀하던 무리들은 반드시 자기 임금을 혹심한 화란(禍亂)에 몰아 넣고야 마음에 쾌감을 느꼈으니, 이런 자들을 어찌 엄흥도에 비하여 보면 어떠한가.
촌부녀자들이나 동네 아이들은 군신(君臣)의 의리(義理)도 알지 못하고, 직접 흉(凶)한 변고를 보지 못하였건만, 지금까지 분하게 여기어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새어 나오고 전하니, 사람의 본성이란 속이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단종, 죽음의 기록 7 ... 해동야언(海東野言)
당시에 조신(朝臣)들이 노산(魯山)을 처형하여 그에게 향한 백성의 마음을 단념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사관(史官)이 기록하기를 " 노산이 금성대군의 실패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라고 하였다
단종, 죽음의 기록 8 ... 죽창한화 (竹窓閑話)
영의정 정인지(鄭麟趾)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魯山)을 제거하자고 청하였으므로, 그 죄(罪)를 논한다면 정인지(鄭麟趾)가 으뜸이고, 신숙주(申叔舟)가 그 다음이다.
영천 靈泉
정조(正祖) 때, 사육신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인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端宗祭)를 올리는 한식 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평소에는 물이 조금만 차 있다가 한식이 다가오면 물이 우물에 가득 찬다고 한다.
장판옥 藏板獄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 268명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이다. 그 구성은 충신위(忠臣位) 32명, 조사위(朝士位) 198명,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28명, 여인위(女人位) 6명 등 268명이다. 이처럼 장릉(莊陵)이 다른 왕릉과 다른 점은 폐위된 임금을 위하여 충절을 바친 이들을 위한 제단과 위패를 모신 전각이 있다는 것이다.
수복방 守僕房
배식단 配食壇
엄흥도 정려각 嚴興道 旌閭閣
정려각(旌閭閣)이란 구체적인 건축물의 형상을 말한다. 정확한 명칭은 정려(旌閭)이다. 정려(旌閭)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門)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旌閣)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정려(旌閭)라는 용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문(旌門) 또는 정표(旌表)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문'을 세웠다는 것은 정려(旌閭)를 나라에서 인정받아 문(門)을 세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건물이 아닌 문(門)을 세우게 되면 정려문(旌閭門)이고, 건물을 세우게 되면 정려각이 된다. 또 건립된 기준이 효녀나 정절(貞節)을 지킨 정절녀의 경우 열녀문(烈女門), 열녀각이 되고, 일반적으로는 그냥 정려문, 정려각이라 칭하고 있다.
세조(世祖)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강물에 던져 진 단종(端宗)의 시신(屍身)을 처음 수습한 영월호장(寧越戶長) 엄흥도(嚴興道)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26년(영조 2)에 세운 정려각(旌閭閣)이다. 엄흥도는 1833년(순조 33)에 공조판서(工曺判書 ..지금의 차관급)으로 추증되었고, 1876년 (고종 13)에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 졌다.
엄흥도 嚴興道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을 때, 엄흥도는 이 고을의 오장(戶長)이었었다. 밤낮으로 단종의 거소인 청령포를 바라보며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 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에서 슬프고 애끓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 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단종은 울음을 멈추고 "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 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 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옛 일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이 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 "하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 후 엄흥도는 매일 밤 비비람을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 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단종은 청령포 어소(御所)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觀風軒)으로 침소를 옮기게 되었다. 객사 동쪽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죽으니, 그 시신은 동강물에 내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東江絶壁 ..후일 낙화암)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히였으니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엄흥도 호장(戶長)은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世祖)의 지시를 두려워 한 군수가 거절하자, 엄흥도는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 곳에서 대기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인양하여 아들 3명과 미리 준비한 관(棺)에 봉안하고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등을지산(冬乙知山)의 先山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말리는 아들들에게 엄흥도는 위선피화 오소감심 (爲善被禍 吾所甘心) ..즉 나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노라..하며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
단종애사의 여인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은 정치적으로는 왕권(王權)강화를 통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수립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도덕적인 결함이 존재하였기에 단종(端宗)을 위해 목수믈 내던진 충신(忠臣)들의 미담(美談)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종애사(端宗哀史)에서 '충신(忠臣)'들에게 가려진 '여인(女人)'들이 없을 수가 없다.
혜빈 양씨 惠嬪 楊氏
단종을 낳은 직후 3일 만에 며느리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世宗)은 자신의 후궁 '헤빈 양씨(惠嬪 楊氏)'에게 핏덩이를 맡겼다. 혜빈은 단종을 친자식처럼 보살폈고, 단종 또한 항상혜빈의 품에서 잠들기를 청할 정도로 혜빈을 따랐다고 한다. 단종이 열두 살 되던 해에 문종(文宗)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눈을 감기 전 문종(文宗)은 혜빈(惠嬪)에게 어린 아들을 지켜줄 것을, 옥새(玉璽)를 뺏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혜빈은 끝끝내 그 약속을 지켰다.
혜빈 양씨(惠嬪 楊氏)는 원래 문종(文宗)의 유모(乳母)이었다가 세종의 마음에 들어 그의 후궁이 되었다, 세종이 죽은 직후 혜빈은 여러 후궁들과 함께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보통 비구니가 된 후궁들은 별궁(別宮)에 따로 거주하면서 왕실의 일에 관하여는 손을 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혜빈 양씨'는 문종(文宗)의 부탁으로 비구니가 된 이후에도 계속 단종의 주변에 머물면서 궁 안의 살림을 주도하였고, 단종이 폐위되는 그날까지 단종의 방패막이가 되었다.
혜빈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의 세력들을 계속 견제하였다.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친동생이었지만, 형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이 이처럼 가까워진 것은 단종을 지켜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한 것도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태종(太宗)의 후궁 '의빈 권씨 (懿嬪 權氏)'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헌왕후(昭獻王后)가 세상을 떠난 후 세종(世宗)으 의빈(懿嬪)에게 어린 금성대군을 맡겼는데, 이때부터 금성대군은 '의빈(懿嬪)'을 친어머니처럼 의지하며 성장하였다.
혜빈 양씨(惠嬪 楊氏)는 머리를 깎은 후 의빈궁(懿嬪宮)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태종(太宗)이 죽은 직후 비구니가 된 의빈(懿嬪)이 있었다. 의빈에게 문안인사를 올리기 위해 의빈궁을 찾던 금성대군(金城大君)은 혜빈과 자주 마주칠 수 밖에 없었고,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단종을 지킬 방안들을 강구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힘으로는 수양대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단종 1년인 1453년, 김종서(金宗瑞)를 숙청한 수양대군은 그날 밤 단종(端宗)의 처소를 습격하였다. 잠자던 단종이 깜짝 놀라 일어나며 ' 삼촌, 나를 살려주세요 '라고 하자, 수양대군은 대답하기를 '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신(臣)이 처리하겠습니다 ' 하고는, 곧 임금의 이름으로 여러 신하들을 소집하였다. 이어 원로대신 황보인, 조국관 등을 죽이고, 정분과 조수량 등은 귀양을 보내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를 계유정난(癸酉政難)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조정의 실권은 수양대군에게 넘어갔고, 단종(端宗)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앗다. 그럼에도 혜빈(惠嬪)은 끝까지 단종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수양대군과는 계속 대립각을 세웠다.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혜빈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2년이 지난 1455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은 '혜빈양씨(惠嬪 楊氏)'와 금성대군(金城大君)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단종에게 이들을 숙청할 것을 요구하였다.
수양대군의 위세(威勢)에 눌린 단종은 '혜빈 양씨'를 청풍(淸風)으로, 금성대군을 삭녕(朔寧)으로 귀앵보내라고 명했다. 단종의 자형인 영양위 정종(鄭悰) 또한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그날 단종(端宗)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일설에 의하면, 수양대군이 옥새(玉璽)를 거두려고 하자 '혜빈 양씨'가 막아서며 ' 옥쇄는 국왕의 중보(重寶)이다. 선왕의 유훈(遺訓)에, 세자와 세손(世孫)이 아니고는 전할 바가 아니라 ..했기에 비록 내가 죽더라도 내놓지 못한다..고 말하다가 귀양에 처해졌다고 한다.
혜빈을 유배 보낸 바로 그날,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양위를 했다는 사실은, 단종에게 마지막 남은 방패막이 혜빈과 금성대군이었음을, 그리고 이들마저 잃은 단종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청풍(淸風)으로 유배된 '혜빈'은 가산(家産)도 적몰되었고, 1455년 11월 9일 대신(大臣)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상소(上疏)에 따라서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
단종비 정순왕후 端宗妃 貞純王后
한 여인의 울음소리가 언덕을 휘감고 내려와 마을을 덮었다. 그 슬픔은 깊고도 묵직하였다. 일을 하던 마을 사람들도 함께 통곡하였다.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동정곡(同情哭)'은 여인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했던 민초(民草)들의 애틋한 마음이었다. 여인이 매일 올라 눈물 짓는 언덕배기는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렸다. 떠나간 남편이 머문 곳이 동쪽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여인은 단종비(端宗妃) 정순왕후(貞純王后) 송씨이었다.
그녀의 기구한 삶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서럽고 아픈 사연으로 점철되어 있다. 남편 단종(端宗)은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왕위를 숙부(叔父) 수양대군에게 넘겼으나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왕후(王后)이었던 그녀도 폐비(廢妃)되어 노산군(魯山君) 부인으로 전락하였고, 남편의 죽음 후에는 서인(庶人)의 신분으로 궁궐에서 쫒겨났다. 한 나라의 국모(國母)이었던 그녀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채 평민(平民)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때 그녀의 나이 불과 18세이었다.
과부(寡婦)가 된 정순왕후(貞純王后)는 빈털터리 신분으로 궁궐을 나와 동대문 밖 공터에 움막을 짓고 정업원(淨業院)일 이름 붙인 뒤 스님이 되어 여생을 살았다. 그녀는 한 평생 동망봉(東望峰)에 놀라 남편이 있던 영월(寧越)을 향해 눈물지었다고 한다.
정순왕후 '송씨'가 남편 단종(端宗)을 처음 만난 것은 1454년 1월 왕비 간택(간택)을 통해서이다. 송씨의 아버지 송현수(宋玹壽)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친구로, 직위가 높거나 이렇다 할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왕비(王妃)의 집안으로는 적격(適格)이었다. 당시 단조은 아버지 문종(文宗)의 삼년상(三年喪)을 우선 치르고자 하였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의 재촉에 못이겨 간택(揀擇)을 결정했다고 한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癸酉政難) 이후 스스로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궁궐 내에서 왕인 단종보다 더욱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왕위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수양대군으로서는 하루빨리 단종을 결혼시켜 상왕(上王)의 구색이라도 맞추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쨋든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조선 최초(最初)의 간택(揀擇)으로 왕비가 되었다. 간택(揀擇)은 일종의 경쟁이므로, 정순왕후의 행실이나 성품, 미모가 누구보다 뛰어났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정순왕후는 첫 간택(揀擇) 후 20일 만에 단종과 결혼하였다. 후대의 예를 보아도 대단히 빠른 속도이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15세, 단종은 14세이었다. 어린 부부는 얼굴도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맺어졌지만 마치 운명처럼 잘 맞았다. 때로는 친구처럼 또 남매처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였다. 왕권을 향한 외부적 압박이 사이를 더욱 공고하게 맺는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린 부부(夫婦)는 궁궐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제약이 많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야망에 늘 노심초사하였다. 수양대군은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며 어린 부부를 감시하고 간섭하려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사는 것이 아닐 정도로 압박을 가하고 두려움을 주었다. 단종(端宗)은 점점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어갔다. 왕(王)으로서 당당함도 이미 잃은 지 오래이다. 온갖 스트레스로 몸은 나날이 야위어만 갔다. 그러한 남편을 바라보는 정순왕후(정순왕후)의 심정은 오죽하였을까.
정순왕후는 수양대군에 대하여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언젠가는 모두가 수양대군의 손에 죽고말리라. 왕위를 찬탈하려는 수양대군의 탐욕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기 어려웠다. 정순왕후는 단종(端宗)을 설득하였다. ' 어차피 숙부의 목적이 왕이 되는 것이라면 굳이 왕위를 붙잡고 이렇게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숙부에게 양위하고 조용히 살아 갑시다. 원하는 것을 손에 쥐어주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는 않겠지요 ' . 단종은 고민했다. 아버지 문종(文宗)으로부터 이어받은 왕의 자리가 자신의 나약함을 흔들리고 있었다. 왕의 적통성(嫡統性)을 강조하는 충신들의 얼굴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권력욕이 강한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 왕실에 피바람이 불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혹여나 왕권강화에만 뜻을 두고 신하들의 고견을 듣지 않은 채 멋대로 국정을 운영한다면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단종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암암리에 단종을 옭죄어 오는 수양대군의 양위(讓位) 요구도 더 이상 거부하기 힘들 만큼 노골적으로 변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양위를 결정하였다. 1455년 7월, 왕이 된지 불과 3년만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윟고 상왕(上王)이 되었으며, 정순왕후는 살얼음 같았던 왕비(王妃) 자리를 놓고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이로써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숙부(叔父)도 어리고 나약한 부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었다.
단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2년 뒤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다. 단종복위운동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신하들이 명나라 사신을 초대한 연회 자리에서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계획하다 실패한 사건이다.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과 연루자 70여명이 모조리 처형당했으며, 상왕(上王) 단종도 이를 아로 있었다고 하여 상왕(上王)의 자리도 박탈한 채 영월(寧越)로 귀양보냈다.
이때 정순왕후도 노산군(魯山君) 부인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쫒겨났다. 이 사건으로 정순왕후의 친정아버지 송현수(宋玹壽)가 사형당하고 친정의 남자들이 모조리 죽었다. 남은 가족들은 관노비(官奴婢)가 되어 몰락하다시피 했다. 정순왕후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권력투쟁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고 싶었던 바람이 오히려 피바람을 몰고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족을 잃고 피맺힌가슴으로 귀양가는 남편을 배웅해야 하였다.
결혼한 지 4년도 채 되지 않았건만, 어린 부부에게는 냉혹한 이별의 시련이 닥쳤다. 다시 살아서 만날 수 있을지조차 기약할 수 없었다. 아무런 힘이 없었던 두 사람은 그저 신세를 한탄하며 서럽게 눈물지을 수 밖에 없었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이별(離別)의 인사를 나누었던 다리는 지금까지도 ' 영도교(永渡橋) '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아픈 사연을 전하고 있었다. ' 님이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 '라는 뜻에 맞게 정순왕후는 영도교(永渡橋)를 건너가는 남편을 떠나보낸 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영월(寧越)로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종은 결국 죽음을 맞는다. 후회와 한탄으로 스스로 목을 맺다고도 하고 세조(世祖)가 내려 보낸 사약(賜藥)을 마셨다고도, 형(刑)을 받아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왕명을 받은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가지고 단종을 찾아갔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엎드려 울던 중, 단종을 모시던 하인이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 나라의 왕으로 유례없을 비참하고도 가슴 미어지는 죽음인 셈이다.
단종의 죽음을 전해들은 정순왕후는 몇날며칠을 통곡했다. 그리고 한 평생을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눈물지으며 단종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죽은 뒤에도 60여년을 더 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피바람을 헤치고 홀로 살아남은 그녀에게 여생은 몹시도 고되고 서러운 세월이었다. 그러나 슬픔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오히려 슬픔이 채 사그라들기도 전, 혹독한 현실이 그녀를 찾아들었다. 한 순간도 걱정해 보지 않는 생계(生計)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정순왕후는 왕실(王室)의 도움을 모두 거부한 채 3명의 시녀(侍女)와 함께 정업원(淨業院)이라 이름지은 움막에서 풀뿌리를 먹으며 연명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일컬어 ' 정업원 주지 노산군 부인 (淨業院 住持 魯山君 婦人) '이라 불렀다는 점은 그녀가 출가(出家)하여 불제자(佛弟子)의 길을 걸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녀는 그곳에서 먼저 떠난 남편과 가족들의 명복(暝福)을 빌고 세상을 향한 원망과 설움을 추스리며 부처님에 의지해 삶을 이어갔을 터이다.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정업원터'가 지금까지 남아 전해온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靑龍寺)의 ' 정업원 구기 (淨業院 舊基) '가 바로 그것이다. 청룡사(靑龍寺)는 이곳에 단종비(端宗妃)의 사당을 모시고 매년 다례재(茶禮齋)를 봉행하며 그녀의 넋을 기리고 있다.
단종이 죽은 후 궁궐은 새로운 왕을 받아들였지만 민초(民草)들은 과거의 왕을 잊지 않았다. 그들에게 단종은 숙부에게 왕위를 뺏기고 죽임을 당한 더없이 불쌍하고 측은한 왕이었다. 옛 사람들의 구술(口述)을 기록한 '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당시 동대문 밖에 살던 여인들이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각종 채소(菜蔬)를 가지고 정업원(淨業院) 앞에 줄을 섰다고 한다. 궁(宮)에서 이를 금지해도 도움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아낙들은 오히려 금남(禁男)의 장소인 ' 여인시장(女人市場)'을 만들어, 채소를 파는 척 모여들어 정순왕후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전해지나. 숭신초등학교 앞에 지금도 남아있는 '여인시장터' 표식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순왕후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궁궐의 도우믈 일체 거절한 채 고고한 품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민초(民草)들에게 그녀는 여전히 국모(國母)이었다. 그녀를 향한 백성들의 존경심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만신창이가 된 그녀를 따스하게 품어주는 의지처가 되었을 것이다. 정순왕후도 민초(民草)들의 도움에 기대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염색(染色)을 하며 생업(生業)에 뛰어들었다.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인근 바위에 새져진 ' 자지동천 (紫芝洞泉) '이라는 글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동천(洞泉)이란 샘에서 자라는 '지초(芝草)'라는 풀로 염색(染色)을 하면 보라색으로 물드는데, 정순왕후와 시녀는 이를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生計)를 이어갔을 것이다.
경혜공주 敬惠公主
경혜공주(敬惠公主)는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장녀로, 단종의 누나이다. 공주(公主)의 어원(어원)은 본디 중국 황제의 딸을 혼인시킬 때 ' 삼공(三公...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이 주관(主管)하였기 때문에 생긴 용어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공주(公主)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 최고 권력자인 왕과 전국의 처녀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간택(揀擇)에서 최종 선택된 중전(中殿)의 딸이 조선의 공주(公主)이었다. 또한 후궁의 딸은 옹주(翁主)로 불렸으며, 공주(公主)와 더불어 품계(品階)를 초월한 존재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내명부(內命府)가 아닌 외명부(外命府)에 속하였다. 어려서 궁중에서 자란 뒤 궐 밖으로 시집가기 때문에 외명부에 속한 것이다.왕녀들은 혼인 후 시집살이를 하더라도 시부모(媤父母)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시부모와 왕녀의 자리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왕녀가 상석(上席)에 앉는것이 법도이었다. 왕녀는 요절(夭絶)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한 경우라도 부마(駙馬)는 법적으로 재혼(再婚)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시가(媤家)가 대역죄를 지어 몰락한 경우에도 왕녀의 신분은 보장되었었다.
이처럼 왕녀(王女)로서 평탄할 것만 같았던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삶은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鄭悰)을 능지처사(陵遲處死)시켰다. 그리고 이들의 운명을 따라 경혜공주도 순천부(順天府)의 관비(官妃)로 전락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고 극귀(極貴)의 신분에서 천민(賤民)으로 곤두박질한 것이다. 극도로 비참한 상황에서 경혜공주는 딸을 임신(姙娠) 중이었다.
그러나 관비(官妃)로 있는 동안에도 공주(公主) 특유의 기품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순천부사 '여자신(呂自新)이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자, '나는 왕의 딸이다.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官妃)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 '라고 호통을 쳐, 그 후 순천부사는 경혜공주에게 사역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세조(世祖)는 왕비 정희왕후(貞喜王后)의 충고를 받아들여 경혜공주(敬惠公主)를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세조(世祖)는 조카딸 경혜공주의 작위(爵位)를 되찾아 주었고, 아이들도 면천(免賤)되었다. 그녀의 딸은 요절(夭絶)하였지만, 아들 정미수(鄭眉壽)는 중종반정(中宗反政)에 공(功)을 세워 정국공신에 임명되었다. '정미수'는 죄인의 자식으로 관리가 되었다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정희왕후(貞喜王后)와 성종(成宗)의 비호 아래 연좌제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변(政變)에 희생된 비운(悲運)의 왕이라는 평가만이 남아 역사의 표면에서 사라졌으나, 단종(端宗)은 역사의 이면(裏面)에서 다시 부활하여 살아 숨쉬는 신령(神靈)으로 존재하고 있다. 단종의 유배지이자 또한 죽음의 장소이기도 한 영월(寧越) 일대의 지역민들은 단종을 마을신이나 무신(巫神으로 모시고 있다.
단종이 신령(神靈)으로 좌정하게 된 것은 그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에 토대하고 있다. 그는 왕(王)의 신분으로서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인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과 죽음을 함께 아파했던 당대(當代)의 사람들이나 후대(後代)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죽어지만 그의 억울하고 외로운 영혼은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활하였다. 생물학적으로는 소멸되었지만,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이다.
신령으로 살아 있는 단종
단종의 비극적인 삶은 양위(讓位)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일반 백성들이 그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아파하는 계기는 그의 유배(流配)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단종이 신격화(神格化)되는 것은 그의 유배(流配)길과 유배생활에서 잘 드러난다. 유배(流配) 자체가 신격화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나, 영월에서의 유배생활은 단종(端宗)과 지역민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기능하였고, 다른 지역보다 단종을 가까이에서 체험한 영월 지역민들에게 있어서 단종은 그들의 마음 속 깊이 간직될 수 있었다.
한양(漢陽)으로부터 영월(寧越)에 이르는 유배(流配)길에는 도처에 단종과 관련된 전설과 유적이 남아 있다. 비록 기록되지 않은 역사이지만 주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출발지인 서울의 광진구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화양정(華陽亭)에는 그가 유배길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전설이 깃든 수령(樹齡) 600년의 느티나무가 남아 있다. 이 나무를 필두로 영월에 이르기까지 곳곳에는 단종의 유배와 관련한 전설(傳說)과 지명(地名)이 전한다. 영월(寧越)에서의 유배생활 역시 백성들의 관심과 슬픔으로 이어진다. 첫 유배지인 청령포(淸玲浦)는 토사(土沙)가 퇴적되어 생긴 섬으로, 배를 이용해서만 왕래할 수 있는 매우 험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단종은 구들장도 없는 마루를 설치하고 그 위에 돗자리만 깐 투막집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홍수(洪水)로 피해를 보고 관풍헌(觀풍軒)으로 옮겨 갔다. 이 홍수(洪水)에 대해서는 단순한 집중 호우가 아니라 어떤 신의(神意)에 의한 것임을 시사하는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단종이 유배되자 그의 외조모인 화산(花山)부인 '최씨'가 무당(巫堂) '용안' 등을거느리고 영월애 내려와 단종을 위한 굿을 하였는데, 굿이 끝나는 날 큰 비가 와서 청룡포가 침수(沈水)되었으며, 그 결과 단종은 영월부중의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관풍헌에서는 비교적 편안하고 개방된 생활을 하였다.단종에게 과실을 바치라는 왕명이 떨어지자 실제로 추익한(秋益漢)이 머루를 진상(進上)하였다. 지역민들은 이미 폐위되었으나 군왕이었던 단종(端宗)을 지척에서 배알(拜謁)함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과 동정의 분위기가 자연스레 고조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본격적인 신격화(神格化) 단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단종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에 그를 신격화하는 신앙적 토대로 가능하였다.
단종이 신령(神靈)으로 승화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조정에서는 단종과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3개월 후인 1457년 10월 24일에 단종의 부음(訃音)이 전해진다. 단종이 자살(自殺)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사사(賜死)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단종에게 사사를 내리는 과정에서 사신(使臣)은 왕명(王命) 집행을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왕명 집행은 천리(天理)를 배반하는 행위이었다.
왕명(王命)과 천명(天命)사이에서 사신들은 갈등하였지만 이러한 사신들의 희생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기 위해 단종은 순순히 죽음을 택했다. 여기서 백성을 생각하는 성군(聖君) 단종의 모습과 폭군 세조(世祖)가 대비되면서, 그의 죽음은 한층 지역민들에게 아픔과 분노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강요된 죽음인 사사(賜死)와 함께 그의 시신(屍신)이 유기(遺棄)되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차원에서 충격적이었다. ' 숲 속에 버려진 후 한 달이 지나도 염습(殮襲)하는 사람이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다 ' 거나 ' 옥체(옥體)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옥(玉) 같은 열손가락이 수면(水面)에 떠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단종의 비참한 삶과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은 단종이 완전히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영혼(靈魂)은 신령(神靈)으로 승화되어 단종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처럼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를 신격화(神格化)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양위(讓位), 유배(流配), 강요된 죽음, 시신(屍身)의 방치 등은 단종이 죽었으되 온전히 죽지 못하는 요인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단종의 영혼(靈魂)이 원혼(寃魂)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단종은 신격호를 통하여 이승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사람들은 그를 신(神)으로 섬김으로써 그로부터 가호(加호)를 빌 수 있었다. 단종은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죽었던 단종이 죽음을 극복하고서 백마(白馬)를 타고 태백산신(太白山神)이 되기 위하여 태백산으로 갔다는 전설 등이다. 단종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제사를 받을 수 없었다. 가혹한 핍박 속에서도 단종은 비밀리에 서서히 제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가 죽은지 15년이 지난 성종(成宗) 3년인 1472년에 죽은 단종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단종을 부처와 동일시하여 그가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출생(出生)의 신비(神秘)가 강조됨으로써 자신들의 영웅(英雄)을 만들어 냈다. 평범하지 않은 그의 출생(出生) 자체가 단종을 비상한 인물 또는 부처와 견줄 만한 신적(神的) 존재로 믿게 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단종(端宗)은 구체적인 직능(職能)을 지닌 신령(神靈)으로 인식되었다. 남효온(南孝溫)의 ' 추강냉화(秋江冷話) '에는 ' 매양 밝은 새벽에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르 입고 걸상에 손수 앉아 있으면 보는 자가 일어나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내가 가물어 향(香)을 피워 빌면 비가 쏟아졌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단종이 기우(祈雨)에 효험을 나타내는 신령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농본국가(農本國家)인 조선에서 단종이 비를 매리는 신령으로 인지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매우 비중있는 신격(神格)으로 상승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17세기 중반에 들어와 재이(災異)를 소멸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국가 차원에서 단종을 제사지냈고, 민간에서도 단종을 본격적으로 신령(神靈)으로 모시기 시작하였다.
신격화 사례들
단종에 대한 신앙은 단종에 대한 공식적(公式的)인 사묘(祠廟) 건립과 무관하지 않다. 중종 11년인 1516년에 공식적인 제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월(寧越)에서는 상식을 벗어난 흉사(凶事)가 일어았다. 1541년에 영월에 부임한 군수가 7개월간 3명이나 사망하고, 전염병이 유난히 창궐하여 많은사람이 죽었다. 영월 지역 주민들은 이러한 흉사(凶事)의 원인이 모두 단종의 원혼이 빌미가 되었다고 믿었다.
영월 지역민들은 국가의 공식적인 치제(致祭 ..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지내던 일))에 만족하지 않고 일반 백성들과 종교적(宗敎的)으로 맺어지고 싶은 단종의 바람이 그러한 흉사(凶事)를 유발시켰다고 믿게 되었다. 그 결과 '성황사'의 후신인 영모전(永慕殿)이 건립되고, 단종은 지역신령(地域神靈)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단종은 영월 일대에서 오늘날까지 마을의 신령 또는 무신(巫神)으로 숭배되고 있다. 영월에는 ' 인간이 단종을 보살피지 않으면 도깨비가 보살핀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단종과 신적(神的)존재들의 관계가 밀접하다.
영월에서의 단종 숭배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사후(死後)에 태백산(太白山)의 산신(山神)이 되어 갔기에 태백산 일대에서 그를 ' 태백산신(太白山神) '으로 관념하는 것과 영월에서 태백산에 이르는 지역의 마을들에서 단종을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것이다. 태백산은 이 지역의 명산(名山)으로서 조선 전기부터 현재까지 영산(靈山)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영월에서 활동하는 강신무(降神巫)는 일 년에 수차례나 이 산에서 ' 산맞이'를 한다. 이곳에는 무당이 단종의 현몽(顯夢)을 받아 세웠다는 ' 단종대왕비각 (端宗大王碑閣) '이 있다.
단종(端宗)이 태백산신(太白山神)이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그곳에서 기도하는 무속인(巫俗人)들에게 재인식되고 있다. 영월에 거주하는 무당들은 단종을 '몸주'로 모시거나 굿을 할 때 단종을 주된 신으로 청배하는 일이 많다. 이들에게 있어 단종은 중요한 신령이어서 이들은 굿을 통하여 영월의 지역민들에게 단종에 대한 믿음을 확산시켜 간다. 단종을 모시는 마을은 태백산을 중심으로 영월군, 태백시, 봉화군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그 마을들에는 단종이 생존 시에 어떤 형태로든 마을과 연관을 맺었음을 강조한다. 단종이 마을에 들ㄹ 잠시 쉬었다거나 그가 띄운 연(鳶)이 마을에 닿았다거나 하는 등의 설화가 전해진다. 단종은 영월 지역에서 마을신, 무신(巫神)으로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관여한다. 영월지역민들은 혼인(婚姻)이나 회갑(回甲) 잔치를 치른 후에 '청령포'에 들러 단종유지비(端宗遺址碑) 앞에서 모든 일이 잘 치러졌음을 고한다. 이뿐 아니라 단종대왕이라 불러서 항상 경의(敬意)를 나타내는 생활습관도 있다. 이처럼 영월(寧越) 지역에서 단종은 신앙(信仰)생활뿐 아니라 의례(儀禮)생활에까지 깊이 괸여하는 살아있는 신령(神靈)으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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