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거리인 홍대 앞, 소박한 병원 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카페 겸 병원 제너럴 닥터.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는 햇살 가득한 창가 자리에 앉아 기분 좋게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이들 사이에 새로운 의료 환경을 모색하는 의사들이 있다. 그저 진료만 하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에게 좀더 친근하게 다가감으로써 1차 의료기관 부실의 공백을 메우고 환자가 기분 좋게 진료받을 수 있는 의료환경을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김승범(34), 정혜진(34) 원장. 제너럴 닥터에는 ‘그만 하면 됐어’대신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세상과 부딪쳐보려는 젊은 꿈이 빛나고 있었다. | |
제너럴 닥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김승범(이하 김): 원래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었어요. 2006년 의료기기 경진대회에서 수상한 것을 계기로 의료디자인 회사를 창업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행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제너럴 닥터를 시작하게 된 건 참 우연한 계기였지요. 신촌거리를 걷다가 문득 ‘카페들은 이렇게 많은데 정작 병원이 없구나!’하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아무리 젊은이들의 거리라고는 하지만, 젊은이들이라고 몸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닌데 말이에요. 젊은이들이 우리 의료계의 관심밖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 이런 의료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젊음의 거리인 홍대 앞에서 제너럴 닥터를 시작하게 됐죠.
정혜진(이하 정): 전공의 수련 3년차 때 처음으로 당직에서 풀려나 휴식을 맛보던 날, 제너럴 닥터 카페에서 친구와 만나게 되었어요. 당시 저는 제 나름대로 인턴, 레지던트라는 혹독한 과정을 즐기면서 ‘난 잘하고 있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처음 이곳에 방문하던 날, 김승범 선생님으로부터 “당신은 평생 의사로서 살아갈 텐데 과연 진료실 안에서 행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서 ‘지금까지 내가 왜 이렇게 살았나?’라는 회의를 갖게 되었어요. 제가 전공의가 되어 환자에게 완치의 기쁨을 안겨줄 수 있는 병원이란 대학병원 급의 극소수뿐이고, 정작 우리 주변의 환자들에게는 아플 때 곧바로 찾아가 치료받을 수 있는 1차 의료기관과 일반 의사가 절실한데 말이죠. 그로부터 일주일 후, 수련 받던 병원을 그만두고 제너럴 닥터에 합류했어요.
제너럴 닥터가 벌이고 있는 일들은……
김·정: 제너럴 닥터를 시작하기 전 초창기에는 진료와 관련된 총체적인 디자인을 전담하는 개인 디자인 사업자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의료디자인부터 바꿔 나가기 위해 진료실에서 사용하는 청진기 같은 도구들부터 디자인 해나갔는데, 도구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카페와 병원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병원을 시작하게 된 거지요. 이것만도 버거운 상황이지만 저희가 벌여놓은 일들이 더 많아요. 저희 생각에 관심을 갖는 분들을 위해 대외적인 발언을 하느라 초청 강연이나 방송 출연도 해야 했고, 책도 쓰고, 물론 디자인 작업도 계속 해오다 보니 2008년 법인을 창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의사 두 명, 간호사, 전문경영인, 프로그램 개발자, 디자이너 등이 모여 머릿속에서 구상하던 것들을 하나씩 펼쳐 나가고 있는 중이지요. 현재 운영 중인 홍대 앞 카페병원 옆에 조그맣게 테이크아웃 커피숍을 냈고, 각종 문화행사를 기획해내고 있구요. 곧 분당에 2호점도 오픈합니다.
제너럴 닥터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는……
김·정: ‘기분 좋은 병원’을 만드는 것이죠. 환자가 아파서 찾아가면 지루하게 기다리다 진료받고 주사 맞고 약을 받아 지친 채로 돌아오게 만드는 기존의 병원들이란 결코 기분 좋은 공간이 아니죠. 저희는 환자들이 아파서 병원에 갔지만 치료받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기분 좋은 상태로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그런 시도의 한 사례로 처방전을 들 수 있겠는데요. 보통 여느 병원의 처방전을 보면 약명이나 처방 방법 등이 적혀 있기는 하지만 마치 암호 같아서 환자의 입장에서 이게 어떤 약인지, 하루에 몇 번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제대로 알기 어렵죠. 저희 병원에서 발행하는 환자용 처방전에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물은 미지근하게 드세요’, ‘커피는 하루에 몇 잔 이하로 제한하세요’ 같은 생활처방들도 꼼꼼하게 적혀 있습니다. 의사의 입장에서가 아닌 환자 입장에서 쓰여진 처방전을 통해 환자들에게 잊혀지기 쉬운 내용들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이죠.
제너럴 닥터를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은……
김·정: 글쎄요. 크게 두 가지에요.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응원해주는 관점. 특히 초기에는 비판적 관점들이 많았어요. 카페 겸 병원이라는 시도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시선이 많았죠. 저희 동기들조차 ‘의사는 의사다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어요. 저희를 모르는 다른 의사들은 ‘돈 많은 자유인들 아니냐?’, ‘한때 저러다 말겠지 얼마나 가겠어?’라며 철없는 젊은이의 치기쯤으로 여기기도 했고요. 게다가 굳이 전공의가 필요하지 않은 동네의원조차 자신들이 일반의라는 사실을 감추는 게 일반화된 현실에서 저희가 일반의임을 밝히고 나서자, ‘기껏해야 일반의가 뭘 알겠어?’라며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문제시하는 시선도 있었지요. 보험진료로 하루 50~70명 이상을 받아야만 원장 월급은 챙기지 않더라도 그나마 병원문이라도 닫지 않고 운영해나갈 수 있는 개인병원들의 열악한 현실을 떠올려 본다면 이런 생각들도 결코 무리는 아니죠. 하지만 한편으로 “당신들이 살아남아야 우리 의료현실이 개선될 수 있다”며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셨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한결 같은 목소리로 밀고 나가자 단순한 재미나 낭만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우리 의료환경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을 믿어주셨죠. 이제는 더 많은 분들께서 응원해주고 계십니다. 저희와 합류하려는 의사들도 늘어나고 있구요.
힘들었던 순간들, 그래도 마음만은……
김·정: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재정적 어려움입니다. 꿈이 돈 때문에 발목을 붙잡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편견에 찬 시선과 달리 저희는 그리 부유한 환경도 아니었거든요. 장사하시는 분들이 “돈 버린 만큼 배운다”고 하시더니만, 의사이자 카페 사장 겸 사업가가 되다 보니 고생하면서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특히 카페의 경우 좋은 재료로 만든 메뉴를 적당한 가격에 제공하려 하자 마진이 남지 않았어요. 병원에서 운영하는 카페이니 몸에 좋은 것만 제공해야 한다는 건강 강박증은 가급적 지양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좋은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만은 강하거든요. 아침에 문 열면서부터 청소하고, 커피를 만들고, 설거지하고, 진료하고, 또 청소하고 마감할 때까지 온종일 쉴 겨를이 없다는 것도 정말 힘들었지요. 하지만 점점 나아져 가고 있습니다. 손익분기점을 넘어섰고, 4층까지 병원을 확장했지요. 카페도 매니저, 주방장, 아르바이트생들까지 전문 바리스타들로 꾸려져 손을 놓을 수 있었고요. 올해엔 처음으로 3박4일 휴가도 다녀왔는걸요. 지금은 천국 같아요.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거든……
정: 보장된 편한 길을 가지 않은 게 후회되지 않느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던 시절, 하루에 100명씩 환자를 진료해야 했어요.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도 환자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일이 거의 없는 사무적 상황에서도 제 신분을 보장해주는 의사 가운 속에 파묻혀 점점 무디어져 갔습니다. 지금은 의사 가운도 입지 않아 환자들로부터 “선생님”이 아니라 “여기요”, “언니”라고 불릴 때도 있지만 환자들을 진심으로 진료해주면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나 의사요” 할 필요가 없으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리 없지요.
88만원 세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김·정: 요즘 저희 카페를 찾는 직장인들로부터 “직장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우리가 직장에 다니는 이유는 물론 돈을 벌기 위함이지만, 직장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요? 연봉이 얼마인가 하는 것만 신경 쓸 게 아니라 ‘나는 지금 이 일을 재미있게 하는가? 이 일을 하면서 행복한가?’를 자신에게 되물어 보고,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는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일하는 동안 즐겁고, 일하면서 스스로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행복이 아닐까요? 특히 학교를 졸업하는 젊은 친구들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는 과정이 생략된 채 연봉을 따라 움직이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실패하면 어떡하지?’하고 시행착오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마세요. 저희도 많은 길을 돌아 이제야 제 자리를 찾았는데요.
그리고 계속되는 꿈들……
김·정: 저희의 꿈은 지구정복이에요(웃음). 목표가 너무 원대한가요? 하지만 “당신들이 이 세상의 의료현실을 바꾸려느냐?”고 물으시면 기꺼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걸요. 많은 이들이 우리 의료계의 문제가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 있다고들 하시지만, 목표치를 해치우듯 진료하는 우리 의료 현실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에 관계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나 했던가요? 그저 의사나 환자 상호간에 일방적인 대화만 있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저희의 계획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개선시키자’가 아닌,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자’입니다. 환자가 통증을 느낄 때 혼자 인터넷을 찾고, 어떤 병원에 가야 하나? 끙끙거리며 고민할 게 아니라, 1차 의료기관을 찾아 의사에게 가이드 받을 수 있도록 의료계의 공백을 메워나가고 싶은 거죠. 더 나아가 의사와 환자 사이에 재미있고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의료 플랫폼을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고 확장해 나갔으면 합니다. 우리 의료계의 커뮤니티 공백을 메움으로써 보람을 느끼고 환자들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진료 현실을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