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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lf von Harnack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
김 성 욱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교수)
초대교회는 사회, 문화 사상적으로 여러 가지의 문제에 당면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하나가 유대주의자들, 이방인들, 영지주의자들이 교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며 기독교적 복음의 진리들을 침범했다는 것이다.1) 이러한 예들을 우리는 고린도전후서나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입장들을 대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영지주의에 관한 언급들은 요한일서와 목회 서신 등에서 뚜렷이 보여주기 때문에, 그 영향이 기독교 내에 광범위하게 침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뿐 아니라 더나아가 초대 교회 교부들인 이그나시우스,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등도 영지주의의 이단성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그 지적하는 강도로 보아서도 영지주의의 영향이 교회 내에서 역시 심각하였음을 쉽게 짐작케 한다.2)
이 영지주의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규명하고 그 발전사들을 기록하고 있다. 현대 신학계에서는 특히, 불트만 학파와 신 불트만 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기독교와 영지 주의에 대한 설명으로 바벨론에서 일어난 여러 종교 사상이 혼합(syncreticism) 해 오던 중에 최후로 나타난 것을 영지주의로 이해한다.3) 따라서 이 혼합주의 운동은 기독교보다 훨씬 먼저 일어난 운동이었으므로 영지주의는 신약의 신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게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Alexander Böhlig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영지주의를 제2세기에 성행했던 각종 종교적 이론들을 총망라하는 것으로, 그 특징을 다름 아닌 혼합주의로 주장함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4) 그러나 이것에 관하여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만큼 그 사상체계가 단순한 것이 아니며 또 그 영역이 아주 광범위하여 때로는 모호하기도 하다. 게다가 영지주의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여러 영지주의 사상가에 따라서도 그 내용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 사상에 대해 전모를 파악해 낸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사실 초대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점하고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간략하게나마 요약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1세기 말부터 2세기에 걸쳐 지중해에 널리 퍼져 있었던 영지주의는 그 어근인 헬라어 “그노시스(γνωσις)” 곧 지식에서 온 말이다.5) 이들은 신비로운 지식을 강조하며, 또 그것을 통한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런 신학적 사조를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지적하자면, 영지주의의 공통적인 경향은 헬라의 철학과 동양의 세계관과 기독교 교리를 절충한 하나의 혼합적 종교 철학이라고 규정짓기도 하는데, 이는 영지주의자들이 주로 다루는 문제들이 우주의 기원, 죄의 문제, 죄악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영지주의를 특히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당시에 유행했던 신(新)플라톤주의를 바탕으로 기독교의 종교적 명제들을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제까지 많은 교회사가들이 영지주의에 대하여 연구하며 분석하고 기록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연구는 단순히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와 분석으로만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교회사 전체에 관한 인식에 있어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분야에 대한 대표적인 사가들이 많지만, 본 논고에서는 본인의 연구와 관련하여 Adolf von Harnack의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하르낙이 이 영지주의를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분석하고, 또 이러한 그의 연구가 교회사 전개나 교리사 서술에 있어서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6) 즉 영지주의에 대한 하르낙의 연구와 분석을 통하여 하르낙의 역사이해의 특정 구도를 밝혀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연구에 있어서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이 있다. George Tyrrell이 교회사 속에서 하르낙의 위치에 대하여 “하르낙이 19세기 동안 암흑한 카톨릭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살핀 그리스도교는 컴컴한 우물 밑에서 본 자유주의적인 프로테스탄트의 얼굴의 반영체일 뿐이다”7)라고 규정하듯이, 하르낙의 연구가 무시간적 상황에서 곧 백지 상태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앞선 세대 혹은 학자에 대한 영향이나 반발 혹은 자료에 대한 다른 이해 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도 함께 다루어야 그 전체적인 구도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1. Adolf von Harnack의 교리사 연구
하르낙(Harnack, Adolf Karl Gustav von, 1851.5.7~1930.6.10)은 그 당시 대표적인 경건한 루터파 신학자로 알려졌으며, Dolpat과 Erlangen에서 실천신학 조직신학 교수로 활동했던 Theodosius Harnack(1817-1889)의 아들로 1851년 러시아 에스토니아의 돌팟(Dolpat)에서 출생하였고, 많은 학문적 업적들을 남겼으며, 1930년 6월 10일 베를린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였다.8) 하르낙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돌팟과 에어랑엔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마침내 Leipzig대학에서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 논문 “Zur Quellenkritik der Geschichte des Gnostizismus”으로 22세의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874년에는 “De Apellis Gnosi monarchia”로 교수논문심사에 통과하였으며, 26세에는 교회사분야에 정식교수가 되었다. 그의 경력으로 보아 하르낙은 이미 영지주의에 관하여서는 당시에 뛰어난 학자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또 많은 이들도 하르낙을 당시에 교부(敎父)들에 관한 연구와 초대 교회의 문서 연구에서 권위있는 학자로 인정하였다. 1885년에는 하르낙의 많은 저서 중에서도 유명한 ‘교리사I’을 출판하였고, 1887년에는 교리사II를 출판하였다. 1888년에는 하르낙이 베를린대학에 교수로 청빙을 받았으나, 노회에서는 이 책에 표출된 그의 신학적 노선에 이의를 제기하여 베를린으로 옮기는 문제에 있어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럼에도 하르낙은 결국 베를린대학에 교회사 교수로 청빙받아 활동하게 되었고, 마침내 1890년에는 교리사III을 출판하여 그의 교리사를 전체적으로 완성하였다.9)
그리고 19-20세기 신학자들 중에서 하르낙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10)인데, 사실 이것은 1899/1900 겨울학기 베를린대학에서 행한 강의인데, 1900년에 책으로 출판되면서 온 유럽의 많은 방면으로 널리 퍼지게 되고 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하르낙은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 책은 20세기 개신교 신학에 있어서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11) 이 기독교의 본질도 하르낙의 역사이해와 그 해석의 기준을 잘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역사이해에 있어서도 제외될 수 없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 후에도 많은 활동을 통하여 1914년에는 귀족으로 승격되었으며(이름에 Von이 붙음), 그가 죽기 전까지 그의 교리사는 계속 증보되었으며, 하르낙이 죽은 이듬 해인 1931년에는 5판 각 3권이 출판되었다.12)
하르낙의 교리사가 가진 서술상의 특징적인 점이라고 한다면, “고대교회의 Dogma(교의)가 어떻게 발생하였가?”라는 주제에 관하여 하르낙은 자신의 교리사에서는 아주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다. Dogma 형성사 연구에 관한 하르낙의 주된 논지는 3세기에 이르러 교리의 형성에 있어서 완성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후로는 더 나아가 교의란 마침내 세 가지의 방향으로 나뉘어 발전해 나간 것으로 파악하였는데, 첫째는 동방의 정통교회로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때까지 교리가 발전하다가 그 다음은 기독교가 고착화되었는데, 이 교회의 생명은 종교적 의식에 있는 것이다. 둘째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언급한다. 이 교회에서는 희랍적인 교의가 어거스틴의 체계를 통하여 수정받기는 했으나 결국 교황의 권위에 예속되어 버린 것으로 평가한다. 셋째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경우라고 제시한다. 이들은 희랍적인 교의를 물려받았으나, 이런 교회의 교리들이 자신의 원리와는 모순되었기에 기독교의 교의는 언제든지 수정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특히 독일의 루터는 그들이 교리적 기독교(Das dogmatische Christentum)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결국 하르낙의 입장에서는 교의의 역사라는 종국적으로 교의의 소멸(als in die Auflösung des Dogmas mündend)로 끝나게 된다. 따라서 하르낙은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 있었던 신앙고백적 발전의 역사에 대하여 더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며, 또 그렇게 하고 있다.
하르낙의 교리사 연구에 관하여 분석하고자 할 때 먼저 간략하게나마 다루어야 할 학자가 있다. 그는 당시 튀빙엔학파의 대표적인 역사신학자로 알려진 F. C. Baur인데, 그의 역사 이해에 대한 분석들 중에 특히 영지주의에 대한 부분을 다룬다면 하르낙의 입장을 더 분명하게 비교하며 설명하여 있겠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비교분석을 통하여 하르낙의 역사이해에 대한 전체적인 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Ferdinand Christian Baur의 영지주의 이해
바우어(1792-1860)13)는 영지주의에 관한 입장을 자신의 교리사 강의 뿐만 아니라 조직신학을 통하여 정리하고 발표하였다14). 그러나 그의 강의와 논문들이 글로 출판되는 것은 후의 일인데, 예를 들자면 바우어의 교리사에 관한 업적 중에 대표적인 것은 1858년에 나온 Lehrbuch der christlichen Dogmengeschichte(기독교 교리사) 제2판15)이다. 그리고 바우어의 사후(死後)인 1865-67년에 그의 아들 F. F. Baur가 책임 편찬한 교리사 강의 (Vorlesungen über die Dogmengeschichte)을 지적할 수 있다.16)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바우어의 사상 분석 혹은 그의 역사이해에 있어서 그 권위와 무게를 더하는 것은 그의 유고인 교리사 강의를 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총 4권으로 된 것으로 바우어가 Tübingen대학에서 오랫 동안 강의한 것을 요약한 것이며, 특별히 이 책을 통하여 바우어의 신학적 입장이 어떻게 발전되어가는 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17) 바우어가 다룬 영지주의나 초대교회사에 대한 자료는 이런 교리사에 관한 것 외에도 조직신학적 주제들에 관하여 서술한 책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들도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18)
바우어의 신학사상은 헤겔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통상적인 이해이다. 바우어의 신학서술을 분석해보면 내용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인 경향에서도 헤겔적인 하나님 개념을 어려움 없이 발견하게 된다. 그 예로 “절대정신은 하나님 곧 절대적인 신으로, 그는 사고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중개하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이런 과정 자체이며 그 과정은 사고 안에서 스스로를 삶의 과정의 신으로 드러내는 정신의 본성이다. (Die absolute Idee ist Gott als der absolute, in dem Prozesse des Denkens sich mit sich selbst vermittelnde Geist. Das Christentum ist daher wesentlich dieser Prozess selbst, der im Denken als der Natur des Geistes, sich explizierende Lebensprozess Gottes....).”19)이라고 바우어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헤겔의 영향 곧 헤겔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바우어의 신학에도 유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증거이다.20)
바우어가 교리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주된 관심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의 과정의 진행 가운데에 있어서 스스로 변화하는가 아니면 혹은 언제나 동일하게 유지하시는가?’ 라는 의문을 스스로 제기해보면 자신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이다.21) 만약 하나님께서 스스로 변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의 과정을 포기하는 것이고, 또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항상 같은 형태로의 지속이라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과정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 있다. 바우어는 이러한 하나님의 변화와 지속의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헤겔의 삼위일체의 교리와 연결시키며 신학적인 설명을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통일성을 유지하시며, 인간은 이러한 신적인 계시를 신적인 지식으로 인식한다는 신학적 설명을 제시한다.22) 이와 맥락을 같이하여 신학함에 대하여 “기독교적 인식은 전적으로 주체 자신과 특정한 절대정신의 중재적 과정에 있어서 순전한 주체적인 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한마디로 단지 자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정신의 자율 곧 개념의 자활인 영원한 사고라는 것을 지적한다”23). 즉 바우어는 이성적 차원에서의 객관적인 역사이해 곧 철학적 이해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 스스로가 수차례에 걸쳐서 밝히고 있듯이, 역사적 현상들과 그 현상들 속에서 객관적으로 고찰하며 밝혀보고자 노력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신학 방법이다.24) 이런 방법론의 기저에 있는 것은 당연히 헤겔의 철학이었으며, 종교의 본질과 역사의 흐름, 신학적 분석과 이해에 사용된 기본적인 관점들과 방법론도 다름 아닌 헤겔의 사상체계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25) 그러면서 바우어의 역사 이해는 자신이 “내가 보기에는 철학 없는 역사란 벙어리이며 시체에 부과한 것 같다“26)라고 진술하였듯이 헤겔식의 철학에 입각한 역사이해이며, 이를 통하여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바우어는 이러한 철학적 경향과 진보사관이 맞물리면서 그 논리적으로 결과로 교회사를 설명한다. 즉 초대교회에서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이단적인 경향이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기독교가 철학과 통합되면서 더욱 심오하게 되었고 또 영지주의에 의하여 신학의 체계가 비로소 형성되었기에, 결국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27)
바우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교리적 입장을 교회사에도 적용한다. 그의 초대교회사 서술에서는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영지주의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된다고 보았으며, 특히 이런 사상이 영지주의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28) 더 구체적인 설명을 위하여 바우어는 삼위일체의 교리와 기독론을 다루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자신의 입장을 더욱 돈독히 하였던 것이다. 바우어는 덧붙여서 이러한 신개념이 특별히 발렌티안의 영지주의에서도 발견하고 있다고 분석하는데, 그 근거는 발렌티누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는 다름 아닌 절대정신의 역사라고 보기 때문이다.29)
게다가 바우어가 가진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에서도 그 유사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바우어의 견해에 따르면 영지주의의 사고체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인데,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30) 그리고 영지주의에서는 영적인 존재와 육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인정하면서, 영적인 존재의 정체성(Identität)을 절대 정신에 대한 인식에 두고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입장과 설명은 곧 영지주의와 헤겔의 종교철학과의 연계성에 대한 바우어의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31) 바우어의 사상에서는 헤겔의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초점의 하나인 하나님의 통일성 곧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신인식의 통합을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에서 널리 알려진 개념이라고 제시한다.32)
3. 바우어의 영지주의에 대한 평가
Baur가 평가하는 영지주의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는 그의 여러 작품들 가운데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초대교회에는 유대교적 기독교(Ebionismus)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바울적 기독교가 서로 상치하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즉 교회사에서 기독교의 시작을 밝히는 과정에서 바울 공동체와 이에 반하는 예루살렘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 두 기독교의 종합으로 생성되는 것이 바로 초기 카톨릭 교회라는 이론이다.33) 베드로적 유대 기독교와 바울적 이방 기독교사이의 통합으로 기독교가 더 높은 단계로의 발전을 이룬 것을 초대교회에서 특기할 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시작하는 싯점에 있어 서로 상치하고 있던 유대교적 기독교와 바울적 기독교가 더 높은 단계의 기독교로 통일로 발전을 이룬 것으로 설명하였다.34) 이 과정에 영지주의적인 경향을 띤 요한의 중재적 기독교의 역할을 강조한다.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정반합의 변증법적 통합을 이루어 발전을 이룩한 것을 영지주의로 설명하는 것이다. 결국 바우어가 제시하고 있는 초대교회사에서의 영지주의에 연구에는 헤겔의 발전사관이 전제되어있으며, 변증법이 내재된 역사이해인 것이다. 또한 바우어의 역사분석이나 이해는 헤겔과 같이 객관적인 것을 발견하려는 의도에서의 추구한 절대정신을 역사 속에서 발견하려는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우어가 이러한 신학적인 경향을 띠게 된 이유를 분석한다면 그의 신학적 입장이 더욱 분명해 질 것이다. 교리사의 과제와 방법론에 대하여 바우어는 교리사의 방법론이란 단지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것 자체(Die Methode der Dogmengeschichte kann daher nur die objektive der Sache selbst sein)라고 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35), 교리의 발전들 속에서 내재하는 객관적인 것을 찾아가는 것이며, 또 그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로 이런 방법론은 헤겔이 자신의 역사 이해가 객관적36)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여 바우어도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들 속에서의 그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교리를 연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이 아닌 정신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으로 간주한다.37)
바우어의 역사이해에 나타난 이런 특징은 그의 신학 활동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특히 그가 죽기 전 여러 해 동안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바우어의 이러한 역사적 관찰은 결국 역사적 현상에 대한 연구라기보다는 역사 내에 존재하는 객관적 존재 곧 절대정신에 대한 분석과 이해이기에 학자들로부터 관념적인 역사이해라는 평을 받게 된다. 바우어도 자신의 역사학 방법론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는데, 특히 삼위일체교리에 관한 연구의 서문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역사 내에서 역사의 관계성을 찾아가는 것으로, 역사연구 방법으로는 역사 속에서 개인의 역할에 강조를 하지 않고 짧게 취급하는 것이다.38)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역사이해에는 역사란 우연적인 것들의 연속이 아니라 전체가 서로 연결된 것이며, 언제나 그들 간의 특정한 연계성을 가지는데, 바로 이것들은 모두 이성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하고 또 찾아가는 것이라는 논리적 귀결로 이어진다. 달리 표현하지면 결국 역사서술에 있어서 이 방법의 사용함에는 절대정신에 대한 고찰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4. F. C. Baur에 대한 Harnack의 평가
하르낙은 자기가 죽기 일년 전에 Baur를 Wellhausen, Troeltsch, Schleiermacher, Ritschl, Leibniz와 같은 맥락의 신학에서의 천재 중의 하나로 인정하였다.39) 또한 초대교회사 연구에 있어서도 바우어의 역할을 부인하지 않았다.40) 그리고 특별히 다른 논문에서는 바우어의 삶과 학문적 업적을 높이 칭송하고 있다: “슐라이에르막허의 등장 이후 30년이 채 지니지 않아서 또 다른 하나의 개신교 신학자 등장하였는데, 그가 바로 Ferdinand Christian Baur이다. 그는 정신의 에너지로 기독교 역사에 헤겔의 놀라운 정신과 역사에 대한 고찰을 접목시킨 신학자이다. ... 바우어는 지난 세기 동안의 독일의 유일한 역사가로서 Ranke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41). 다시 말하여 하르낙은 바우어를 슐라이에르막허 이후의 등장한 천재적인 신학자 중의 하나이며, 또한 당대 최고의 역사가였던 랑케와 비교될 수 있는 역사가 곧 교회사가로 인정하고 있다. 하르낙이 Baur를 이렇게 평가한 근거에 관하여서는 하르낙의 교리사에서 잘 기술하고 있다: “신학 내에서는 헤겔의 위대한 제자인 F. C. Baur의 언제나 변함없는 업적이 항상 남아 있을 것이다. 바우어가 18세기의 비평적인 업적이 없이 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교리사 연구에 있어서 제일 먼저 통일적인 구성을 이루는 시도를 하였기 때문이다.”42) 하르낙은 바우어가 시도한 교리사 서술과 그 업적에 대하여서는 아낌없는 칭찬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하르낙은 동시에 바우어의 교리사 서술과 자신의 방법론 사이에 거리를 둔다.43) 이는 그가 바우어의 교리사 서술 방법에 있어서 분명한 잘못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44) 마치 바우어의 스승인 헤겔은 자신이 추구한 역사는 가장 객관적인 이해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지만, 이에 대하여 K. Löwith은 비판하기를 헤겔의 역사이해는 형이상학에 근거한 철학으로 처음부터 마지막 종착지점까지 우주적 역사의 진행에 하나의 운동에 대한 재구성이라고 지적하고 결론적으로 하나의 유사 신학적 구성(Hegels Philosophie der Geschichte eine pseudo-theologische Geschichtskonstruktion)이라고 규정하였다.45) 하르낙이 Löwith과 같이 바우어나 헤겔의 역사이해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하게 바우어의 역사이해와 서술에서는 초기 기독교의 발전과정을 너무나 엄격한 논리적 진행과정을 거친다는 것으로 하르낙은 평가한다. 그리고 하르낙이 헤겔의 철학을 하나의 사변적 실제주의라고 평가하듯이 바우어의 역사 이해에도 같은 판단을 적용하고 있다.46) 이는 하르낙의 신학이 기본적으로 그의 스승 리츨과 같은 노선인 반(反)형이상학적 (Antimetaphysiker)47)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5. 하르낙의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
하르낙은 초대교회를 서술함에 있어서 사도시대이후부터 약200년까지의 기간 중에 기독교가 경험했던 다양한 변화들을 언급하는데, 그 중의 최대의 사건으로 바로 희랍 사상의 유입과 복음이 희랍사상과 결합한 것을 지적한다.48) 그 과정에서 생생한 기독교의 본질이 변질되면서 교리로 발전하게 되, 이어서 나타나는 문제점들로 율법화, 사제주의화를 언급한다. 희랍의 종교철학이 기독교에 유입되기 시작하면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중심으로 이르게 되고, 결국에는 기독교는 잘못된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49)
그러나 하르낙의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를 서술하기 이전에 먼저 하르낙의 스승인 리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는 하르낙이 자신의 교리사 연구에서도 밝혔듯이 그의 스승인 리츨의 영향이 교리사 전반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르낙이 자신의 교리사I을 Albrecht Ritschl에게 헌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을 당신의 손에 드리며 당신께 다시 한번 당신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에 대해 나의 마음의 감사를 표하지 않은 수 없습니다. 당신의 초대 기독교의 발생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비로소 제가 17년 전에 나의 신학적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현금의 이 책은 나의 오랜 연구의 결정체이며, 만약 당신의 기본적인 업적이 없었다면 쓰여질 수 없었으며 완성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 책을 기꺼이 받아주시고, 저자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십시오.......”50) 따라서 하르낙의 교리사에 대한 작업은 리츨신학의 입장과의 연계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비록 부분적으로 비교해 본다면 신학의 방법론을 기술한 리츨과 교리사의 방대한 분량을 서술한 하르낙이 세밀한 부분에서는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기본 노선은 하르낙 자신이 밝히듯이 분명한 것이다.51)
Ritschl은 그의 학문의 초기 단계에서는 신약신학자로서 튀빙엔 학파와의 연관성 곧 Baur의 영향권아래 있었으며, 튀빙엔 학파의 입장에 따라 1850년에는 초대교회에 관한 연구서로 “Entstehung der altkatholischen Kirche”52)란 책을 내어 봏았다. 그러나 7년 후에는 Ritschl이 자신의 입장을 크게 바꾸게 된다. 같은 제목 하에 출판되고 또 제2판이라고 하여 내용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것들이 있겠으나, 그 근본적인 입장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제2판의 서문에서 리츨이 스스로 밝히고 있고 있다. “내가 ‘Entstehung der altkatholischen Kirche’을 처음으로 공개하였을 때에, 나는 튀빙엔 학파의 입장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입장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며 원칙적인 문제와 전체적인 면에서 반대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일 판에 나타나는 인상은 새로운 판에서는 금방 이상하다고 느껴지나 부분적으로는 필연적인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이런 것에 대하여 이제는 설명하며 충분하게 하려고 노력한다.”53) 즉 리츨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제일 판에서는 튀빙엔학파나 바우어의 견해에 반대하고 싶었어도 그 만한 능력이 되지 않았으나, 학문적 축적이 자신에게 쌓여진 후에는 이제 어떤 점에서는 기존의 견해와는 달리 설명하며 또 더 자세하게 지적할 수 있으며 그 근거도 충분히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Baur나 튀빙엔 학파에 대한 Ritschl의 방법론적 이의 제기는 1860년에 더욱 분명해진다. 이 시기에는 튀빙엔 학파에 자체 내에서도 신학적 변동과 이 학파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이 오고가면서 바람이 그치지를 않았다.54) 특히 Baur가 1860년에 튀빙엔 학파란 제목으로 글을 발표하자, 리츨은 이에 대하여 “Über geschichtliche Methode in der Erforschung des Urchritentums”란 제목으로 그의 스승인 Baur의 입장과 방법론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표출하였고,55) 그 이듬해에는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을 “Die historische Kritik und das Wunder”란 제목으로 더욱 발전시켜나갔다.56)
튀빙엔학파 혹은 바우어의 입장과 리츨의 초대교회사 인식에 있어서 가장 두드려진 차이점 중의 하나는 영지주의에 관한 것이다. 리츨의 견해에 따르면 영지주의의 그 원래적인 기원은 유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리스적인 사고이다. 리츨은 영지주의의 입장이 그리이스 정신의 변형으로서 기독교를 하나의 교리 체계로 만들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그의 제자인 하르낙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교리나 변증가들 교부들의 노력들이 신약성경에서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도출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초대 교회 신학과 교리의 사고 구조, 진술 내용들은 당시의 철학에 의존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교리 형성 과정은 사변적 관심에서, 혹은 이단 방어에서 나온 것으로서 단순하고 순수한 복음을 역사 그물망 속에서 혼합되면서 그 본질과 멀어지게 했다는 것이다.57)
Baur는 이와 반대로 모든 역사현상들 속에서 객관적인 객체 곧 형이상학을 추구하면서 기독교역사의 발전단계에 있어서 더 낫고 진보적인 단계로의 발전이 이 영지주의를 통하여 이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의미를 더욱 분명하고 실제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예를 들자면, Baur에게 있어서 “사변(Spekulation)”이란 개념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반면에 신학에서 형이상학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리츨의 경우에는 사변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인 것이다. 리츨에 따르면 사변이나 형이상학은 결코 기독교 이해를 위한 학문적 방법이 될 수 없으며, 더욱이 기독교는 철학이나 사변적인 색채를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58)
하르낙이 영지주의에 관하여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자신이 전제한 방법론 혹은 역사이해의 한 틀로 인한 것이다. 그는 리츨의 입장을 자신이 기술하는 교리사의 근본적인 입장으로 Ritschl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교리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도 밝힌다.59) 한마디로 하르낙은 리츨의 입장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이다.60) 그래서 하르낙은 기독교의 본질을 밝히는 방법으로 변증적인 방법과 종교철학적인 설명을 거부하였다.61) 이런 까닭에 하르낙은 교리사에서 많은 기독교교부들의 역할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에는 변증법과 교리체계 그리고 철학이 숨어있거나 이런 것들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62) 정리해보면 바우어에게 있어서 변증이나 철학은 신학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지만, 하르낙은 이러한 것들이 분명하고 명쾌하며 간단한 복음63)을 너무나 복잡하고 혼잡하게 만드는 까닭에 신학에서 부정적인 요소, 곧 신학에서 제거되어야 할 요소로 여긴다. 이것을 하르낙은 복음에 대한 희랍정신의 혼합으로 정의하며 특별히 헬라화(Hellenisirung des Christenthums)된 것을 의미한다.64) 하르낙에게 있어 변증과 철학적 방법은 맑고 깨끗한 기독교 본질에 희랍정신이 가미되면서 혼탁하고 기독교를 고착화(Erstarrung)65)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인정된다.
6. 정리
바우어가 영지주의를 기독교 발전사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큰 공헌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하르낙은 생명력 있고 단순한 복음을 너무 교리적으로 그리고 복잡하게 만들어 그 생명력이 상실되어가며 복음의 본질이 흐려져가세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한다. 초대 교부들에게 있어서 예수와 그의 복음에 대한 설명을 위해 사용된 철학적 변증은 하르낙의 평가에 따르면 기독교의 신학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잘못된 길(Irrweg)로 인도한 것이다.66)
하르낙의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는 전체적으로 A. Ritschl의 영향에서 발전하고 전개한 것이다. 하르낙이 교리사의 서술에 있어서 언제나 제일 먼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교의(Dogma)의 발생에 관한 언급에는 언제나 교의란 기독교의 헬레니즘화의 산물이라는 전제를 분명히 밝힌다. 그가 세우고 있는 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교리의 구상과 형성은 복음의 토대 위에 그리이스 정신의 한 작업이다(”Das dogmatische Christentum (die Dogmen) ist in seiner Konzeption und seinem Ausbau e i n W e r k d e s g r i e c h i s c h e n G e i s t e s a u f d e m B o d e n d e s E v a n g e l i u m s“).67) 이 신학적 입장은 근본적으로 리츨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당시의 하르낙이 속한 루터파와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교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중심적 의미와 복음의 근본 진리가 그리이스 정신으로부터 온갖 공격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보존해 왔다는 것이 교리사를 서술하는 하르낙의 주된 입장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발전에 있어서 잘못된 길로 걷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복음에 대한 희랍정신의 혼합이기에, 교리사의 발전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로 여겼다.68) 이 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희랍정신을 신학 내에서 제거하며, 보다 실천적이고 단순한 기독교로 가야만 하기에 결국 하르낙에 의하면 교리사 연구는 도그마의 전개, 발전 과정을 서술, 비판하기 때문에 교회를 교리적 기독교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자신이 신학을 하는 이유에 관하여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69)
하르낙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R. Seeberg가 하르낙의 교리사에 대하여 그의 동료인 다음과 같이 평가 하였다: “다방면적인 역사적 관점, 의문을 제기하는 데 있어서의 통일성과 정력, 생생한 교리적 관심, 매혹적인 표현 방법 등은 이 저작이 교리사의 분야에 있어서 장차의 모든 노작에 대하여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확보하여 주었다.”70) 이는 하르낙이 펼친 교리사에 대한 연구가 자세하고 치밀한 분석과 광범위한 자료에 의한 것이기에 교리사 연구에 있어 이러한 칭송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르낙의 연구업적에 대하여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이것과 연관하여 그의 역사이해나 교리사 서술에 대하여 다른 평가를 내리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곧 하르낙의의 역사이해에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심에 대한 중요한 입장이 분명히 간과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어떤 면에서 자신의 전제에 입각하여 역사를 분석하고 평가하며 해석한다고도 할 수 있다.
Abstraction
Ein Jahr vor seinem Tod bezeichnet Harnack Baur als "genial", ein Urteil, in das er auch Wellhausen, Troeltsch, Schleiermacher, Ritschl und Leibniz einbezieht. Obwohl er sich auch in der Dogmengeschichte anerkennend über ihn äußert, steht sein Geschichtsverständnis doch im Gegensatz zu demjenigen Baurs.
Baur legt in seinem Werk aus dem Jahr 1835 'Die christliche Gnosis oder die christliche Religionsphilosophie in ihrer geschichtlichen Entwicklung' seine Ansicht über das frühe Christentum dar: Es stünden sich nämlich ein ursprüngliches Judenchristentum (Ebionismus) und ein gesetzesfreier Paulinismus gegenüber. Im Urchristentum bildete sich eine höhere Einheit von Heidentum und Judentum. Baur versteht das frühe Christentum unter dem Gesichtspunkt des Gegensatzes eines judenchristlichpetrinischen und eines heidenchristlichpaulinischen und deren Überwindung in einem johanneisch vermittelnden Christentum. Von der Vermittlung dieser beiden Gestalten sei die weitere Entwicklung des früheren Christentums geprägt.
Harnack würdigt Baur als Verfasser und Gestalter der Dogmengeschichte. Doch distanziert er sich gleichzeitig von ihm. Die Baur'sche Methode der Dogmengeschichtsschreibung habe den Fehler, daß sie nicht 'mit dem Ursprung des Christenthums selbst beginnt und angeblich streng logisch verlaufen ist.
Der Unterschied zwischen Baur und Harnack tritt deutlich im Verständnis der Rolle des Gnostizismus bei der Hellenisierung im frühen Christentum zutage. Harnack kommt zu einem gegenteiligen Ergebnis, obwohl er Baurs Ansicht zustimmt, daß der Gnostizismus auf dem Weg des Christentums eine Rolle spielt. Denn andererseits beurteilt er den Gnostizismus als einen Irrweg, weil er mit seinen Spekulationen mit dazu beigetragen habe, das Christentum zu entstellen. Hingegen urteilt Harnack, daß der Gnostizismus in der alten Kirche überwunden wurde. Daher versucht er im Christentum keine weiteren gnostischen Spuren zu entdecken, die in die Gegenwart führen. Hierin stehen die beiden Theologen einander schroff gegenüber; ihre Thesen widersprechen sich.
Nach Ritschls Ansicht enthält der Gnostizismus ursprünglich kein jüdisches, sondern ein griechisches Denken. Auch Harnack ist dieser Meinung. Beide sehen den Gnostizismus von griechischem Geiste durchwaltet, der das Christentum in ein System von Lehren verwandelt. Dagegen ging Baur zur besseren Erklärung des Gnostizismus und aller Geschichte von einer objektiven Metaphysik aus, die er von Hegel übernommen hat. Dementsprechend bedeutet für Baur das Wort 'Spekulation' nichts Negatives, während Harnack diese für das Einströmen des Griechentums und die Verunreinigung des Evangeliums verantwortlich macht. Da Harnack Hegels Geschichtsphilosophie als spekulativen Pragmatismus beurteilt, überträgt er diese Einschätzung auch auf Baurs Geschichtsverständnis.
Key Word: Haranck, Baur, Ritschl, Gnosis, Hellenisierung, Spek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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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vangelische Katholische Lexikon, Bd.1. p.1619-1622;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p.246; 기독교대백과사전 vol.11, 영지주의, 기독교교문사 1992, p.717-723.
4) Alexander Böhlig, Synkretismus, Gnosis, Manichiäismus in Koptische Kunst: Christentum am Nil (Essen: Villa Hügel, 1963), p.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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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Gütersloher 1999; Harnack, Die Entstehung der christlichen Theologie und des kirchlichen Dogmas, Gotha 1927;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Bd.1. p.243-309; Robert M. Grant, Gnosticism and Early Christianit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9, S.39-69.
7) George Tyrrell, Christianity at the Crossroads, London 1909, p.44.
8) 하르낙의 생애에 관한 책으로는 그의 딸인 Agnes von Zahn-Harnack가 쓴 Adolf von Harnack, Berlin 1951. 을 추천한다.
9)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Bd.1-3, Freiburg 1931. (하르낙의 이 책은 1885년부터 1931년까지 5판이 거듭되면서 꾸준히 증보되었다 따라서 하르낙의 역사이해와 분석의 변천을 보기 위하여서는 1-5판에 대한 비교분석역시 중요한 주제이지만, 본 논고에서는 자료의 취급과 관련하여 5판을 중심을 다루게 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연구해야 할 죄소한의 자료를 든다면 Das Wesen des Christentums와 Die Entstehung der christlichen Theologie und des kirchlichen Dogmas를 언급할 수 있겠다. Robert M. Grant, Gnosticism and Early Christianit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9, S.39-69.
10)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책임편찬 Trutz Rendtorff, Gütersloh 1999. 이 책은 하르낙의 강의 100년 기념으로 나온 것으로, 더 나아가 20세기와 21세기를 여는 그 시점에서 제시되고 있다고 한다. 기독교의 본질이 많은 판을 거듭하여 출판되었기 때문에 각 책들의 page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강의의 출처를 밝히는 것은 제1판을 기준으로 하는데, 이는 많은 후대의 판들에서도 1판과 page를 맞추려고 했으며, 만약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제1판의 page를 옆에 기록하고 있다.
11) John Macquarrie, 한숭홍 譯, 20세기 종교사상, 나눔사 1993, p.101-103; Geoffrey W. Bromiley, 서원모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p.488-496.
12) 하르낙의 작품에 대한 정리서로는 Smend의 책을 언급할 수 있다. F. Smend, Adolf von Harnack : Verzeichnis seiner Schriften bis 1930, Leipzig 1990.
13) H. Liebing, Ferdinand Christian Baurs Kritik an Schleiermachers Glaubenslehre, in: Zeitschrift für Theologie und Kirche (54) 1957. p.225-; P. Friedrich, Ferdinand Christian Baur als Symboliker, Göttingen 1975, p.32-; 바우르와 후기 튀빙겐학파, 기독교대백과사전 Vol. 2, 기독교교문사 1992, p.1189-1193.
14) G. Frardrich, Ferdinand Christian Baur, der Begründer der Tübinger Schule als Theologe, Srtiftsteller und Charakter, Gotha 1909; K. Scholder, Ferdinand Christian Baur als Historiker, in: Evangelische Theologie (21) 1961.
15) F. C. Baur, Lehrbuch der christlichen Dogmengeschichte, Darmstadt, 1979. (1867년 Leipzig에서 발행된 세번째 판을 수정없이 그대로 편찬한 것인데, 이것도 1858년의 제2판을 수정하지 않는 것이다.)
16) F. C. Baur, Vorlesungen über die christliche Dogmengeschichte, Leipzig, 1865. 이 책에 대한 서평은 W. Möller에 의해 쓰여졌다. 다음의 글을 참조하면 여러 유익을 얻을 수 있다. W. Möller, Rezension, Baurs "Vorlesungen über die christliche Dogmengeschichte", in: Theologische Studien und Kritiken (41) 1868, p.183.
17) W. Geiger, Spekulation und Kritik, Die Geschichtstheologie Ferdinand Christian Baurs, München 1964.
18) F. C. Baur, Die christliche Gnosis oder die christliche Religionsphilosophie in ihrer geschichtlicen Entwicklung, Tübingen 1835; F. C. Baur,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Versöhnung in ihrer ihrer geschichtlicen Entwicklung von der ältesten Zeit bis auf die neueste, Tübingen 1838; F. C. Baur,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Dreieinigkeit und Menschwerdung Gottes in ihrer geschichtlicen Entwicklung I-III, Tübingen 1841-43.
19) Baur, Lehrbuch der christlichen Dogmengeschichte, p. 355. 참고 Baur의 교리사 강의 중에서도 위의 표현과 유사한 언급들을 어렵지 않게 지적할 수 있는데, 특히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언급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원한 진행 그 자체이며 동시에 절대정신이다(Gott ist wesentlich der ewige Prozess selbst, der absolute Geist), 그 분은 언제나 영원하시며 동시에 또 하나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존재로 알려지며 다른 존재로의 변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교 Baur, Vorlesungen über die christliche Dogmengeschichte IV, p. 469; Baur, Die christliche Gnosis oder die christliche Religionsphilosophie in ihrer geschichtlichen Entwicklung, p. 692-.
20) Baur, Vorlesungen über die christliche Dogmengeschichte IV, p. 534-; Baur, Die christliche Gnosis oder die christliche Religionsphilosophie in ihrer geschichtlichen Entwicklung, p.711-; Hegel, Religionsphilosophie, §§ 15, 43;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책임편찬 Georg Lasson, Leipzig 1920, § 163. Baur가 다루고 있는 초대교회사의 중요한 교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 “칭의론”과 “하나님의 인간되심에 관한 교리”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핵심에는 헤겔의 사상들과의 깊은 연관성을 보주고 있다. 비교 Baur, Vorlesungen über die christliche Dogmengeschichte IV, p. 534-; Baur, Die christliche Gnosis oder die christliche Religionsphilosophie in ihrer geschichtlichen Entwicklung, p. 711-.
21) Baur,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Dreieinigkeit und Menschwerdung Gottes in ihrer geschichtlicen Entwicklung III, p. 927.
22) E. Schmidt, Hegels Lehre von Gott, Eine kritische Darstellung, Gütersloh 1952, p.152-.
23) Ibid. “... das christliche Bewusstsein ist nur die subjektive Seite des im Prozesse der Vermittlung mit sich selbst zum subjektiven Bewusstsein sich bestimmenden absoluten Geistes. Das Christentum ist mit einem Worte nicht bloss Bewusstsein oder Gefühl, sondern Denken, der ewige Gedanke als die Selbstbestimmung des Geiste, die Selbstbewegung des Begriffs.” 비교. Baur, Vorlesungen über die christliche Dogmengeschichte IV, p.350.
24) 비교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 483.
25) P. Meinhold, Geschichtskritik und Kirchenerneuerung, in: Saeculum, 1958, p.37.
26) Baur, Symbolik und Mythologie I, p. XI. 비교 Lehrbuch der christlichen Dogmengeschichte, p.59.
27) Liebing, Ferdinand Christian Baurs Kritik an Schleiermachers Glaubenslehre, p.225-.
28) Baur, Lehrbuch der christlichen Dogmengeschichte, p. 100; Baur, Vorlesungen über die christliche Dogmengeschichte I, p.194. 바우어는 헤겔의 사고구조에 있어서 절대정신이 발렌티누스의 사고구조에 있어서 정신인 Uräon과 비교하여 볼 때 같은 의미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찾아보기: Baur, Die christliche Gnosis oder die christliche Religionsphilosophie in ihrer geschichtlichen Entwicklung, Tübingen 1835. p.672-.
29) James M. Ribinson, "Jesus: From Easter to Valentinus(or to the Apostles' Creed)," J B L 101/1 (1982) 5 - 37.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복음서 본문에서 노스틱 본문을 지적하기도 하며 또는 신약 문서가 노스틱 문서와 같은 종류(genre)이며 사상 면에서 공통점을 많이 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30) Baur, Die christliche Gnosis oder die christliche Religionsphilosophie in ihrer geschichtlichen Entwicklung, p.697-.
31) 비교. Ch. Taylor, Hegel, Frankfurt 1978, p.647-; E. Schmidt, Hegels Lehre von Gott, Eine kritische Darstellung, Gütersloh 1952, p.161-.
32) Baur, Die christliche Gnosis oder die christliche Religionsphilosophie in ihrer geschichtlichen Entwicklung, p. 705-. 비교 Hegel,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 책임편찬 Walter Jaeschke, Teil I Einleitung: Der Begriff der Religion, Hamburg 1983; Teil II Die bestimmte Religion 1985; Teil III Die vollendete Religion, 1984. Hegel은 종교 철학에 대한 강의를 세 번(1821, 1824, 1827년)에 걸쳐서 행하였지만 언제나 같은 제목이었다.
33) 교회사에서 기독교의 시작을 밝히는 과정에서 바울 공동체와 이에 반하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설정하며, 이 두 기독교의 종합으로 생성되는 것이 바로 초기 카톨릭 교회라는 입장이며,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고린도 교회 내의 분열(고전 1 : 11-12)을 제시한다. 비교: F. C. Baur, Die Christuspartei in der korinthischen Gemeinde, in: Tübinger Zeitschrift für Theologie, 1831, p. 84.
34) 비교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p.242.
35) Baur, Lehrbuch der christlichen Dogmengeschichte, p.9: “Die Methode der Dogmengeschichte kann daher nur die objektive der Sache selbst sein; man kann sich nur in den Entwicklungsgang, welchen das Dogma in seiner immanenten Bewegung genommen hat, hinstellen und demselben nachgehen, um, weil hier nichts bloss zufällig und willkürlich sit, das eine Moment immer wieder als die notwendige Vorrausetzung des andern und alle zusammen als die Einheit ihres Begriffs zu begreifen. Es ist also das Dogma selbst, das in diesem Prozess mit sich selbst begreiffen ist ... es ist dasselbe Wesen des Geistes, das diesen Prozess an sich selbst durchmacht.”
36)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Leipzig 1920. §§ 1483-484.
37) Baur,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Versöhnung in ihrer geschichtlicen Entwicklung von der älltesten Zeit bis auf die neueste, Tübingen, 1838. p.V. (서문). 여기에서도 비슷한 설명을 기록하고 있다.
38) Baur,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Dreieinigkeit und Menschwerdung Gottes in ihrer geschichtlicen Entwicklung, I. p. XIX- (서문).
39) Agnes von Zahn-Harnack, Adolf von Harnack, Berlin 1951, p.9.
40) Harnack, Ritschl, 1922 in: Reden und Aufsätze, p.330-333. 비교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p.98. 참고, 하르낙의 글을 모아놓은 Reden und Aufsätze는 1904-1951까지 총 10권이나 출판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연구를 위해서는 그 구체적인 년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41) Harnack, Die Bedeutung der theologischen Fakultäten, in: Reden und Aufsätze, p.204.
42)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I p.36.
43) 참고 Ernst Troeltsch, Adolf von. Harnack und Ferdinand Christian Baur, in: Festgabe von Fachgenossen und Freunden A. von Harnack zum siebzigsten Geburtstag, Tübingen 1921, p.282-291.
44)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I p.8.
45) K. Löwith, Von Hegel zum Nietzsche, Stuttgart 1958, p.239. 비교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Leipzig 1920. §§ 1483-484.
46)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p.11, 35-39.
47) A. Ritschl, Theologie und Metaphysik, p.40; E. Seeberg, Adolf von Harnack, p.17.
48)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p.119-122;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Bd.1. p.243-250.
49)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Bd.1. p.251-253;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p.119-131.
50) Agnes von Zahn-Harnack, Adolf von Harnack, p.98.
51) Haranck, Albrecht Ritschl, p.327-345.
52) A. Ritschl, Die Entstehung der altkatholischen Kirche, Bonn 1850. 리츨은 역사적 과정과 진행을 이해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통일성과 필연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밝힌다. (p.3-4).
53) A. Ritschl, Die Entstehung der altkatholischen Kirche, Bonn 1857. 제2판의 서문에서.
54) K. Hase, Die Tübinger Schule. Ein Sendschreiben an Herrn Dr. F. Ch. von Baur (1855). 이 글에 대한 Baur의 답변의 글인 F. Chr. Baur, An Herrn Dr. Karl Hase. Beantwortung des Sendschreibens die Tübinger Schule (1855); G. Uhlhorn, Die älteste Kirchengeschichte in der Darstellung der Tübinger Schule (1858); 그리고 Baur가 밝히고 있는 튀빙엔 학파의 신학적 입장 F. Chr. Baur, Die Tübinger Schule und ihre Stellung zur Gegenwart, 이 논문은 1860년에 더 증보되면서 새로이 제2판으로 출판되었다.
55) A. Ritschl, Über geschichtliche Methode in der Erforschung des Urchristentums (1861). in; Jahrbuch für deutsche Theologie, 1871, p.191-. Ritschl이 10년 후에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며 잡지에 다시금 발표하였다.
56) A. Ritschl, Die historische Kritik und das Wunder (1862).
57)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p.114.
58) A. Ritschl,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öhnung, Bd.III. Bonn 1883. p.14-25: A. Ritschl, Theologie und Metaphysik, 이 책의 주된 논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59)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I. p.3. 각주1, p.40. 각주1. 두 곳에서는 Ritschl의 글인 Über geschichtliche Methode in der Erforschung des Urchristentums (1861)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참고 E. P. Meijering, Theologische Urteile über die Dogmengeschichte. Ritschls Einfluss auf von Harnack, Leiden 1979.
60) M. Basse, Die dogmengeschichtlichen Konzeptionen Adolf von Harnacks und Reinhold Seebergs, Göttingen, 2001,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p.119-123.
61)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p.4-6.
62)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p.254.
63)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p.172: “Der Protestantismus rechnet darauf, daß das Evangelium etwas so Einfaches, Göttliches und darum wahrhaft Menschliches ist, daß es am sichersten erkannt wird, wenn man ihm Freiheit läßt, und daß es auch in den einzelnen Seelen wesentlich dieselben Erfahrungen und Überzeugungen schaffen wird.”
64)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I. p.250;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p.154. 비교 E. P. Meijring, Die Hellenisierung des Christentums im Urteil Adolf von Harnacks, Amsterdam/ Oxford/ New York 1985. 불트만의 입장은 하르낙의 견해와 다르다. 불트만은 영지주의를 이방 근동에서 침투된 이원적인 구속사상에 그 뿌리를 둔 것으로 규정하며 그 특성상 기독교와의 경쟁 또는 병행하였던 것으로 평가한다. 참고. R.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1965 Tübingen, p.111-112, 166-186.
65) Harnack, Das Wesen des Christentums, p.124.
66) 이 주제에 관하여 다음의 글을 추천한다. E. P. Meijering, Die Hellenisierung des Christentums im Urteil Adolf von Harnacks.
67) Harnack,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I. p.16.
68) 이 부분에 관한 글을 2004년 3월 27일 초대교회에서의 바울의 역할에 관한 하르낙의 입장과 그 비판에서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이 논문과 함께 읽으면 그 이해가 더욱 분명해지지라 본다.
69) Agnes von Zahn-Harnack, Adolf von Harnack, p.23: “네가 알 듯이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고 한다. 나는 네가 혹시 하는지 모르지만, 종교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경멸과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든지 물론 기독교가 잘못되었고 (es sei ein Irrtum) 그 기독교의 잘못된 역사를 연구(der Geschichte dieses Irrtums nachzugehen)하고 고 공부라는 것이 또 큰 인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자신의 친구에게 쓴 편지의 일부인데, 여기서 하르낙은 당시의 기독교가 잘못되었고 또 잘못된 길로 발전하였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학문적 연구와 훈련을 하려고 애쓴다. 이와 아울러 신학 혹은 기독교의 역사에 관한 하르낙의 기본적은 입장도 이러하였는데, 교리사가 완성되고 계속 증보를 할 동안 이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가진 기독교와 기독교 역사에 관한 기본 입장은 생애동안 지속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70) E. Seeberg, Gedächtnisrede - Adolf von Harnack, Tübingen 1930.
첫댓글 자유주의 신학을 완성한 아돌프 폰 하르낙을 비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역사신학자 중의 한 분이 김성욱 교수죠!
이글의 결론은 제가 볼때에는 이 글의 마지막에 있는 "곧 하르낙의의 역사이해에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심에 대한 중요한 입장이 분명히 간과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