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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 이와 같이 六識이 일어나면, 중생들은 이것이 十二入處에서 연기한 虛妄한 分別心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오히려 ‘몸 안에 있는 識이 눈을 통해 色을 보고,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識은 죽지 않고 다음 生을 받는 永遠한 存在라고 主張하기도 하고, 肉體가 죽으면 사라지는 一時的인 存在라고 主張하기도 합니다.
062. 『中阿含經』의 「次第經」을 보면, ‘차제(Sati)’라고 하는 비구는 우리 몸속에 있는 識이 변함이 없이 존재하면서 다음 生을 받는 ‘自我’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佛敎를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063. 사티(次第)가 불멸의 自我라고 생각한 識을 부처님께서는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해서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內入處를 緣으로 해서 생긴 것이므로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識은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發生하는 意識 現象이지, 눈, 귀, 코, 혀 등을 통해 外部의 事物을 認識하는 存在가 아니라는 게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064. 事物을 分別하는 意識은 우리의 몸속에 存在하는 어떤 實體가 아니라, 봄으로써 생기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각각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六識이라 합니다.
065. 衆生들은 이렇게 虛妄하게 生滅하는 無常한 것들을 마음에 모아 놓고 있으며, 이것을 마음에 모아 놓는 것이 欲貪입니다. 欲貪이 있을 때 十二入處가 集起하고,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생긴 虛妄한 識이 分別한 것들을 다시 欲貪이 取하여 ‘自我’와 ‘世界’를 꾸며냅니다. 따라서 欲貪에 따라 衆生들은 각기 다른 ‘자아’와 ‘세계’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欲貪에 의해 ‘자아’와 ‘세계’가 造作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自我가 世界에 태어나서 죽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066. 중국 선종의 제3조 승찬 선사는 信心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좋고 싫음의 分別과 執着을 놓으면, 모든 것은 본래 하나의 空으로 드러난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067. 六根은 삶에 依存하여 나타나는 認識 活動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十二入處가 滅한다고 해서 六根의 認識 活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면 보이고, 들으면 들리고, 생각하면 생각됩니다. 이러한 認識은 六識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十二入處를 滅하여 眞理를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깨달은 眞理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緣起法입니다.
068. 『雜阿含經』 296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걸 緣起法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이것을 緣起法이라고 한다. 無明을 緣하여 行이 있고, 行을 緣하여 識이 있다. 마침내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 덩어리가 集起한다. 어떤 것이 因緣에서 생긴 法인가? 無明, 行 등이다. 부처가 세상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이 法은 常住하며, 法은 法界에 머물고 있다. 如來는 그것을 스스로 깨달아 等正覺을 이루어 다른 사람을 위해 演說하고, 열어 보여서 나타나게 한다. 이 경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法은 常住하며, 法界에 머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法이 常住하고 있다는 事實과 法은 法界에 머물고 있다는 事實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認識, 다시 말해서 十二入處가 滅한 狀態에서의 六根에 의한 認識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法과 法界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069. 法은 緣起法, 즉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法則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緣起法으로 나타나는, 因緣에서 생긴 것을 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法은 두 가지 意味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연기법으로 생긴 ‘법’을 의미합니다.
070. 法이 常住한다는 것은 法이 항상 意, 즉 마음과의 因緣 속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人間 마음을 因緣으로 人間의 法이 생기고, 다른 중생에게는 다른 중생의 마음을 인연으로 다른 법이 생깁니다. 따라서 法은 因緣에 의해 항상 나타나지만, 그것이 實體로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法의 實相은 空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이렇게 空한 實相입니다. 이것이 十二入處가 滅한 狀態에서의 認識입니다.
071. 十二入處가 있으면, 緣起하는 法의 空한 實相을 모르고, 그것을 欲貪으로 취하여 여러 가지 虛妄한 分別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六識입니다. 六識은 緣起法의 眞理를 모르는 無明의 狀態에서 十二入處가 集起하여, 因緣 따라 나타나는 空한 法을 有無, 善惡, 愛憎, 苦樂으로 分別하는 分別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世界는 이렇게 虛妄한 分別心을 因緣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緣起한 法입니다.
072. 우리가 有無로 分別하여 보는 世界는 六識의 分別로 構成된 것이며, 그것을 實在하는 것으로 執着하는 것이 無明이다. 반면 分別에 執着하지 않는 智慧에서는 緣起하는 그대로의 法界가 드러난다. 이때 意와 法은 서로 依存하여 緣起하며, 個別的으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緣起法이라는 眞理의 次元에서 보면 法界이고, 因緣에 의해 나타난 現象으로 보면 意界와 法界이다. 모든 法은 이렇게 緣起하여 나타나며, 同時에 緣起라는 法則에 항상 머물러 있다. 이것이 常住法이다.
073. 十二入處에서 六識이 發生한 狀態를 부처님께서는 왜 十八界라고 하셨을까요? 十二入處는 欲貪으로 將次 ‘自我’와 ‘世界’로 取해질 虛妄한 마음입니다. 內六入處와 外六入處는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가운데 일어난 생각들이 사라지지 않고 欲貪에 묶여서 모여 있는 상태로서, 아직은 ‘自我’와 ‘世界’로 취해진 것이 아닙니다. 十二入處가 ‘自我’와 ‘世界’로 取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이 分別되어야 합니다. 識은 바로 이러한 十二入處를 分別하는 마음입니다. 十二入處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分別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六識이라고 하는 分別心이 생기면, 十二入처와 六識은 이 分別心, 즉 識에 의해 각기 다른 것으로 分別이 됩니다. 分別心이 十二入處와 새로 發生한 六識 사이에 境界線을 그어 18種類로 區分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六識의 發生으로 十二入處 狀態인 우리 마음이 18界域으로 區分된 狀態가 18界입니다.
074. 어떤 것에 觀心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欲求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欲求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떤 事物에 대하여 欲求를 지니고 있으면 그것을 보게 되고, 보게 되면 보는 나와 보이는 事物을 分別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다는 건 이러한 分別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分別心은 欲求로 생기며, 欲求로 事物을 볼 때 생기는 分別心이 六識입니다. 따라서 六識은 欲貪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각각 다른 六識으로 分別된 十八界도 각각 그 內容이 다릅니다.
075.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은 無常하게 생겨서, 생기면 남김없이 사라지는 虛妄한 것인데, 이것을 변함없이 存在하는 나의 눈과 꽃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이 모여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이 因緣 따라 나타나는 虛妄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생각이 모여 있기 때문에, 이들이 ‘同一한 것으로 存在한다’라고 생각하여, 自我와 世界로 分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世界와 自我를 分別하는 六識은 十二入處가 있을 때 나타납니다.
076.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은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이 虛妄하게 생겨서 虛妄하게 사라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에 의해 생긴 虛妄한 생각을 모아 놓고서, ‘보는 놈과 보이는 게 存在하고 있다’라고 생각하여 이들을 分別하는 것입니다. 自我와 世界를 分別하는 六識은 이렇게 十二入處를 바탕으로 생깁니다. 그리고 이런 分別心으로 인해서 生死의 괴로움이 생깁니다.
077.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六識이 發生하면, 우리의 마음은 새로운 意識 상태가 됩니다. 보는 눈(眼)과 보이는 색(色)과 그것을 인식하는 의식(眼識)이 分別되는 것입니다. 耳・鼻・舌・身・意도 마찬가지입니다.
078. 우리 마음이 十八界가 되면 十八界를 因緣으로 새로운 意識이 發生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觸이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觸은 六根과 六境의 空間的인 接觸으로 理解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觸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에 觸을 그런 뜻으로 理解한다면, 觸은 六根을 因緣으로 생긴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十二緣起에서 觸은 六入處를 因緣으로 생긴다고 하고 있으며, 觸에 대해서도 入處라고 부르는 걸 볼 때, 觸을 主觀과 客觀의 空間的인 接觸으로 解釋하는 것은 잘못임을 알 수 있습니다.
079. 부처님께서는 十八界를 緣하여 六觸이 생기고, 六觸을 緣하여 六受가 생기고, 六受를 緣하여 六愛가 생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界를 緣하여 觸이 생기는 것이지 觸을 緣하여 界가 생기지는 않고, 觸을 緣하여 受가 생기는 것이지 受를 緣하여 觸이 생기지는 않으며, 受를 緣하여 愛가 생기는 것이지 愛를 緣하여 受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080. 부처님은 眼界・色界・眼識界의 和合을 觸이라 합니다. 十八界를 緣하여 觸이 發生한다는 것은 이렇게 眼界・耳界・鼻界・舌界・身界・意界와 色界・聲界・香界・味界・觸界・法界 그리고 眼識界 乃至 意識界가 和合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十八界 각각의 根界・境界・識界가 緣하여 6種類의 觸이 發生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081. 十八界는 十二入處의 意識 狀態에서 六識이 發生함으로써 나타난 새로운 意識 상태입니다. 즉 六識이라는 分別心이 생김으로써, 十二入處와 六識이 다른 界域으로 分裂된 狀態의 意識이 十八界입니다. 이러한 十八界는 衆生에 따라 각기 다르고,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왜냐하면 界는 항상 衆生의 마음과 함께하고 和合하기 때문입니다.
082. 각기 다르게 느끼는 걸 受라 합니다. 그리고 이 受는 觸을 緣해서 생기며, 觸은 十八界를 緣하여 생깁니다. 따라서 十八界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즉 十八界는 그 內容이 저마다 다른 欲貪으로 각기 다르게 모아 놓은 十二入處라는 意識과 이것을 因緣으로 생긴 六識이므로, 欲貪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각기 다른 十八界가 和合한 觸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觸을 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受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083. 어떤 것을 좋게 느끼고 나쁘게 느끼는 原因은 각기 다른 欲貪에 의해 集起한 十二入處와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생긴 六識이라는 分別心에 의해 分裂된 十八界를 인연으로 생긴 觸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괴로움은 이러한 觸을 因緣으로 해서 생깁니다. 따라서 괴로움을 없애는 修行은 이 觸에서 이루어집니다.
084.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六識이 생기면, 이들은 각기 종류에 따라 界를 形成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이들이 種類에 따라 分類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이렇게 過去의 經驗을 통해 形成된 意識 內容들이 十八界로 分類되어 있습니다.
085. 十八界를 具體的으로 分析해 보면, 眼界, 耳界, 鼻界, 舌界, 身界, 意界는 ‘主觀界’이고 色界, 聲界, 香界, 味界, 觸界, 法界는 ‘對象界’이며 眼識界, 耳識界, 鼻識界, 舌識界, 身識界, 意識界는 ‘意識界’입니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보는 놈은 내부의 주관적 自我다”라는 생각이 모여 있는 게 眼界이고, “보이는 것은 외부의 對象이다”라는 생각이 모여 있는 게 色界이며,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등을 분별하여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 모여 있는 게 眼識界입니다. 耳・鼻・舌・身・意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식하는 것은 내부의 주관적 自我다”라는 생각이 모여 있는 것이 意界이고, “인식되는 것은 외부의 대상이다”라는 생각이 모여 있는 것이 法界이며, “사과, 배, 나무, 책상, 산, 강 등을 분별하여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 모여 있는 것이 意識界입니다. 이처럼 十八界 속에는 自身이 經驗한 것들이 種類別로 모여 있습니다.
086. ‘무엇이 있다’라는 意識이 생기는 것은 眼界・耳界・鼻界・舌界・身界・意界라 하는 ‘主觀界’와 色界・聲界・香界・味界・觸界・法界라고 하는 ‘對象界’와 眼識界, 耳識界, 鼻識界, 舌識界, 身識界, 意識界라 하는 ‘意識界’가 함께 모일 때, 즉 三事가 和合할 때입니다.
087. ‘무엇이 있다’라는 느낌은 반드시 이 세 가지가 한 자리에 만날 때, 즉 三事가 和合할 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觸이라고 부릅니다.
088. 부처님께서는 有・無 二見은 모두 觸을 취한 것이므로, 觸을 滅하면 ‘있다, 없다’라고 對立하는 無意味한 論爭이 사라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089. 入處는 우리가 없애야 할 虛妄한 意識 狀態를 뜻하며, 界가 성립하는 바탕이 되는 意識입니다. 十二入處는 十八界가 成立하는 바탕이 되는 虛妄한 意識이므로 ‘入處’라고 부릅니다.
090. 觸은 ‘무엇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있다’라고 하는 모든 것은 이 느낌에서 비롯됩니다.
출처 : 이중표 교수 지음.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첫댓글
오늘도
행복으로 가득 채우는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