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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김 영 현
카프칸가 하는 친구가 쓴 작품 중에 「변신(變身)」이라는 것이 있다. 썩 재미있다곤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기발한 내용이어서 읽은 지가 오래되었지만 내용의 토막토막이 내 기억의 갈피에 남아 있다. 내 기억력이 다소 흐린 점이 있더라도 용서해준다면, 아울러 억지로 그 내용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대충의 줄거리를 이야기해보겠다. 나의 기억력에 의존할 생각이 전혀 없는 독자라면 직접 그 책을 사 보셔도 좋겠다. 이야기인즉슨 이러하다. 한 사내가, 내 기억으로는 옷감 같은 걸 들고 다니는 세일즈맨으로 알고 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처구니없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벌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리가 여럿 달린 징그러운 생김새의 벌레다. 이 돌연한 사고로 인해, 사고라고 표현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온 집안이 떠들썩하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뚱뚱하고 눈물 많은 어머니, 그리고 귀엽고 착한 누이동생 등 식구들은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버린 그를 쫓아내어야 할지 가만두어야 할지의 판단도 잘 서지 않는다.
벌레로 변한 사내 자신이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는 한편 어처구니가 없고 한편 무섭기도 하거니와 스스로도 견딜 수 없는 징그러움을 느낀다. 그 모양으로는 외출은커녕 집안 구석에도 제대로 나돌아 다닐 수 없다. 그는 온종일 자기 방구석을 배로 슬슬기어 다니면서 자기에게 느닷없이 닥친 이 기괴한 불행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소용이 없다. 당연한 결과로 그는 깊은 실의와 절망에 빠진다.
집안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누이동생만이 벌레로 변해버린 자기 오빠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때가 되면 먹이(먹이라고 표현했다)를 갖다주지만 그것도 오래가리란 보장이 없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전달할 언어도 잃어버렸다. 말을 하려 하면 칙칙거리는 이상한 벌레 울음소리만 나는 것이었다.
흡사 우리나라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소가 된 게으름뱅이‘ 꼴이지만 소보다 백 배 천 배나 더 징그러운, 형편없는 다족류(多足類)의 벌레로 되어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입에서는 끊임없이 거무튀튀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발에서도 찐득찐득한 풀 같은 액체가 독한 냄새를 풍기며 흘러나온다.
결국 그 사내는 절망과 굶주림 속에서 죽어버리는데, 내 기억이 분명친 않으나 그 누이 되는 처녀가 죽은 벌레를 연탄집게(이 부분도 정확하지 않다) 같은 걸로 집어서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걸로 끝난다. 그러고 나서 그 집은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그냥 예전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카프카는 사족으로 달아두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렇게 간단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중간에 장황하게 떠벌려놓은 말들을 나는 반의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 소설을 번역한 친구(내가 읽은 책이 일어판에서 중역한 싸구려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가 책 뒤에 해설해놓은 것을 참고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친구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취약성 (脆弱性)’ 어쩌구 하여 더욱 난삽하게 설을 풀어놓은 통에 나는 더더욱 헷갈리고 말았다. 때로는 이해가 갈 것도 같은데 알고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한 사내가 눈을 떠보니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런 투로 시작되는 글은 신춘문예 같은 데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발상법의 하나가 아닌가. 말하자면 문학적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수작인데 알고 보면 유치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해놓고 보면 나같이 재능이 발바닥인 삼류 작가들도 그럭저럭 이야기 한 자루는 맞추어낼 수 있긴 할 것이다.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나는 주뼛하니 머리를 치켜 깎고 괭이눈을 하고 있는 프라하 출신의 이 카프카란 작자의 글을 그 외에도 몇 편 더 읽어보았는데 결론은 그 친구의 머리가 약간 돌았거나 내 머리가 아주 나쁘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카프카에 얽힌 재미있는, 그러나 퍽 화가 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그 이야긴 조금 있다 하기로 하고 먼저 나는 한 가지 고백부터 하여 야겠다.
뭐냐 하면 그 후 인생을 살아가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 자신이 정말 벌레처럼 취급당하는 경험을 몇 번 하였는데 그 경험의 끝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요즘에 와서 문득문득 나 자신이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버리는 듯한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나 외에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친구들의 고백에서도 자주 발견되었는데 나는 나보다 형편이 더 나쁜 친구도 몇몇 알고 있다. 어떤 친구는 불가불 정신병원의 신세까지 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자.
자신이 벌레로 변해버렸다는 느낌.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다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느낌은 아주 불쾌하지만 동시에 약간의 (이 표현의 뉘앙스를 이해해주기 ˙바란다) 편안함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아니다. 그 편안함은 어둠에 지나지 않는다. 알고 보면 정체가 불분명한 두려움이고 불안이라고 해야 옳겠다. 연이은 5년간을 감옥과 군대에서 보내고 돌아온 시점부터 발생한 이러한 증세에 대해 나는 사실 남모르는 고민을 많이 했다. 가만히 혼자 방 안에 앉아 있거나, 낯설고 어두운 거리를 걸어갈 때면 이 느낌은 영락없이 찾아와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마침내 나는 과학적인 철저성에 입각하여 나를 일단 정신장애 환자로 단정을 하고 스스로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를 하기로 결심을 했다. 이 기회에 분명히 말해두거니와 나는 유물론자이다. 이 말은 내가 불가지론자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밝혀두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에서 오랫동안 수용되어 있다가 살아 나와서 『생존을 위한 심리치료법』을 쓴 V. E. 플랑클 박사의 책을 구하여 보기도 했고 자동기술 방식으로 자신의 정신 상태를 기술해두었다가 원인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그렇게 치밀한 위인이 되지 못할뿐더러 한 가지 사실에 오랫동안 몰두할 수 있는 인내력이 결여된 사람이다. 더구나 엄청나게 빠르게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이 나의 연구자적 정력을 다 앗아가 버렸다. 결국 그냥 그때그때 지내면서 그런 증세가 조금씩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증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독 나한테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러한 증상은 그 후 사회적 분위기가 바뀜에 따라 조금씩 회복되기는 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연결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최루탄 가스의 어떤 성분이 일정한 효과를 가져다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역으로 밝혀보자면 벌레가 되어버리는 듯한 나의 고통스러운 증상은 사회적 분위기와 약간의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아니, 실제로 그럴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지루하게 다른 방향으로 나갔는데 나는 지금부터 이러한 관점에 서서 나의 증상에 관련된 과거의 몇 가지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한다. 예전에 나는 어떤 정신과 의사로부터 (그는 내 친구의 담당 의사였다) ‘말해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충고가 사실이라면 나는 적어도 이 불유쾌한 느낌, 혼자 어두운 방에 누워 있으면 영락없이 찾아드는 이 막연한 어둠의 기억으로부터 조금은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앞에서 운을 뗀 바 있는 카프카에 얽힌 한 가지의 에피소드만 언급하고 가자. 이 이야기는 본 내용과 전혀 관계없지만 생각나는 김에 말해버리는 것도 괜찮을 듯해서다. 바쁘신 독자라면 이 부분은 읽지 않고 넘어가도 좋겠다.
그 당시 나는 영등포구치소 영점칠 평의 독방에 갇혀 있었다. 대학졸업반이었던 나는 한 학기를 남겨두고 ‘시위 예비혐의’로 긴급조치 9호에 걸렸던 것이다. 참 재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저녁 점호가 끝난 구치소 안은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동안 바깥에서 사역을 하던 죄수들도 모두 입방(入房)하고 각 사동(舍棟) 입구에 있는 이중 철문마저 자물쇠로 채워지면 하루의 일과가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놈들은 벽에 새겨놓은 만년 달력의 날짜에다 성급하게 엑스표를 긋고 어떤 놈은 체력 관리를 위해 열심히 뜀박질을 하거나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어떤 놈은 불경이나 성경책 혹은 영어 문법책을 들고 시간을 쪼갠다. 그리고 어떤 놈은 이빨을 풀고 어떤 놈은 노래를 하기도 한다.
이 모든 소리들이 모여 나지막하게 웅웅거린다. 삼십 촉 전등 아래 앉아서 이 응웅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올라 제법 행복한 기분마저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소설책 같은 종류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청춘의 한순간도 소홀히 보내지 않기 위하여 독서에 전념하고 있었다. 천장만 높은, 좁고 긴 방이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하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봐, 재미있어?”
그때, 누군가 말을 붙여왔다. 지나치는 듯한, 그러나 분명히 경멸조의 어투가 담긴 목소리였다. 이 시간에 마주 이야기를 붙여올 사람이란 담당 교도관(그냥 담당이라 부른다)밖에 더 있겠는가. 나는 천천히 눈을 들어 시찰구* 쪽을 쳐다보았다. 황토색 페인트칠이 되어있는 철문의 윗부분 손수건만 한 크기로 뚫려 있는 시찰구에 안경을 쓴 사내의 얼굴이 하나 들어 있었다.
시찰구는 손가락 굵기의 쇠막대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내가 거꾸로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착각을 했다. 이를테면 벽에 걸려있는 사진과 같은 곳에.
사내는 새로 부임한 젊은 교도관이었다. 그가 관심을 보여온 이상 나도 그냥 있을 수 없어, “재미있다뇨? 빵살이*를 재미로 합니까?”
하고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서(규칙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와 가까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철문께로 다가갔다.
“얼마나 되었지?”
“육 개월요.”
“육 개월이라. 나 같으면 이 비좁은 방에 하루라도 있으라면 미치고 말 텐테.”
“습관이죠. 잊어버리고 지내면 그런대로 지낼 만합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담당 교도관은 나와 비슷한 이십 대 중반이었다. 그러나 그는 반말로 질문을 하는 입장이었고 나는 존댓말로 대답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고 노숙해 보였다.
“그렇게 태연한 척할 필욘 없어. 나는 죄수들이 태연한 척하는 꼴을 보면 비위가 콱 상해버린다구.”
“나는 죄수가 아닙니다.”
그의 빈정거림에 나는 기분이 상하여 항의하듯이 말했다.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제발 동정은 하지 마세요. 이유없이 동정을 받는 것만큼 싫은 건 없으니까요.”
“그러지.”
그는 의외로 순순히 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생각에 잠긴 옆모습을 보며 나는 이런 데서 일하기에는 그의 눈빛이 너무 섬세하다고 생각했다.
“학생인가?”
이윽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마치 형사와 같이 물었다.
“예.”
“물론 가족들도 있겠지?”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습니다. 여동생은 지난해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고 있어요. 예쁘다고 할 수 없지만 생각이 깊은 앤데 그걸 누가 알아주나요? 우리 읍에는 걔가 취직할 만한 마땅한 일자리도 없거든요.”
나는 가능한 한 친절하게, 빠른 어투로 나의 가족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가족 이야기만큼 인간 사이를 친밀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대방도 자연히 긴장을 풀고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경멸조의 어투를 버리지 않았다.
“자네 어머니는 자네의 이런 꼴을 보고 좋아하시겠지?”
그는 계속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어떤 어머니가 자식의 이런 꼴을 보고 좋아하시겠어요? 그저 이해해주시길 바랄 뿐이지요. 일전에 면회 올 때 보니까 무릎 신경통으로 무척 괴로워하시던 데……”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까닭 없이 가슴이 아파와서 내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 흐려졌다. 그러나 곧 활기찬 목소리로, “이런 경우 저런 경우 다 생각하면 누가 나서서 싸우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주름살이 파이면서 냉소 같은 게 번졌다.
“무책임한 놈이군. 너도.”
그는 분명히 경멸조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친밀함을 보이려 노력하던 나는 기분이 완전히 잡쳐버렸다. 나도 모르게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무책임한 놈이라니! 독재의 억센 발톱에 사로잡혀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양심수를 비록 존경은 해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토록 깔아뭉개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화난 눈으로 그를 한 번 쏘아보고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등을 돌리어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불쌍한 죄수들을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걸어오는 담당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말하는 것이었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우리 형이란 놈도 그랬어.”
그 말에 나는 다시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눈썹 사이의 자물쇠는 풀지 않았다.
“나에겐 형이 하나 있었어. 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자식이었지만 말이야. 나는 자신의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놈은 모두 우리 형과 같이 무책임한 놈들이라고 말해버리지. 기분이 나빴다면 이해해주게.”
나는 여전히 대꾸를 하지 않고 눈길을 비스듬히 벽 쪽으로 향함으로써 화난 표시를 하고 있었지만 귀로는 그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회칠을 한 벽에는 손이 닿는 높이까지 낙서가 긁혀져 있었다.
“우리 형도 예전에는 시골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지. 어릴 때부터 남달랐으니까, 우리 아버진 몇 마지기 안 되는 땅을 일구고 사는 농사꾼이었는데 형 편없는 술주정꾼이었어. 술만 마시지 않으면 여인네처럼 수줍음을 타는 양반이었지만 술만 마셨다 하면 낮도깨비로 변해버렸지.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형이나 나나 보이는 대로 아무것이나 잡고 두들겨 패고는 했는데 형과 나는 헛간에 숨어 있고는 했지. 닭의똥이나 오래된 먼지 냄새 같은 게 나는 헛간 말이야. 거기서 아버지의 화가, 아니 술이 깰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나는 그의 이야기에 어느새 빠져들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 화가 났었다는 것도 잊고 그의 단내가 나는 입 가까이 다정하게 귀를 기울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그런 어둠침침 한 헛간의 분위기가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런 우리 아버지가 술을 끊은 것은 순전히 바로 그 형 때문이었어. 가꾸지 않아도 곡식 알맹이는 곡식으로 자라듯이 형은 혼자서 공부를 잘했고 그래서 소위 도시의 일류라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지. 가정 형편은 여전히 어려워서 형이 도시로 나가 공부할 처지는 못 되었지만 우리 형은 워낙 공부를 잘했거든. 그때부터 아버지는 술을 끊었지. 그리고 죽어라고 일만 하시는 거야. 남의 일도 닥치는 대로 하셨지. 우리의 희망, 바로 형 때문이었어.”
그는 안경을 벗어서 닦았다. 검은 교도관의 모자와 검은 교두관의 옷을 벗은 그의 모습을 나는 나도 모르게 연상을 해보면서 어느새 그에게서 일종의 친근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우리의 기대대로 형은 일류 대학교에 진학을 했어. 그때 우리 집의 기쁨을 너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그 오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바로 눈앞에까지 온 것을 우린 느꼈지. 그때 나는 시골에서 겨우 농업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형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라 믿었기 때문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어. 아니, 우리 형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든든했는지 몰라. 형이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우리 살림은 더욱 쪼들렸고 자그만 땅붙이까지 팔아치워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그까짓 것쯤이야 우린 얼마든지 참을 준비가 되어 있었어.”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는 잠시 말을 끊고는 갑자기 화난 눈이 되어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무슨 잘못이나 저지른 놈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그 형이란 놈이 대학 3학년 때 덜컥 자살을 하고 만 거야.”
“자살을요?”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반문을 했다.
“그래, 자살이야. 아아 정말 나쁜 새끼였어. 어쩌자구 그렇게 어처구니 없이 죽어 버리는가 말이야.”
나는 놀라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깊게 한숨을 들이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왜요?”
나는 창살을 사이에 두고 그에게 바싹 얼굴을 붙이면서 성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 정말 잠꼬대 같은 유언이라 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어. 유서라고 써놓았었거든.”
“뭐라 썼던 데요?”
그는 나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말했다.
“카프카라고 있어? 독일 미치광이 소설가 말이야.”
“있어요.”
“그 자식이 대학에 가서 빠져버린 게 바로 그 카프카라는 거야. 정말 환장할 노릇이지. 그리고 그렇게 썼더군. 자기는 ‘갈 수 없는 성’으로 가야겠다고 말이야. 아아 정말 무책임한 놈이었어.”
나는 갑자기 머리가 뒤죽박죽되는 느낌이었다. 내용을 알 수 없는 증오감과 불행감이 가슴속에 불꽃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버지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 전보다 더 형편없이 말이야. 그리고 자기로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카프카란 놈이 어떤 놈인지 만나면 찢어 죽이겠노라고 절규를 하시는 거야, 그래서 아버지를 사람들은 뜻도 모르면서 카프카라고 불렀지. 한마디로 우리 집은 그 후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렸어, 결국 나도 보다시피 이렇게 인생의 반은 감옥살이를 하는 간수가 되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 맞추어 취침나팔이 불어왔다. 취침 준비에 구치소 안은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그제야 자기가 ‘도둑놈’(갇혀 있는 놈을 모두 그렇게 부른다)에게 지나치게 많은 자기 개인의 이야기를 했다고 느꼈던지 다시 엄숙한 표정으로 단언하듯이 말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순 없어. 너 같은 놈들은 모조리 무책임한 놈들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더 이상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훌쩍 가버렸다. 그가 가버린 시찰구는 다시 텅 비어버렸고 나는 복잡한 생각에 젖은 채 천천히 원래 자리로 돌아와 푸른색 이불을 깔고 취침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는데, 나는 마침내 부르주아적 감성의 반민 중성에 대하여 철저히 경멸을 표하기로 결심을 했다.
본 내용도 아닌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졌던 것 같다. 이 부분까지 읽어버린 독자들에게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하면서 이제 ‘종종 벌레가 되어버리는 느낌’의 증상에 결부된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자. 카프카의 평가에 대한 문제는 독자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책을 보고 좀더 신중하게 판단해주시면 고맙겠다.
육 개월가량의 독방 생활이 끝나갈 무렵에 나는 일심 재판을 받았다. 방청객이 철저히 통제된 텅텅 빈 재판정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 재판에서 나는 5년 구형에 2년을 선고받았다. 단지 시위를 예비 음모하였다는 죄명으로 말이다.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나의 법정 태도가 매우 건방져서 형이 더 무거워졌다는 말도 있었다.
어쨌든 항소를 하고 보았다. 그러고 나서 항소심 관할 재판소가 있는 서울구치소로 이감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는 무더위가 한참 몰려오던 참이었다.
서울구치소는 매우 시끄러웠다. 오래된 건물의 구석구석이 허물어지고 비둘기들이 곳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정치범들이 워낙 많은 터여서 우리 같은 피라미들에게까지 독방이 돌아오지 않아 다른 일반수들이 있는 방에 하나씩 끼여 살 수밖에 없었다.
오래간만에 사람 살을 맞대고 사는 맛에 기분이 들떴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비좁은 방에 여남은 명이 칼잠을 자자니, 그나마 무더위에 화딱지가 나는 판국에 정말 입 안에서 불을 토해낼 지경이었다. 자다가 눈을 떠보면 옆에 자는 친구의 냄새나는 입이 내 입과 꼭 맞닿아 있는 일도 있었다.
그 방에 키가 190 정도 되는 친구가 있었는데, 자기 말로는 특전사 상사 출신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경우는 사정이 더 딱한 게 마음대로 발을 쭉 뻗고 잘 수가 없어 아침마다 무릎이 저려온다고 신경짙을 부리는 것이었다.
책 공부 대신에 그들로부터 인생 공부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이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또다시 단식투쟁에 돌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78년 여름. 유신*의 짙은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때의 사정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알고 보면 매우 연약했던 독재자, 독재자란 대개가 다 연약하다, 박정희는 그 당시 불안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마누라마저 비명횡사해버리고 난 다음 그의 신경은 바늘 끝처럼 날카로워져 있었고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히는 일이 많아졌다. 어떤 때는 자기 자신조차 자신의 감정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다 사람들의 가슴에 누적된 불만들이 권력의 허술한 부분을 뚫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웠고 외로운 만큼 단순 포악해졌다. 그는 권력의 채찍을 함부로 휘둘러댔고 일체의 대화나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세계는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에는 반드시 황혼이 있는 법이다!
12월이면 그의 8대 대통령 임기가 끝난다. 아직 근 다섯 달이 남아있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라는 백 퍼센트 지지율을 자랑하는 집단에서 간단한 요식행위로 다음 임기를 연장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그는 어쩐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일찌감치 선거 아닌 선거를 치러버린 다음 좀 쉬고 싶었다. 그렇게 해두면 다소 시끄럽게 굴던 친구들도 체념을 하거나 타협을 해오거나 할 것이었다. 일제 때도 처음에 좀 시끄럽게 떠들던 패들이 세월이 길어지니까 모두 전향을 하고 협력 쪽으로 돌아서지 않았던가.
그래서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하여(의장이 바로 대통령 자신이니까) 조기 선거를 실시할 예정이었다.
우리는 그날을 D데이로 정해놓고 일제히 구호를 외치고 할 수 있는 저항의 형태를 다 하기로 한 다음 단식에 들어갔다. 서로 큰 소리로 통방*을 하여 이런 사실을 알렸기 때문에 구치소 당국도 당연히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소 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장마전선이 예전보다 빨리 형성되었는지 눅눅한 가랑비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날씨가 후더웠기 때문에 하릴없이 온종일 갇혀 있는 사내들은 괜히 짜증을 부리고 이유 없이 아무나 대고 화를 부렸다. 내가 들어가 있던 방의 방장(房長)인 최 사장이라 불리는 육십 대의 뚱뚱한 대머리 사내도 젖꼭지까지 러닝을 걷어 올리고 더러운 어항의 금붕어처럼 숨을 헉헉거리는 것이었다.
오래되고 볼품없는, 그러나 숱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서울구치소의 깃털이 더러운 비둘기들도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중의 어떤 놈은 죄수들의 손아귀에 잡혀 희롱을 당하다가 심심풀이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가능한 한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편안한 마음이란 극도로 단순한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심리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각종 불안한 상념들을 지우기 위해 나는 이를테면 지구의 종말 같은 걸 떠올렸다. 이 지구에 지금 느닷없이 종말이 온다면 나는 먼저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 먼저 감방 문을 부수고 필사적으로 일단 밖으로 나가본다? 아니야. 그런다 하더라도 어차피 지구는 종말일 테니까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최후의 순간을 맞기 위해 정신통일을 한다? 마그마가 끓어오르고 불비가 퍼부을 테니 그 뜨거움을 어떻게 참는다?
단순한 정신 상태가 다시 복잡하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가만가만 노래를 불러보았다. 그리고 콘크리트의 완강한 벽 속에서 잠들어 있을 친구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들의 특징과 몸짓이 무성영화의 컷처럼 하나씩 지나갈 때마다 나는 반가움에 그냥 울음을 터뜨려버릴 것만 같았다.
길고 긴 밤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아침이 밝아왔다. 물빛으로 젖어 있는 아침은 밤새 내리던 가랑비가 내처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둑한 그림자를 띠고 있었다.
이빨을 닦으면서 뼁끼통(변소) 뒤 철창으로 보니 멀리 외곽의 흰 담장 아래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서 눈부신 푸른 몸으로 촐촐히 비를 맞고 있었다.
어느새 여기저기에서 구호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냥꾼은 각설이타령만 들어도 반갑다고 그 소리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전율이 느껴졌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이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그리 투쟁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다. 겁이 많고 조심스러울뿐더러 교활하기까지 하다. 언젠가 시위를 할 때도 누군가 내 손에 짱돌을 쥐어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끝내 던지지 못하고 쫓겨 다니다가 마침내 땀에 젖은 그 찡돌을 책상머리에다 곱게 모셔둔 일도 있었다. 생각하면 정말 창피한 일이었다.
방문 앞에는 언제 왔는지 두 명의 덩치 좋은 무술 교도관이 딱 버티고 서서 시찰구 너머로 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투지가 그들의 몸에서 그대로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불안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순식간에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나서고 할 계제가 아님을 일찌감치 눈치 채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외면을 하는 척 했다.
드디어 나는 철창을 잡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긴급조치 해제하라! 박정희는 물러가라!”
그 순간 나는 내 몸의 모든 세포가 활짝 열리는 것을 느꼈다. 기가 막힌 희열감이었다. 모든 세포의 솜털은 바늘처럼 솟아올랐고 알 수없는 감동에 닭살이 돋아 오르는 것이었다.
불안감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대신 거대한 해방감이 파도처럼, 불길처럼 몰려오는 것이었다.
“저 악랄한 유신 반동세력들은 또다시 민중을 기만하고, 사천만 동포의 가슴에 칼을 꽂았습니다. 여러분! 독재자 박정희를 처단하고 이 기만적인 대통령 선거를 단호히 거부합시다! 민주주의 만세! 독재정권 물러가라!”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 모자라 철문을 차댔다. 옆방 옆방으로 이어지는 그 소리들로 복도는 삽시간에 떠나갈 듯했다. 단단한 시멘트 벽에 부딪힌 구호소리들은 미처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해 왕왕 되울려왔다. 나는 그 순간 죽어버려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의 무게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투명한 존재로 변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뿐이었다. 방 앞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교도관들이 문을 따고 일시에 들이닥쳤다. 한 녀석이 악에 받친 얼굴로, 나는 그의 증오에 찬 눈초리를 분명히 보았다. 나의 명치께를 주먹으로 힘껏 질렀다. 일순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으로 앞으로 고꾸라지는데 억센 손아귀가 내 뒷덜미를 단단하게 낚아채는 것이었다. 소매가 짧은 푸른 수의가 위로 당겨 올라가자 배의 맨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단추가 하나 툭 뜯어져 나가 바닥에 굴러갔다.
그리고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녀석은 내 팔을 뒤로 꺾어서 들어 올렸다. 기가 막히도록 빠른 동작이었다.
그런 상태로 복도로 끌려 나왔다. 복도에 나오니 이 방 저 방에서 형편이 비슷하게 끌려 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서로의 얼굴을 보자 힘을 얻어서 우리는 다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도관들은 민첩한 솜씨로 입을 틀어막더니 얼굴에다 방성구(防聲具)를 채웠다. 방성구는 가죽으로 만든 일종의 마스크 같은 것인데 나무로 된 돌출부가 있어 그것이 입 안으로 쑥 들어와서 혀의 놀림을 완전히 차단해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입속에 숱하게 채워졌을, 더럽고 냄새나는 나무토막이 입 안으로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심한 구역질이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손을 뒤로 하여 수정(手錠) *이 채워졌다.
어느새 침이 앞섶에 누렇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로는 침을 목구멍 안으로 삼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들에게 끌려 긴 복도를 걸어 나갔다. 나는 도살장의 칼날로 끌려가는 소를 보지 못했지만 지금, 시찰구의 구멍으로 대가리를 들이박고 우리를 쳐다보는 다른 죄수들의 눈에는 아마 우리들이 그렇게 보이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들에게 보이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눈 속에 이글거리는 증오심을 담았다. 때로는 증오가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는 장맛비가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더운 살덩이에 닿는 빗방울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고 어쩌다 시선에 걸려드는 불행한 운명의 구치소 나무들만이 눈부신 초록의 잎새를 달고 서서 후줄근히 비를 맞고 있었다. 비둘기들은 보이지 않았다.
구치소 내의 구조를 잘 알지 못하는 나는 그게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곳곳에서 들려오는 구호소리가 가슴속에서 불안하게 되울릴 뿐이었다. 나는 어느새 다른 친구들과 고립되어 혼자 끌려가고 있었다. 침은 계속 흘러내렸다. 혀가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이빨로 나무토막을 꼭 깨물었다. 나무는 매우 단단하게 이빨과 부딪쳤다.
내가 끌려간 곳은 소위 ‘먹방’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은 사용하지 않고 오랫동안 비워둔 방이었는데 가끔 징벌을 받은 죄수들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문자 그대로 텅텅 비어 있는 그 방은 마루가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고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아 낮인데도 어두컴컴하였다. 영등포구치소의 독방처럼 천장은 높고, 마루는 길쭉하게 생긴 영점칠 평의 방이었다. 이를테면 마치 좁은 바위 틈 공간과 같이 생긴 방이다.
그들은 나를 거기에 처밀어 넣고는 문을 잠가버렸다.
혼자가 되자 낭패감과 절망감이 동시에 가슴을 서늘하게 덮어왔다. 나는 한쪽 벽에 등을 기대어 쭈그리고 앉았다.·그런 상태로 발을 쪽 뻗으면 반대편 벽에 발이 닿을 정도의 폭이었다. 어둡게 그림자가 진 벽에는 예외 없이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낸 낙서들이 상처처럼 박혀 있었다.
투쟁적인 친구들은 그런 상태로도 계속 떠들고 있었다. 방성구가 혀를 짓누르고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르는 소리는 모두 ‘우우’거리는 발음뿐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옛날 어린 시절 시골에서 여름밤에 들었던 늑대 울음소리를 기억해냈다. 심장을 누군가 손아귀로 꽉 쥐어짜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리였다.
인간의 비장한 가슴을 공명통으로 하여 울리는 그 소리는 각종의 감정들이 다 담겨 있어서 듣는 사람에 따라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이상한 추억을, 때로는 공포감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런 느낌은 아마 소리를 지르는 본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러나 그 소리도 줄어들어 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 그리고 곰팡이와 먼지 냄새 같은 게 나는 어두운 방. 그것은 어린 시절 자주 숨어 있던 헛간의 기억과 함께 이상하게 가슴을 텅텅 비우는 것이었다.
홍분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자 미칠 것만 같은 가려움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손이 뒤로 묶여 있기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나 한 듯이 보였다.
등줄기 어깻죽지 쪽이 가려운가 하면 배꼽 아래쪽 근처가 가렵고, 그런가 하면 날개 안쪽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가려운 것이었다.
특히 왼쪽 겨드랑이 아랫배에는 무슨 미세한 벌레가 기어가다가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팔을 비틀어 가려운 부위에 최대한 가까이 손을 가져가려 했지만 그런 노력을 할수록 손목은 더욱 끊어질 듯이 조였다. 아까 교도관이 수정을 채울 때 화가 잔뜩 나서 워낙 안쪽까지 단단히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이 벽의 튀어나온 모서리 부분에 가려운 부위를 대고 소처럼 비벼대었다.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이 온몸으로 번져갔다.
그러나 그것도 그럴 순간뿐이었다. 금방 또 다른 부위가 발작이나 일으킬 듯이 가려워오는 것이었다.
끝없는 가려움의 연속이었다. 나는 마침내 처음 자세대로 자리에 앉아 모든 가려움을 참아나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고는 이 비참하고 괴로운 상태를 견뎌나가기 위해 ‘형이상학 요법’을 시도했다. ‘형이상학 요법’이란 게 별다른 것은 아니고 일종의 관념 조작술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을 이중으로 분리시켜 묶여 있는 비참한 자신과 그것을 관찰하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해방되어 있는, 자유로운 자아를 하나 더 만들어버리는 방법이다.
나는 독방에 살면서 이 방법으로 약간의 효과를 보았다.
그래서 처음 독방에 들어온, 대부분 징벌을 목적으로 한 경우였는데, 일반수들에게도 나의 이 ‘형이상학 요법’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다.
유물론자이면서도 관념을 조작할 줄 아는 훈련이 되어 있는 나 같은 인간에게나 통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비좁은 식구통(밥 등 물품이 들락거리도록 되어 있는 철문 밑에 달린 작은 구멍)에 대가리를 내 빼고 발광적으로 소리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이었다. 자신이 영점칠 평의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미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내 친구 중에는 아직도 좁은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상태의 나에게는 ‘형이상학 요법’토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런 조작술이 오히려 나를 찐득한 늪같이 더욱 초라하고 비참한 기분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정말 낭패할 일이 하나 생겼다. 오줌보가 당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오줌보를 비워두었어야 했는데 흥분하느라고 잊어버렸던 것이다. 둥근 공 같은 게 아랫배에 묵직하게 자리 잡는 걸 그제야 깨닫고 나니 가려움증은 어느 정도 사라졌으나 대신 조바심이 밑바닥을 간질여대는 것이었다. 설마하니 손을 이렇게 뒤로 묶어둘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손이 뒤로 묶여 있으니 수의(囚衣) 바지 앞에 달린 끈을 풀 수가 없어 꼼짝없이 그대로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려움증처럼 참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고무풍선 하나가 떠올랐다. 고무풍선 속에는 뜨뜻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물은 점점 불어났고 고무풍선은 점점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 압력은 고통스럽게 배를 불렸다.
모든 생각이 아랫배로 쏠렸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뻣뻣한 게 쥐가 날 것만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로 철문을 쾅쾅 차대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더욱 땅겨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스치며 지나갔다.
조금 있다가, 둥근 원통형의 모자를 쓰고 ‘지도’라는 완장을 찬 사내가 ‘또 지랄을 떠는군’ 하는 표정으로 달려왔다. 못마땅함과 분노가 적당히 발린 얼굴 표정이었다. (‘지도’란 교도관의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기결수 중에서 차출된 죄수를 말한다.)
“뭐냐!”
그는 같은 도둑놈인 주제에 눈알을 부라리며 금방 욕이라도 퍼부을 듯한 기세로 말했다. 이빨 새가 훤한,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어떻게 보면 고지식해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나에게 하등 증오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나왔다.
나는 그의 눈을 똑똑히 보면서, 입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몸짓으로, 내가 지금 오줌이 마려워죽겠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리 영리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그는 나의 몸짓을 일종의 항의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얌전히 앉아 있으라구. 그렇게 설친다구 좋을 건 하나두 없어. 너희들 땜에 우리꺼정 곱징역 살게 된 걸 생각하면, 빌어먹을!”
그는 주먹으로 칠 듯한 몸짓을 하며 을렀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애원을 했다. 나는 그가 빨리 내 눈빛에서 항의가 아니라 애원의 빛을 발견해주기를 기대했다. 대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또 한 차례 지나갔다. 나는 나무막대에 차단된 혀를 간신히 비틀어 ‘오움’이라고 불명확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을 뱉어내는 데까지 성공을 했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드디어 사내는 나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오줌? 이봐 오줌을 누고 싶다는 말이야?”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사내의 대답을 기다리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의 푸르고 두툼한 입술을 쳐다보았다.
“안됐지만 어쩔 수 없어.”
이윽고 사내가 말했다.
“나한테는 그럴 권한이 없어. 열쇠도 없을뿐더러 절대로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이 있었거든.”
나는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의 표시를 눈으로 했다.
그는 고개를 몇 번 가로젓더니 마음 약해지기 전에 떠나야겠다는 듯이 황급히 복도 저쪽으로 가버렸다.
그의 뒤에다 대고 나는 다급하게 철문을 차대며 짐승 같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는 되돌아오지 않고 가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리 문을 차대도 누구 하나 얼굴을 내미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분노와 절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어두컴컴한 고요와 견고한 벽이 다시 나를 에워싸고 나의 복잡한 감정을 차갑게 되받았다. 나는 원래의 자리로 천천히 돌아와 처음의 자세대로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드디어 요도를 꽉 잠그고 있는 의지력을 풀어버렸다. 고무풍선을 팽팽하게 부풀어 올리고 있던 물이 황급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뜨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오줌은 곧 척척하게 푸른 수의의 바지를 적시고 사타구니를 타고 엉덩이께로 하여 바닥으로 흘러갔다. 그런 상태로 한참 동안 오줌을 누었다.
오줌보가 비는 만큼 고통도 사라지고 일종의 쾌감이 부르르 떨리며 지나갔지만 태신 비참해짙 대로 비참해진 기분이 되었다. 그때의 내 기분을 백 분의 일쯤이라도 이해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바지를 입은 채로 오줌을 싸보면 될 것이다. 나는 그 후에 어떤 곳에서 심문관의 지시에 따라 옷을 발가벗겨져 본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의 기분과 비슷하였으리라 기억 된다.
그 순간 나는 많은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면회실에 들어와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늙으신 어머니, 주민등록증을 챙겨 오지 못해서 그냥 시골길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며 눈물을 글썽이던 어머니. 좁은 어깨 너머로 내리던 하얀 눈송이들. 읍내 구멍가게에 쭈그리고 앉아서 남의 말에 벌떡벌떡 놀라실 어머니를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여동생의 모습도 떠올랐다. 요즈음 면회는 주로 그 애가 오고 있었다. 갓난애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오빠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애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시골 사진관의 진열대 위에 놓인 낡은 사진처럼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마지막 검거될 때 미처 인사도 하지 못했다. 면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여동생 편으로 가끔 소식은 들었다. 그녀는 책갈피에다 교도관의 검열에 걸리지 않도록 깨알 같은 글씨로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하고 적어놓았었다.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생각했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린 것 같았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한 고통이 되었다. 입에선 끊임없이 개처럼 질질 흘려대고 있는 침. 질퍽하게 오줌을 싸놓은 옷. 손을 뒤로 묶여 팔이 없는 사람의 꼴을 하고 있는 지금의 형상이 그들을 놀라게 하고 미치게 하고 말 것이었다. 나는 끝없이 작아지고 싶었다. 이를테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먼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싶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보니 철창 밖으로 여전히 가랑비가 곧은 직선을 그리며 축축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놀랍게도 내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가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 손목을 죄는 수정의 고통도 이젠 더 이상 그렇게 혹독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고 있는 방성구도 이젠 더 이상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이 마치 여름날 나뭇잎에서 흔히 발견되는 나방의 애벌레처럼 물렁물렁해진 것을 알았다. 다리나 팔 대신에 빨판 같은 게 끝에 붙어 있는 여러 개의 발이 몸통에 달려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내 몸을 완전히 관찰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머리만은 마음껏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한 마리의 완전한 그리고 다소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버린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매우 비참하고 괴로운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이상한 위안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억지로 모가지를 비틀어 여기저기로 돌려보기도 하고 몸통을 움직여보고자 노력도 했다. 둔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내 몸은 내 의지력에 따라 움직여주었다. 단지 입에서 여전히 더러운 침 같은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이 기분 나빴지만 벌레라면 흔히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의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나의 의식은 여전히 벌레로 변해버린 내 몸통의 눈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는 벌레의 눈을 통하여 마치 열쇠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듯 자신을 완전히 숨긴 채 세상을 내다보고 있는 셈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볼 수가 없다. 이보다 더 안전하고 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찐득찐득한 발을 부지런히 놀려 뼁끼통 뒤 철창문이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 시원한 비바람을 좀 느껴보기 위해서 였다.
철창 밖에는 가는 빗줄기에 젖은 팽나무 잎사귀와 물기에 젖은 잿빛 하늘이 보였다. 그 모든 것이 꿈처럼 아득한 그리움에 젖어 있었는데 세상이란 보기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어두컴컴한 헛간과 그때의 금빛 깃털을 한 닭 새끼들을 선명하게 기억해내었다. 그리고 내 품에서 꺼내어져 비둘기처럼 솟아오르던 수많은 삐라와, 태극기를 꺼내 들고 ‘독재 타도’를 외치던 친구의 결연한 얼굴과 비좁은 산동네 자취방도 빠짐없이 기억해내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밖을 구경하다가 몸이 오슬오슬하니 떨려왔기 때문에 나는 다시 몸통을 틀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이럴 경우, 열심히 운동을 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바닥과 벽과 천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 일은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한 바퀴 돌고 내려왔을 땐 온몸이 흠뻑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바닥에 뺨을 붙인 채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왔다. 나는 마치 길고 깊은 시간의 한가운데 혼자 버려져 있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 상태로 잠이 들었는데 자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끈끈한 눈물을 흘렸다. 얼굴이 하얗고 마음씨가 곱던 내 애인의 얼굴이 저 멀리 아지랑이처럼 잠시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예감이 가슴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이제 나는 이 길고 괴로운, 한편으로는 심리주의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의 끝을 맺어야겠다.(나는 심리주의적 태도를 극도로 증오한다.)
‘말해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고 나에게 충고를 주었던 내 친구의 담당 의사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백 배나 천 배나 더 좋은 약이다’는 사실이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난 지금의 심정은 말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처음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나는 모든 결 차분히 그리고 세세하게 말해버리기로 작정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다.
벌레가 되어버린 제2, 제3의 경험을 이야기하기에는 나나 독자 여러분이나 대단히 불유쾌하고 짜증스러운 기분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안대의 텅텅 빈 강당 구석에 양손에 수갑이 채워져 팔걸이의자에 고정된 다음, 그때도 꼭 같은 가려움증으로 고생했다. 몇 밤을 하얀 벽만 보고 앉아 있던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또다시 벌레의 기억이 고통스럽게 떠오른다. 온몸에 피멍 꽃이 피어 신음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나 독자를 괴롭힐 권리가 없는 것 같다.
우리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각가지의 형태로 벌레가 되어버린 불유쾌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 이다.
내 친구의 담당 의사는, 그는 삼십 대 후반의 국립 정신병원 의사였는데 팔걸이가 떨어져 나간 낡은 연구실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증상을 두고 ‘2차대전 증후군’이라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이제 이야기의 끝을 맺으며 한 가지 사실만 더 사족으로 달아두고자 한다. 혹시 당신이 의사라면 이 사실을 꼭 알고 넘어가야 한다. 즉,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라는 인간은 퍽이나 단순하고 낙천적이며 때때로 경박하기까지 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나는 절대로 카프카의 변신에서 나오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사내’처럼 될 가능성이 없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밝혀두기 위해서 말해둔다.
지금 밖에는 때늦은 가을비가 추절거리며* 내리고 있다.
나는 불을 켜두지 않은 반지하의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 앉아서 이 글을 쓰면서 또다시 서서히 벌레로 변해가는 자신을 느끼고 있다.(나는 그 후 5년이 지나서야 옛 애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때는 너무나 낯설어 있었다.)
『창작과비평』 63호(1989년 봄);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실천문학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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