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했어요
이별은 가르쳐 준 적 없었는데
어쩜 그렇게 잘했어요
어쩌면 그렇게 잘 해낼 수 있었어요
보고만 있어도 뿌듯해서 눈물이 나네요
그 날
「용서하지 마세요.……사랑해요.」
그날 30대 그룹 중 12개 그룹에서는 하반기 대졸 신입사원채용 규모를 작년보다
늘리고, 필기시험 대부분을 폐지하는 한편, 적극성과 창의성에 역점을 둔 채용 방
법을 실시하겠다고, 끈질기고 엉뚱한 놈도 먹고 살 길이 열렸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최근 들어 TV CF에 외국 모델을 선호하는 회사들이 급증하고 있어 시
장 개방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모델들 등살에 우리 광고 모델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며 인간마저 외제를 선호하는 우리의 습성에 깊은 한숨을 쉬는 기사를
냈고, 한국경제 연구원 부설 자유기업센터 공병화 씨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비즈니스하기 좋은 나라라는 인식이 자리잡아야 한다며 비즈니스
하기 껄끄러운 우리 나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용서하지 마세요.……사랑해요.」
우리 나라 사람들 사망 원인을 2위인 뇌졸중의 발병률을 크게 낮추는 예방책으
로, 혈압을 낮추고 금연하면 된다는 의학계의 발표가 있었는데, 그럼 저혈압의 골
초는 어떻게 되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 기사의 사진에 실린 의사와 간호사, 환자
등 3명은 특정기사와 상관없다고 사진 밑에 쓰여져 있었는데 그 기사를 쓴 기자
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의심도 되었다.
게르마늄 첨가 홈세트 담아봐 가 파격적인 50% 할인과 함께 선착순 100명에게
는 특별 선물까지 증정한다며 특별 선물에 50%할인을 하고 팔아먹어도 남는 게
있다는 듯 선물 광고를 냈다.
「용서하지 마세요.……사랑해요.」
미국 프로농구(NBA) 피닉스 선즈의 포인트 가드 캐빈 존슨이 오는 5월 탈장수
술을 받게 돼, 시즌 초반 결장이 불가피해졌다. 존슨은 지난해 아랫배와 사타구니
부근에 지속적인 통증으로 23경기에 결장했었는데, 다음 시즌 그의 연봉 문제로
미국 프로농구(NBA) 피닉스 선즈 관계자들은 골치를 썩고 있고, 고대 유적지 트
로이는 신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곳이라며 트로이 고대 역사의 매력에 빠져버렸
다고 마누라나 새끼들도 그만큼 사랑해 줄지 모르지만 하여간 인류문화 연구회
탐방팀이 취재 소감을 발표했다.
「용서하지 마세요.……사랑해요.」
바둑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최병인 3단의 반란은 아쉽게도 실패로 돌아
갔다. 최 3단은 최종 결승국에서 이창호 7단에게 1백53수만에 백으로 불계패함으
로써 생애 첫 타이틀 획득에 그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난 것처럼 기사가 났고, 여
성들은 맑고 깨끗한 피부를 위해 독일의 다이문 화장품에서는 신상품 코스마를
개발했다며 신상품 코스마만 바르면 모든 피부가 엉덩이 피부처럼 뽀얘진다는 광
고를 냈다. 그리고 덧붙여 살아 있는 효모화장품은 지구상에 단 하나라며 강조하
고 나섰다.
그리고 그날 돼지띠 오늘의 운세는, 47년생, 59년생은 동서남북에 귀인이 따르고
하는 일마다 서광이 비치고, 35년생은 추진하던 일을 오늘 당장 그만두라고 나왔
다.
「용서하지 마세요.……사랑해요.」
이태원 고리 아줌마는 돈 쓸 일 계신 분들을 급히 찾고 계셨고, 현대 자동차에
서는 스쿠프를 새로 개발해 뉴 스쿠프 란 이름으로 판매에 나섰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그렇게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계란 후라이를 빠뜨
리고 배달된 김치찌개를 먹으며 계란 후라이를 빠뜨리고 배달된 김치찌개를 덮어
왔던 4년전 7월 1일자 중앙일보를 매우 신중히 읽어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날 영
원히 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
유통 기한
내 그리움에는
유통 기한이 없나 봅니다.
이 름
한 번 써봤어요
괜히 한 번
다른 얘기 끄적이다
……써지길래
이름 석 자 다른 낙서들 사이에
끄적여 놓아 봤어요
그랬더니
한 번 그래봤더니
누가 지어주었는지
어쩌면 그 얼굴과 그렇게 잘 어울리던지
이름만 보고도
내가 내 글씨로 내 연습장에 써본
그 이름만 보고도……
한 번 써봤어요
다른 얘기 끄적이다
이런 줄 알면서도
이렇게 입술 깨물 줄 알면서도
괜히 한 번
……써봤어요.
그 사람
그 사람 내가 갖기에 너무 귀하고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귀하게 느껴져 만날수록 나를 두렵게 만들던 사람이었습
니다. 그래서인지 생각해 보면 너무나 한참이 지나버린 일인데도 지금까지 잊지
도 그리워도 못하며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가끔 오늘처럼 많이 마시게 되는 날이면 찾아가 봐야지, 가다 죽어도 좋은 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 죽지 않을 만큼만 마시고 내 정신 떠나 찾아가 봐야지
하다가도 그 사람 위해 참아집니다. 내 정신이 아니더래도 참아집니다.
나는 그 사람 언제 한 번 꽉 안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꽉 안으면 부서져 버릴까
봐, 부서져 날라가 버릴까봐, 조심조심 감싸 안으며 힘 한 번 마음만큼 줘보지 못
했습니다.
너무 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주인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
사람 입술 깨물며 알아듣기도 힘든 발음으로 무언가 말하려 할 때 내가 그래줬습
니다.
버릴 땐, 꼭 버려야 할 땐 과감해지라고. 너를 위해 아무것도 못해 주는 놈, 한
번 잡아볼, 맞서 싸워볼 능력도 없는 놈 때문에 네 마음 너무 고생시키는 거 아
니라고. 그런 놈 따위 때문에 이렇게 입술까지 깨물며 가슴 칠 필요 없는 거라고.
그래 놓고 이럽니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내 맘 하나 몇 년째 추스리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지금쯤 아마 아이를 낳을 때가 지난 것도 같습니다.
한때 서로를 위해 죽어도 줄 수 있던 사람들이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소식조차
전해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얼핏 생각해 보면 예쁜 아이 한 명
쯤 생길 때도 됐지 싶습니다.
이제 누군가와 아침에 눈을 뜨는 일에도 익숙해져 있을 거고, 지난 세월의 흔적
도 어느 정도 잊혀져 그 나름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아이를 낳았다면 딸이었으면 좋겠는데, 절대로 내가 바라 볼 일이 아니라 무척
이나 쓰려오기는 하지만, 그 사람 꼭 닮은 딸 하나만 낳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
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그 사람의 표정, 눈빛, 냄새, 성격 꼭 빼다 박은 사랑스런
여자 아이. 그 재롱 단 십분이라도 내 무릎 위에서 지켜 봤으면 그 자리에서 죽
는다 해도 소원이 없겠지만, 내가 지금 죽어도 일어나 줄 것 같지 않은 일은 그
사람과의 그 일이 있은 후에 두 번 다시 바라는 습관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마시고 슬슬 일어나봐야겠습니다.
저 앞에 맥시칸 샐러드 집에서 간단하게 한 잔 더하고 가야 잠이 와질 것 같기에
더 취하기 전에 여기서는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그 집 샐러드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는데, 하긴 이제 저렇게 어두컴컴
한 곳에서 우리들의 상황과 내 취한 눈빛에 속이 상해 눈물 참아가며 으적으적
샐러드를 씹어 삼킬 일은 없어졌으니, 난 그 사람을 위해 한 가지는 해주고 사는
셈이 됐습니다.
참으로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일일 수밖에 없지만.
오늘 오랜만에 큰 돈을 써버려 맥시칸 샐러드 집에서는 외상을 좀 해야겠습니
다. 아까 낮에 백화점에서 목걸이를 하나 고른다는 것이 생전 그런 곳에 가보질
안아 너무나 비싼 것을 포장해 다음달 생활비까지 이미 다 써버리고 말아서 말입
니다.
오늘 스물다섯 개의 초를 한꺼번에 다 껐을지 모르겠습니다. 생일 케잌에 초를
한꺼번에 다 끄지 못하면 그해에 감기가 자주 찾아온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기억
이 나서 걱정이 됩니다. 하긴 누군가 함께 꺼줄 테니 한 번에 쉽게 끌 수 있겠군
요.
외상술은 너무 많이 마시면 안된다는데 간단하게 한 잔 하고 일어나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벙어리 편지 2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커피를 마셨고 담배를
태웠습니다. 당신이 직접 선곡해 녹음해 주신 (테이프 앞면에 좋은 글 많이 쓰라
고 당신이 예쁜 글로 적어까지 주신)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나
싶습니다. 물론 당신께는 미안합니다. 눈을 뜨면 냉수를 한 잔 마시고, 빈 속에는
커피와 담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매일 말씀하시는데, 당신이 걱정하시는 걸 알면
서도 눈을 뜨면 어느새 담배를 물고 커피를 따르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제 속도
많이 좋아졌고 잦던 헛구역질도 가끔씩만 괴롭힌답니다.
이게 다 당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내 몸을 위해 속상해 하는 것은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행복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과드려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는데, 왜 어느 해 겨울 함께 맞춰 입었던
앙고라 스웨터 기억하시지요. 당신은 진한 분홍, 나는 엷은 파란색. 당신은 제게
보라색이 어울리지만 보라색은 외롭다 하시며 엷은 파랑으로 골라 주셨지요.
그 소중한 스웨터가 글쎄 애기 조끼처럼 줄어들어지 뭡니까. 탈수를 시킨다는
것이 실수로 뜨거운 물을 틀어 세탁기에서 꺼내보니 그렇게 줄어들었답니다. 세
탁소에 부탁해 봤지만 앙고라 특성상 원래의 크기로는 늘어나지 않는답니다. 어
찌나 속상하던지 몇 날을 고민하다 그냥 벽에 걸어두었습니다.
그해 겨울 그 따뜻하고 포근했던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는 없지만, 그 느낌
이 그리워질 때마다 얼굴에 비벼도 보고 맨살에 안아도 보니 그런 대로 좀 나아
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조금 무성의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소원
하던 작업실을 가졌을 때, 내 정신 없고 조심성 없는 성격을 걱정하며 1년 동안
적어도 열쇠를 열두 번은 잃어버릴 거라 하더니, 이렇게 했는데도 설마 잃어버리
겠냐며 만들어주신 은팔지 열쇠고리도 목욕을 할 때마저 내 몸에 붙어 있는데,
많이는 하루에 대여섯 번까지 당신의 얼굴을 못 떠올리곤 합니다.
또 한 가지 먼지 쌓인 장미 다발. 셀 수 없이 많은 장미송이로 상반신을 가리면
서 작업실에 들어선 사랑스런 모습. 비록 지금은 너무 말라 건드리기만 해도 바
스러지지만 한동안은 그 장미향에 취해 눈을 뜨곤 했는데 방안 가득 그 향기가
없어졌다고 당신의 향기를 깜빡 잊고 살았습니다(언젠가 한 번 먼지를 닦아내려
다 바스러져 포기하기는 했지만).
참으로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절 감동시킨 일 중 가장 귀여웠던 순간이 언제인
지 아십니까? 아닙니다. 당신이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순간순간 감동 받으니 안아
주고 싶던 순간으로 정정하겠습니다.
밥을 먹을 때나 양치를 할 때,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담배를 입에 물
고 사는 절 걱정하시던 당신은 언제나, 그놈의 담배를 끊던지 날 끊던지 해. 하
며 이 세상 오직 당신만이 만들 수 있는 양미간을 찡그린 표정으로 투정하곤 했
었지요. 그러면 저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습니다.
한동안 지치셨는지 어느날 많이 낡고 오래 돼 보이는 지포라이터를 건넸습니다.
즉석 사진인 듯한 반 명함판 크기의 사진 속에 그 특유의 양미간을 찌푸린 사진
을 투명한 유리 테이프에 붙여 평생 이런 인상으로 사는 거 보고 싶으면 할아버
지께서 쓰시던 건데 잃어버리지 마. 하였습니다.
담배를 끊으라며 라이터 선물이라…….
당신은 그렇게도 참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엊그제 인세를 받아 관리비와 세금들을 지불하러 은행에 들렀습니다. 전화요금
고지서를 창구 안에 밀어 넣었는데 깔끔한 은행원 아가씨는 이번 달에도 한 통
화도 안 거셨네요. 미소 지으며 얘기했습니다. 남의 일에 참 관심이 많은 아가씨
라고 생각들었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언제나 미소 한 번 만들지 않고 영수증을 건네받을
뿐이니까. 이번 달이 당신 생일 달이기에 저금 대신 조금 큰 돈을 남겼습니다. 아
직 말을 놓지 못했던 시절, 얼핏 얘기하신 그 디자이너 숍을 찾아갔습니다. 세상
에, 그곳에는 마치 당신을 위해 디자인된 듯한 옷들이 온통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선물하실 건가요?
점원은 다가왔고, 저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애인 되실 분은 행복하시겠어요.
사이즈를 물은 다음 점원은 그렇게 말을 건네었고, 여자의 몸매는 애를 낳기 전
과 낳은 후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는 얘기를 기억해 내고 저는 머뭇했습니다. 몸
이 많이 불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당신은 평소에도 몸매 관리를 잘하셨으니 크
게 불어나진 않았을 거라 믿고, 예전 그 싸이즈를 써 주었습니다.
점원이 주차장까지 쇼핑백을 들어 주었고, 그 안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
운 당신의 이브닝 드레스가 들어 있었습니다. 몰론 당신이 입고 계셔야 그렇겠지
만 말입니다.
은팔찌를 차고 있는 왼손을 구부려 한 달 전처럼 작업실 문을 열었습니다.
이번 달에는 술을 좀 많이 사셨네요.
배달 소년은 라면과 술, 봉지 김치, 인스턴트 캔 등을 내려 놓으며, 죄송합니다.
부탁하신 아이리쉬 커피는 모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하며 돌아섰습니다. 당신
께서 향이 좋다고 하셔서 그 커피 외에는 입에 대지도 않게 됐지요. 아! 물론 고
맙다는 눈인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런 예절쯤은 몸에 배어 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참 볼수록 아름다운 드레스입니다. 작년에 사드렸던 잉크색 높은 굽 구두와 함
께 놓으니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집을 조금 늘려야 할까 봅니다. 당신이 입으실 옷들을 벽에 걸어두다 보니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내년에는 걸어둘 자리가 없을 것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
다. 조금 넉넉하게 띄엄띄엄 걸어놔야 보기도 좋을 것 같고. 그 동안 저축한 돈이
꽤 되니까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당신의 당부대로 저축을 습관화하니까 예전처
럼 금전적으로 큰 불편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까요. 당신은 소주를 못하시는 걸 알면서 깜박 하고
내 술만 사왔지 뭡니까. 할 수 없이 오늘도 예전처럼 그냥 한 잔 받아만 놓으시
고 보고만 계셔야겠습니다.
참, 그리고 모레 그 소년이 아이리쉬 커피를 가지고 오면 투명한 유리 테이프를
하나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야겠습니다. 소중하게 간직한다고 했는데도 5년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금이 가다니. 당신이 언제나 부주의하다고 걱정하실 만합니다.
테이프가 거의 끝나갑니다. 이 곡만 끝나면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답니
다.
들을수록 마음에 와닿는 곡들입니다. 마지막 곡이라 당신이 꽤 신경을 써 선곡
하신 것 같아요. 당신은 늘 시작부터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그러셨
잖아요. 들을 때마다 늘 가슴 한 곳에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가긴 했지마는. 하긴
매일 아침에 듣고 있으니 모레 아침에 일어나 들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투정부린다고 화장실을 안 갈 수는 없으니……, 참 이상도 하지. 왜 이 David
Lanz의 Cristofori's Dream 란 곡이 끝날 때쯤 되면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는지.
좀 진득하니 끝까지 듣지 못하고 이 곡만 끝나면 당신의 사랑스런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하긴 매일 아침 들려 주시니 오늘도 부담 없이 화장실에 다녀오겠습
니다. 빨리 다녀온다고 하는데도 와보면 테이프가 멈춰 있답니다. 금방 다녀와야
할 텐데.
「……미안해. 용서하지 말아요…….
어디 아프지 말고…….
아침에 눈을 뜨면 냉수부터 마시는 거 잊지 말고…….
빈 속에 커피, 담배 너무 하지 말아요.
……용서하지 말아요. 건강하고…….」
추 신 : 모레 아이리쉬 커피가 배달될 때까지 잠을 잘 생각입니다. 제 작업실 열
쇠를 잃어버리신 것 같아 경비원 할아버지께 맡겨 놓았으니 잠이 깊이 들어 제가
열어드리지 못하면 직접 열고 들어오세요. 경비원 할아버지가 잊고 계실지도 모
르니까 5년 전 이맘 때쯤 3층 벙어리 총각이 부탁했을 거라 하면 기억하실 겁니
다.
다 생각납니다
그 사람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과 제가 만들어 두었던 모든 시간의 얘기들을 씹고 되씹으면 아무리 힘
든 일이 찾아와도 힘들다 말겠지, 이러다 말겠지 라고 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어느 확신에 이렇게까지 힘이 되어 주시는 그 사람을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
래서 무척 성실하게 그 사람을 사랑했었고, 순간순간의 기억들을 추억으로 만들
준비를 해가며 우리의 기억들을 지켜보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다 생각이 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다 생각이 납니까. 그렇
게까지 노력했던 내가 보고만 계시기 미안하셨는지 하나님 당신께서 그 사랑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으니 좀 그렇고 그때의 그 추억들을 내가 다 가지고
살도록 힘써 주셨나 봅니다. 괜찮습니다.
원래가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데 그걸 아파해 본다고 바뀌어지는 것도 아니고,
만약에 어느 선까지 진심으로 너무나 아파해 그 상대가 돌아올 거면 아마 그 사
람은 제 곁을 떠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전 아파하지 않고 이렇게 살게
되어 있으려니 하고 성실하게 그 사람과 제가 만들었던 모든 시간의 얘기들을 씹
고 되씹으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만약 시간이 되돌아가 다시 한 번 그 사람과 손을 마주 잡았을 때 하나님 당신
이 넌지시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며, 이래저래서 그러그러하게 살도록 되어 있으
니 차라리 지금 이 손을 놓는 게 어떠하겠니? 하셔도 나는 역시 마주 잡은 손을
놓아버리지 못했을 겁니다. 그 순간 하나님 당신이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살아가
는지 물으신다면 저는 특별히 그 이유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까
지 다 생각나게 해준 사람이니까, 내 생애에 언제 또 이렇게 솔직해 볼 수 있을
까 하는 마음이라고 밖에는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겠느냐고도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 사람 발걸음을 편히 돌려보낼 수 있는 마음 역시 그 사람이
제게 베풀어준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마지막 얼굴은 왜 보지 않으셨냐고요? 그건 내가 돌아서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
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얼굴을 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겁니
다. 훗날 아주 먼 훗날, 하나님 당신이 다른 생각에 빠져계실 때 더 이상은 만나
지면 안되는 우리에게 잠시 눈을 떼고 계셔서 우연히 마주친다 하여도 그 사람에
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때의 제 표정만은 보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랬었다는
걸, 차마 돌아보지 못했던 그때의 내 얼굴이 이랫었다는 걸 보여준다면 아마도
보고 있는 그 사람보다 내가 먼저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제발이지 그 사람과 제게서 눈을 떼지 말아주십시오. 부득이 그
사람과 제게서 눈을 떼고 계셔야 한다면 다른 신에게 감시라도 부탁해 주십시오.
그렇게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흘렀어도, 이랬었다는 걸 보여 줄 것만 같아서 말입니다. 그때 그 사람의 발길을
편히 돌려보냈던 내 얼굴이 이랬었다는 걸 보여줘서는 안되는 까닭에 말입니다.
경 험 담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몇백 배는 더 힘드는 일이다.
가을 편지
오늘은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습니다. 며칠의 밤샘 작업으로 어제 작정을 하고 오래 자서 그
런지 다시 눈을 붙여보려 해도 마음처럼 쉽지가 않군요.
이런 날은 하루가 몹시 길게 느껴져 생각들이 한참 많아지는데……. 글을 쓰겠다는
놈이 생각이 많아질까봐 두려워 하다니, 이제 펜을 버릴 때가 왔나봅니다. 참! 그래
서 눈을 떠 무엇을 할까 생각을 했지요.
물론 너무나 잘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먼저 생각난 것도 당신이 나를
위해 만들어 주셨던 편한 미소였지요. 그래서 오늘은 작정을 하고 잠시 나타났다 이
내 사라지는 그 얼굴을 머리 안에 오래 잡아둬 보려고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인사말이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비오는 목요일 저녁, 두고 가신 체크 무늬 우산을 보며 얘기하듯, 사랑하는
당신, 요즘에는 어떤 우산을 쓰고 다니시나요? 할 수도 없고, 시계 좀 보고 살라 하
다, 걸어둬 봐야 보지도 않을 무용지물이니 들리는 것으로 걸어놔야 한다며 심사숙
고 끝에 골라 걸어주신, 시간마다 어김없이 뻐꾹대는 뻐꾹이 시계를 보며 얘기하듯,
사랑하는 당신, 시간을 알고 살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할 수도 없고, 하루에 세 번
먹어야 하는 감기약을 일주일에 두 개밖에 안들고 잊고 가신 감기약을 보며, 얘기하
듯, 사랑하는 당신, 요즘은 감기와 별로 안 친하시죠? 할 수도 없으니, 도대체가 사
랑하는 당신 빼고는 말로나 글로 아니면 생각으로 당신을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인
사는 생략하고 편지를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생략하고 안부를 좀 물어봐야겠는데 이런, 다짜고짜 건강을 묻자니
평소에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들리실 테고, 졸업한 지 한참 됐을 학교 생활을
물을 수도 없고, 즐겨 들던 치즈케잌은 여전히 하루에 한 조각씩 드시는지 물으려니
무슨 치즈케잌에 중독된 사람처럼 느껴질까봐 그것도 그렇고…….
이래서 사람은 서로 좀 만나면서 살아야 하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나는 글 쓰는 직업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 한 장
제대로 못 쓰고 있으니, 이거 어디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겠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당신이 언제나 눈에 힘을 주고 강조하셨죠! 나는 입에 풀칠이나 하
고 살려고 글 쓰는 놈이 아니라, 세상 한 번, 내가 느끼는 이 세상 한 번 그대로 표
현코자 글 쓰는 놈이니 조금 전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그럼, 내 얘기를 들려드려 볼까요.
뭐, 편지라는 것이 내 얘기 상대와 얘기 주고 받으며 써내려가는 것이니 그것도 그
리 나쁜 방법은 아닐 것 같군요.
가만있어 보자,…… 어떤 얘기를 해드릴까?
살이 너무나 많이 빠져버려, 건너편 유선 슈퍼 아저씨가 더 이상 내게는 술을 주지
않는다는 걸 말씀드리면 또한 걱정하느라 속 꽤나 상해버리실 테고, 사랑하는 당신
이 좋아하셨던 이 목소리는 언제부터인지 쇳소리가 많이 섞여나와 주위에서 담배를
아예 끊어버리라는 얘기가 많이 들려온다고 말씀드리면 그나마 아름답게 기억되는
나의 모습의 그나마도 사라져버릴 테고, 그러자니 이번에도 내 원고들은 출판사에서
화장지가 남아돌아 받아 줄 수 없겠다는 그 얘기 그대로 전하면 또 돈 많은 사람한
테 시집가 출판사 하나 차려주겠다고 울먹일 테니 그것도 관둬야 하고, 어쩌죠? 뭐
하나 당신에게 전해드릴 만한 산뜻한 소식이 없으니…….
노인네처럼 괜히 쓸데없이 일찍 일어나 골치만 썩이지 싶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사랑하는 당신에게만큼은 써드릴 얘기가 많았었는데 이제 당신마저 내가 써볼 수
있는 성질의 주제가 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아무것도 써볼 수가 없군요.
참! 어제는 오랜만에 과일을 한 번 먹어봤습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물론 내가 직접
산 것이 아니고 누군가 자기 이름으로 된 책 한 번 자기 얘기로 써서 가져보는 것
이 소원이라 하길래 나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현실에 놀라 그 사람
고생하며 살아왔고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하는 얘기를 써주었죠. 물론 그 사람 인
상과는 안 어울리는 얘기들이었지만.
그랬더니 그 사람이 글쎄 고맙게도 얼마간의 생활비와 사과를 한 박스 사왔지 뭡
니까? 당신 빼고는 누구한테 뭘 받아 본 기억이 없어 얼마나 감격을 했던지…….
요 며칠 밤샘 작업을 한 보람이 넘치는군요. 그래서 그 마흔개의 사과 중 날 닮아
그 중에서 눈에 띄게 못생긴 사과를 하나 씹어 삼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궁금증이 생기더군요.
한 입 두 입 씹다보니 그 궁금증이 더욱더 켜져갔습니다. 물론 이제 내 얘기를 들
어주던 당신마저 몇 해 전을 끝으로 더 이상 들어주지 않아 기껏 질문이라고 한다
해도 내가 그 답을 찾아 내게 대답해 줘야 하기는 하지만…….
그 사과 말입니다.
내가 농사를 안 지어봐서 모르는 건지, 사과 안에 사과 씨가 몇 개인지는 먹다 보
면 알아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 사과씨 안에는 과연 몇 개의 사과가 들어 있는
것일까요?
역시 그렇죠!
내가 생각해 내는 것들이란……, 어느 누가 그런 것 따위에게 관심을 주겠습니까?
그래도 난 너무나 궁금한데, 이제는 누구에게 질문이라는 것을 하는 방법조차 기억
이 안나니…….
어쩌겠습니까!
남아 있는 서른아홉 개의 사과를 씹어 삼켜보며 알아봐야지요.
그러다 운이 좋아 알아지면 그것으로 동화를 한 번 더 써볼 생각입니다. 왜 언젠가
우리의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이야기를 그 아이에게 들려 주
겠다고 약속드린 적 있지 않습니까!
아! 내가 항상 이런다니까.
이제 그 약속을 지켜볼 필요도 없어졌는데, 그 약속은 사과 씨앗에 사과가 몇 개
들어 있을지 알아내는 문제보다 훨씬 어렵고 가능할 수 없는 얘기인데 말입니다.
이래서 남 잘 시간에 못 자고 있으면 관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말이 나왔나
봅니다.
히히.
GATE 21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일곱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방금
안타로 타점을 올린 송구홍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왼쪽 허벅지에 올려 놓았던 오징어 다리 두 개와 몸통이 조금 붙어
있는 머리가 그녀의 왼쪽 허벅지에서 송구홍의 안타와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 하
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떨어진 오징어 다리 두 개와 몸통이 조금 붙어 있는
머리가 문제가 아니었는지, 슬쩍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일곱 번째 파란색 의자에 다시 앉았다.
이번 타석에서 안타가 나온다면 2루에 나가 있는 송구홍이 빠른 발을 이용해 홈
으로 들어올 테고 경기는 역전되어 버리는 아주아주 중요한 상황이었다.
타석에 들어온 유지현은 신인답지 않은 침착한 자세로 타석에 임하고 있고, 선
발로 나와 지금껏 역투하고 있던 해태의 강심장 조계현 투수는 경기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는지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목이 타는지, 음료수를 들고 다니는 아주머니가 게토레이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평소 어떤 물건이든지 정가가 아니면 구입하지 않던 그녀였는
데 경기에 열중한 나머지 지금 자기가 산 게토레이가 정가의 두 배나 된다는 사
실도 잊은채 그녀는 두 개의 게토레이 값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뜨거
운 응원에도 불구하고 평소 찬스에 강한 유지현은 오늘은 날이 아니었는지 유격
수 옆 평범한 범타로 끝났고 그녀는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왼쪽 이어폰에서는,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꼭 봐야 한다는 라디오
광고가 들려왔다. 그 다음 광고, 100만 개를 팔았고, 3년 연속 능력개발 히트 상
품이라는 메로나 광고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왼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고 게토
레이를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일곱 번째 파란색 의자 옆에 놓고
있었다.
야구장 측에서 홈 관중을 위한 서비스로 응원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고용한
치어리더들이 준비해 온 동작들을 음악에 맞추며 흥을 돋우고 있을 때 그녀는 21
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일곱 번째 파란색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
가고 있었다.
늘 긴장된 순간이 지나고 나면 화장실에 갔던 그녀는 지금 화장실 문을 열고 있
을 것이다. 그녀는 평소 습관대로 누누히 강조하는 오리지널 샤넬 백에서 종이
비누를 꺼내어 땀 맺힌 손을 깨끗이 닦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볼 일을 보고 나
와 또 손을 씻을 것이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와서 또 한 번 손
을 씻어 내는 깔끔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청결한 습관은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때 특히 심해지곤 하는데 그 덕분에 나도 이빨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유리잔에 와인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자주 찾는 음식점이나 찻
집은 언제나 긴장된 상태에서 주위를 의식해야 했고, 오늘은 조금 느끼했다. 그
래도 잘 먹었다. 하며 내게 인사를 건넬 때면 무척 행복하긴 했지만 월말이면
어김없이 날라오는 카드 고지서는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21번 게이트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이어폰을 왼쪽 귀에 꽂고 서너 알인가 대여
섯 알인가 되는 팝콘을 입 속에 넣고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언제 봐도 귀여울
수밖에 없는 모습이엇다.
그때 해태의 강타자 홍현우가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아버리는 역전 솔로 홈런을
때렸고 서너 알인가 대여섯 알인가밖에 먹지 않았던 팝콘은 봉지째 땅바닥에 나
뒹굴게 되었다. 옆사람들 모두가 엘지의 열성 팬이었는지 자기들 발 밑에 그녀가
집어던진 팝콘이 너저분히 흩어져 있는 줄도 모른채, 그녀처럼 뭘 집어 던지거나
쌍소리로 투수를 욕하는 듯했다. 투수는 더 이상 다음 공을 던지지 못했고, 플레
이 오프 진출이 결정되는 경기인만큼 이광환 감독이 투수에게로 다가가고 있었
다. 언제나 썬글라스를 쓰고 있는 이광환 감독의 표정에는 별변화가 없었지만 평
소 때와는 달리 직접 투수의 공을 건네 받아 특급 소방수 김용수에게 볼을 건네
주었다. 언제 봐도 조용할 것 같고 어느 순간에도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이광환
감독의 느낌을 그녀는 나와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는 듯했다.
왜 우리 나라 야구 감독들은 없어보이는 거야? 감독은 수입 안하나? 미국이나
일본은 감독부터 있어 보이잖아, 안 그래?
그녀는 언제나 내게 의견을 물어주었고, 생각해 보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해 그
럴 때마다 맞장구를 쳐 주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다. 특급 소방수 김용수는 연속
으로 볼을 세 개 던지고 있었지만 제구력에 자신 있었는지 크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왼쪽 이어폰을 빼고 오른손을 사용해 누누히
강조하는 오리지널 샤넬 백을 열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필터가 밤색이었고 담배
각이 자그마한 걸 보니 여성용으로 시판되어 호흥을 얻고 있는 콤팩트 담배인 것
같았다.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 의자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가 그녀의 밤색 필터에 불을 붙여 주었고
그녀는 귀여울 수밖에 없는 미소를 보이며 연기를 내뿜었다.
특급 소방수 김용수는 볼을 세 개나 연속으로 던진 후 안쪽으로 스트라이크를
하나 잡고, 구질을 알 수 없는 바깥쪽 볼로 평범한 내야 땅볼을 유도했다. 해태는
팔회초 솔로 홈런으로 경기를 동점에서 재역전시켰다.
다시 팔회말 엘지의 공격이 시작될 때 그녀는 들고 있던 게토레이 캔 안에 반을
넘게 핀 필터가 밤색인 콤팩트 담배를 쑤셔 넣었다. 내가 무심코 다 마신 와인
병에 꽁초를 쑤셔 넣거나 담배를 테이블 밑에 털면, 무식하게 왜 그래? 다른 사
람들이 쳐다보면 어쩔려고. 또 그 한 병 세척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기나
해? 쓸데없는 데서 돈 아끼지 말고, 애국한답시고 쳐! 이렇게 내 무식한 습관을
지적하던 그녀였는데 경기가 경기인 만큼 크게 흥분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 순간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
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가 오른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고 뒷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핸드폰을 이어폰을 빼내었던 오른쪽 귀에 갖다 대었다. 관
중들의 환성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에다 뭐라뭐라
이야기하며 21번 게이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선두 타자 한대화가 투수 옆을 스치는 안타로 일루에 진출해 있었고, 엘지 관중
들은 모두 관중석에서 일어나 그녀처럼 깡충깡충 뛰며 열광하고 있었다. 다음 타
자는 요즘 연속 안타 기록으로 주목을 끌고 있는 김동수였고 경기는 충분히 뒤집
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야구장 전체가 긴자 상태였고 앉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때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가 이제 양쪽 다 이어폰을 끼고 있는 그녀
의 뒷목을 쓸어 안으며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김동수는 이번 타석에서 안타를 만들어 내면 연속 경기 안타기록과 팀을 플레이
오프에 진출시킬 수 있는 찬스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일곱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
아 있던 그녀가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
었다. 누누히 강조하는 오리지널 샤넬 백과 다정히 왼쪽 오른쪽에 끼고 있던 소
니 워커맨과 신문 등을 챙기는 것으로 보아 화장실이나 구내 매점을 이용하려고
가는 것은 아닐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타석에서는 김
동수가 어떻게든 안타를 만들어 보려고 투수와 신경전을 펴고 있고 엘지는 플레
이 오프에 진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평소에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지 않는 이광환 감독이 투수 교체까지 손수 할 정도로 긴장되는 경기인데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길래 그렇게 저렇듯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의 핸드폰에서 무슨 급한 연락
이 온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밥보다 야구가 좋다던, 겨울이 싫은 이유가 단지
야구 경기가 없기 때문이라던 그녀가 이런 중요한 경기를 포기하고 야구장을 떠
날 일이 없었다.
작년 엘지가 종합 5위에 그쳤을 때 우승도 아무런 타이틀도 없었던 경기에서 뒤
쪽에 앉아 있던 어느 관중이 터뜨린 폭죽으로 내 머리가 다 타고 목덜미에 화상
을 입었을 때도 곧 끝나니 조금만 참아 보라던 그녀였는데, 상대팀이 어디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팀이 점수를 너무 많이 내는 바람에 경기가 지연이 돼 수
학 경시 대회에서 초등부 일등을 한 첫째 조카 녀석을 위해 형님 부부가 마련했
던 저녁 약속에도 참석을 못했었는데 도대체 저렇게 급히 야구장을 떠날 사건이
생긴 것일까?
그녀의 왼쪽 어깨를 감싸안은 21번 게이트, 앞에서 네 번째, 옆에서 여덟 번째
파란색 의자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를 위로 올려 넘긴 듯한 남자의 표정엔 덧니
가 살짝 보이는 미소가 담겨 있고 그녀의 표정도 야구 경기에는 크게 미련이 없
는 것으로 보아 그녀 신변상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이제 저 둘은 사무실 앞 카페 S에서 함께 타고 온 초록색으로 유리가 선탠이
된 흰색 소나타를 나고 핸드폰이 불렀던 곳으로 떠날 것이다. 들어올 때 보니까
뒤에 차들이 많이 주차되어 빠져 나가기가 싶지 않을 텐데.
요즈음 차량이 많이 늘어난 문제에 대해서 그녀는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
다.
짜증이야 정말! 난 주차금지 푯말만 보면 꼭 놀리는 것 같아 싫더라. 어디를 가
도 온통 차니, 하긴 거긴 주차 걱정 없으니 속은 편하겠어!
아마 그때 김동수는 안타를 쳤을 것이다. 아니면 조계현이 삼진 처리했을 것이
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관중들은 크게 흥분하고 있었고, 옆에서 심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사람이 3주나 넘게 청계천 시장을 돌아다녀 한달 봉급이 넘는 액
수를 지불하고도 2주나 넘게 기다려 구입할 수 있었던 내 저격용 망원렌즈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빼앗아 갔다.
주위가 한층 더 시끄러워진 것으로 보아 두 팀 중 한 팀이 매우 좋은 플레이를
보였거나 어느 한 팀이 매우 저조한 플레이를 보였을 것이다.
심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사람은 3주나 넘게 청계천 시장을 돌아다녀 한달 봉
급이 넘는 액수를 지불하고도 2주나 넘게 기다려 구입할 수 있었던 내 저격용 망
원렌즈를 돌려 주었을 때, 가져갈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보이며 손에 묻었던
물기를 허벅지에 쓱쓱 밀었다.
뭔일이다냐! 시방 우는겨? 우리가 이겼당께! 이겼어!
다음 주에는 크리에티브 1팀장에게 부탁을 해야 할 것 같다. 아주 특별한 소품
이 필요한 광고 콘티를, 꼭 이 저격용 망원렌즈가 들어가는 콘티를 만들어 달라
고, 그러면 다음 주 내 생일날에 그녀는 다시 나를 만나자고 할 것이고 나는 단
하루만에 그녀에게 이 망원렌즈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 나는 망원렌즈와
함께 구입한 공기총을 준비할 것이다.
청결한 그녀를 위해 깨끗이 손을 씻고…….
정말로 죽어야 할 인간들 넷
영어 배운답시고 귀는 안 열고 돈 싸들고 다리 벌리는 년 하나
운동경기 할 때만 죽일놈의 쪽바리 새끼들이고
경기 끝나면 로바다야끼에서 마일드 세븐 피우는 놈 둘
그년들과 자고 싶어 하는 그 새끼들과
대인 관계 맺어야 하는 빙신 같은 나 셋
그리고
보이는 데서만 지랄하고 돌아서면 똑같아지는 니들 넷.
천상에 계신 이여
천상에 계신 이여……!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들 중 단 하나. 그 하나를 원하고 살 뿐이었습니다. 너무도 간절히
원하면 질투의 신이 눈치를 채어 장난을 칠까봐 조심조심 마음 졸이면서까지 원
하고 살았었는데, 무슨 이유이신지 당신은 그것마저 내게 허락치 않으시는군요.
천상에 계신 이요……!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일이 많은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생각을 하고, 이를 닦으면서도 생각을 하고, 가스가 다 떨어진
라이터에 가스를 넣으면서도 생각을 해봤지만 당신에게 바란 것은 하나! 그 단
하나마저도 자격이 없을 만큼 잘못은 생각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극본대로 살아가야 할 저로서는 가슴을 치며 살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그저 가슴만 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당신이 무엇인가 이루고 살라고 보내신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이곳과는 안녕을 하
려고 합니다. 아무런 의미도, 기쁨도, 그렇다고 끈끈한 정마저 없는 이유로 무겁
지도 않을 손을 흔들며 돌아서기에 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그 대신, 천상에 계
신 당신께 조건을 건다는 그 자체가 우습지만 그래도 이제부터 드리는 부탁은 들
어 주셔야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무런 이유도, 그렇다고 저를 달래 보실 생각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저 보고
만 있기에도 가여운 놈이라 생각하시고 두 번째 부탁만은 들어주십사 하고! 그렇
게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언제나 그 목소리에 갈증을 느껴 단 한 번도 다른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
하고 산 두 귀는 전봇대가 높았던 그녀의 전화선 밑에 묻어 주십시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는 소리라도, 그 사람의 짜증을 받아 주는 소리라도, 그 사
람의 농담에 즐겁게 웃는 소리라도 감사히 듣겠으니 두 귀는 전봇대가 높았던 그
녀의 전화선 밑에 묻어 주십시오.
그리고 이 두 눈은, 언제나 차갑고 정숙한 모습만을 보았던 이 두 눈은 그녀가
자주 들르던 째즈빠 앞에 묻어 주십시오 누구 때문에 취하고 싶은지, 무슨 이유
로 취해야 하는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가는 모습이
라도 감사할 뿐이니 한 번만이라도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두 눈
은 그녀가 잘 가는 째즈빠 앞에 묻어 주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 이 목소리, 몇 마디 들려줘 보지 못한 이 목소리는 이제 그녀가
사랑하게 될 그 사람에게 건네주십시오. 언제나 입 안에서만, 가슴 속에서만 살아
왔던 이 목소리는 이제부터라도 실컷 들려줄 수 있도록 그녀가 사랑하게 될 사람
에게 건네주십시오. 화도 내 보고 달래줘 보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고백도 해볼
수 있게. 그런 것 저런 것 한 번도 못해 본 한 맺힌 이 목소리는 이제 그녀가 사
랑하게 될 사람에게 건네주십시오.
너무 많이 바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제 마지막 하나, 이 하나만 들어 주신다면 아무런 원망 없이 오히려 감사함으
로 당신을 기억하며 떠나겠습니다.
너무나 한이 맺혀 공기조차 마음대로 들이마셔보지 못한 이 가슴,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만 하다 가는 이 가슴은 단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그녀의 마음속에
묻어 주십시오. 그 마음속에 내가 들어가 산다는 걸 그녀는 영원히 모르고 산다
해도, 그래서 다른 사람을 담고 산다 해도 아무 말 없이 그 둘이 눈치 못채게 사
랑하는 모습 지켜만 보며 살아갈 자신 있습니다. 그러니 한맺힌 내 가슴 그녀의
마음속에 영원히 묻어 주십시오.
천상에 계신 이여!
왜 이렇게 잘못했던 일들만 생각나는지
무슨 대단한 일을 하면서 산다고 주말에
영화 한 편 함께 봐주기가 짜증이 났는지. 어차피 잘 거면 언젠가 말을 놓지 못했던
그때처럼 손 한 번 잡아주고 옆에서 잘 수도 있었는데, 그런 거 저런 거 이해 못할 애
도 아니고, 자다 혹시 내가 이를 갈거나 잠꼬대를 해서 옆사람들이 눈치를 주면 죽어
도 사과 안하는 나 대신 무슨 큰 죄나 지은 애처럼 자기가 사과하고 원래 이 사람 잠
이 좀 부족한 사람이니까 이해를 해달라고. 내 신경 쓰느라고 무슨 영화를 봤는지 잘
떠올리지도 못하면서 오빠랑 영화 보면 괜히 더 재미있는 것 같다고.
한 번도 못 먹어 봤다는 소주를 장난 삼아 몇 잔 먹였을 때, 할 말은 많은데 취해서
……미안해요. 내가……안되는 거 알지만요……. 오빠한테 힘이 좀 됐으면 하는데……
취해서 미안한데……. 그래요, 난 그게 취한 거보다 더 미안해요……, 아무 힘이 못된
다는 게. 이렇게 예쁜 마음 보여주는 애였는데, 이 병신이 기껏 한다는 소리가, 니가
무슨 건전지니, 힘을 주게. 집에나 가자.
무슨 대단한 사람을 사귀고 있다고 갑순이 장난감까지 챙기며 만나줬는지. 강아지는
성장기를 잘 보내야 한다고, 그래야 갑순이가 보고 배운다고, 갑순이가 아무나 보고
안기고 잘 안 짖는건 순해서 그래요. 착해서 남 먼저 생각할 줄 알고, 대충 손해 보고
살고 갑순이는 주인 잘 만났어요. 주인 닮아서 저렇게 순해요.
내가 침대에서 재운다니까 일어나 보면 서로 끌어 안고 자고 있었다고, 가끔 목욕도
시켜주고 털도 빚겨준다니까 그 쪼다가 그게 부러워서 세상에 강아지가 부러워서 그
렇게 바보처럼 생긴, 사람 말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눈만 멍창히 뜨고 있는 갑순이에
게, 넌 어쩜 이렇게 예쁘게 생겼니. 오빠가 목욕시켜주니까 참 좋지. 얼마나 좋을까.
오빠 냄새도 맡고 잘 수도 있고, 갑순인 너무 좋겠다.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하고 헤어진다고, 어쩌면 그렇게 떠나가는 게 당연한 건데 피
죽도 못 먹고 사는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타나서는, 다 아니깐요. 오빠가
무슨 맘으로 내게 이러는지 다 아니까 그 마음 고마워서 참고 살았는데……, 더 이상
오빠 힘들게 안할라구요. 나만 좋자고 나 하나 행복하지고……, 그 마음 고마우니까
내가 먼저…… 고마우니까.
그 쪼다가 뭘 안다고 내가 언제 한 번 자기를 챙겨줘봤다고 그러는지. 그 쪼다가 끝
까지 고맙다고 할 때에는 왜 그렇게 한 대 때려주고 싶었었는지. 나는 정말 졸려서 안
만나는 거고, 정말 귀찮아서 피한 건데, 만나서 할 말이 없어서 담배만 피우다 들여보
낸 것이고, 술기운에 단지 술기운에 그날 졸면서 본 영화의 슬픈 대사가 떠올라 눈물
한 번 보인건데 누가 자기를 위해서 그랬다고 착각하는지.
원래가 싸가지 없는 놈으로, 마음속에 담고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놈으로 네 기억 속
에 남겨야 했는데…….
가끔 그 쪼다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지면, 별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한때 알고 지냈
던 사람이니까, 단지 그 이유로 사는 모습 궁금해지면 왜 그렇게 잘못했었던 일들만
생각이 나는지. 워낙에 착한 마음을 가진 애니까 세월이 흐르다보면 이런저런 일 다
용서 받을 수 있어도 내가 지를 사랑했었다고 생각하게 하면 안되는 거였는데. 나보다
지를 더 사랑해서 그랬다는 걸 알게 한 거, 그 잘못은 다시 태어나 또 한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 같아 속이 상하지. 자꾸 미안해지는 거지.
그땐 참 많이 울었는데
그땐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왜 그렇게 슬픈 일이 많았는지, 혼자 밥을 먹다가도, 교육심리 강의를 듣다가도, 솔
리드의 8이 새겨진 작은 당구공 모양의 차 키로 시동을 걸다가도, 약속 시간을 확인
해 보려 시계를 보다가도 슬펐습니다. 그냥 그렇게 어떠한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슬퍼해 본 거 이외에는 특별히 다른 할 일을 생각해 볼 수 없었나 봅니다.
그땐 참 많은 말들이 입 주위에서 맴돌았습니다. 왜 그렇게 할 말이 떠올랐었는지
작년 봄에 뒷머리를 좀 감추라고 사준 마이클 조던 이름이 새겨진 남색 나이키 모
자가 뒤에서 세 번째 구멍에 딱 맞았었는데 무심코 썼을 때 매우 헐렁해져 있어 생
각을 해보니 머리를 짧게 잘라서 그렇다고, 우리가 자주 들프던 카페의 여주인이 이
번에도 딸을 낳았다고 주인 아저씨가 섭섭해 하시길래 키우는 재미는 아들보다 딸
이 훨신 낫다고, 나 같은 놈 키우시는 것보다 훨 나을 거라고 위로해 드렸다고, 아
기 냄새가 어울린다고 사준 존슨즈 베이비 로션이 바닥을 드러내 아버지 스킨을 발
랐다가 하루종일 독한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 혼이 났었다고 그냥 내게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 그 많은 얘기 하나도 건네볼 수 없다
는 생각에 그저 혼자 중얼거리며 가슴만 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별의미 없고 귀찮게만 여겼던 당신과의 만남들을 그렇게 간절히 원하며
살게 될지 그땐 누가 알았겠습니까!
몇 주 전 결혼한 고등학교 선배 형이 집들이에 초대하면서 제수씨 너무 예쁘게 하
고 오지 말라고 형수가 샘낸다고 그럽니다. 신경 쓰고 나올 필요 없으니 거기만 함
께 가달라고, 혼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나는 이해해도 그들이 어색하게 생각할거라
고, 나이가 몇인데 애기 냄새 풍기냐고 짜증내며 안 바르던 존슨즈 베이비 로션은
내가 직접 사기가 좀 그러니까 그것만 사달라고, 아주아주 큰 것으로, 그리고 신곡
나올 때마다 노래방 가자고 귀찮게 졸라댈 때 둘이 무슨 재미로 가냐고, 그렇게 노
래하고 싶으면 혼자 가서 실컷 하라고 그랬던 건 쑥스러워서 그런 거였다고, 신곡은
못 불러줘도 당신은 모르실 거야 라는 노래는 부를 줄 아니까 다시 한 번만 졸라댈
순 없냐고……, 혼자 있는 것에 익숙치 않았던 그땐 함께하고 싶은 일들은 왜 그리
도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땐 참 많이도 울었는데……
무슨 눈물이 그렇게도 많이 나오던지, 사람이 왜 그렇게 독하냐고 가슴 아프지 않
았냐고, 슬픈 흉내라도 내볼 수 없냐고, 울먹이며 얘기할 때 아무 표정 안 만들어지
더니, 그 뒤로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눈물을 훔쳐야 했고 아침이면 촉촉히 젖은 베갯
잇에 놀라 깨어나서 그 베개 쓸어안고 또 많이 울었는데, 그때 그렇게도 많이 흘렸
던 눈물 때문인지 지금은 더 슬픈 일이 생겨도 눈물이 나오질 않습니다.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이젠 정말 눈물은 나오질 않습
니다. 그러다 그저 가끔씩 그땐 참 많이 울었는데 생각이 날 때면 왜 그렇게 울었
는지가 생각나 습관적으로 눈이 아롱거릴 뿐입니다.
아버지의 카메라
사진 찍는 모습을 보거나 카메라를
보게 되면 그다지 기분좋은 일도 아니면서 입가에 정말로 즐거워서, 우스워서, 미소
를 만들어 주는 일이 있다. 벌써 십일 년이 지난 일이고, 오늘도 내 앞에 존재하는 웃
지 못할 우스운 일이다.
이 얘기는 어머니가 일본에 다녀오시면서 두 개의 카메라를 사오시면서 시작된다.
중학교 때 사진부에 들었던 누나는 작고 예쁜 카메라를 부탁했고, 어머니는 그 약속
을 지키셨다. 지금이야 손바닥만한 카메라가 흔하고 전자동으로 손가락만 누르면 찍히
는 카메라가 전자 대리점에 가면 취향별로 진열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흔
하지 않았다.
몰매 맞을 얘기겠지만 국산품을 애용하는 요즘 어머니가 사오신 누나의 18㎜ 카메라
는 정말 예뻤고 소풍갈 때 내 주위에 친구들이 모이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누나의 카메라만 사오셨으면 이 얘기를 쓸 필요가 없는데 문제는 아버지의 카메라였
다.
어머니는 절대로 사치하시는 분이 아니셨는데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카메라도 사오셨고, 그 카메라는 사진 작가용으로 십일 년 전 일본에서 히트
한 것이었다. 온통 영문과 일어로 설명이 되어 있고, 자동이 아닌 수동이었기 때문에
난 줘도 못 만지는 그런 카메라였다.
어렸을 때 이후 아버지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영어와 일
어 사전으로 한참을 그 설명서와 씨름을 하신 아버지는 결국 그 카메라의 기량 중 지
극히 단순한 렌즈 조절법과 셔터 누르는 법만을 알아내셨다.
니들은 작은 누나의 18㎜ 카메라만 쓰고, 이건 결혼식이나 어디 놀러 갈 때만 써야
한다.
그런 아버지의 말씀으로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아버지의 카메라는 장롱 속에 두툼한
수건으로 싸여져 보물처럼 우리들의 손길을 피했다.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설악산으로 피서를 떠났다.
당연히 아버지의 목에는 조금은 무거워 보이는 목이 아프시지 않을까 생각케 하는
아버지의 카메라가 너무도 당당히 걸려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난 아버지의 카메라로 찍으면 모델처럼 나올 줄 알았고, 당연히 아버지
가 카메라의 기량을 십분 발휘하실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카메라는 아버지의 목만 장
식해 주었을 뿐 우리 가족이 어렵게 잡은 포즈는 전혀 무시해 버렸다.
누구의 얼굴인지 분간하기 힘든 사진이 태반이었고, 그나마 얼굴이 나온 사진은 몸이
옆으로 삐딱하게 나와 있었다.
그해 우리 가족 피서 사진은 아버지 카메라 덕분에 앨범에 꽂혀지지 못했고, 다시 아
버지는 영어와 일어 사전으로 설명서와 씨름을 시작하셨다. 나도 좀 배워보려 했지만
아버지는 애들이 만지는 물건이 아니라며 내가 카메라와 친해질 틈을 주지 않으셨다.
우리 가족의 즐거웠던 한때마저 간직해 주지 못했던 그 카메라는 그래도 당당히 아
버지의 보호 아래 날로 그 위상을 더해 갔고 어느덧 우리에게는 누나의 18㎜ 카메라
가 우리집을 대표하는 카메라로 자리잡았다.
가끔 누나들과 나만 있으면 장롱을 뒤집어 아버지의 카메라를 연구했지만 우리의 어
린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 볼수록 만질수록 침범할 수 없는 성역처럼 멀어져 갔다.
분명히 우리집에는 크고 멋진 카메라가 있었는데 아버지 친구분들과 여러 팀이 놀러
갈 때면 다른 집들과는 달리 우리는 작은 카메라가 초라히 누나 손에 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유치하고 어린애 티나는 말도 안되는 자격지심인데도 그땐 솔
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렌즈를 조절해가며 찍고 싶은데 다른 애들처럼 어깨에 멋
진 카메라를 둘러메고 걷고 싶은데 왜 아버지의 카메라는 장롱 속에만 있는 것일까라
고 짜증이 나기까지 했다.
더 웃기는 얘기는 사오 년 전부터 18㎜ 필름이 구입하기 힘들어졌고, 나도 이제는 그
카메라를 찍어도 될 나이가 되었으니 당연히 꺼내주시겠지 했는데, 아버지는 국산 자
동카메라를 하나 사가지고 오시면서 걱정거리 하나를 덜으셨다는 표정으로 너무도 기
뻐하시는 것이었다.
이제 더 좋은 신형이 나왔고 그건 들고 다니기 너무 불편하다며 아무리 말씀드려도,
이건 아무나 못 찍는 거야, 임마! 이게 얼마나 좋은건데. 하시며 근처에도 못 오게
하시는 거였다.
그즈음 미국에서 사진 공부를 하던 연태가 귀국했고, 난 그 카메라를 보이며, 이거
정말 기가막힌 카메라야! 라며 자랑을 했었다. 그때의 연태의 표정은 아버지가 못 본
것이 다행이었다.
유행 지난 노래를 자기가 처음 들은 것처럼 친구에게 자랑할 때 그 상대방의 표정보
다는 조금 덜한 표정을 지으며, 요즘 이 무거운 걸 누가 쓰냐? 촌티나게, 나올 때는
신경 좀 끌었는데 이건 실패한 카메라야. 하며 그렇게도 위대해 보이는 아버지 카메
라의 체면을 땅바닥으로 추락시켜 버렸다.
그때 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귀엽게 느껴졌는지 글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된다.
재작년 작은 누나 결혼식날도 아버지의 카메라는 칙칙한 장롱 속에 있어야 했다. 그
러다보니 이젠 집안 식구 누구도 아버지의 카메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
지는 가끔 한가하실 때마다 여전히 카메라를 꺼내어 보고 닦으면서 뿌듯해 하신다.
얼마 전에 장난삼아 한 번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빌려달라고 한 적이 있다. 이젠 별생
각 없이 빌려주실 줄 알았는데 역시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셨다. 십일 년 전 그
카메라의 애정을 그대로 간직하신 채, 이건 아무나 못 찍는 거야, 임마! 이게 얼마나
좋은 건데……. 하시며 당신이 그 카메라의 제작자인 것처럼 자랑스러워 하셨다.
세월이 흘러 기술이 발달해 손톱만한 카메라가 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찍어 낸다고
해도 장롱 속에 카메라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카메라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고지식하게 보이시지만 신상품만 나오면 가지고 있던 것에 기다
렸다는 듯이 싫증을 내는 내게 아버지의 카메라는 웃고 있을 수만은 없는 잔잔하고
깊은 그 무언가를 준다.
언제 시간이 나면, 아니 시간을 내서 아버지의 카메라를 한 번 닦아봐야겠다. 어찌
그 깊은 마음을 다 느낄 수 있겠냐마는 감히 십일 년 아버지의 손길을 조금이라도 느
껴보고 싶다. 언젠가 내게도 소중한 그 무엇이, 내게도 가장 사랑스런 그 무엇이 생길
거라는 꿈을 꾸며…….
다음 연인에게 드리는 부탁
삼백예순다섯 날이 몇 번을 더 돌아야
당신을 만나뵐 수 있을런지 알 수 없지만, 이미 다섯 번째 삼백예순다섯 날을 혼
자 보내며 이런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물론 제 마음에 꼭 드시는 분이라면 더 바랄 것도 없겠지만 사람 욕심이란 게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이라 이런 정도까지만 바라자고 저하고 약속해 놓았으니
들어 보신다면 크게 어려운 일은 없을까 생각됩니다.
그 약속에 작은 욕심을 더 보태자면 제가 큰 무리 없이 들어가 자리잡을 수 있
는 작은 마음의 공간을 준비해 놓으신 분이라면 조금 더 깊게 연인이 되실 수 있
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이제부터 드리게 될 부탁을 들으시고 어째서 이런 주문
을 하는지 모른다고 물어오시면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물음이
어렵고 부담스러워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는 정말로 무어라 속
시원하게 답을 드릴 준비가 안되었기에, 그저 언젠가, 당신이 그 물음 자체도 잊
어버리신 어느 날엔가 웃으며 말씀드릴 수 있는 그날까지 기다려 주셨으면 하는
염치없는 다짐을 받아두고 시작하겠습니다.
제 다음 연인 당신은 파란색을 멀리 하시는 분이셨으면 합니다.
무슨 색을 좋아하건 그건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파란색만
은 피해 주셨으면 합니다. 파란색이 차가운 느낌의 색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만,
제게는 당신이 알고 계신 파란색의 매서운 느낌보다 더 매서운 색이니 저를 위해
멀리해 주십시오. 파란색 펜도 파란색 편지지도 파란색 쉐터도 파란색 열쇠고리
도 파란색 커피잔도 제 다음 연인 당신은 멀리 하셔야 합니다. 당신마저 유난히
파란색을 좋아하신다면 저는 처음부터 당신에게 다가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 저를
생각해서 우리의 내일을 생각해서 멀리 해주십시오.
제 다음 연인 당신은 제게 상의 없이 머리를 자르거나 전화 통화로 머리를 잘랐
다는 거짓말은 삼가해 주셔야 합니다. 짧은 단발이 유행이라거나 답답해서라거나
관리하기 힘들다거나 해서 잘랐다고 하시곤 만나서는, 머리 때문에 나 만나는
거 아니지? 유행은 따라가는 순간 뒤처지는 거야. 네가 있는데 왜 답답하겠어.
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또 그러시다 어느날 갑자기 머리를 자르고 와, 미안해.
이제 더는 안되겠어. 서로에게 못할 짓이야……. 라고 하시면 더더욱 안됩니다.
제 다음 연인 당신은 가을에 언제나 매일매일 저를 만나셔야 합니다. 졸업 작품
준비를 하실 때도, 친구 결혼식장에 가실 때도, 친구 부부 집들이에 가실 때도,
언제나 저와 함께 다니셔야 합니다. 친구의 남편이 행정고시 출신이라 하여도 만
나드리겠습니다. 졸업 작품의 주제가 당신 어머니의 양장이라도, 그래서 당신 어
머니가 옆에 계셔도 함께 해드리겠습니다. 미련한 열등감 때문에 당신을 혼자 다
니게 하면 가을이니까, 봄이 아니고 여름이 아니고 겨울이 아닌 가을이니까, 다른
계절보다 사람의 감정이 쉽게 움직이는 가을이니까 더 약해지고 더 우울해지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혼자라는 거 더 힘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 사
람이 아니구나 하며 돌아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이 다음 연인 당신은
가을에는 언제나 매일매일 저를 만나고 계셔야 됩니다.
제 다음 연인 당신은 커피에 설탕을 두 개쯤 넣고 드셔야 됩니다. 두 개가 너무
달다 생각되면 하나라도 넣고 드셔야 합니다. 당신은 프림만 넣은 커피는 드시면
안됩니다. 연인은 닮아가야 한다고 당신이 프림만 넣은 커피를 드시면 저 역시
당신이 넣어주시는 프림만 넣고 마실 테고 제 취향도 여전히 설탕 없는 커피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심장이 찢어지던 자리에서처럼 너무나 쓴 커피를 마
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사이는 그런 순간이 없어야 하겠지만 커피
를, 설탕 없는 커피를 마실 때마다 문득문득 두려워질 수 있는 겁니다.
제 다음 연인 당신은 무척 행복한 사랑을 하실 것입니다. 절대로 저는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삼백예순다섯 날이 다섯 번을 돌도록 생각하고, 혼자 되었
던 이유를 더듬어 놓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습니까? 그러니 당신은 절대로 실
수하지 않는 남자와 사랑을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수치인 열한 개비의 담배만 피울 것이고, 나흘에
한 번 꼭 안주를 먼저 먹은 다음 한 병에 두 잔이 빠지는 채워지는 소주를 마실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보고 싶어 하실 때, 정 상황이 안되어 목소리라도 듣고 싶
을 땐 언제라도 보여드릴 것이고 언제라도 들려드릴 것입니다. 저는 저번 학기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 학기에도 장학금을 받을 것이며, 슈베르트의 숭어에서 4악장
2번 곡에 왜 바이올린이 연주되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내일이 보장되어 있는 사랑을 하실 것이고, 절대로 불안하지 않
고 친구 연인들과의 참석자리에 저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마침 친구 연인들이
음악 얘기가 나와도 더 이상 긴장하실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른들이 보시기에도
믿음직스러운 남자와 만나고 있다는 굳은 믿음을 심어드릴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몇 가지만 부탁만 꼭 지켜 주신다면 당신의 행복을 보장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아!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부탁인데 너무나 생각하고 있어서 깜박 잊고 넘어간 것 같습니다.
내 다음 연인 당신은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한 번 더 그때의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면 아마도 이번에 죽어질지도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니들 뭐 하니
내 조카 유지가 책상을 뒤적인다
너무 예쁜 내 조카 유지가
책상을 뒤적이며 투정을 부린다
왜 삼촌 책상에는 지우개가 없느냐고
지고 그림을 그리다
잘못 그린 삼팔선을 지워야 하는데
삼촌 책상에 지우개가 없어서 못 지우고 있다고
내 조카 유지가 책상을 뒤적인다
너무 예쁜 내 조카 유지가
삼팔선을 지워 보겠다고 지우개를 찾고 있다.
그럽디다
그럽디다. 사람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럽디다.
능력있다고 해서 하루 열 끼 먹는 거 아니고, 많이 배웠다고해서 남들 쓰는 말
과 틀린 말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발버둥거리며 살아봤자 사람 사는 일 다
거기서 거깁디다.
백원 버는 사람이 천원 버는 사람 모르고, 백원이 최고인 줄 알고 살면 그 사람
이 잘 사는 것입디다.
만원 벌자고 남 울리고 자기 속상하게 사는 천원 버는 사람보다 훨 나은 인생입
디다.
어차피 내 맘대로 안되는 세상, 그 세상 원망하고 세상과 싸워봤자 자기만 상처
받고 사는 것,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자기 속 편하고 남 안 울리고 살면 그
사람이 잘사는 사람입디다.
욕심, 그거 조금 버리고 살면 그 순간부터 행복일 텐데, 뭐 그렇게 부러운게 많
고, 왜 그렇게 알고 싶은 게 많은지, 전생에 뭘 그리 잘 처먹고 살았다고 그렇게
버둥대는지 내 팔자가 참 안됐습디다.
그렇게 예쁘게 웃던 입가에는 어느덧 싼 미소가 자리잡아 있고, 적당히 손해보
며 살던 내 손에는 예전보다 만원짜리 몇 장이 더 들어 있습디다. 그 만원짜리
몇 장에 그렇게도 예쁘던 내 미소를 누가 팔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도매로
넘겨버렸습디다.
그럽디다. 세상사는 일 다 그렇고 그럽디다.
넓은 침대에서 잔다는 것이 좋은 꿈꾸는 것도 아닙디다. 좋은 음식 먹고 산다고
머리가 좋아지는 것도 아닙디다. 사람 살아가는 것이 다 거기서 거깁디다.
다 남들도 그렇게 살아들 갑디다.
내 인생인데 남 신경 쓰다 보니 내 인생이 없어집디다. 아무것도 모르며 살 때
TV에서 이렇다고 하면 이런 줄 알고, 친구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살 때
가 좋은 때였습디다.
그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디다.
언젠가부터 술이 오르면 사람이 싫어집디다. 술이 많이 올라야 진심이 찾아오고
왜 이따위로 사느냐고 나를 몹시 괴롭힙디다.
어떻게 살면 잘사는 건지?
잘살아가는 사람은 그걸 어디서 배웠는지 안 알려줍디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려 하면 내 눈에는 피눈물 난다는 말, 그말 정답입디다.
누군가 무슨 일 있느냐고 물을 때 난 그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깨가 굽
어 있습디다. 죄없는 내 어깨가 내가 지은 죄 대신 받고 있습디다. 고개 들어 하
늘을 보다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고 정말로 기쁘고 유쾌해서 웃어본 지가, 그런
때가 있기는 했는지 궁금해집디다.
알수록 복잡해지는 게 세상이었는데 자기 무덤 자기가 판다고 어련히 알아지는
세상 미리 알려고 버둥거렸지 뭡니까.
내가 만든 세상에 내가 질려 버립디다.
알아야 할 건 왜 끝이 없는지, 눈에 핏대 세우며 배우고 배워가도 왜 점점 모르
겠는지, 남의 살 깎아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내가 남보다 나은 줄만 알았는데 돌
아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둘러보니 이제껏 내가 깎아먹고 살아왔습디
다.
그럽디다. 세상사는 일 다 그렇고 그럽디다.
왜 그렇게 내 시간이 없고 담배가 모자랐는지 태어나 살아가는 게 죄란 걸 뼈에
사무치게 알려줍디다. 망태 할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무서워
하던 그때가 행복했습디다. 엄마가 밥먹고 어여 가자 하면 어여가 어디인지도 모
르면서 물 마른 밥 빨리 삼키던 그때가 그리워집디다.
남들과 좀 틀리게 살아보자고 버둥거리다 보니 남들도 나와 같습니다. 모두가
남들 따라 버둥거리며 지 살 깎아먹고 살고 있습디다.
잘사는 사람 가만히 들여다보니 잘난 데 없이도 잘삽디다. 많이 안 배웠어도 자
기 할 말 다하고 삽디다.
그러고 사는 게 잘사는 것입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