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926년, 염불수행을 스스로 실천하고 조직화한 성월 스님과 안양암
김태흡(金泰洽) 지음, 『불교입도 신앙실화 성월대사』,
1935(乙亥)년 9월 9일.
『안양암지(安養庵誌)』 (부산시 동구 초량동 4가 843. 金水寺 내),
발행자 李法弘, 1958.
1) 성월 거사의 무량회 결성과 안양암 건축
1876 가을 이창진李昌鎭 진사의 아버지 이재청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유언을 남긴다.
“염불, 염불, 염불해야 하느니라. 지성으로 염불해야 극락을 간다.”
그 뒤 이 진사는 아버지 유언에 따라 염불 공부를 시작하고, 시골 · 서울 할 것 없이 산중에 있는 사찰을 많이 다녔다. 그러나 염불은 시작하였으나 염불 정진이 그다지 잘 되지를 않았다. 10년쯤 부처님에 대한 믿음만 가지고 있다가 어느 날 욕 잘하기로 유명한 환옹幻翁 큰스님을 뵙고 불법을 물었다.
“불법 공부를 하려거든 염불을 하게. 우리는 어찌하든지 극락 가야지, 이 세상에는 견성성불 하였다 하더라도 해이하고 게으를 때가 있으니, 자네는 6자 염불을 밤낮으로 독송하고 생각하여 극락길을 찾게나.”
이 진사는 이때 출가를 바랐으나 큰 스님은 처자가 있어 안 된다며 거사 5계를 받게 하였다. 그래서 1889년 39살에 성월性月 처사가 된다. 그 뒤 성월 처사는 이 뒤부터 『연종보감』이니 『정토요집』 같은 극락정토에 대한 문집을 많이 보다가, 당나라 때 여산 혜원 법사가 48명을 모아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하고 염불을 하다가 왕생극락한 옛 기록을 보고 깊이 감동하여, 자기도 도반을 모아 정 가는 곳에 절을 지어 놓고 염불이나 하다가 남은 삶을 마치려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해 9월, 사방으로 터를 구하러 다니다가, 동대문 밖 창신동에 초가집을 사서 칠성각 3칸을 짓고, 무량회를 조직하여 염불도량을 열었다. 그리하여 김정인金正因 한여여韓如如, 전성파全性坡 같은 여러분과 같이 정토발원을 하고 염불회를 열어서, 지성으로 염불을 계속하였다. 그 뒤 너도나도 염불 왕생을 목적으로 모인 처사가 30명 남짓 되었으므로 칠성각은 처사의 사찰이라는 이름이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그 뒤 성월 처사는 후세를 내다보고, 그 뒤 형편이 되는 대로 1,300평이 넘는 땅을 사서 1899년 절 이름을 안양암安養庵이라고 붙였다. 안양이란 바로 극락을 말한다.
2) 출가득도(出家得度)와 권왕문(勸往文) 발표
성월 거사는 이처럼 공부하며 안양암 불사를 하다가 신축년(1901) 5월 도봉산 망월사에 가서 회광悔光 스님께 비구계와 보살대계를 받고, 다시 6월에 만하萬下 스님에게 건당식建幢式을 하니, 호를 평등당平等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미 ‘성월당’으로 입에 익어 왔기 때문에, 그 뒤에도 성월 대사로 부르게 되다. 성월 대사는 이후부터 사문의 몸으로 더욱 염불 수행에 힘쓰며 널리 염불 수행을 권하였다.
“십지보살은 신통 변화가 부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덕이 이처럼 무궁한데 어찌 천상천하에 제일가는 법을 내놓고 무슨 다른 공부를 할 것인가? 나무아미타불.”
“애지중지 사랑스러운 재물들, 어느 곳에 쓸 것인가? 나무아미타불.”
“봄에 씨를 심어 가을에 거두는 것과 같거늘 어찌 심지 않을 것인가? 나무아미타불.”
“이 몸을 이승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때 제도하여 보오리까? 나무아미타불.”
“부처님께서 이르시되, 망상을 내지 말라 하셨으니, 공부(염불 수행) 밖에 내는 마음은 모두 망상이니, 짐짓 그 마음을 내지도 말며, 또 탐심을 내지 마오. 탐하는 마음은 악업을 이루니, 화내는 마음(嗔心)을 내지 마오. 화내는 마음을 참지 못하면 지혜 마음이 상하오. 밖의 마음에 망상이 나거든 칼로 반드시 날려 버리오. 다만 화두 생각하고 회광반조廻光返照하되, 염불이 바로 화두이니 갓난아기가 젖 생각하듯, 배고픈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루 종일 밥 먹을 때, 가고 오고 일할 때, 도량 쓸고 손님 영접할 때도 조금도 쉬지 말고 부지런히 염불하면, 자연히 천묘성天妙聖에 들어맞게 되려니, 속히 될 마음도 내지 말고 나태심도 내지 말고, 밤낮 쉼 없지만, 염불하오. 생사의 큰 바다를 건너가는 길 염불 수행밖에 없습니다.
3) 열반을 미리 알리고(涅槃豫告) 죽은 뒤 방광(死後放光)
성월 대사는 이러한 권왕문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권고하며 불법의 신심을 일으키게 하더니 1926년 8월 2일,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을 끊고 문도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지금부터 7일 지난 뒤 극락 왕생할 터이니, 너희들은 그리 알아라.“
이처럼 입적을 미리 알렸으나 문도들은 들은 둥 만 둥 하였더니, 과연 7일을 지나서 입적하였다.
그런데 바로 대사가 입적하던 8월 초8일, 오후 7시에 신도 안양행安養行이 대사를 간호하며 탕약을 준비하다 졸고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갓 쓴 노인 한 분이 동자를 데리고 대사가 있는 마루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씨는 ‘정말 누가 왔는가?’ 하고 병실로 들어가니까 대사는 원기를 내 앉아서 말했다.
”지금 지장보살이 문수동자와 같이 오셨구려. 그래서 내가 인사를 드리기 위해 일어났소이다. 그리하니 나에게 장삼과 가사를 입혀 주시오.“
안양행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들은 문도들이 대사의 거동이 하도 이상하여 함께 모여서 보니, 대사는 서쪽을 향하여 3번 절하더니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 6자 염불을 10번이나 부르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문도들께 말했다.
”내가 지금 극락을 가는 길이니, 너희들은 울지 말고 도움염불(助念)을 하여 나의 앞길을 도우라.“
하시더니 오후 8시에 앉아서 자는 듯이 입적하였다.
그런데 대사가 돌아가신 뒤에도 여러 번 빛을 내는(放光) 상서로운 현상이 있었으니, 입적하고 나흘 되던 8월 11일 오후 8시에 안양암에서 밝은 빛이 비쳤고, 그 이튿날 길을 떠나 서대문 밖 봉원사에서 화장할 때 두 번째 밝은 빛을 냈는데(放光), 오후 4시부터 5시까지 밝은 빛이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칠칠일(49일) 동안 기도 날을 정하고 기도승이 지장보살의 정진을 하되 매일 만 번 정근을 하였는데, 여섯 번째 칠 일 되는 날에는 세 번째 번개 빛(電光)을 쏘는 듯한 상서로운 현상이 있었다.
이것을 본 대사의 아드님 양학당 태준養鶴堂泰俊 대사는 더욱 감동되어 49일 입재 날, 첫째는 선친을 위하고, 다음에는 법계의 중생제도를 다짐하고, 부처님 앞에서 오른손 약손가락을 한마디씩 태웠다. 이날 천 명이 넘는 승려와 신도들은 모두 감격해 ”그 부자는 부처님을 위하여 난 분이다“라고 말하고, 또는 “어찌하면 부자가 그렇게도 한뜻인가?” 하며 찬탄하며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4) 성월 대사의 업적
대사는 칠성각 3각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다시 이것을 허물어 버리고 큰 가람을 건설하였으니, 안양암 도량 내에 북쪽으로는 수년간의 대웅전을 건축하고 서쪽으로는 관음전을 건축하고, 동쪽으로는 명부전을 건축하고, 다시 금륜전金輪殿과 독성각獨聖閣을 건축하고 또 앞에는 큰 염불당念佛堂을 수년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중행사와 월중행사로 시행하여, 해마다 원만계단圓滿戒壇을 모아서 보살계를 설하게 하고 달마다 미타현행회 · 지장회 · 관음회 · 칠성회를 열어서 신도들을 지도하고 신도가 세상을 뜨면 반드시 불보살의 번개幡盖(가리고 덮은 것)를 가지고 가서 지성으로 염불하여 위로하였다. 이것은 대사께서 이 절 안 사람들과 다 한가지로 거행하는 행사였지만, 대사 자신에게도 특별한 행사였으니 해마다 방생회를 열고 살생계를 가르쳤으며, 또 글씨 쓴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주워다가 정하게 태웠다. 불교에 입도한 뒤 40년 동안 꾸준히 지장정근과 아미따경 염송 · 육자염불로 공부하였으며 만일회 염불당 화주가 되어 염불 사업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또 항상 시식단을 모아 놓고 삼계에 떠도는 외로운 넋에게 먹을 것을 베풀었고, 길 가다 가난한 거지를 만나면 꼭 먹을 것을 사 주거나 돈을 주거나 옷을 주어 도왔다. 대사의 모든 생활은 옛날의 혜원 대사와 영명 연수 대사의 감화를 받은 자취가 많았다. 안양암은 당시 조선의 훌륭한 스님들이 대부분 한 번씩 법문을 설하시고 가셨으니 석주 대사石柱大師, 환옹 대사幻翁大師, 사바하 스님, 보운 대사寶雲大師, 운파 대사雲破大師, 만하 대사萬下大師, 관허 대사寬虛大師, 회명 대사晦明大師, 진하 강백震河講伯, 용성 강백鎔城講伯, 경운 강백, 월하 강백月河講伯, 청호 강백晴湖講伯, 회광 강백晦光講伯 같은 교종敎宗의 거장들이 다 한두 달이나 혹은 며칠씩이라도 설법을 하시고 지나가셨고, 선승으로는 유명한 수월, 용성, 만공, 한암 같은 선지식 스님들이 한두 번씩 이 안양암을 들렀다 가시며, 불법 종자를 터트리고 가셨다.
성월 대사의 업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많은 불자를 모아 함께 공부해 극락에 가서 태어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월 대사는 37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염불 정진시켜 그들이 임종 때 기적을 보이게 한 일이 많았다. 성월 대사는 훌륭한 법사 · 선사를 청하여 법문을 설하게 해서 대사도 무량한 법리와 넉넉한 이익을 얻는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래서 칠성각 시대에 30여 명이나 모여서 공부하는 처사님들은 이러한 선지식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며 30년 넘게 만일회 염불을 마치고 왕생극락을 한 기적을 두고 가신 이가 많다.
卍 보정의 꼬리말
엮은이가 2008년 『극락 간 사람들(韓國往生傳)』을 쓰기로 원을 세우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안양암이었다. 서울에 있어 가깝고 기록과 함께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칠성각으로 시작된 절이라 비좁고 옹색한 느낌이 들지만, 정토 수행의 전통이 곳곳에 남아 있고, 극락에 간 성인들을 많이 낸 절이다.
지금은 성월 스님 때처럼 뜨거운 염불 수행 분위기는 보이지 않지만, 정토 수행의 가람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서 세워진 절 가운데 극락 간 사람들을 무더기로 발굴해 낸 보기 드문 도량이다. 성월 스님을 빼놓고도 적어도 6명의 수행자가 극락을 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자세하지는 않지만, 연도와 간단한 임종 상황을 기록해 놓아 이 책에 모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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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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