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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소주[蘇州]에서 소주[燒酒]에 취하듯
그런 그는 2월 18일 소주의 서문을 떠나 북쪽의 어귀에서 또 다른 아름다운 풍광을 마주한다. 이를 마저 읽어본다.
<풍교에서 순풍을 만나 돛을 달고 북쪽으로 가니 동쪽에는 호구사가 있고 탑이 있었으며 서쪽에는 방산이 있고 또 탑이 있었는데 바라보니 모두 하늘을 버티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소주를 떠나는 길, 지금으로 치면 석로에 산당가를 따라 북으로 향하여 지금도 호구라 부르는 곳으로 해서 석산역이라는 곳으로 빠져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탑이 얼마나 높길 래 하늘을 버티고 섰다고 했을까. 춘추시대 오왕인 합려(闔閭)가 지금의 호구라는 곳의 연못 아래에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한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합려의 무덤을 만들 때 관 속에 검 3000개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이 검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도굴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왔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도굴은 중단되었고 이후 호구라 불렀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이 곳에 물이 들어차서 연못이 되었고, 사람들은 검지라고 부른다. 40m 높이의 정상에는 호구 탑이 있는데, 높이가 47.5m이며 수나라 때 지어진 것이다. 소주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건축물로 몇 차례의 보수공사에도 불구하고 북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한쪽은 진흙, 다른 쪽은 돌로 받침을 했는데 진흙 쪽이 가라앉아 본의 아니게 동양의 피사의 사탑이 되어 그것으로도 유명한데 지금은 보완을 해서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바로 최부는 그 호구탑을 보고 하늘을 버티고 있다고 한 것이다. 최부는 이런 풍광을 제대로 못 보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기에 그는 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밤중에 배를 타고 고소역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역시 바라보는 것으로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밤에 배를 타고 성 옆을 지났기 때문에 백낙천의 이른바 ‘칠언(七堰)·팔문(八門)·육십방(六十坊)·삼백구십교(三百九十橋)’는 지금은 옛것을 없애고 새롭게 꾸며서 뛰어난 경치와 기이한 유적들을 모두 상세히 기록할 수 없습니다.>
맞다. 분명 그는 너무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런 소주를 천하를 좌지우지 한 시인인들 그만 조용히 바라만 보았을까 소냐. 백낙천은 항주에서도 근무했지만 소주에서도 근무를 했던 관료 겸 시인이다. 일부러 조정이 시끄러워 자청해서 소주자사로 내려왔다고 했다. 그런 그가 소주의 풍성함을 단 한마디로 칠언(七堰)·팔문(八門)·육십방(六十坊)·삼백구십교(三百九十橋)’라 했다. 여기서 칠언(七堰)은 물이 들어오면 가두어 비가 내리지 않을 때 갑문을 열고 물을 방출하는 시설을 말하고 수없이 많은 다리가 있음을 나타내어 390개교를 들었고 도시가 발전하다보니 상업도시와 거주지가 번성했다는 뜻으로 60방이라 한 것이다. 어디 문인들이 소주에 대해 노닐던 세상을 한 번 알아나 보자. 제일 이른 시대 시인 이백이 나섰다.
烏棲曲(오서곡)
이백(李白 / 이태백)
姑蘇臺上烏棲時(고소대상오서시)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들이려 할 적
吳王宮裏醉西施(오왕궁리취서시) 부차는 궁중에서 서시에 흠뻑 취했었네.
吳歌楚舞歡未畢(오가초무환미필) 오가 초무의 환락 끝나지 않았는데
靑山猶銜半邊日(청산유함반변일) 푸른 산은 어느 덧 지는 해를 반쯤 삼켰었네.
銀箭金壺漏水多(은전금호루수다) 은전 세운 금항아리에선 물 많이 새었고
起看秋月墜江波(기간추월타강파) 일어나 바라보면 가을 달 물결 속에 빠져 있었네.
東方漸高奈樂何(동방점고나악하) 동녘 어느새 밝아 왔으니 못다한 즐거움 어이 하랴.
吳나라 왕 부차(夫差)가 越나라의 미인 서시(西施)에게 빠져서 밤낮으로 놀 생각만 하다가 결국 망국의 참화를 당한다는 내용이 아닌가. 이백의 <樂府> 詩에 있어서 또 다른 측면의 예술성과 기풍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솔직히 이쪽에 소질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아무튼 고소대 위에는 까마귀 둥지를 찾아들고, 오왕은 궁 깊은 곳에서 서시와 단꿈을 꾸려하는데 오초의 노래와 춤에 흥이 아직 다하기도 전에 푸른 산은 해를 반이나 삼켜버렸고 은전은 금호 속의 떨어지는 물에 가물거리고, 휘영청 밝은 달은 강 물결너머로 떨어지고 마니 이윽고 동녘은 점점 밝아 새 세상이 깃드니 못 다한 즐거움을 어찌 하려는가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소주에는 중국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정원이 있다. 중국 정원은 원림을 중심으로 하여 꾸민다. 그 대표적인 곳이 졸 정원이라는 곳이다. 정원이 조성된 것은 명대의 왕헌신(王獻臣)이 관직에서 추방되어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온 때인 1522년으로 그간 곳을 거쳐 간 주인도 여럿 있다. 당나라 때에는 시인 육구몽(陸龜蒙)의 주택이었다가 원나라 때에는 대굉사(大宏寺)로 되었다가 명대에 들어 왕헌신이 2년간 설계하고 13년간 지었다는 곳이다.
그런 정원의 이름은 시 한 구절에서 연유한다. 진대의 시 한 구절 ‘졸자지위정 (拙者之爲政) 어리석은 자가 정치를 한다)’에서 본 따 이 정원을 졸 정원(拙政園)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세상을 등지고 또 다른 세상을 맛보는 재미에 정원이 자리를 하고 있으며 이에 시적인 의미가 또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소주 사람들은 옛날부터 ‘강남 정원은 중국 제일이요, 소주 정원은 강남 제일’이라 말해왔다 한다. 창랑정 (滄浪亭) 사자림(獅子林), 졸정원(捽政園), 유원(留園) 등 소주 4대 정원 이외에도 4백 여 개 정원이 있었고, 현재도 40여 정원이 남아있다고 한다. 가난은 시를 만들지만, 부(富)도 예술을 낳는다고 하겠다.
묘하게 왕헌신이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 반대편 피렌체에서도 아름다움을 탐닉하고 있었다. 15~16세기는 동서양 모두 찬란한 르네상스를 꿈꾸고 꽃을 피웠다. 르네상스를 꽃 피웠으며 오늘날까지 가장 아름다운 예술 도시로 손꼽히는 피렌체. 현재의 피렌체가 아름다운 르네상스 도시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수세기동안 문화와 지성을 선도하며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메디치 가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단테, 마키아벨리까지 모두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았다. 중국 강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기에 최부는 글에서 비단, 금·은·주옥, 그리고 많은 장인과 예술인,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었고 천하에서 강남을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했고, 강남 중에서도 소주와 항주가 제일이었는데, 이 성(소주)이 더 뛰어났다고 말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한산사의 종에 대해서는 한마디 분명히 말을 해야 하겠다. 일본인들이 수학여행을 와 한산사가 붐빈다는 것에 대해서 이는 순수한 마음의 발로는 정녕 아니다. 일본이 대륙 점령을 할 때 청나라 시대 주조한 한산사 종을 약탈해 가고서는 최근에 사과하는 뜻에서 다른 종을 만들어 보내 대웅보전에 안치했다. 안내판에 그 내력이 다 있는데, 그런 연유로 한산사에 뭔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여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순수하고는 거리가 먼 족속들이니 인간의 근원과 원형을 노래하는 당대의 시인의 꿈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읽기나 할까.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왠지 두보의 시가 좋다. 두보의 시는 장중하고 사념적인 인상을 준다. 그런데 두보의 30세 전후까지의 시는 미감이 넘치고 호연지기가 빛난다. 후일 젊은 시절에 대한 회고의 정을 담아 쓴 <壯遊>라는 시를 보면 "일골 살부터 포부가 장대하여 입을 열면 봉황을 노래했고, 아홉 살에 쓴 큰 글씨는 한 바구니가 넘었다"고 한다. 15세 전후에는 시회(詩會)에 참가하여 문명을 날리며, 이 때 이미 술고래였다고 유년기를 회고했다. 이 시는 또 어떠한가.
江南逢李龜年(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
岐王宅裏尋常見 : 기왕의 집안에서 늘 이구년 을 보더니(명창 이구년)
기왕택리심상견
崔九堂前幾度聞 : 최구의 집앞에서 명창을 몇번이나 들었든고(명창)
최구당전기도문
正是江南好風景 : 참으로 이곳 강남의 풍경이 좋으니(불변의 자연)
정시강남호풍경
落花時節又逢君 : 꽃 지는 시절(노년)에 그대를 다시 만나 보는군요.
낙화시절우봉군
*李龜年=당.현종 태평시에 총애받던 명창.악사
*岐王=현종의 동생.문인.풍류와 교우
*崔九=현종의 문신 崔척으로 년장자를 九라표현함
젊은 시절의 명창. 악사와 문인들의 교우를 회상하고 안록산의 난으로 피폐해진 세상에서 고달파진 옛 지인을 다시 만나며 꽃 지는 풍경 속에 쓸쓸함을 노래하고 있다. 자연과 인생의 대비를 통해 슬픔을 부각한 율시이다. 두보 최후의 시로 알려졌는데 770년 59세를 일기로 이곳 강남에서 생을 마쳤다. 만년에 남긴 시들로 보아 폐결핵.
중풍 등의 지병으로 죽었다는 견해가 옳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시는 전란의 어두운 사회악에 대한 풍자가 뛰어나며 만년의 작품은 애수에 찬 것이 특징이다.
형식적 기교에 뛰어나고 왕도. 민본정치를 표방하는 시성(詩聖)이었다. 그는 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등 한시(漢詩)의 대가(大家)들에게 선구적 입지를 인정받고 1,400여 편 이상의 수작을 남겼다. 조선조에서도 훈민정음 반포 후 두시언해(한글판)를 저술하여 국민의 지적대중화에 공헌하였다. 아! 시성 두보의 생애는 고난과 우수의 연속으로 천재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쓸쓸히 갔으니 큰 역사는 당대에 알려지고 정해지는 것이 아닌가싶다. 15세 그가 교류한 사람들의 면면이 아무튼 놀랍지 않은가. 20이 되어 두보는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땅을 밟겠다는 웅지를 품고 남경, 소주 등 남부 오월(吳越)지방의 풍물을 접하며 감수성을 키웠다.
<"동으로 고소대에 내려가 / 바다에 띄울 배 이미 갖추어 놓았건만 지금도 남은 한은
/ 부상(扶桑)까지 가 보지 못한 것(장유)" >
이 구절에서 부상이 어디일까 여전히 말이 많은데 일본을 두고 한 말이라고들 평가를 한다. 약관의 두보가 해 떠오르는 일본까지 가 보려다 실패한 것으로 보고들 있다. 그의 웅장한 호연지기를 말한다. 절강성 소흥(紹興)에 가서는,
<“월나라 여인의 살결은 천하제일이고, 감호는 오월에도 서늘하다. 염계는 빼어나게 아름다우니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네(壯遊)">
라고 연애편지풍의 시를 읊기도 했다.
24세(29세?) 무렵에는 산동 지방을 여행했는데. 그의 부친 두한(杜閑) 이 연주사마(兗州司馬)로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태산은 어찌하여 제나라 노나라에 걸쳐 그 푸른빛이 끝나지 않는가 ~ 모름지기 정상에 올라 모든 산이 발밑에 있음을 한번 보리라(會當凌絕頂 一覽衆山小)">
이 구절은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음을 알고,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았다('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는 공자님 말씀과 함께 호기롭던 두보의 젊은 날을 말하고 있다. 아무튼 그 시대에서도 두보는 소흥 항주 소주를 누비며 그의 시상을 넓히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항주와 소주에서 관직을 한 백거이(白居易)는 자신의 시고(詩稿)를 모아 정리한 후 불상에 복장(腹藏)으로 넣게 했다. 그리고는 여산의 동림사(東林寺)와 동도(東都)의 성선사(聖善寺), 그리고 소주의 남선원(南禪院)에 각각 보냈다. 책마다 기문을 따로 적었다. 어느 하나가 망실돼도 다른 것은 남을 테니 일종의 보험을 들어둔 셈이었다. 각각의 기문이라면 세 곳 중 어디에서도 자기 유품이 나오면 그만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죽어서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그의 욕망이 바로 느껴진다.
19세기 동아시아 문화를 주름잡았던 추사 김정희와 연분이 있던 청나라 옹방강(翁方綱)도 백거이의 일을 본떠 자신의 '복초재집(復初齋集)'을 항주 영은사(靈隱寺)에 보관케 하고, 다시 한 부를 추사 김정희 편에 초상화와 함께 해남 대둔사(大芚寺·지금의 대흥사)로 보내 보관케 했다. 설령 중국에서 천재지변을 만나 책이 다 사라져도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것이란 희망을 담았다. 추사는 그 책을 대둔사로 보내면서 해동의 영은사란 뜻으로 '소영은(小靈隱)'이란 세 글자를 편액으로 써서 함께 선물했다.
다산이 그 소식을 듣고 아름답게 여겨 양근(楊根) 소설산(小雪山)에 남은 태고(太古) 보우(普愚 )가 머물던 절터에 암자를 세워 그 책을 옮겨 와 중노릇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자 초의(艸衣)선사를 꼬드겼을 정도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그렇지 않아도 세상이 기릴만한 큰 자취를 남겼으니 오히려 후세들은 감지덕지다. 그들 모두는 강남 항주나 소주에 뭔가를 남겨두려 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강남을 비유한 시라도 남겨 두었다.
아무튼 백거이는 811년 돌아가신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3년 후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별 볼 일 없는 한직의 벼슬자리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의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했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는 불운을 맞는다. 사실 이 사건에는 당시 유명한 당나라 재상 배도와 신라의 장보고가 관련이 있는데 설명이 기니 다른 자료를 찾아보기 바란다. 사마(司馬)라는 직책은 별로 할 일도 없고 그저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있으나마나한 명분뿐인 직책으로 요즘으로 치면 대기발령과 같이 취급되던 녹봉만 축내는 직책에 불과했다.
그 사건은 백거이가 관리에 입명된 이래 처음으로 겪은 뼈저린 좌절이었고 매우 큰 심적 고통이었다. 그로인해 그의 시심(詩心)은 유유자적하고 감상(感傷)으로 향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바로 이 고난의 시기에 백거이 최고의 서정시로 일컬어지는 불후의 명작 비파행(琵琶行)의 詩가 세상에 나온다. 참 묘한 게 태평세월을 구가할 때보다 시련에 봉착 할 때 문인들은 보다 글에서 생기가 나고 윤기가 흐른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대표작은 모두 유배로부터 얻은 산물이다.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 연연이 흐르는 절제의 미학이 있으며 기름진 향유로서는 촉수가 다양하고 예민하여져 그 느낌을 글로써 표현을 하지 않는가 싶다. 그런 점에서 소주는 예술가의 터전이며 문인들의 안식처라 여겨진다. 그러기에 천하명필 왕희지 안진경도 여길 다녀간 모양이다. 암벽에 그들 친필 시가 새겨져있다고 한다. 그들뿐이 아니다. 오왕 합려를 섬기던 손무가 쓴 것으로 그동안 널리 알려진 손자병법의 주인공을 기념하는 손무정(孫武亭)이 소주성 안에 있다고 했다.
온갖 꽃과 벌 나비가 모여드는 소주, 그곳의 정원의 반 이상이 호수다. 도영루(倒影樓)는 물 속 나무 그림자를 감상하는 누각이다. 향원당(香遠堂)은 호수의 연꽃 향기 맡는 누각 이름이다.‘향기가 멀다’는 향원(香遠)의 뜻은 주무숙의 ‘연꽃은 멀수록 향기가 맑다(香遠益淸)’는 데서 따온 것이다. 견산루(見山樓)는 앞 산을 보는 누각이다. 원앙관(鴛鴦館)은 손님 대접하던 곳이다. 원앙관 남색 유리는 명나라 때 천산(天山) 남북로 실크로드를 통과해서 이태리서 수입한 오랜 유리다. 숱한 누각 이름 뜻만 적어나가도 선비들의 그윽한 운치를 배울 수 있을 정도다. 백향목(白木香) 나무숲 사이 자갈길 따라가면, 계수나무는 꽃을 피우고 태산목은 푸른 잎으로 태산처럼 하늘을 가리고, 작은 오솔길은 정자와 누각 사이에 이어지거나 회랑으로 연결되고, 정자는 꽃무뉘 새겨진 화창(花窓) 통해서 경치 더 아름답게 조망한다.
대(臺)는 멀리 조망하기 위한 축조물이다. 누(樓)는 대 위에 사방 탁 트이게 지은 건물을 말한다. 정(亭)은 경치 좋은 곳에 휴식하기 위해 건립한 집이다. 각(閣)은 2층 이상 집을 말한다. 이 밖에 당(堂),헌(軒),재(齋)의 건물은 선비의 거처나 공부하는 곳들의 명칭인데 그것들이 한 데 모아져 호수와 지형에 따라 예술적 배치의 극을 달리고 있다
이렇듯 뜻이 깊고 수려한 아름다운 물의 도시 소주에서는 미인이 뜯는 비파소리가 제격이 아닐까. 비파 타는 여인을 만나 읊은 백락천의 ‘비파행’(琵琶行)이란 시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꼭 이곳 소주 미인을 직접 봐야 한다고 생각하였었다. 백락천은 양자강 희미한 달빛 속 등불 밝힌 배에서 여인을 만났다고 한다. 여인은 비파로 얼굴을 반쯤 가려 은근한 멋을 풍기며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데, 곡조는 소리를 이루기도 전에 정이 담겨있었다.
한 소리 한소리에 슬픔이 서려, 평생 불우한 정을 하소연하는 듯, 아미를 약간 숙이고, 심중의 무한한 사정을 말하는 듯, 배는 소리에 취한 듯 조용하고, 다만 강물 위에 가을달이 유난히 희게 보이더라고 했다. 어느 참 내게 1천2백 년 전 시인이 만난 비파를 타는 미인이 화려한 비단을 몸에 감고, 옥같이 흰 피부에 구슬처럼 맑은 눈, 그윽한 미소를 띠고 내 앞에 다소곳이 내려앉는다.
장안(長安) 기생으로, 일찍이 목(穆)·조(曺) 두 선재에게서 비파를 배웠다는데 다 늙어 그녀는 이제는 상인의 아내가 된 처지, 곡이 끝나자, 가련하게도 고개를 떨구고, 젊었을 적 즐거웠던 추억을 회상하며 신세타령을 하는데, 비파는 황홀경인데 몰골은 시들어, 사랑을 모르는 이 아름다움을 알 리 없고 가냘프면서도 황홀한 바파의 곡조는 더더욱 알 리 없으려니.정감 잃은 비파 소리는 애처롭기 그지없다. 그래서 백거이도 동병상련으로 글을 적어 주었다 하지.목석연하다 싶은 세상은 늙어서인가, 초라해서인가 아님 무감해서인가. 자꾸 딴 생각이 든다. 그 의미를 담아서일까, 왠지 나도 바파행을 닮은 듯 이 구절이 그냥 그렇게 좋다.
老大嫁作商人婦(노대가작상인부) 나이 든 몸이 상인의 아내로 시집갔어요.
商人重利輕別離(상인중리경별리) 상인은 이문만 알지 이별은 모르니,
前月浮梁買茶去(전월부량매다거) 지난달에 부량으로 차 사러 떠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