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에는 정말 예간다 제간다 했지”
내가 그 분을 만난 것은 하루 종일 누구와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가 그나마 서명을 받을까 해서 마을에 들어갔을 때 서명을 하는 이웃 젊은이를 구경이라도 하듯이 저적거리고 다가오신 분에게 서명을 부탁하면서 부터였다.
물론 그 분이 서명을 하지는 않았고 이웃집 젊은이가 대필을 하긴 했지만 내가 그곳에 늘 근무를 하면서 그분을 자주 만나게 된 것이 계기라면 계기 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통상 만남이 그렇듯이 우리의 만남도 어디에서 살았는가와 본관이 어디인가를 따지면서부터 시작이 되긴 했었다.
누구나 그렇게 물어보는 것은 자기와 연관이 조금이라도 이어지는 어떤 끄나풀이라도 닿는 것이 있다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이기에 나도 그런 유의 어떤 공통분모를 찾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고향에서 그분이 오래 사셨다는 것을 알고는 금새 가까워 짐 을 느낀 것이다.
“거기선 어디 사셨어요?”
“원머루”
그러면 다시 그곳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천 관이며 춘천 관 순흥옥 등...
그 옛날 시장 안을 장악했던 시골의 뭇 사내들을 후려내 어느 집은 가세가 기울기 까지 했던 선술집 작부들까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훤하게 알고 있었다.
그 때의 이야기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기이긴 했지만 그래도 들어서 알기는 다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돈도 참 많이 벌었었지 대추장사를 했는데 사면 곱장사는 됐었으니까”
나이가 여든 여덟이라고 하신 그 분은 아직도 모습은 건강해 보였지만 행동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은 모르겠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 걷는 게 자꾸 힘들어져”
늙으면 모두 그렇게 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열심히 운동을 하시면 아마 좋아 질 것이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를 떠나서 다시 용문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그 분은 예전의 일들이 아주 선하게 떠오르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기도 하면서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살아온 날들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겪고 살아온 세월 속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내재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온 다음에는 그런 일들을 반추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한때는 뽕나무 육묘사업을 크게 한 적도 있었는데 그만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서 손해를 엄청나게 본 적도 있었지”
그러나 옛날 사람들 누구나 그랬듯이 그 분도 오뚜기처럼 한번 실패를 하면 다시 재기를 거듭하면서 그래도 노년까지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했다.
“저건너 저 집 앞에 있는 논들이 모두 내가 팔아먹은 땅이지”
그러나 자기만한 자식은 두지 못한 듯 맞 아들은 장애를 입고 들어앉아있고 몇 째 아들은 이혼을 한 채 집에 와서 당신의 수발을 들고 있다고 했다.
늘은 부인이 거동이 시원치 않아서 아들이 살림을 하고 있다고..
지난 과거를 회상하시는 그 분에게 한마디 했다.
“그렇게 날리실 때에는 주변에 여자들도 꽤나 많았을 거 같은데 정말 그러셨어요?”
“그런 걸 말이라고 하나?”
“어디 그런 이야기 좀 해 보세요”
“설사 내가 그런 일이 많았다 해도 자네 앞에서는 그런 말 못하지”
아직도 고루하신 노인은 그런 말을 접어 두신다.
그 노인이 며칠 전에는 집 앞 신작로 둑에서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 전에는 집 앞에서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하셨어요?”
그게 궁금해서 물으니 그 노인은 말했다.
“거기다 도라지를 심었네 도라지는 삼년이 지나야 캔다고 하는데 내가 죽고 나면 자식들이 캐 먹으라고 심었어 내가 어찌 삼년을 살겠어 그 안에 죽어야지”
내일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듯이 노인은 그 아픈 다리를 가지고 자식들이 캐 먹을 수 있는 도라지를 힘들게 심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