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꼬집의 여유
정지연
회색빛 하늘이 축축하다. 눈이라도 올 것 같이 잔뜩 찌푸리고 있다. 라디오에선 흘러간 옛 노래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365애창곡집’에 실려 음악시간에도 많이 불리던 노래들이다. 보리수, 금잔디, 비목, 캐 세라 같은…. 이런 날은 눈이라고 펑펑 내려야어울릴 것 같다. 둥그런 무쇠 연탄난로 위에서 ‘달그락달그락’ 주전자에서 퐁퐁 하얗게 품어내던 보리차 냄새, 익어가는 고구마 냄새가 그리워진다. 눈 오는 날 학교 옆 빵집에서 호호 불면서 먹던 달달했던 단팥죽 생각이 난다. 남편도 똑같이 옛날 생각이 났나보다.
“ 팥죽이 먹고 싶어지네. 눈이 오면 더 좋고.”
치과에 갈 준비를 하던 남편이 창밖을 보며 오늘이 동지란다.
“내일인데? 내일 해 먹으면 어떨까요?”
달력을 보니 오늘이 맞다. 집 콕에 방콕만 하고 있어 그날그날이 똑같으니 날짜 가는 것도 모를 만큼 게을러진다.
국물이 자작해졌다. 젓고 있던 주걱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팥을 삶고 준비를 했다. 앙금을 내리지 않고 통팥 그대로 쑤는 단팥죽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핸드폰을 옆에 놓고 동영상 화면을 보며 열심히 따라 하고 있는 중이다. 젓고 있던 주걱을 놓고 불을 껐다. 완성이다.
끝인 줄 알았더니 ‘계피가루를 한 꼬집 넣어주세요.’라는 말이 덧붙는다. 신바람이 나서 핸드폰을 보며 옆에서 연신 중계방송을 하던 손자가 ‘한 꼬집’이 뭐냐고 묻는다. ‘아니 단팥죽에 무슨 계피가루?’ 의문이 갔으나 전문가의 말을 듣기로 했다. 얼마큼의 양인가? 느낌상 손자의 볼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꼬집어 올렸다. ‘진짜요?’ 손자가 자기 볼을 다시 한 번 꼬집어보며 큰소리로 웃는다. 두 손가락사이의 양이 ‘한 꼬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말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양의 표현이다. ‘한 꼬집, 두 꼬집….’ 얼마나 귀여운 말인가 꼬집고 싸우다가도 금방 호호호 웃던 친구의 얼굴이 생각나는 정겨운 말이다.
한 숟가락 맛을 본다. 계피향이 단맛과 어우러져 입안에 가득 퍼진다. 맛이 기가 막힌다. ‘할머니, 나 두!’ 옆에서 까치발을 들고 솥을 들여다보던 손자가 맛을 보더니,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든다. 단맛이 강한 단팥죽에 어울릴 것 같지 않던 계피가루 한 꼬집이 더 깊은 맛을 냈다. 강한 단맛을 줄이고 구수함이 계피 향을 만나 더 진해졌다. 이렇게 한 꼬집은 아주 적은 양이지만 맛이 덜할 수도 있고 기가 막힌 맛이 되는 중요한 ‘양量’이다.
생각해보니 음식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말 중에도 ‘한 꼬집’처럼 살짝 올려 얹어서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있는 말들이 많이 있다. ‘더 예쁘다. 더 밉다.’ ‘ 참 예쁘다. 참 밉다.’…. ‘김서방’과 ‘김가놈’에 따라 소고기의 양이 달라졌다는 이야기처럼 작은 한마디의 따뜻한 말로 희망과 행복이 넘칠 수도 있는 양이 된다. 그런가하면 조금 참으면 될 말을 뱉어냄으로 후회하고 아주 작은 오해로 인해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등을 지게 되는 경우도 많다.
말이 아니더라도 시장에서 덤으로 건네주는 귤 한 개, 얹어주는 나물 한줌…. 서로 나눠 갖는 이런 작은 정다움이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훈훈한 한 꼬집이 아닐까? 사람도 한 꼬집 같은 사람이 있다. 옆에 있으면 힘들어도 더 즐겁고 행복해지는 그런 사람. 그래서 계속 같이 있고 싶어지는 사람이다. 모두가 남을 생각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찰랑거리며 가득 채워지길 기다리는 마음 그릇에서 욕심과 시기를 한 꼬집 덜어내고 그 자리에 남을 배려하는 감사와 너그러움을 한 꼬집 담아주는 여유를 갖고 살아간다면 조금은 더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요즘같이 힘든 때 한 발 따뜻하게 다가서고 한 발 뒤로 물러서줄 수 있는 배려의 여유를 가진 그런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한 꼬집 만큼의 작은 마음의 여유를 갖는 다면 한결 편안하게 이시기를 이겨 나갈 것 같다.
그동안 길들여진 내 마음 그릇을 들여다본다. 작은 여유의 틈도 없이 채울 것들은 채우지 못하고 그릇 가득 쓸데없는 욕심들만 가득 채워 서로 엉켜 미움과 원망만 불려가고 있지는 않는가? 버릴 것들을 비워내고 나눠주며 겸손과 감사로 채울 수 있는 한 꼬집 같은 사람, 아니 마음 그릇에 한 꼬집의 여유를 항상 준비해 두는 습관을 길들이고 싶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남편이 좋은 냄새가 난다며 무슨 냄새냐고 물으며 흠흠 거린다. 식탁 위에서 냄새를 품어 올리고 있는 단팥죽 그릇을 가리키며 손자가 손으로 자기 볼을 꼬집어가며 ‘한 꼬집’ 때문이라고 큰 소리로 설명을 한다. 계피향이 구수함과 달달함에 함께 어우러져 식탁을 가득 채운다. 남편이 먼저 숟가락을 든다.
“ 어디 한 번 먹어볼까?”
“ 으-음, 이 맛이야!”
집안 가득 흐뭇한 향이 가득 찬다.
첫댓글 아~~너무 이쁜 말이군요, <한꼬집>
단팥죽이 먹고싶단 생각을 안해봤는데 선생님 단팥죽을 보니 급 당깁니다. ㅎ 한꼬집 넣고 한꼬집 덜어내고 잘 살아보아요^^
오랫만에 한 번 먹어보면 꽤 괜찮아요. 더구나 분위기 있는 그~~ 카페에서~~ ㅎㅎ
'한고집' 비워내면 ' 한 꼬집' 행복인데 --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또 잘 안되게~~ 참 힘드네요.
아영샘의 첫답글~~ 정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단팥죽에 이런 비법이 있는 줄 몰랐네요. 계피 한꼬집을 넣으며 소재를 찾고 철학을 발견 한 점이 놀랍습니다.
저도 마음 그릇에 한 꼬집의 여유를 항상 준비해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비워낸만큼 평안하고 여유롭다는데 살다보면 그렇지가 못하네요.
노력은 해 보려구요.
답글 감사 + 감사~~입니다.
'한꼬집' 예쁘고 살가운 말이네요.^^
한 꼬집의 마음의 여유...
공감하며 마음에 담습니다.
ㅎㅎ 귀여운 말 맞지요?
더해지는 나이 탓인지~~
'한 꼬집' 비우면 '한꼬집' 여유가 생기는데 ... 그게 힘들더라구요
엄청 바쁘실텐데 답끌까지 주셔서 감사 또 감사합니다.
TV를 통해 많이 들어본 단어지요.
주로 요리사들이 사용하는 이 말이 이토록 오묘한 진리를 지녔는 지 감동했습니다.
살아가는 데 실제로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고 한 꼬집의 여유가 필요한 데 그 걸 실천하지 못하네요.
늘 넉넉한 정선생님의 마음이 읽혀져 흐뭇합니다.
선생님 이렇게 답글까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비워낸 만큼 편안할텐데 그게 잘 실천이 안되네요.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 봐야겠어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것 같습니다. 단팥죽처럼 달달한 순간을 한꼬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조금만 넣어도 향을 드러내는 계피처럼 조금만 마음써주면 너무도 달라지는 세상인것을 우리는 알고있는것이지요.
그렇겠지요. 세상이 달라지겠죠.
근데, 그게 마음같이 잘 이행이 안되더라구요.
읽어주고 답글까지-- 감사합니다. 활력 넘치는 명희샘 !
보고싶네요.
'사람도 한 꼬집 같은 사람이 있다. 옆에 있으면 힘들어도 더 즐겁고 행복해지는 그런 사람. 그래서 계속 같이 있고 싶어지는 사람이다. ' 한 꼬집의 의미를 딱 꼬집어서 내 놓은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