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꿀 따는 기계(採蜜器) 돌리기〉
구연식
인간의 부지런한 삶을 비교 표현할 때 개미와 꿀벌이 자주 등장한다. 개미의 삶은 자기들의 새끼들을 낳고 기르며 겨울을 나기 위해서 봄부터 늦가을까지 허기진 잘록한 허리를 쥐고 얼굴은 숯 검댕이 되도록 일만하는 부지런한 곤충이며, 꿀벌 역시 개미처럼 부지런한 군집(群集)으로 살아가는 곤충이다. 하지만 벌은 인간에게 꿀을 모아 주고 있다.
그렇지만 벌이 꿀을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니라 인간이 무자비하게 강탈해 가고 있는 일이다.개미는 자기들의 삶에만 부지런하게 충성을 다하지만, 꿀벌은 자기들도 살면서 인간에게 가장 달고 맛있는 꿀을 제공해 주는 익충(益蟲)이다. 지구상의 충매적(蟲媒的) 과일나무에 열매를 맺게 하는 등 인간과 자연계에 종(種)의 보존에 지대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중국 진나라 때 어떤 명리학자가 시골을 지나가다가 점심때가 되어서 점심 요기(療飢)나 할 요량으로 양봉(養蜂) 주인에게 다가가서 사주(四柱)를 봐주겠다고 꼬드겼다. 생년, 월, 일, 시를 물어 맞춰보니 진시황제와 동일한 생년, 월, 일, 시였기에 진시황제는 지방의 많은 왕을 거느리고 살고 있고, 양봉주인은 많은 여왕벌을 거느리고 있어 황제와 같은 사주팔자로 살고 있다고 칭송하며 점심 한 끼를 때웠다는 우스갯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꿀벌은 계층별 서열이 뚜렷한 위계질서를 철칙으로 살아가는 곤충이다. 자기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는 부끄러움을 주기도 한 곤충이다. 지구상 어디를 가나 꽃은 으레 꿀벌과 상생하고 있어 어쩌면 꽃씨 식물과 꿀벌의 생성 시기는 같고 인간 삶의 언저리에서 같이 부대끼며 살아왔을 애완충(愛玩蟲)이다.
나의 대학 동창 친구 모임인 삼순회(三順會-친구 3명 부인 이름에 모두 ‘順’자가 들어 있음)가 있다. 벌써 40여 년간 격월마다 부부끼리 만나는 탓에 ‘뉘 집 살강에는 숟가락 몽댕이가 몇 개 있고, 댓돌 위에 고무신 문수가 어떻게 되는지’ 훤히 다 아는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이 이제는 고희(古稀) 줄에 앉아 육체적인 노쇠로 약간의 불편함을 하소연하기도 한다. 전남 영광이 고향인 친구는 한창때는 월남전에 참전할 만큼의 체력이 왕성한 친구로 현직에 있을 때부터 고향 영광에서 양봉(養蜂)을 하면서 어린 시절 고향의 목가적(牧歌的) 향수에 젖어 광주와 영광을 오가며 소일하고 있어 친구들은 그를 부러워하며 격려하고 응원해 주었다.
그런데 2,3년 전 인가 그 친구가 나이 어린 후배에게 “시간 있으면 영광 양봉장에 와서 채밀기(採蜜器)나 돌려주소?”라 전화했다는 말을(고 하는 전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지난번 모임 때는 이제는 힘들어서 금년만하고 모두 정리하고 양봉 일을 그만 접는다는 말을 들으니 친구가 짠하게 보였다.
그래서 아카시아 꽃 만발하는 5월 모임은 영광 친구의 양봉 꿀 따는 작업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오늘 아침에는 호남 고속도로와 서해안 고속도로를 번갈아가며 전남 영광 어느 시골의 친구 고향에 오전쯤 도착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벌써 채밀 작업이 끝났다기에 법성포(法聖浦) 포구에서 굴비 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5월 마지막 주말 법성포 일대에는 단오제 축제, 굴비 축제, 그리고 ‘K.B.S 전국 노래자랑’ 녹화까지 축제로 어우러져 법성포 포구는 전국의 관광객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축제장을 대충 둘러보고 건어물, 영광 특산물 모시 송편 등을 한 꾸러미씩 사들고 주차장 쪽으로 오다가 포구에 민물이 합류되는 물가를 살펴보니 어른 손가락 크기의 망둥어 떼들이 좌우로 몸을 뒤집어 가며 머드팩을 즐기고 있었다. 민물 게들도 얕은 물가에서 잠수하면서 일광욕 겸 물갈퀴질이 한창이다. 인간이 관여치 않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저렇게 좋은 자연의 이치(理致)인데…
법성포를 뒤로하고 불갑사(佛甲寺)에 들러 절 경내를 둘러보았다. 초여름 오후 산사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나뭇잎들은 모두 졸고 이따금 풍경소리만 가냘프게 들리는 떡갈나무 그늘아래 둘러앉아 지난 학창 시절 이야기, 시국 문제들을 갑론을박(甲論乙駁)하면서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애써 채밀한 아카시아 꽃 꿀단지를 염치없이 받으려니 우윳빛 꿀단지에 친구의 땀과 노고가 담겨 있어 보기도, 먹기도 아깝다. 친구야 고마우이..... 그리고 건강 함세.....영광에서 세 친구는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재다짐하고 광주로, 한 친구는 정읍으로 그리고 전주로 각기 삶의 터전으로 말(馬) 고삐를 돌려 뽀얀 먼지 내뿜으며 헤어졌다.(20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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