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호(30)씨는 1급장애인이다. 대학교 1학년이던 94년 사고를 당해 목뼈(경수)손상 전신마비장애를 갖게 됐다. 누르고 눌러도 흘러 넘치는 꿈과 사랑이 충만했던 청년 시절. 그는 목과 어깨 근육으로 팔을 약간 움직일 수 있는 것 외에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장애를 갖게 됐다. 하늘과 땅이 무너졌던 그 날의 사건은 1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행형으로 그의 곁에 있다.
10년의 세월… 전신장애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으로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깊고 깊은 절망과 비탄의 나날들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사고순간만큼이나 뇌리 속에 큼직하게 아로 새겨진 ‘대사건’이 지난해 2월 그에게 다가섰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전동휠체어나눔연대를 통해 전동휠체어를 무상으로 기증 받게 된 것이다.
전동휠체어는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대사건인가. 기자는 전동휠체어가 고씨의 일상을, 인생을 어떻게 바꾸었는 지 알아보기 위해 고씨와 함께 하루를 지내기로 했다.
|
|
고경호씨와 여자친구 김영실씨가 서로 얼굴을 보며 나란히 걷고 있다. 전동휠체어가 생기기 전에는 김씨가 항상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야 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외출한다니까 기분 좋아요”
|
|
고씨는 '취재를 통해 나를 드러낸다는 게 부담되지만, 여론형성과 제도개선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낀다'고 말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약간 쌀쌀했지만 햇살이 상쾌하게 부서지던 지난 2월 18일 오전 10시.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고씨의 아파트를 찾았다. 고씨는 부모님과 누나 부부 그리고 한살바기 조카와 함께 살고 있다. 고씨와 가족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경호씨는 이미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외출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약간 들떠 보였다.
“어제 한 숨도 못 잤어요. 잔뜩 기대하고 기다렸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낸다는 게 부담이 되지만, 여론형성과 제도개선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껴요. 밖에 나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닌 다니까 기분이 좋네요.”
방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길을 나섰다. 먼저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고씨의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까지 오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취재진이 고씨를 들어 올려 차에 태우는 것까지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전동휠체어를 싣는 게 문제였다. 취재진 차량에 화물칸이 있어 공간은 충분했지만, 무게가 80Kg에 달하는 전동휠체어를 든다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2명의 취재진이 모두 남자였기 때문에 가까스로 실을 수 있었다. 남자 혼자나 여성 일행이 전동휠체어를 든다면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화물칸이 없는 일반 승용차에는 아예 들어갈 수 없다는 설명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가장 불편해요. 서울시가 운영하는 장애인 택시가 있는데, 지방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없어요. 지하철을 사용하는 게 가장 편한데, 지하철이 없는 곳에 갈 때는 난감하죠.”
전동휠체어 덕분에 9년만에 스스로 힘으로 외출
|
|
고경호씨가 어머니 양애자씨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인천에서 노량진으로 가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해 2월 전동휠체어를 받았을 때의 느낌이 궁금했다.
“전동휠체어를 처음 받았을 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았어요. 잃었던 자유를 다시 찾은 느낌이었죠. 혼자 힘으로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더군요. 가장 먼저 공원에 나가서 여자 친구를 만났어요. 매일 집에서 만나다가 제가 약속 장소로 나갈 수 있게 된 거죠. 사고 난지 9년 만에 혼자 힘으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신랑 입장!’할 때 누가 밀어주는 휠체어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식장으로 입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뿌듯했어요. 상상만 해도 기뻐요.”
사고 후 고씨는 서울 ㅎ대학교에 복학했다. 선후배들이 휠체어를 밀어주고, 강의실로 올라갈 때는 업어주기도 했다. 학교는 장애인 편의 시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학교 생활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선후배들이 고씨를 챙기는 것을 깜빡 잊고 강의실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몇 시간동안 강의실에 갖혀 있기도 했다. 고씨 스스로 휠체어를 바퀴를 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안되겠다 싶었죠.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고…. 그래서 방송대로 진학했어요. 전공도 경영학에서 영문과로 바꾸었죠. 다행히 타자는 칠 수 있으니까 번역 등의 일은 자리에 앉아 할 수 있잖아요?”
“분위기나 맛은 따지지 않아… 들어갈 수 있느냐가 중요”
|
|
대형 페밀리 레스토랑도 장애인 시설이 전무한 경우가 많았다. 한시간 가량 찾다 겨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오후 12시경 상도동에 도착했다. 삼성농아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여자친구 김영실(32)씨도 나왔다.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한 대형 패밀리 레스토랑. 김씨가 매우 좋아하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식당은 2층에 있는데, 엘리베이터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2층까지 전동휠체어를 들고 가는 것은 무리였다.
“이런 경우는 흔해요. 저 때문에 저와 함께 길을 나선 사람들이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합니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은 대부분 음식점의 분위기나 맛을 따지지 않아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한 시간 정도 식당을 찾아 헤매 다니다 노량진에 있는 피자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행 중에 피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울퉁불퉁한 인도, 전동휠체어로 다니기도 쉽지않아
|
|
보도블럭이 깨지거나 턱이 높아 전동휠체어로 다니는 데 위험한 경우가 많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차장에서 식당까지 걸었다. 고씨는 전동휠체어를 탔다. 주차장에서 식당까지 가는 길이 험해서 전동휠체어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보도블럭이 깨진 곳도 많았고, 어긋난 곳도 많았다. 인도와 차도를 가르는 턱이 높아서 인도로 진입할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그와 일행이 된 기자는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어서 좋긴한데, 막상 길을 나섰을 때 막막할 때가 많아요. 인도로 가다가 인도 끝의 턱이 너무 높을 때가 있죠. 어린 아이들도 쉽게 내려갈 수 있는 높이지만, 제 입장에서는 절벽을 만난 셈이죠. 다시 돌아가서 차도로 내려가야 해요. 매년 보도블럭을 갈아 엎는 공사를 하는데 달라지는 게 없어요. 오히려 공사 때문에 이동권만 제한될 때가 많죠. 한번은 보도블럭이 깨진 곳에 바퀴가 빠져서 지나가던 행인 네 분이 달려들어 빼 준 일이 있어요.”
고씨는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없어 여자친구가 먹여줘야 했다. 눈 앞에 먹을 것이 있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먹을 수 없다. 식사를 하며 두 사람이 만난 이야기를 들었다. 고씨와 김씨는 3년전 인천의 한 선교단에서 만났고 2년전부터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두 사람은 장래를 약속했지만, 김씨 집안에서 반대가 있어 아직 연인으로만 남아있다. 두 사람은 “꼭 허락을 받아 결혼하고 싶고 그렇게 될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깜짝 이벤트도 할 수 있다”
|
|
고씨는 '전동휠체어를 갖게된 이후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다. 산책 중인 고씨와 김씨. ⓒ미디어다음 김준진 | 점심 식사 후 잠시 산책을 한 후에 김씨는 일터로 돌아갔다. 다시 고씨를 차에 태우고 전동휠체어를 힘들게 차에 실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초경량 전동휠체어가 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 엄두를 낼 수 없다. 현재 고씨가 타고 있는 전동휠체어는 380만원 정도하는데, 초경량 휠체어는 2배 더 비싸다.
일행은 여의도 한강고수부지로 향했다. 한강으로 가는 차안에서 고씨가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척추장애인은 신체 조절 능력이 떨어져 체온 조절이 쉽지 않아 추위를 쉽게 탄다고 말한다. 차의 히터를 틀고 창문을 닫았다.
한강고수부지에 도착, 한강변으로 가고 싶었지만,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사진기자가 다른 일정이 있어 떠났기 때문에 전동휠체어를 함께 내려줄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차 안에 앉아 한강을 바라봤다.
“전동휠체어가 생기기 전에는 어머니가 제 손발이 되어주셨죠. 올해 63세이신데, 점점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많이 도와주시지만, 전동휠체어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자신감도 생겼어요. 집에만 있을 때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많이 위축됐는데, 외출이 늘면서 자신감이 늘었죠. 예전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뭘 사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제는 ‘내가 사다 줄께’라고 말할 수 있어요.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거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깜짝 이벤트도 할 수 있어요. 제과점에 직접 가서 케익을 사 갖고 올 수도 있고요. 항상 뒤에서 나를 밀어주던 사람과 나란히 길을 갈 수 있어요. 전동휠체어 없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고 후 9년만에 한강고수부지는 두번째 왔다. 차에서 내릴 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오니까 너무 좋단다. 여자 친구가 퇴근할 때까지 한강변에 있기로 했다.
“저 같은 장애를 가지게 되면 사고 후 15년 정도 산다고 하더군요. 그 동안이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게 대부분의 장애인들의 심정일 겁니다. 전동휠체어를 처음 탔을 때 ‘이렇게 사는 것도 방법이구나’, ‘이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장을 혼자 갈 수 있으니 이제 취직을 해야겠다’는 목표도 생겼고요.”
“장애인이 불편하지 않은 공간은 어느 누구도 불편하지 않아”
|
|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 턱을 오르고 있다. 이 정도는 턱이 낮은 편이지만 주위의 도움없이 오를 수는 없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 다시 여자친구가 일하는 상도동으로 갔다.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기자는 함께 마실 음료수를 사러 갔다. 그런데 실수로 열쇠를 차 안에 둔 채 문을 닫고 말았다. 안에 고씨가 있었지만 고씨는 문을 열 수 없었다. 수십분 만에 겨우 기자가 차 문을 열었다. “열쇠를 돌려서 전원을 올리고 유리를 내리려고 했는데…” 고씨가 멋적게 웃었다.
“장애인이 불편하지 않은 공간은 어느 누구도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유모차를 끌기도 좋고, 노인들이 이동하기도 좋잖아요. 모두 자기 일로 생각하고 장애인의 이동권을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고씨의 말을 듣고 취재 중에 만난 한 노인이 생각났다. 중풍으로 전동휠체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그 노인은 “멀쩡한 몸으로 살다 기력이 쇠하니 장애인의 고충을 알겠다”며 “장애인의 문제는 앞으로 누구에게나 닥칠 지 모르는 문제”라고 말했다.
최근 전동휠체어 보급운동이 활발해지고, 제도적 지원도 논의되고 있지만, 이게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어디든지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산책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이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 아니겠는가.
오후 5시가 되자 김씨가 일을 마치고 나왔다. 두 사람은 기자에게 영등포의 한 백화점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오랜만에 멀리 나왔으니 1시간 정도 백화점 구경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백화점 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한강대교를 건넜다. 고씨는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은 더 걸리지만 몇 년 만에 한강을 바라보니 좋다”며 웃었다. 기자는 두 사람을 백화점에 내려줬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백화점으로 향했다.
기자에게 오늘 하루 만큼 우리 사회가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아름다운 기계, 전동휠체어를 가슴으로 마주한 정말 뜻 깊은 하루였다. 경호씨를 통해 본 하루는 안타깝고 행복했다.
|
첫댓글 우리나라는 아직은 전동휠저가 다닐수가없고 아직은 멀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