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도 사랑, 남도의 명소 (36번째 이야기) 🎀
◇우리고장 우리선조들의 빛나는
발자취를 찾아서 ◇
《남도의 고택 구례 운조루 》
조선시대 때 양반이 지을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집이 99칸이었으며,
그 이상 지으면 역모의 의사가 있다고 해서 가문 전체를 몰살 하였다.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으로, 사랑채 누마루의 당호다.
그러나 '구름 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중국의 대 문장가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중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아오네)"에서 따온 집 이름이다.
호남지방 대표적 양반가옥으로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대구 사람 삼수공(三水公) 류이주(柳邇冑, 1726~1797)가 18세기 후반인 1776년 기둥을 세우기 시작해서 6년 뒤인 1782년 완공했다.
그는 28세인 1753년(영조 29년) 무과에 급제 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43세인 1771년 낙안 군수로 부임했다. 이 당시 낙안에서 보낸 세곡선이 한양으로 가던 길에 서해상에서 침몰했다.
그 죄를 물어 조선 조정은 류이주를 함경도로 귀양 보냈다. 다행히 이듬해에 죄가 풀려 그는 구례로 내려와 살며 조카 류덕호를 구례 부자였던 이시화(1725~1784)의 딸과 결혼시켰다.
이후 류이주는 삼수부사로 발탁되어 가며 덕호를 양자로 입양시키고, 이시화의 땅이었던 지금의 운조루 자리를 집터로 양여 받아 집을 짓기 시작했다. 6년 뒤인 1782년 류이주가 평안도 용천부사로 있을 때 집은 완성되었다.
운조루 신화의 시작이었다.
운조루가 지어진 땅은 본시 경사진 산자락이라 산사태의 위험도 있었고 바위가 널려 있어 집터로는 부적격했다.
하지만 후에 노고단 선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락지 명당터로 소문나며 ‘조선 3대 명당처’로 널리 알려졌다.
아마 운조루가 있는 오미동 지역의 너른 들인 구만들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공중에서 보면 금가락지처럼 둥그런 모양새를 가진데다가 운조루 주인인 류씨 가문이 대를 이어가며 부를 유지했기에 이런 소문이 생겼을 것이다.
오봉산 쪽에서 바라본 오미동(산 자락)과 구만들. 풍수적으로 봤을 때, 운조루 뒷 산인 병풍산의 동쪽인 좌청룡이 서쪽인 우백호에 비해 현저하게 짧다. 백호보다 청룡쪽 기가 허하다는 이야기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현재 토지면 소재지 들어가는 입구쪽 야산에 대형 돌무더기인 조탑을 쌓아 놨다. 이를 '비보산수'라 하는데, 기가 허한 곳을 보완하는 장치인 것이다.
한편 일제 강점 시절에 풍수가들은 운조루 터를 금구몰니 명당지로 여겼다. 당시 풍수가들은 구만들 일대에 3대 발복처가 있다고 하며 그 땅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금구몰니(金龜沒泥,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있는 명당처), 금환락지(金環落地, 선녀가 땅에 내려와 목욕한 뒤 다시 하늘로 오르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명당처), 오보교취(五寶交聚;5가지 보물, 즉 금·은·진주·산호·호박이 가득 쌓여 있는 명당처)가 그 땅이었다.
풍수가들은 이 세 터를 찾아 집을 짓고 살면 하늘의 기운을 받아 힘들이지 않고도 부귀영달을 누린다고 했다. 이 말에 현혹된 사람들이 전국 각처에서 구만들로 몰려와 발복터를 찾았다.
금구몰니 터는 구만들의 위쪽 지역(상대)에, 금환락지 터는 중간 지대(중대)에, 오보교취 터는 아래 지대(하대)에 있으며 셋 중 가장 길한 터는 오보교취 터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금구몰니 명당처가 있다고 하는 상대에는 이미 고래등 같은 기와집인 운조루가 있었다. 사람들은 운조루가 대를 이어 잘 사는 것을 보면, 그 자리가 분명코 금구몰니 터라고 했다.
또 실제로도 운조루를 지을 당시 터를 파던 중 거북 형상의 돌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돌은 집안 내에 대대로 보관되어 오다가 도둑을 맞아 현재는 없어져 버렸다.
아무튼 명당터에 집을 지었기 때문인지 류씨 집안은 대대로 재산을 잘 건사하며 부를 누렸다.
문중 문서에 의하면 운조루는 한때 883마지기(전통적인 토지 면적을 재는 단위인 마지기는 지역마다 규모가 150~300평 정도로 달라 전체 농토 크기를 계산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전라도에서는 논 1마지기를 200평 정도로 여겼기에 운조루 류씨 집안 소유 토지는 대략 18만 평 정도였을 것이다.) 농토를 소유했으며, 구한말 때 까지만 하더라도 이 농토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매해 200~400여 명의 농사꾼을 고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부잣집이었던 운조루에는 세 가지 큰 자랑거리가 있다.
첫째는 ‘타인능해(他人能解, 누구든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라는 글이 써진 큰 쌀독이다.
흉년이 들 때면 쌀 두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원형 나무통인 대형 쌀독에 쌀을 매일 가득 채워 놓고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했다고 한다.
둘째는 뜨락에 낮게 설치된 굴뚝이다.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굴뚝을 낮게 설치했다고 한다.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혹여라도 운조루에서 나는 굴뚝 연기를 보면서 반감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두 사유를 보면, 운조루 주인들은 '노블레스 오블레주'를 적극 실천한 인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딴지를 걸며 현실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부자 몸 조심으로 평소에 민심을 자극하지 않고 최대한 우호적으로 만들어 민란 발생 시 가문의 보전을 위한 방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운조루는 동학농민운동 때나 여순사건, 6.25전쟁기에 지리산 자락인 구례가 인적 물적 피해를 다수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고 한다.
셋째는 1851년부터 1936년까지 5대조 류제양(1846~1922)과 7대조 류형업(1886~1944)이 작성한 일기인 ‘시언(是言)’과 ‘기어(紀語)’이다. 류제양이 쓴 ‘시언’은 1851년부터 1922년까지를, 류형업의 ‘기어’는 1898년부터 1936년까지 집안일, 농사일, 당시 지역과 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을 자기 소회를 간단히 붙여서 기록해 놓았다.
“어제 밤에 들으니 방광 월곡에 사는 황현 매천 어른께서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약을 마시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오후에 마침 부고를 갖고 하인이 왔기에 그 죽음을 물으니 진사 어른께서 이번 5일 밤 뜻하지 않게 돌아가신 후에야 집안사람들이 비로소 알았고 유언이 있었으며, 다음날 잠시 회생하시어 몇 시간 살아 계셨다가 그 다음날 새벽녘에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이것은 가히 의로운 죽음이라 할 것이니 유방백세(流芳百世, 향기가 100대에 흐름)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기어, 1910.8.7.>
“혼자 북쪽 난간에 기대어 있는데 금환락지의 명당처를 찾는 손님이 찾아왔다.
경남 합쳔군 상백면 육리에 대대로 살아온 정태규와 같은 군의 대양면 무곡리 사람 주기인, 두 벗이 갑자기 와서 ‘금환락지’가 이 부근에 있는 모양이라고 하늘처럼 믿었다.
그러나 만일에 그곳을 얻지 못한다면 그동안 주선한 노력은 공연한 허비에 불과하니 그 후회를 어찌 할 것인가? 밤에 운조루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기어, 1927. 7. 5>
“박승림이 방문해서 금환락지를 얘기하는데, 본인이 새로 잡은 집터가 조선 4대 명당의 하나로써 동양 삼국이 모두 아는 바라고 했다.” <기어, 1929. 4. 11>
운조루가 있는 곳은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로, 예로부터 오미동이라 했다. 류제양이 쓴 마을 유래지 <오미동려사(五美洞閭史)>에 의하면 운조루에서 보면 앞쪽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의 산이 오성(五星)을 갖추었고, 물이 풍족하고, 풍토가 질박하고, 집터와 집들이 살기에 좋다는 다섯 가지를 들어 ‘五美洞(오미동)’이라 했다고 한다.
구례에서 하동 가는 길에 너른 들이 나오면 저절로 북쪽 산자락이 바라봐 진다.
운조루가 있는 오미동으로 산자락을 따라 한옥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격류처럼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 속에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 고향을 떠나며 노인들만 남아 을씨년스럽기만 한 오미동에 한옥 단지를 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운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