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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저 편
박문구의 소설은, 이렇게 문장을 시작하다가 나는 잠시 멈춘다. 이건 아니다. 그보다는 더 질박한 문장이 선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이 자리는 그의 생애 첫소설집 해설의 자리다. 웃기는 것은 소설에 해설은 무슨 해설이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 작업은 단수 낮은 문장론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은 특히 우리쪽 소설은 해설에 값하기 위해 쓰여진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읽어서 좋으면 좋지 않은가. 그것으로 소설은 자기미학을 완성한다고 나는 본다. 그래서, 이 글은 박문구의 소설을 해명하는 방향을 버린다. 그보다는 그의 소설 이전 혹은 이후에 박혀 있을지도 모르는 일련의 비소설적인 이야기를 덧대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언젠가, 내 친구 소설가 박문구는 말했다. 삼척에 시 잘 쓰는 여자 두 명 있는데 한 여자는 이사갔다고. 그래서 나는 삼척에 시 쓰는 여자 한 명 남았다는 뜻으로 새기며 웃는다. 그의 말은 다소 위험하지만 명료하다. 나는 그런 거침없는 뻥에 넘어간다. 두 명의 여자 중 남아 있는 여자가 아니라 이사 간 여자가 그의 소설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의 첫소설집 뒷방에서 이런 말을 먼저 꺼내드는 것은 이 말만큼 소설가의 인간을 잘 대변하는 일화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이 참을 수 없이 귀여운 한 줄의 세리프는 그와 내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늙어오는 사이에 그가 키워온 외로움의 낮은 음계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써서는 안 되겠으나, 적어도 소설가 박문구를 떠올릴 때만은 예외적이 된다. 무슨 뜻이냐고? 갑자기 나도 애매해진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것이 알뜰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말했듯이, 누군가의 외로움에 대해 아는 체 한다는 것은 대박 웃기는 일이 되기 쉽다. 나는 그를 잘 알지만 또 잘 모르기도 한다. 내 기억에 박혀 있는 것만으로 재구성할 뿐이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언제나 재구성될 뿐이지 결코 구두 밑창에 붙어 있는 껌딱지처럼 고정적이지 않다.
사월 어느 저녁에 그가 내게 전화했다. 삼척에서 원주로 걸려온 전화다. 공간감을 부셔버린 그날의 통화에서 그는 소설집 해설을 쓰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이 자리에 차출되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이상한 흥분에 휩싸였다. 흥분의 핵심은 소설집 한 권 없는 소설가 내 친구가 소설집을 묶는다는 데 연유한다. 나에게 전이된 흥분이 무엇인가를 흥분하면서 복기한다. 그것은 우정이나 연민과 같은 항목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자기 확인 같은 것이리라. 그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그와 연결된 어떤 히스토리다. 그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다녔고 같은 지방에서 같은 문학병을 앓았다. 우리가 앓은 문학병은 희귀병은 아니었으나, 1970년대 당시에는 나름 앓고 싶어 투신한 지병이었다.
내가 아는 박문구는 대관령 저 너머 강릉에 있는 유일하고 치명적인 지방대학 국어교육과의 문학도로 출발한다. 그는 군복을 검게 물들인 파카를 입고 다녔다. 이 패션은 1960년대 선배 지식인들의 개폼일 것인데 박문구는 이것을 자기화 하는데 대체로 성공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의 가난도 한몫 했다고 본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것도 보기에 따라서는 화사한 사치로 비쳐지기도 하는데, 그가 걸친 예의 검은색 윗도리는 그런 상징으로 읽혔었다. 게다가 그는 언제나 번민이 뒤섞인 어둡고 무거운 표정을 달고 다녔다. 단벌신사처럼 그의 표정도 한 벌 밖에 없었다. 상상해보시라. 검은 파카에 거기에 짝을 맞춘 검은 표정. 그의 무겁고 사색적인 표정에 압도당했는데 훗날 그 표정은 사색과 무관한 가난이었다는 것을 돌이킬 때마다 속았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주변을 압도하면서 캠퍼스를 휘젓고 다녔다. 그의 표정은 그와 상관없이 참 소설적이었다. 사무가 없으면서 사무적인 표정이었으며, 인문학보다 더 다급했던 인문학적 표정은 나 말고도 다른 이들을 겁주는데 효율성이 컸다.
내가 그를 소설가보다 문학청년으로 기억하는 아름답지만 쓸쓸하고, 쓸쓸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이 일화는 언젠가 적절할 때 써먹어야지 했는데, 기회는 이렇게 필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내게 왔다. 그 하나. 그는 대학 내에 있던 유일한 문학회의 회장으로 주석하고 있었다. 신학기가 되면 그는 학교 안에 방을 붙이고 신입 회원을 모았다. 경포 바닷가에서 눈밝은 문학 지망생들을 기다렸는데 내 기억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아서 회장 혼자서 자작 소주를 마시고 해산했다는 얘기가 첫 번 째 에피소드이다. 회원 한 명 없는 문학회의 회장이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20대 청년의 적막한 자존심을 달래주는 파도소리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무낙은 화사하다. 지난 세기 70년대의 정치상황이 제조한 어둠발이 굵었던 시절, 그것도 적적한 지방대학의 고농축 지방 분위기 속에서 스승도 선배도 없이 문학을 혹은 문학적 아우라를 부양했다는 공로를 그는 사후적으로 추인받아야 옳다. 그것이 날계란 몇 개로 아침을 대신하며 지방대학의 문학을 이끌어온 그의 존재감이다.
다른 하나의 에피소드는 좀 더 우스운 옛날 이야기가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대학이라는 제도는 가설극장을 닮고 있다. 낡은 영화를 돌리고 난 뒤 그보다 더 엉성한 물건을 팔아먹는 호객행위를 하는 제도가 장소였다. 그가 다닌 사립대학도 그런 곳이었다. 한번은 술을 마신 그가 교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의 눈에는 아주 초라한 대학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큰 분노를 느끼며 그것을 뽑아서 개울 밑으로 밀어버렸다. 그날 밤의 역사(役事)는 역사(歷史)다. 그 이후 번듯한 간판이 만들어졌다는 후문에서 그의 이름은 지웠지만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적어 둔다. 청년의 객기 서린 행동을 좀 보수하여 개인적 혁명이라 부르고 싶다. 술기운 속에서 그를 두드렸던 한 줄의 분노심은 단지 자신의 등록금으로 운영되는 대학의 허술한 마인드에 대한 항변만은 아니었을 것. 회원없는 문학회장 박문구의 당대적 저항의 모습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아니, 그래야 내 사고의 아귀가 맞는다. 내 친구 소설가를 둘러싼 두 편의 일화는 나에게만 기억되는 듯 하다. 이 이야기는 내가 그를 생각할 때 들어가는 문과 같다. 첫잔 없이는 다음 잔을 마실 수 없듯이 이것 없이는 그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있겠으나 대저 마른 긴장감 없이는 돌이킬 수 없는 저예산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는가. 그것도 박문구 혼자 제작, 연출, 주연, 소품을 다 감당한 청년극이다. 전사(前史)가 길었다. 그래도 짧았느니, 그대의 청춘!
그랬던, 박문구가 소설집을 내는 일은 내게 하나의 울렁거림이다. 한 시대가 내게 몰려온다. 소설가에게 첫소설집이라는 점 말고도 이 책은 소설을 넘어서는 복잡한 정서들을 내게 던져준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이게 활자화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쩐지.’ 라는 메모가 나를 살짝 웃게 했다. 자기가 쓴 작품에 대한 저렴한 자기판단 때문이다. 웃자고 하는 얘기를 죽자고 듣지 말기 바라며, 쓴 사람이 모르는 부분을 읽는 사람이 보충해야 하는 것이 독서의 본질이기는 하다.
작품집에 탑재되는 소설은「적군」을 포함하여 도합 여덟 편이다. 1958년생 마돈나가 나이와 상관 없이 그의 영토는 ‘청춘’과 ‘춤’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을 조금 비틀면 박문구의 문학적 영토는 ‘지방’과 ‘술’이 아닐까. 이 말을 풀어서 쓰면, 소설가가 지방에서 마신 술 정도가 되고, 이것은 박문구의 소설적 정의에 해당하기도 한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껏 동해안 삼척을 근거지로 살아왔고, 일관되게 술을 숭상해온 술꾼이다. 이것만으로도 박문구 소설의 키워드가 간추려지지 않는가, 싶다. 나의 직관은 잘 맞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의 소설이 나의 직관을 도와주었다. 내가 읽은 그의 소설의 무대는 모두 작가가 살아온 지방 안에 있다. 삼척을 중심으로 하는 동해안 일대가 소설 속 인물들의 동선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공간은 인식이다. 그것은 서로 불가분으로 삼투하고 작동하는 계(契)다. 면 단위, 군 단위 혹은 소도시를 살고 있는 박문구 소설의 인물들은 그와같은 공간이 허락하는 범주 안의 갈등이자 그것을 깨려는 갈등이다. 시골의 작은 면소재지, 성산, 대관령(「적군」), 바다와 맞닿은 도시(「인형과 술꾼」,「역사의 후예」「환영이 있는 거리」), 고성(「데드 마스크」), 몽골, 정선(「시간의 저편」), 휴양지를 낀 마을(「강쇠바람을 기다리며」), 강원도 중심부의 작은 면소재지(「술꾼 시절」) 등이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된다. 소설의 인물들이 거주하고 사색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공간적 지형이 이렇다는 말이다.
나는 그렇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게 뻥인가 아닌가를 묻는다. 나는 세상이 다 뻥으로 버무려졌다고 본다. 소설이라는 제도는 대놓고 뻥이라고 떠들어대는 순진한 장르다. 언제나-이미 현실은 어떤 소설보다 더 정교한 뻥으로 조작되어 있다. 소설은 가공이고 현실은 가공 이전이라고 보는 견해는 소박한 판단의 결과다. 무책임하게 말하자면, 나는 소설을 통해 현실을 느끼고, 현실을 통해 소설을 바라본다는 뜻이며, 소설은 현실의 증상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마치 꾸민 듯이, 거짓말인 듯이, 실제와 무관한 듯이 시침을 떼고 있는 그 진실이 소설의 무의식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런 생각에 기대자면, 박문구의 소설은 아주 잘 꾸며진 현실의 알리바이로 읽힌다. 앞에서 대강 살폈듯이, 공간적으로 그의 소설은 삼척을 중심으로, 동해안 7번 국도의 궤적 속에 녹아 있다. 그것은 공간적 변방성 내지는 지방성에 해당된다. 세계화라는 말을 듣기 전에 우리는 서울과 지방(시골)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성장한 세대다. 지방으로 간다는 말은 서울을 벗어난다는 뜻을 함축할 뿐이다. 우리 세대의 동경은 그러므로 서울지향이었고, 의식의 표준 또한 서울이었다고 본다. 인터넷이 가동하면서 우리는 지방에 사는 서울 사람 또는 한국에 사는 뉴욕 사람이 되었다. 이런 틈, 조각 속에 놓여 있는 것이 박문구 소설 속 인물들의 정황이다. 현실에서 벗어난, 이탈한, 깨어진, 막힌 인물들이 벌이는 드라마가 그의 소설을 구성하고 있다.
이 소설집에 출연하여 연기하고 있는 인물들의 직업군은 교사와 그에 준하는 지식인이다. 박문구 소설의 표준적 인물은 교사다. 작가 자신의 투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지방도시에서 교사가 현실과 대면하면서 가지는 디스카운트 된 자존감과 보충할 길 없는 지방적 무력감이 소설의 기본 동력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사 사령부 간에 주고받았던 전보에 얽힌 일화. 독일군: 이곳 전방은 상황이 심각하긴 하나 파국적이지는 않다. 오스트리아군: 이곳 상황은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슬라보예 지젝의『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우리가 견디는 현실이라는 국면은 앞의 전보 내용과 다르지 않다. 위독하지만 참을만 하고, 견딜만 하지만 여전히 위독한 지경이 우리의 삶이다. 이 책이 관통하고 있는 소설적 상황도 위독하지만 참을만 하고, 참을만 하지만 위독한 현실‘들’이다.
「데드 마스크」는 박문구적 위독성을 표준적으로 무대화한다. 이 소설은 13년차 교사직을 사임한 전직 교사가 직면한 파국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다. 써놓고 보니, ‘현실을 다룬다’는 말은 어색하다. 우리는 현실에 의해 그저 다루어질 뿐인데 말이다. 우좌지간, 교사인 ‘나’에게는 건조한 부부애만 남은 불임의 아내가 있고, 반복과 규범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하는 데드 마스크에 관한 고백이다. 현실에 저항하는 방식의 하나로 ‘나’는 소설쓰기를 출구 삼고 있고, 종국에는 교사직을 버리고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가고 싶’어 갈 수 있는 ‘한계’인 고성을 선택한다. 고성은 주인공의 의식의 군사분계선 같은 지점이고, 그곳은 금강산 건봉사가 있는 곳이다. 이곳이 ‘나’가 설정한 힐링의 공간이다.
변함없는 반복. 그리고 변함없을 반복의 미래에서 내 모습은 내가 아니라 이중의 마스
크로 변장한 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동료들도 실은 자신을 드
러내지 않는 마스크의 천재들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아상실증 환자.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우리 모두 그 병원체를 몸 깊은 곳에 키우면서도 그것을
감지할 기능은 정지된, 진정한 치유불능의 환자들의 모습에 더 견디기 어려웠다. (「데드
마스크」)
인용으로 꺼내놓은 ‘나’의 생각은 규범과 제도와 일상의 응시에 겁 먹고 있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유무를 질문하는 강박증이다. 입 큰 현실에 먹혀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이 두려운 이 사랑스러운 강박증자는 지금-여기의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규범적 현실과 상투적 현실에 매몰되어 자기를 뺏기는 것이 두려운 ‘나’는「데드 마스크」만이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의상을 갈아입고 출연한다.「인형과 술꾼」은 제목부터「데드 마스크」의 변주라는 냄새가 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년 가까이 철도청 개찰구에서 펀치를 들고 좌석표를 찍는 직업을 가진 M은 병으로 인해 휴직하고 자기에 눈뜬다. 안정된 직장생활 속에서 얻는 M의 데드 마스크는 ‘석화(石化)’다. 석화는 비인간화의 과정이다. 주인물 M의 건너편 자리에는 언제인지 모르게 이 도시에 스며든 정체불명의 사내가 있다. 시집을 읽기도 하는 사내는 바코드에 읽히도록 규격화된 M을 조롱한다. 시는, 과장이지만, 단지 말이 그렇다는 뜻에서, 꿈 속에서도 세속의 길을 걷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에 대한 서약이다. 규격화된 삶 속에서 한없이 왜소해지는 자신의 일상을 통해 ‘실패한 아버지’의 삶이 실은 성공이었다는 것을 수용하는「역사의 후예」도 석화를 두려워하는 존재의 위기에 대한 소설이다. ‘아버지는 실패한 분이었지. 그런데 지금 내가 생각해 보니 결코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신 분이니까. 티브이를 보면서도 소리치고 웃고. 이 도시 전체 가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연속극을 같은 자세로 거실이나 소파에 앉아 보고 있다고 생각해 봐. 어때? 숨 막일 것 같지 않아?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그런 걸 거부하고 사셨던 거야.’ (「역사의 후예」) ‘완전한 실패’라는 말이 느닷없이 독자의 습관적 생각의 어디를 건드리고 지나간다.
두 편의 소설「인형과 술꾼」「역사의 후예」에서 나는 아름다운 상징을 만난다. 향유고래에 관한 설명이다. 데드 마스크와 나날의 석화가 두려운 인간에게 ‘거대한 회색빛 향유고래가 주어진 생명을 다하고 한없이 깊고 어두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때, 어둡고 깊은 바다 속에서 서서히 퍼져나가는 용연향의 향기’ 는 하나의 메시지다. 그것은 박문구 소설의 인물들이 갈구하는 환타지에 대한 소설적 응답이다.
‘데드 마스크’와 다른 자리에 소설가 나름의 현실 이해력이 돋보이는 일군의 소설이 있다. 이 소설들은 현실에서 길어냈을 상상력과 소설가의 관념을 결합시킨 풍경의 세밀화다. 더럽지만 참을만 하고, 참을만 하지만 지저분한 현실이 소설을 떠받치고 있다.「적군」,「강쇠바람을 기다리며」,「술꾼시절」등은 날것의 현실을 날것으로 받아적고 있다.「적군」은 다섯 개의 삽화로 구성되어 있고, ‘적이 없어 슬픈 나라/아르헨티나’로 시작하는 김광규의 시를 되새기게 한다. 적은 어디 있는가? 적은 누구인가?와 같은 문제의 현실적 판본들을 엮어놓고 있다. 이 소설을 독서하면 삶의 상스러움에 기인하는 통증을 느낀다.「강쇠바람을 기다리며」는 교육현실에 대한 리포트다. 시골 학교의 교사와 주민의 갈등이 선명한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어 흥미롭다. ‘사람이라도 많이 와 줬으면 그나마 바쁜 탓으로 더위도 잊겠네만’으로 시작된 마을사람들의 ‘손님 없음’의 화풀이가 시골 학교 교육 문제로 번지는 도입부는 실소를 자아내지만, 정작 거대한 담론은 하찮은 데서 기인한다는 판본을 진지하고 우습게 복원한다. 교사의 절망을 보는 일은 마음 복잡하다. 아마도 소설가 자신이 오늘날 한국 교육의 현장을 대놓고 씹은 소설이 되겠다.
「술꾼시절」1980년대말 시골 면서기의 허세가 빌미가 되어 사찰에서 출퇴근하면서 목도된 그렇고 그런 종교인들에 대한 회고담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의 입가심용같은 소설이다. 읽으면서 웃고, 웃으면서 읽게 되는. 1980년대와 그 시절에 청춘을 보낸 축들에게는 한 편의 흑백영화를 보는 회고감을 준다. 그땐 그랬지, 하는 손 쓸 수 없는 부끄러움이, 등장인물이 아니라 독자를 부끄럽게 물들이는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민주주의는 늘 오는 것이지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더불어 불교가 아니라 불교에 붙어 살아가는 중생들의 희극을 목도한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을 뿐! 끝으로,「환영이 있는 거리」는 1970년대식 변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백적인 문체를 채택했다는 점 혹은 아날로그적인 인물의 정서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
소설을 잘 읽었다. 여기 쓰이는 ‘잘’은 ‘싹’, ‘재미있게’, ‘탈 없이’ 등에 다 걸리는 뜻이다. 그러나 미처 덜 읽힌 한 편,「시간의 저 편」은 이 소설집의 과잉으로 남아 있다. 이 소설에는 몽골의 대초원이 배경으로 제시된다. 독자의 감각 속에 시원하고 푸른 통감각을 열어놓는 소설이다. 목마름과 아랫배 통증을 호소하던 ‘나’가 ‘시간의 저편에서 태고의 지표를 울리면서 다가오는 원시의 음향이 거대한 날개로 광막한 허공을 수만 갈래로 찢으면서 태양의 반대편으로 밀려가는’ 드라마를 겪으면서 배변하는 일은 그에게 ‘통쾌감’의 극치를 선물한다. 통변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없다면 소설의 이 장면을 통변으로 이름지어야 하리라. 박문구 소설의 인물들이 공통적 유전자인 현실에 대한 소화불량이 일거에 해소되는 순간이다. ‘시간의 저 편’이 아니라, 작가는 소설의 저 편을 응시한다. 언어 이전, 현실 이전부터 존재하는 야생적 사유에 대한 갈망은 소설 ‘너머’를 갈망한다. 향유고래는 작가가 지향하는 야생적 사유의 매개물이었다. 작가는 언어의 의해 왜곡되지 않은, 허구도 손 대지 못한 절대적 야생의 세계를 꿈 꾼다. 소설가가 동경하는 ‘시간의 저 편’은 몽골 대초원이 의미하는 초월적 의미가 될 것이다. 그것을 나는 박문구 ‘소설의 저 편’이라 명명한다.
무슨 말을 중얼거리면서 여기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다. 박문구가 쓴 여덟 편의 소설과 그 드라마를 관람했다. 마침표 하나를 찍고 나니 어느 새 총총 목련은 다 졌군. 그의 소설은 너무 소설적이다. 소설적이다 못해 그를 읽으면 어딘가는 아프고 쑤신다. 어둡고, 무겁고, 칙칙하고 답답해라! 현실을 절개하고 거기 붙어 있는 벌건 생살에 입을 대고 있는 듯 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그랬다. ‘너무 아픈 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읊조리던 김광석의 목소리는 왜 떠오르냐. 소설읽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해두거니와 그것은 소설가 자신의 체험의 형식이 신산했기 때문으로 정리한다. 독후감이 아린 것은 소설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주체의 문제다. 나는 그의 소설에서 삼척 바닷가의 해무를 뚫고 울려오는 파도소리를 듣는다. 어둑한 강의실에서 후배들 틈에 섞여 ‘국어학개론’ 같은 과목을 수강하던 청년 학도 박문구의 모습은 그 후 나에게 상징적 풍경이 되었다. 이 글은 그가 거쳐온 문학적 여정에 대한 우정적 헌사다. 그의 소설이 좋은 소설인가 아닌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고, 나는 다른 차원으로 이 책의 해설 공간에 끼어들고 있는 것이다. 박문구는 그 자신으로 충분히 소설이다. 소설적 텍스트다. 청춘이 소설에 헌납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문학에 관해 함부로 떠들어댈 수 없다. 그것은 예의다.
이번 학기에 나는 그의 모교가 된 대학에서 ‘현대소설론’ 강의를 하고 있다. 섭섭하고 고마운 것은 후배들은 나도 모르고 박문구의 전설도 모른다. ‘누구신데요?’ 그 표정들 앞에서, 나는 한때 이 캠퍼스를 외롭게 누볐던 문학도에 대해 침을 튀기고 싶지 않다. 역사는 지워지며 새로 쓰여진다. 박문구 선생 그대에게도 역사의 광휘가 빛나기를! 소설을 완독하고 나니, 문득, 중진 신인 박문구가 옆에 서 있다. 이 소설의 인물들 다 그대였구려. 그대의 소설적 전기였구려. 뭐, 소설이라고? ‘보바리부인, 그녀는 나다’라고 외친 플로베르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면, 작가는 엠마는 나의 찌꺼기였다, 라고 쓸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게 너지, 하다가, 아니 소설이지, 하면서 나는 웃는다, 낄낄낄. 소설이 아니라면,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구랏발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 가서 까놓고 발가벗을 것인가. 감사하다, 늦은 소설가여. 그대는 뒤늦게, 소설이 아니라, 그대 자신을 통과했구려. 언젠가 가을날이었군. 동해시에서 앞이마가 형형한 박선생을 잠깐 만나고 돌아서는 길에 작성했던 나의 시 한 구절로 에필로그를 대신한다.
식은 죽 같은 공연을 끝내고 나니 객석 끝에
소설가 내 친구 지방신문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시청 옆에서 맹물 같은 표준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허벅지를 꺼내놓고 대로에 앉아 네온 빛을 쬐고 있던
가출 중인 여고생 일반을 추상했고
여기가 묵호와 북평 사이에 있는 천곡동이라는 사실
수령 400년 된 예술관 앞뜰 배롱나무를 감탄했으나
문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사랑을 확인하지 못한 연인처럼
톨게이트에서 우리는 군말 없이 헤어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