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밤
최 양 귀
‘동양의 알프스’라는 속초를 아들 가족과 여행을 했다. 동해안 속초는 검푸른 바다와 설악산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곳이다. 여고 수학여행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흔들바위, 강릉 경포대, 신사임당의 오죽헌 등 둘러볼 곳을 알아보며 마음이 들떴다.
군의관인 아들은 노루와 사슴 가족이 자주 나타나는 인적 드문 산속 관사에 산다. 휴가를 받은 오랜만의 외출이다. 날씨도 좋다. 대전과 속초 거리는 324㎞ 먼 길이다. 쉬엄쉬엄 쉬어 가며 속초에서 만나기로 했다.
신록이 무성한 산야는 한겨울과 확연히 다르다. 산골에서 자란 남편의 한결같은 레퍼토리는 아카시아 꽃잎 전이다. 적절한 추임새를 넣는다. 저 너머 부드러운 산등성이는 곱상한 여인이고 설악산은 근육질 남성이라며 웃었다. 겨울에는 이런 여행 코스를 잡을 수가 없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니 정이 두터워진다.
여행 때는 집밥이 개운해서 도시락을 준비했다. 잡곡밥, 올리브에 구운 두부, 겉절이, 고추 참치, 상치와 쑥갓, 구운 김, 브로콜리, 방울토마토, 심심한 된장국이다. 오창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으니 소풍 같은 즐거움이 소소하다.
문막휴게소를 지나자 고속도로는 터널 연속이다. 터널 벽에 ‘백두대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어머! 속초 가려면 백두대간을 통과하나요?”
“태백산, 설악산, 소백산, 노령산맥, 차령산맥 등 강원도 호랑이 등을 타고 가야지요”
운전하는 남편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말한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백두대간 횡단은 건강한 청장년이 체력 단련하는 코스로 알았다. 터널 천장에 조명이 현란하게 바뀌고, 비상구와 방화 셔터 표시가 규칙적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장 긴 인제양양터널 11㎞를 벗어날 때는 백두대간 힘겨운 산행 같다. 안도의 숨이 나온다. 터널 사이 열린 도로 주변도 높은 산봉우리이다. 튼튼한 산맥인 백두대간을 가슴에 새기니 감개무량하다.
넓은 바다가 보인다. 아들이 알려준 숙소가 코앞이다.
기쁨을 주는 예쁜 손녀가 배꼽에 손을 대고 꾀꼬리 소리로 큰절하듯 인사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손녀 인사는 예의 바른 며느리 덕분이다.
“필승”
아들의 구호다. 휴게소에서 산 깡충깡충 뛰는 토끼 인형을 손주에게 주었다. 웃음꽃이다. 아들은 경관 좋은 숙소를 배정받으려 한 번만 쉬고 왔단다. 매사에 승부욕이 강하다. 첫돌 된 사랑스러운 손자와 세 살 된 손녀가 카시트에서 오랜 시간 견뎠으니 대견하다.
길게 뻗은 모래 해안선과 먼바다까지 보인다. 며느리는 바다에 당장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을 읽은 듯 아이들이 모래 놀이를 좋아하니 바다로 가자고 한다. 모래 놀이감과 야외의자를 챙겨 바다에 도착했다.
남편의 ‘섬집 아기’ 하모니카 연주에 손자가 유모차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가재와 사슴벌레 잡기를 좋아했던 아들은 장난감으로 바닷물을 퍼왔다. 손녀가 익숙하게 모래로 음식을 만들고 물길을 만든다. 혼자 잘 논다.
나는 얼른 양말을 벗고, 바지를 대충 접은 후 바다로 향했다.
“어머님, 모래 속 조개껍데기 조심하셔요.”
차분한 며느리 조언이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니 시원하다. 여독이 사라진다. 물살이 다리를 휘감는다. 해초와 다시마도 보인다. 손녀를 위해 다시마를 잡으려니 쏜살같이 달아났다. 해초는 물결에 춤추며 흘러갔다. 예상치 못한 파도가 다리를 철썩 때리며 바지를 적신다.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었다. 바닷물이 찰싹거리는 모래 위를 소녀와 같이 뛰었다. 상쾌하다. 발자국을 깊게 파니 발 촉감이 살아난다. 유년시절 개헤엄 수영으로 더위를 식혔던 다정한 물이다.
속초는 휴전선이 가까워 출입 제한된 곳도 있으나 바닷물은 남북통일이다. 외손주와 하와이 ‘하나우마 베이’ 산호초 사이로 수영하던 열대 물고기를 구경했던 바닷물이다. 바닷물은 여권이나 비자 없이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한다. 바다는 하나다. 바닷물은 지구 구석구석을 누비며 사람의 희로애락을 보듬는 따뜻한 고향 친구다.
속초 별미 항아리 물회와 대개 세트로 풍성한 저녁을 먹었다. 창밖에 어둠이 깔리니 바닷가 불빛의 찬란함이 손짓한다. 보석을 뿌린 듯 형형색색 불빛이 바다를 비춘다. 질서 정연한 빛의 공연에 눈이 부시다. 딸 가족과 야경이 예뻐서 한참 머물렀던 시애틀 밤바다 같다. 낮에 발을 담갔던 바다는 바람 없는 호수다.
보일 듯 말듯 작은 파도는 곰지락곰지락 움직이는 손주 손가락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바다는 불빛 공연을 관람하는 청중이다. 조용한 파도의 찰싹거림과 잔잔한 거품은 손뼉 소리다. 바다는 밀물 썰물로 의미 있는 큰일을 했다.
우리나라를 지킨 인천상륙작전, 세월호 인양 때 ‘조금과 사리’ 뉴스로 이목을 받았다. 그 위대한 바다가 고요하다. 깜깜한 밤 불빛향연이 맘껏 공연하도록 양보한 것이다. 나는 로열석에서 불빛향연과 조용한 밤바다를 감상한다. 딸 가족도 초대하고 싶다. 해안가 불빛 야경과 잔잔한 바다의 하나 됨이 경이롭다. 대자연 조화가 신비롭고 그 순리를 따르면 역사가 된다.
누군가에게 나의 삶이 아름다운 불빛 같은 길잡이였나 되짚어 본다. 열정과 욕심으로 타인을 아프게 했는지! 삶은 도전과 응전이다며 불도저처럼 일한 날이 많았다. 뒤처진 이를 위해 한 걸음 더 양보했으면 작은 빛이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잠이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불빛 속으로 달아났다. 잠 못 드는 아름다운 속초 바다가 나를 돌아보게 했다. 커튼 사이로 반짝이는 불빛은 여전히 어두운 밤을 노래한다. 안개로 덮인 수평선에 먼동이 밝으니 노른자 같은 태양이 얼굴을 내민다.
아름다운 밤바다에 취해 뜬눈으로 보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경전 말씀이 조금 이해된다. 오묘한 밤바다 선물은 황홀함과 기쁨의 성찰이다.
햇빛이 빛날 때 열심히 일하라 재촉한다. 명산 설악산을 오십 년 만에 등산한다. 아른거리는 친구의 즐거운 모습에 발길이 빨라진다. 가파른 등산길에 한발 한발 바람을 맞으며 오르리라. 산 정상에서 마음을 아프게 한 이들에게 사과하고, 보고 싶은 친구와 지인의 복을 맘껏 기도하였다.
어린 손자가 먼 길을 감내하며 동반 여행을 계획한 아들 내외가 고맙다. 덕분에 알프스 같은 속초에서 밤낮의 경계를 허무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큰 광명 앞에 서는 날 이 땅에서 ‘허물없이 살았노라.’ 담담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