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김경우 공직 귀농작가님의 공지 게시글 윤달의 지혜 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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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중국에서 기원하여 우리나라에서 따로 발달한 풍수지리설과 조상음덕 기복신앙에 근거한 말씀같습니다.
저도 " 4대까지는 봉제사(奉祭祀)하고 그 웃대는 묘사(墓祀)로 하라" 라는 관혼상제에 관한 오래된 관습이
역시 도참설과 조상음덕 기원에 있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1700년대의 학자 순암공 안정복의 가례지침에는[ 4대봉제사하고 그 웃대는 산밑에서 묘사를 올린다 ]
라고 되어 있었는데, 우리들 후손들은 한식 성묘에 추석전 벌초에 추석과 구정 차례에 가을 묘사에 삼사월
춘향제 팔구월 추향제에 참 많기도 합니다. 조상모시다 기둥뿌리가 무너집니다.
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나라에서는 안산과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린 명당이 있어 왕후장상 부귀영화
발복터가 되겠지만, 만주나 고비사막같은 허허벌판이나 바람으로 모래산이 골짜기가 되는 곳에서도 명당이
존재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 곳은 명당이 없으니 인물도 나올 수 없다 라면 칭키스칸 쿠빌라이
아골타 등과 만주 여진족으로 우리나라를 휩쓴 장군, 그리고 청나라를 건국한 애신각라(愛新覺羅=신라를
사랑하고 잊지않겠다)성을 가진 만주족은 조상의 묘를 어디에 썼을까요?
그리고 수맥에 대하여 강조하셨는데, 매장시 땅속1미터에서 물이 잘 빠지는 사질토가 아니라면 장마지면
대개 물이 고입니다. 흐르는 수맥이 문제라면 지하1킬로미터까지 파본다면 제 아무리 명당자리라도 수십개의
수맥이 가로 지르고 있을 것입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L로드 없이 수양버들이나 자침반 하나로 수맥과 묘소방위를 잡았었는데 만주로 간 분들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조상의 자취를 간직하는 데는 전세계에서 중국과 수위를 다투는 우리 민족입니다.
중국이 삼황오제의 전설족보를 들먹이면 우리 선조는 선원록, 유뷰록의 왕족 족보와 각 성씨 본관의 시조이후
현손까지의 연결을 자랑합니다.
조선 중엽때는 인구의 절반, 일제강점시 창씨개명 이전까지만 해도 성이 없는 국민들이 상당수 이었음에도
오늘날에는 모든 국민이 시조이후 자신까지 성씨본관의 족보를 가집니다.
저 역시도 시조 이후 제 자식에 이르는 족보를 가집니다.
다른 동성이관에서 우리 시조위에 도시조로 군림하려 한 200년간에 걸친환부역조 사대주의 음모에 우리
대종회에서 소송을 걸어 1심패소(판결=1000년 전의 사건은 본 판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2심에서 화해조정
판결로 그들의 소위 숭모비에서 우리 시조와 선조들을 끌어들인 글자들을 수십자 파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짧은 한자지식으로 역사공부 참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당자리를 탐내어 투장하고 암장하고 산송시비의 자취가 암행어사나 관찰사가 지방을 순행하면
토호들과 양반네들이 무더기로 제출한 입안문서로 관아가 미어터질 지경이었더군요.
이렇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바라고 명당자리를 찾아 조상묘소로 하는 욕망으로 전국의 산하를 곰보투성이로
만든 우리들의 선조들입니다. 지금은 많이들 화장을 하고 또 묘소는 모아서 납골묘로 하며 그러한 과정에도
참 따라야 할 절차와 기피할 조건들이 많습니다.
왜 꼭 그래야만 합니까? 순암공 안정복은 가례지침에서 [ 4대보다 웃대는 묻힌 산밑에 가서 절만 하라 ] 했습니다.
당시는 산에 호랑이등 맹수가 흔하니 조심하라는 의미이겠지요. 조선 세종때 쓴 어느 장수의 무덤은 꽤 깊은
산중턱에 있더군요.
조상의 음덕, 조상의 앙화 그것을 그렇게 중시해야 할까요?
잘 되면 내탓이오 못 되면 조상탓이라니 죽은 조상이 억울할 것입니다.
오늘날 납골묘역을 조성하는 이유는 벌초와 성묘가 후손들에게 커다란 노역이 되어 안그래도 손이 귀한 자손들을
보호하기 위함과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것을 주된 이유로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도참설 풍수지리설은 족보책과 더불어 오늘날도 번창하고 있지만 제사와 벌초 성묘 등의 [죽은 조상을 이용하여
산 후손들이 화합하라 ] 는 취지를 벗어난다고 봅니다.
따라서 수맥이 무조건 나쁘다 라는 기공설(氣功說)적 주장에는
" 우리 몸속의 혈관과 림파액 관은 수맥이 아닙니까? " 라고 되묻습니다.
수맥의 영향, 전자파 영향, 방사능 영향, 자외선 영향, 황사와 매연의 영향, 세균과 바이러스의 영향, 뜻밖의 사고로
인한 영향에서 자신과 후손들에게 가장 악영향을 끼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선순위를 매겨야 할까요?
의식주와 산업활동 모든 것이 위협받는 요즈음입니다. 이럴 때 판치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전 국민이 화를 당하더라도 나만 우리 집안만 화를 안당하면 된다 라는 이기주의의 극치가 10대 길지(吉地)인데
대부분 깊은 산중의 오지입니다. 즉 무사히 살려면 첩첩산골의 무지랭이로 살라는 의미이군요.
옛 선비들이 경고글을 남겼습니다. 3대를 적선(積善)하면 한대 후손 발복(發福)한다.
즉 100년동안 봉사해야 한 후손이 잘 산다 입니다.
수백년동안 부자였었던 경주 최부자 집안에는 6개의 처신 처세에 관한 지침이 있었지만 오늘날 경주 최부자는
부자에서 독립유공자로 자리하였습니다. 이것은 한사람이 한 집안이 평생을 살아가고 대를 이어내려 감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나에서 우리로 그리고 사회의 일원이자 국민으로서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하지 십대길지로 피하거나
조상의 음덕에 기대어 후손들의 평안함을 최대 이익으로 본다면 만연하느니 기복신앙이오 조상모시기에
후손들의 등골이 휘고 후손들의 정성이 조상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도깨비 방망이를 달라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제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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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빠진 것 한마디 [ 4대 봉제사하고 그 웃대는 산밑에서 절만 하라 ]의 참된 의미는 4대 위로는 벌초 성묘도
하지 않아 나무와 잡초가 우거지면 묘소가 사라져서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유추해 봅니다.
그랬었다면 오늘날 전국의 산이 곰보투성이가 됨을 면하였을 것입니다.
첫댓글 이래저래 살기가 참 버거운 나라임에 틀림 없습니다.
수려한 글에 설령 의구사항도 있겠으나 반문도 못하겠습니다.
여기 이 글이 후세에 길이 길이 전해져 우주관을 가졌슴합니다.
지구에는 분명히 지구 자기장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정도나 세기는 지역이나 위치에 따라 천차만별이므로
평생을 어느 곳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것이 인체에 미치는 정도나 작용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의 풍수지리라면 과학자적인 입장에서도 아주 외면할 수는 없다하겠습니다.
즉, 양택(집터)은 산자가 오랜시간 어떤 경우에는 거의 평생을 살아가는 공간이므로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보니 그 좋고 나쁨이 분명 있다할 것이나, 음택(묘터)은 글쎄요.. 그 역시 아주 없다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이 후손들의 길흉화복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기에는 유전인자를 인위적으로
바꿀 정도로 과학문명이 발달한
요즈음의 잣대로는 시대적으로 좀 고루한 얘기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조상을 위하는 풍습도 시대에 맞추어가야한다고 봅니다. 자식들을 많이 낳는 예전에는 가능했던 풍습들이
요즘엔 무리이거나 불가능한 경우도 적지 않아보입니다.
예를 들어, 조상 묘소관리만해도 요즘엔 하나나 둘만 낳다보니 인원수가 줄어 몇몇이서 관리한다는 자체도
버겁지만 그마저 사고로 한둘만 죽게되면 물리적으로 불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장이나 수목장제도가
시대적으로 맞다고보며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봅니다. 애써 매장을 하더라도 평토장으로 해서 그저 양지바른
곳에 묻히면 되는 것이지 구지 봉분을 만들어 해마다 잔디를 깎고
잡초를 매주고하는 어려움은 이젠 피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다보탑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이미 조상님들께서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일정이상 지난 대의 묘소는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도록 함으로써 그와 동일한
효과를 얻도록 한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만..
제사문화도 그렇습니다. 요즘 배곯아 제사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외려 제사를 두고 집안마다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상차림을 놓고도 사위와 처남이 의견을 다투기 일쑤고 종교가 다르다보니 빚어지는 갈등까지 더해지다보니 집집마다 가관도
아닙니다. 이젠 뭔가 단안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