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 금수정 양사언 느티나무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초등학교 시절 외운 ‘태산가’이다. 이 시조를 지은 양사언(1517~1584)은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틀무시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돈녕주부를 지낸 청주 양씨 양희수다.
양사언은 1540년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곧 부모상을 당해 6년간 시묘살이 뒤 1545년 문과에 급제했다. 문과 급제 뒤 운정기(雲亭記)로 문명을 알렸고. 성균관 사정과 강릉부사, 안변도호부사 등 관동, 관북 지역의 수장을 지냈다. 40여 년의 관직 생활에 청렴 검소했으며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않았다. 자연을 즐기며 신선같이 살았고 서예와 시문이 빼어났다. 또 명종 때의 예언가 남사고에게 천문과 역술을 배워 앞날을 훤히 내다보았고 임진왜란을 예언하였다.
1582년 안변도호부사 때 이성계 증조부 묘 함경남도 안변의 지릉(智陵) 화재로 황해도에 유배되었다. 2년 뒤인 1584년 유배가 풀렸으나 병으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의 일화가 있다. 양사언이 ‘날 비(飛)’ 자를 써서 아들 양만고에게 주며 ‘이 글이 쓰인 종이가 날아가면 나는 세상을 떠날 것이니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다. 어느 날 양만고가 집을 정리하다가 그 종이가 바람에 날아갔는데, 마침 유배지에서 집으로 오던 양사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또 금강산에 정자 ‘비래정’을 짓고 현판을 썼는데, ‘비’ 자만 마음에 들어 족자로 걸었다. 어느 날 세찬 바람에 ‘비’ 자 족자가 사라졌다. 양사언이 유배에서 돌아오다 세상을 떠난 날짜와 시각이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듯 풍류인 양사언의 행적은 민담이 되고 설화가 되었다. ‘전우치전’에도 양사언 이야기가 있다. 양사언이 단군의 옛 유적을 찾기 위해 태백산에 올랐다가 화담 서경덕과 우사 전우치를 만났다. 이때 양사언은 서경덕으로부터 천기를 살피는 예언서를 받았다고 한다.
인천도호부사를 지낸 양만고(1574~1654)는 양사언의 아들이다. 또 이복형으로 사원, 사형, 사인, 사의가 있고, 동복으로는 두 동생 양사준(1519~1579), 양사기 1531~1586)가 있다. 이들 삼 형제가 효성이 지극하고 두루 문장이 높아 중국 북송시대 쓰촨성(眉州) 출신 당송팔대가이자 미산삼소(眉山三蘇)인 소식과 소철 형제, 그들의 아버지 소순처럼 칭송받았다.
양사언은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더불어 조선전기 4대 명필가이다. 금강산 만폭동에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라 새긴 글이 있다. 양사언의 고향 포천의 조선 시대 지명은 영평이다. 양사언은 이 영평 8경인 금수정에서 시서와 거문고를 벗 삼았고, 천변 바위에 새긴 ‘경도(瓊島)’가 있다. 경도는 ‘옥 바위섬’이다. 1128년 북방민족인 금나라 군대가 북송을 무너뜨리고 그곳 산에서 돌을 가져와 북경 북해공원 호수에 만든 바위섬이다. 북방민족의 후예로서 금수정과 경도 앞에서 마음이 호기롭게 툭 트이는 이유이다.
이제 양사언은 금주산 기슭인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산 193에 계신다. ‘유학자이며 불교를 가까이했고 만년에는 선도에 깊었다. 그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이고 작품은 탈속한 정취가 빼어나다.’는 조경이 쓴 묘갈명이다. 80여 계단을 올라 ‘통정대부행안변도호부사 양공지묘’에 참배한다. 이어 포천천이 와서 영평천으로 흐르는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46 보장산 아래 신선의 정자 금수정으로 간다. 금수정을 지키는 느티나무에 호기롭게 기대어 중국 북경에도 있다는 경도에서 눈앞의 우람한 보장산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