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56) 버림과 행함 역대하 11:13~17
지난 수요일에 저희는 북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로보암이 취한 종교정책들로부터, 바꾸지 말아야 하는 것 네 가지를 살펴보셨습니다.
섬길 대상, 섬길 장소, 섬길 사람, 섬길 시간 모든 것을 바꿉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기에게 주신 말씀대로, 북이스라엘로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저 이스라엘 열 지파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망가뜨려야 자신이 살겠다고 판단을 했기에, 오히려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망쳐버렸던 것이지요. 그래서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지요? 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해임되고,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로 예루살렘으로 모두 옮겨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아론의 자손들이 저 레위지파 사람들이 쫓겨나서 유다에 머물게 된 것이지요?
그들만이 아니라, 또 누가 있었다고 했지요? 그들은 해임되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대로 북이스라엘 지역에 기업을 허락받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들인데, 오늘 북이스라엘에 우상에 세워지고 엉터리 제사장이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예배의 장소가 바뀌고 절기가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유다로 함께 내려왔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어떤 사람들?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자 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다고요? 17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무리가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더라’”
지난 시간에 이 말씀을 전하면서 오늘 다시 이들을 조금 생각해보시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떠남’ 이 있었고, ‘행함’이 있었습니다. 그 떠남을 위해서 이들이 했던 것이 ‘버림’이었지요? 자, 이 두 가지 키워드, ‘버림’과 ‘행함’을 가지고 오늘 말씀 시작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그리고 그분께 드릴 올바른 예배와 삶을 ‘버렸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과 말씀을, 그들에게 주신 율례와 법도의 가르침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와 르호보암은 어떻게 했지요? 전쟁을 치르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들의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요, 여로보암과 전쟁하러가던 길에서 되돌아왔던 것입니다. 또 어땠지요? 오늘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비록 겉으로 보여지는 원인은 여로보암의 해임이었지만, 그들의 마을과 산업을 ‘떠나,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옮겨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의 이유와 같았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조상들의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바로 그들에게 명하신 율법과 명령을 온전하고 바르게 ‘행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저들이 취하고 있는 겉모습은 똑같습니다. 한편으로 버렸고, 한편으로 행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동기가, 그리고 순서가 다르지요? 행하기 위해서 버린 사람들이 있고, 버리기 위해서 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행하기 위해서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버리기 위해서 행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을 버려야 하지요? 네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 하나님 주신 예배와 사명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무엇을 버려야 하지요? 인간적인 안정과 유익, 평안과 산업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네, 끝까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됨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을 행해야 하지요? 네, 말씀대로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의 사람답게 행해야 합니다.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하지요? 네, 내 욕심대로 말씀을 바꾸고 변경하고 말씀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 버림과 행함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요? 우리의 신앙생활의 흥망이, 우리 인생의 흥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버림과 행함, 순종과 헌신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이 있고,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르호보암과 유다가 불순종하니 이스라엘 열 지파가 떠나가지만, 르호보암과 유다가 순종하니, 레위 사람들과 마음을 굳게 한 백성들이 모여드는 것이지요?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버릴 것을 버리고 행할 것을 행하니 오늘 저 유다나라 르호보암의 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확인해 보게 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이들이 이처럼 버리고 행한 이유입니다. 무엇이지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지도자 때문도 땅과 소유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단 하나 신앙이었습니다. 단 하나 하나님을 믿고 찾고자 하는 신앙이 저들의 버림과 행함의 이유였던 것이지요?
그런 그들의 결단과 걸음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버린 것들을 하나님 때문에 행한 것들을 기억하시고 갚아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들에게는 갚아주시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갚아주실 거라고 알고 믿고 있었기에 행동에 옮겼던 이들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했던 이들이기에 오늘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니 버리는 것이요, 사랑하니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언 8:17)
그래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늘 ‘버리는 것’과 ‘행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저 마음으로 하나님만 우리의 창조주로 예수님만 구세주로 성령님만 보혜사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구원은 그렇게 받는다고 로마서에 이야기 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술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그러나 이때의 입술로 시인함은, 버림을 행동을 동반하는 고백입니다. 황제가 아닌 나사렛 청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은 다 죽임을 당하던 로마시대의 구원입니다.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고백이요,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고 있던 이들의 저 재판장과 형장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지던,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분명하게 외쳐지던, “성도됨, 백성됨, 소유됨의 시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로 생과 사가 나뉘어지는, 이 말 한 마디로 사형이 구형되고, 생애가 끝나는, 분명한 ‘증언’으로서의 ‘시인’이었던 것입니다. 나 혼자 인정하고 마는 시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의 믿음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어야, 경건의 모양만이 아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고전4:10). 어떤 능력?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무엇을 걸고? 네, 내게 주신 모든 것, 재산과 생명을 포기하고서라도 말입니다.
일전에 한번 살펴보셨지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우리에게 주신 영생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것들을 분토와 같이 버리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행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붙들기 위하여 오늘도 멈추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 위하여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이르기 위하여 오늘도 다른 것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단계 단계 그대로 계속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 그리요. 울에게는 버림의 실제가 있어야 하고, 눈에 보이는 행함이 필요합니다.
오늘 르호보암과 남유다가, 그리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그리고 저 하나님을 찾기 위해 마음을 드린 이들이, 떠나고 버리는 대가를 치르고 용기있게 행동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구체척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두 군데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바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첫 모습은 “버림”이요 “행함” 이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행함이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백 세에 낳은 아들을 버리는 행함이 성경이 주목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그 모습은 첫 모습부터 마지막 모습까지 “버림”이요 “행함”이셨습니다. 하늘보좌를 버리고 사람몸을 입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섬기러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버리시고 하나님 사랑을 당신의 죽으심으로 확증해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신부들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이어진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행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행하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바라옵기는 여로보암과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버리고 악을 행하지 마시고, 이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붙들고, 내 생각과 판단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율례를 배우고 행하시는 그래서 우리 주님이 형제요, 모친이라고 말씀하는 분들, 이 땅에서 백배나 받고 내세에서 영생을 받고 누리는 분들, 오늘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버림과 행함을 이야기하는 본문이 하나 더 의미심장하게 기록하는 것이 또한 이것입니다. 17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삼 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 년 동안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삼 년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더니, 삼 년 동안 유다 나라를 강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여쭈어볼까요? 여러분의 나라는 몇 년 강성하시면 좋겠습니까? 10년입니까? 100년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10년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는 것이고, 100년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는 시간만큼 하나님은 강성하게 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평생은, 그리고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안에서 바르고 순전하게 행하여, 늘 강성하게 해주시고 복되게 해주시는 시간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지키시고 힘주시고 평강 주시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결같고 변치않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