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식생활
세계의 여러 민족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각각 자신들의 풍토와 미각에 맞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요리를 개발해 왔다. 이러한 식생활의 다양성은 각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재료를 요리하는 기술, 요리에 부여하는 문화적 의미의 다양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요리도 주거양식에 못지 않게 세계 각 지역의 생태학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 속에 형성되어
온 문화이기 때문에, 토착성이나 고정성, 전통성이 강한 생활문화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리분야에서 문화적 접촉과 수용, 변용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샤부샤부'가 한국의 일식집에서 모두 함께 넣어 끓여 먹는 탕
요리가 되고, 한국의 김치가 일본에 건너가 수십 종의 변형된 일본산 '기무치'로 태어나고
있는 사실은 요리문화의 다양한 변용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요리는 민족이나 지
역에 고유한 역사와 전통에 의해 형성되어온 물질문화이나, 다른 민족이나 지역의 요리와
서로 접촉하면서 아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일본요리든 한국요리든
요리 자체의 물질적 특징이나 단순한 요리방법의 이해만으로는, 요리나 식사관행의 배후에
있는 생활문화 자체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하, 일본요리와 일본인의 식생할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정리하고, 그 중요한 특징들을
사회蟁문화적 맥락에서 설명蟁해석해 보고자 한다.
(1) 육식을 금지한 식생활의 역사
나라시대(奈良, 710-784)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이 금지되었으며, 소나 말, 닭, 원숭이
의 식용을 금하고 있었다. 이러한 식생활에 대한 금기는 에도시대(江戶, 1603-1868)까지 이
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메이지시대(明治, 1868-1912) 이전의 일본인이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경작용 가축인 우마의 식용을 금기시했지, 사냥한 야생동물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야생동물은 사람들의 정착생활과 농경지의 확대로 그들의 삶의 터전이 침
식됨으로써 급격히 감소되어 갔다. 산간오지에 사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육식의 기
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여름의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건조지대에 발달한 목축도 발
달하지 못했다. 에도시대에는 사슴이나 멧돼지를 정력을 증강시키는 '약용식품'으로 이용했
으며, 특히 멧돼지를 '산 고래(山鯨)'라 하여, 명목상으로는 짐승의 범주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먹을 때의 거부감을 약화시켰다.
이와 같이 나라시대 에서 메이지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는 육식문화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이것이 당시의 일본요리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헤이안시대(平安, 794-1192)에는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어, 귀족사회의 풍요로운 식문화
가 성립되었으며, 식사도 맛이나 영양보다는 색깔이나 모양, 장식 등 보기에 아름다운 형식
을 중시한 '잔치요리(大饗料理)'가 유행했으며, 또한 사회적 신분과 계층에 걸맞는 식사예법
이 마련되어 오늘날 일본요리의 기본틀이 형성되었다.
카마쿠라시대(鎌倉, 1185-1333)에 들어가면,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선종(禪宗)이 무가(武家)
사회에 수용되어, 수행기간 중에만 먹는 '쇼진(精進, 채식)' 요리가 고안되어 정착하게 된다.
또한 선종의 사찰에서 낮에 차를 마시는 습관이 일반화되자, 1일 2회의 식사 외에 '점심(點
心)을 포함하는 1일 3식의 식사관행이 정착하게 된다.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1568-1699)
시대에는 카마쿠라시대에 시작된 차마시기 풍습이 '차노유(茶湯, 다도)'라는 일본 특유의 생
활문화로 완성되었으며, 차를 끓이기 전에 준비하는 '카이세키(懷石)' 요리가 태어나 나중
에 대표적 일본요리로 자리를 잡는다.
오랫동안의 쇄국으로 평화시대가 지속된 에도시대에는 새로 형성된 에도(토쿄)와 오사카
등의 대형 소비도시에 전국의 산해진미가 유입되면서, 소비와 향락 중심의 도시문화가 꽃이
피고, 모양보다는 실제로 맛이 좋은 요리가 만들어졌다. 또한 이들 대도시에는 경제력을 갖
춘 신흥 상인계급을 주고객으로 하는 요정이나 음식점 등이 생기고, 요정에서는 이들을 위
한 연회용 요리가 발달하여 현재의 연회용 요리의 기초가 되었다. 에도 말기에는 오랫동안
육식을 금지한 식생활의 근간이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특히 외국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쇠고
기 요리가 유입되면서, 이것을 먹는 것이 진보사상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때
까지 일본의 쇠고기 요리는 냄비에 된장과 함께 끓여 먹는 약용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으
나, 이것을 평상식으로 먹는 것이 문명개화의 본보기가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오늘날 일본의 대표적 요리로 자리잡은 '뎀푸라(튀김요리)'나 '소바키리(메밀
국수)', 초밥, 뱀장어의 '카바야키(뱀장어를 토막내어 뼈를 바르고, 양념을 발라 꼬챙이에 꿰
어 구운 것)' 등이 생겼으며, '와사비(고추냉이)'를 푼 간장에 찍어 먹는 현재의 '사시미(생선
회)'도 에도시대에 간장이 보급되고나서 일반화되었다. 또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조미료인
간장이나 설탕, 다시마, '카츠오부시(가다랭이포)' 등도 에도시대에 생겼다 하니, 일본요리의
형성과정에서 에도시대가 차지하는 사회蟁경제적 의미와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
다.
개국과 함께 시작된 메이지시대에는 구미의 음식이 급격히 유입되어 일본의 전통적 식생
활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육식도 허용되고, 정부의 장려로 '규나베(牛鍋, 쇠고기와 채소 등
을 냄비에 넣어 끓여 먹는 것)'가 유행한다. 때를 같이 하여 일본과 서양식 요리의 절충형도
속속 등장하게 된다. '메이메이젠(銘銘膳, 외상)'에서 '차부다이(여럿이 함께 먹는 높이가 낮
은 밥상),'에, 그리고 식탁으로 식생활 환경도 크게 변화게 된다. 전후 미국에서 들어온 탈지
분유와 밀가루가 무상으로 보급되어 학교급식이 시작되었으며, 이와 함께 1955년경부터 시
작된 고도경제성장으로 일반 서민의 식탁에도 구미형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라시대에서 메이지시대까지 일본인의 식생활에 대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대
강 살펴보았다. 그러나, 특정 시기에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실제 어떤 식사를 했는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극히 드물다. 단편적 고고학 자료를 제외하면, 고대나 중세 사람들의
식생활에 대한 기록은 상류사회의 의례식(儀禮食)에 관한 것이 약간 보일 뿐, 특히 서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것은 전무한 상태이다. 에도시대가 되면, 요리책이 간행되나 이것도 도시사람
들을 위한 요리법에 관한 것으로 서민들에게는 거의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 한편, 마을에 남
아 있는 고문서 등의 기록에는 연중행사나 인생의례와 같은 모임이나 접대용 식사에 관한
것뿐이다.
그러나, 소화(1926-1989) 초기에 서민들의 일상적인 식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
료가 있는데, 이 자료는 1940년 나라여자사범학교 학생들이 여름방학 기간 중에 각자 귀향
지인 자신의 집에서 섭취한 음식들을 기록해서 분석한 것이다. 일본인의 식생활의 전체상
을 밝히는 정량적 분석자료로는 불충분하지만, 당시 나라현의 식생활 실태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쌀을 주식으로 하며, 가장 많이 먹는 반찬은 '츠케모노
(漬物, 야체절임)'이며, 그 다음으로 '니즈케(가지나 호박 감자를 삶아서 간을 한 것), '미소시
루(味汁, 묽은 된장국)', 생선구이와 '츠쿠다니(佃煮, 생선이나 조개, 해초, 채소 등을 설탕이
나 간장으로 달짝지근하게 조린 것)'의 순으로 나타났다. 즉 2차대전 전의 일본인의 식사는
쌀을 주식으로 한 츠케모노와 미소시루, 야채요리가 일반적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인의 식생활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는 메이지 초기의 육
식의 허용과 외국 식문화의 적극적 도입을 계기로 일어났다. 또한 일본인의 전통적 식생활
은 육류섭취가 억제된 곡류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며, 필수 아미노산의 섭취는 생선이나
콩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다른 여러 민족에 비해 생선의 섭취가 유난히 많으며, 식물
성 단백질의 보고인 콩의 소비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최근에는 엔화강세와 함께 값싼 수입
고기의 대량 유통으로 육식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그만큼 콩의 섭취가 감소했다고 할 수 있
다.
(2) 신선한 것이 최고 - 사시미(생선회)와 스시(초밥)
육식이 억제된 곡류 중심의 전통적 식생활에서는 '밋있는 음식'은 당연히 생선류였다. 현
대 일본인의 식생활에서도 생선은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 생선소비
를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2년간 생활하다 귀국하는 일본인을 위한
송별회를 앞두고, 어떤 음식이 좋겠느냐고 물어봤더니, "생선은 곧 물리도록 먹을 테니 고기
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들에게 생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사례라 하겠다. 일본인이게 해산물 중 생선은 가장 좋은 반찬에 해당되며, "쿠삿테모
타이(썩어도 도미)", 아무리 작은 생선이라도 '오토츠키(머리와 꼬리가 달린 것)'라면 훌륭한
반찬거리가 되는 것이다.
"날것으로 먹을 수 없다면, 구워서 먹어라, 그래도 못 먹겠거든 끓여서 먹어라"는 얘기가
시사하는 것처럼, 일본요리에 있어서 음식의 신선도에 대한 집착과 그것에 연유된 요리법의
간소화, 식품의 가공기술에 대한 불신, 음식재료의 있는 그대로의 맛을 강조하는 요리의 소
박함과 자연주의가 강조되고 있다. "하룻밤을 넘긴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식품은 새 것을 구하면 가능한 한 가공을 하지 않고, 그대로
먹는 것이 맛있는 것이다. 일본요리는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을 수 있게 하는 가공기술이나
자연에 없는 맛을 새로 만드는 기술 즉 '요리하는' 것보다 '요리하지 않는' 것을 요리의 이상
으로 삼았다. 요리사의 관심은 오직 소재의 맛을 어떻게 하면 그대로 살릴 수 있을까에 집
중되었으며, 모든 식품은 '꽅(맛이 가장 좋은 시기)'을 기준으로 평가했다. '꽅'이 아닌 것은
요리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최근의 일본인은 이러한 가치관과 식생활의 전통을 바탕으
로, 선도를 유지하는 냉동기술과 다양한 가공기술의 개발로 최대 생선소비국과 수산대국에
걸맞는 세계의 온갖 해산물을 즐기고 있다.
일본어에 '우미노사치(海幸)'와 '야마노사치(山幸)'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산이나 바다에서
나는 풍부한 식품의 재료를 가리키는 말로서, 일본인은 자연환경에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는 말이기도 하다. 1년 내내 비나 눈이 오는 관계로 토지가 비옥하며, 특히 여름의 고온다
습한 기후조건은 식물의 성장과 발육에 최적의 조건이 되고 있다. 일본의 국토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모양을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도시가 바다와 인접하고 있거나 아주 가까운 거
리에 있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우미노사치를 신선한 동안에 가져와 먹을 수 있었던 천혜
의 조건이 된 것이다. 토쿄에서 생선의 '이케'라 하면, 살아서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하며, 관
서지방에서의 '이케'는 살아 움직이는 동안에 즉사시켜 그 상태로 며칠간 보존된 상태를 가
리킨다. 이는 해안과 마주하고 있는 토쿄에 비해 한 때 문화와 역사의 중심지이었던 쿄토
가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산 속에 위치한 사실에 기인한다. 일본 전체를 생각하면 대부분의
도시들이 토쿄처럼 바다에 접하고 있어, 식품의 신선도에 대한 관념은 토쿄의 '이케'에 가깝
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든 "생선은 날것으로 먹어라, 구워서 먹어라, 그래도 못 먹겠거든
끓여서 먹어라"고 한 속담은 생선의 선도에 따라 요리법을 달리하라는 말이다. 생선은 전통
적으로 일본의 부식으로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신선할 때 날것으로 먹
는 것을 최고로 친 것이다.
일본요리 중에서 신선도와 '이케'를 중시하는 식품은 말할 것도 없이 '사시미'이다. 생선은
그 자체가 종류는 다양해도 사시미의 형태로 먹는 경우, 조미료를 많이 섞어 맛을 낸 다른
요리에 비해 맛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다. 따라서, 요리사는 맛으로 승부를 낼 수 없으며, 요
리에 사용된 재료의 품질을 문제삼게 된다. 나아가 요리의 모양과 색깔, 장식 등의 '모양내
기'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어육을 벤 모양이나 배열방법, 머리와 꼬리 부분의 곡
선(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먹지 못하는 장식품 등, 단조로운 맛을 다양한 모양새와 꾸미기
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사시미의 모양내기에는 여러 모양의 식칼이 사용되는데, 이 중 야채용 식칼은 극히 일부
에 지나지 않으며 생선용이 대부분이다. '데바보초(出刃包丁, 식칼)나 사시미칼과 같이 널리
사용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붕장어용이나 복어회용, 장어용 등 특정 생선에 한해 사용되는
것도 있다. 즉 생선요리는 칼솜씨뿐만 아니라 식칼 그 자체의 문화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요리 '이에모토(家元, 종가집)'에서 행하는 일종의 '칼법의식(包丁式)'이 이에 해
당된다. 이러한 생선요리와 칼놀림, 식칼 등을 포함한 생선요리문화가 일본요리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생선요리를 생각할 때, 간장과 소금의 기능을 빼놓을 수 없다. 생선요리는 간장과
소금이라는 단일 조미료의 사용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끓여 먹는 생선에는 간장, 구워 먹는
것에는 소금"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간장과 소금은 생선요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간장은 생선을 단일맛으로 먹는 일본인의 식사관행을 더욱 진전
시켰다. 한국 사람들이 회를 먹을 때, 간장과 초장, 된장을 함께 겻들여 먹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일본인의 생선요리에서 간장의 의미를 쉽게 읽을 수 있다. 간장은 생선요리문화의 결
과이며, 비린내를 없애고 생선의 담백한 맛을 강조하는 가장 좋은 조미료이다. 일본요리의
역사에서 '다시(가다랭이포를 쩌서 여러 날에 걸쳐 말린 것을 얇게 깍아 낸 것)'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과 간장의 출현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만능 조미료인 간장과 소재를 중시하는 요리관 때문에, 앞에서 말한 요리기술은 아주 단
순할 수밖에 없었으며, 소재로 승부하는 요리법이 고안된 것이다. 전문 요리사의 솜씨는 칼
을 쓰는 기술과 예쁘고 맛깔스럽게 보이기 위한 '담아내기'로 판가름났다. 이러한 요리사의
식당요리는 지나치게 특수화되어 가정요리와의 차이를 크게 벌려 놓았으며, 물밀듯이 밀려
오는 외래의 다양한 식문화에 적응하는 데에 한계를 들어내고 말았다. 예를 들면, '네 발 달
린 동물'의 금식에서 해방된 이후에 서양이나 중국에서 육류에 대한 여러가지 요리법이 소
개되었으나, 일본요리 쪽에서 고안해 낸 것은 기껏해야 '규나베'(스키야키)' 정도였다. 또한
동물의 내장이나 뼈에 관한 요리도 한국요리에 의존한 결과 내장이나 뼈를 이용한 요리법은
고안되지 못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일본의 음식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생선요리는 '스시(壽司, 생선초밥)'이다.
스시는 원래 생선을 오랫동안 저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며, 이를테면 '생선절임'인 셈이다. 나
무통이나 항아리에 소금을 친 생선과 밥을 번갈아 넣고, 또는 생선의 뱃속에 밥을 넣거나
통 속에 어육과 밥을 번갈아 넣어 누름돌로 눌러 두면, 자연적으로 발효되어 썩지 않는 생
선절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든 '나레즈시'(생선초밥)는 도작문화권인 동남아시
아에서도 널리 애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 발효된 스시는 어
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좀더 빨리 초밥을 먹기 위해 고안 된 것이 바로 에도시대 후기
에 나타난 '니기리즈시(주먹초밥)'이다. 이것은 생선의 어육을 엷게 썬 것을 초를 넣어 섞은
밥을 손으로 한 움큼 집어 단단하게 한 것 위에 얹어 먹는 것으로, 현재 일식집에서 먹을
수 있는 초밥의 형태이다.
(3) 의례식(儀禮食) - 떡과 경단
우리의 떡국이나 팥죽처럼, 일본에서도 섣달 그믐날의 메밀국수, 설날의 '카가미모치(鏡餠,
신불(神佛)에게 바치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동글납작한 떡)', 토소(屠蘇, 도소주), 조니(雜
煮, 야채나 고기를 넣어 된장이나 간장으로 간을 맞춰 끓인 떡국), '오세치요리(설빔요리)'
등이 있으며, 3월 3일의 '히나마츠리(雛祭)', 5월 5일의 단오, 7월 7일의 칠석제 등에도 특
별한 음식을 먹는다. 또한 출산을 축하하는 데나 3월과 5월의 '셋쿠(節句, 명절), 결혼식 등
에도 특별히 준비된 떡이나 술, 생선 등을 먹는다. 이 때 먹는 음식이 말하자면 '의례식' 또
는 '행사식'인 것이다. 의례식은 그 일컫는 이름이나 모양, 색깔 등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
관련된 주술적 효과를 기대하는 뜻에서 의도적으로 마련된다. 예를 들면, '타이(도미)'는
'메데타이(경사스러운)'의 '타이'에 '모치'는 '치카라모치(힘센 사람)'의 '모치' 에 연관되어 특
정한 날의 음식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 밖에 '수루메(말린 오징어)'나 '콘부(昆布, 다시마)',
'카츠오부시(다랭이)'도 의례식으로 자주 이용된다.
연중행사나 인생의례 등의 특별한 날에 먹는 대표적 의례식에는 '모치(떡)'와 '단고(경단)'
가 있다. "경사에는 떡을 빚고, 흉사에는 단고를 만든다"는 말이 있으나, 그 구별은 확실하
지 않다. 본래 모치는 찹쌀을 쪄서 그것을 으깨어 만든 것이고, 단고는 맵쌀가루를 물에 개
어 둥글게 만든 다음, 이것을 구워서 만든 것이다. 이 또한 엄밀하게 구분하기 어럽다. 현실
적으로 여러가지 다양한 중간 형태의 식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시게(石毛直道)에
의하면 모치나 단고가 보통 연중행사와 관련된 식품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평
상식품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으며,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서는 주식으로도 사용되었다 한
다.
필자는 필자의 조사지(후쿠시마현 타키네초)에서 설이나 추석 등의 연중행사에 다양한 종
류의 떡을 만들어 며느리의 친가에 보내는 관행에 주목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12월
28-30일에 떡을 빚어 수건 1장과 함께 친가에 보내는 '나가모치(절편같은 모양)', 3월 3일의
명절 인사용으로 흰떡과 쑥떡을 포갠 다음 눌러 펴서 마름모꼴로 자른 '쿠사모치', 봄과 가
을의 '히간(彼岸, 춘분과 추분을 중심으로 한 7일간)'에 찹쌀과 맵쌀을 섞어 밥을 지은 다음,
가볍게 으깨어 둥글게 뭉쳐 팥고물을 묻혀 만든 '보타모치(가을의 히간에는 '오하기'라고
함)', 5월 단오에 쌀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편 후, 그 속에 콩고물을 넣어 둥글게 한 다음, 떡
갈나무 잎으로 싸서 찐 '카시와모치', 콩고물을 넣지 않은 흰떡을 깻잎이나 감나무 잎으로
싸서 찐 '본모치' 등이 있다. 떡이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의례식으로 이용되고 있
는 사례로서 주목할 만하다.
앞에서 약간 언급한 주술적 효과를 기대하는 뜻에서 이용하는 떡에는 '치카라모치(力餠)'
가 있는데, 이것을 먹으면 실제로 배가 든든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특별한 힘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쌀의 본질이 응축된 떡에는 벼의 곡령(穀靈, 稻魂)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설날에 먹는 '카가미모치(鏡餠)'도 그 둥근 모양에서 신경
(神鏡)을 연상하고, 새해에 각 가정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신(歲神)이 머무는 것으로 생각
했다. 말하자면, 곡령이나 신이 머무는 신성한 음식으로 간주한 것이다. 오츠카(大塚滋)의 지
적처럼 설날 초하루에 아이들에게 하나씩 주는 둥근 떡 이름에 '토시다마(신이 인간을 방문
하여 하사하는 것)'가 이용되는 것도 모치를 신의 하사품, 즉 영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
다.
이러한 설명이 사실이라면, 필자의 조사지에서 선물로 이용되는 여러 종류의 떡은 신앙적
요소가 희박해지고, 소멸한 것에서 상징의 세속화가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성스러운
'하레'의 음식물이었던 모치가 일본의 근대화와 함께 세속화되어 점차 인스턴트식품의 일
종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떡은 여전히 연중행사와 같은 특별한 날에 신(神)과 불
(佛)에 바치는 제물로 자주 이용되고 있으며, 제례가 끝난 후에 벌이는 '나오라이(直會, 음복
잔치)' 때는 신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매개물이 되고, 또한 사람들 사이의 세속적 선물로
도 자주 이용되고 있다.
나오라이는 본래 신과의 공식(共食) 의례로서 제신(祭神)에게 바쳤던 제물(신의 영험한 힘
이 깃들어 있는)을 제사의 주재자와 참가자가 함께 먹는 데 의의가 있었다. 이것을 특히 '신
인공식(神人共食)'이라고 하며 선물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즉 신에게 바쳤던 제물을 사람
들이 나누어 먹고, 나오라이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준 것이 사람들의
사이의 선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의 음식이나 술이 신에게 바쳐진 후에는 각각 '오고후
(護符)'와 '오미키(神酒)'가 되며, 이들에게는 신의 성스러운 힘이 깃들여져 있는 것으로 믿으
며, 이것을 먹고 마시면 특별한 '고리야쿠(利益, 신의 은총이나 가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
다.
한편, 설에 모치를 먹지 않는 '모치나시쇼가츠(떡없는 설)'의 습속에 주목하여, '이네(벼)'
문화에 대항하는 '이모(감자)' 문화라는 이질적 문화체계의 존재를 규명하려 했던 논의도 있
었다. 모치는 '하레노히(경사스러운 날)'에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의례식으로, 일본인의
식생활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4) 개인 전용식기와 청결감
NHK 대하드라마에 나타나는 무사들의 식사모습을 보면, 그들은 한국인처럼 큰 상에 음
식을 잔뜩 차려놓고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앞에 놓인 개인상 위의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각자 따로 먹는 밥상을 '메이메
이젠(銘銘膳, 외상)'이라 하는데, 지금도 각종 모임의 회식이나 결혼피로연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현재 일반 가정에서는 다리를 접을 수 있는 조금 큰 상(차부다이)이나 현대식 식탁
에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반찬을 포함한 음식은 기본적으로 각 개
인별로 따로 마련된다. 즉 음식을 개인의 전용식기에 미리 나눠서 먹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까 자연히 음식의 수가 많지 않으며, 일단 수저를 대었다 하면 남기지 말고 모두 먹어야 한
다. 먹고 싶으나 모두 먹지 못할 경우는 미리 덜어서 먹을 만큼 먹어야 한다.
이러한 전용식기의 대표적 예가 2차대전 전가지만 해도 도시나 농촌에서 사용되었던 '하
코젠(箱膳, 상자상)'이다. 이것은 뚜껑이 달린 정방형의 상자 밥상으로, 상자 속 서랍에 밥공
기와 접시, 젓가락 등의 식기가 들어 있다. 식사 때 뚜껑을 뒤집어 상자 위에 놓고 식기를
나열한다. 하코젠과 그 안에 있는 식기류는 각각 사용자가 정해져 있으며, 같은 가족끼리도
다른 사람의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전용식기에 사용자의 인격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
들에게는 남이 사용함으로써 오염되어 부정한 것이 된다는 관념이 있었으며, 다른 사람의
입과 접촉하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하려고 했다. 이러한 금기를 의도적으로 깨는 데에, 큰 영
향을 미친 요리도 등장했다. 메이지시대에 나타난 '나베모노요리(냄비요리, 찌개요리)'는 같
은 냄비 안의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써 일상적 삶의 질서를 깨고, 연대감을 증대시키는 효과
가 기대되어 학생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식사에 대한 일본인의 위생관을 알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가 있는데, 바로 지정된 용
도로만 쓸 수 있는 '토리하시(取箸)'라는 젓가락의 사용이다. 토리하시는 함께 먹기 위해 준
비된 음식을 덜어서 먹기 위한 젓가락이다. 토리하시가 없다면, 자신의 젓가락을 거꾸로 하
여 입에 닿지 않은 부분을 사용하여 음식을 덜어가야 한다. 우메사오(梅棹忠夫)는 이러한 식
사관행에 나타난 일본인의 위생관을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극력 꺼리는 미적 관념의 체계
로서 일종의 '결벽증문화'라고까지 했다. 그러니까 개인별 식기사용은 일본인의 식사관행
에 있어서 유별한 청결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마 일본인이 한국사람들의 식사행
위, 예를 들면 김치국물이나 된장찌개를 여러 사람이 먹는 모습을 본다면 대단한 거부감을
가질 것이다.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젓가락과 주발(밥그릇이나 국그릇)이라는 개인용 식기가
오래 전부터 일반화되어 있었다. 젓가락과 주발의 문화권에서는 주식과 국은 개인용 그릇에
일단 담아서 먹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동아시아 3국 중에서 일본이 식기의 개인 전용화가
가장 진행된 나라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헤이안시대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중국이나 한국의
영향으로 숟가락이 사용되었으나, 그 후 메이지시대 이전까지 일본인의 식탁에서 숟가락은
자취를 감췄다. 메이지시대에 들어오자 양식용 스프나 카레라이스, 냄비요리의 유행과 함께
숟가락이 재등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숟가락의 사용은 몇몇 양식요리에만 아
주 한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5) 한일의 식문화의 차이 - 젓가락과 숟가락의 사용구분
일본인의 식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밥과 국, 반찬 몇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먹는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밥그릇과 국그릇의 차이에서 비롯되는데, 한국
에서는 그릇을 들고 먹는 것은 식사예의에 어긋나나, 일본에서는 반대로 놓고 먹는 것이 비
천한 행위가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주발이 대부분 놋그릇이었으며, 이것이
크고 무거운데다가 뜨거운 국이나 밥을 담으면 열전도가 빨라 손으로 들 수 없었다. 그래서
밥과 국을 숟가락으로 떠서 먹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반대로 주발이 모두 목
제나 도자기 그릇으로 작고 가벼우며, 열전도도 느려서 들고 먹기에 편하다. 만약 일본에서
한국식으로 먹으면, '이누쿠이(개밥먹기)'가 되며, 한국인이 일본식으로 먹으면 행실이 바르
지 못한 사람이 된다.
최길성도 지적했듯이, 한국에서 숟가락 사용이 보편화된 것은, 일본에 비해 자연환경이 풍
요롭지 못해 동물의 내장이나 뼈까지 전부 처리하는 '탕'(국요리)요리의 발달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비해 일본요리는 국물보다 건더기가 중심이어서 젓가락만으로도 충
분했다고 본다. 또한 일본에서는 일단 수저를 댄 음식은 남기지 않으나 한국에서는 남겨
도 무방하다. 옛날 양반집에서는 오히려 남기는 것이 하인을 위한 주인의 넉넉한 아량으로
통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처음부터 적은 양의 밥과 국이 나오며, 더 먹을 경우에는 '오카
와리(추가)'를 부탁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국에 밥을 말아(섞어) 먹는 것이 보통이나 일본에서 그렇게 먹으면 어김없이
'개밥'이나 '네코맘마(고양이밥)'가 된다. 남이 먹다 남은 것이나 자신의 것이라도 섞어서 먹
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소재 본래의 맛과 모양을 즐기는 식사관에서 비롯
되었다. 즉, 섞으면 재료 본래의 모양이나 색깔, 맛이 사라지며 여러 음식이 섞인 모양은 결
코 보기에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의 대학식당에서 가끔 우동에 밥을 말아 먹는 사람
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예외없이 일본에 갓 온 한국사람들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풍부한 자연환경에 의해 '우미노사치'와 '야마노사치'가 넘치는 풍토
에서 신선한 생선이나 야채를 가능한 한 본래의 맛을 살려서 먹기 위한 다양한 식칼을 개발
한 것도 우리와의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식칼로 자르고 썰어서 예쁜 모양으
로 담아낸 음식을 가능한 한 그 모양을 마지막까지 흐트러뜨리지 않고 먹는 젓가락 전용의
식사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6) 신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미디어 - 오사케(청주)
일본인이 즐겨 마시는 술에는 청주(정종)를 비롯하여, 소주와 맥주, 위스키 등이 있다. 이
중 청주는 '일본 전래의 술'로서 '오사케(酒)'라고 하며, 모든 술을 가리키는 집합명사로도 사
용된다. 맥주나 위스키가 들어오기 전에 '술'을 마신다고 하면, 바로 청주를 마신다는 의미였
다. 일본 민속학의 창시자인 야나기타(柳田國男)에 의하면, 술은 원래 신과 인간이 함께 취
하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신도식 결혼 때의 술잔 주고받기 의례(교배례)
나 지진제, 상량식, 산신제 등 신이 나타나는 곳이나 신을 섬기는 자리에는 반드시 술이 따
랐다. 이처럼 신이 나타나는 때를 보통 '하레노히'라고 하며, '하레'의 행사가 술마시는 기회
를 제공해 준 것이다. 신에게 바친 음식과 술은 '오고후'와 '오미키'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일
컬어질 정도로 예사 음식이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한 '나오라이'는 제사 때 신에게 바친 음식이나 술을 제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회식하는 기회이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신과 인간의 직접적 교류에 술이나 음
식이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끝나면 '온자(穩座)'라는 '부레이코(無禮講, 격
식을 차리지 않는 인간관계)'가 시작되며, 이 때 주위 사람들과 즐겁게 담소하면서 취할 때
까지 마음껏 마시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하면, 술에 취한 몽롱한 상태인 비일상적 세계에서
신이 나타나 취한 사람들 몸에 내리면, 신과 인간이 혼연일체(神人合一)가 된다고 믿기 때문
이다. 술에 흠뻑 취하게 되면 자신이 신인지 인간인지 알지 못하는 '카미가카리, 즉 신들린
상태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세속적 권위나 질서체계는 무너지고,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해지
는 부레이코가 연출되는 것이다.
또한 축제를 시작하기 전에 부정(不淨)을 씻기 위한 '키요메노자케(부정씻기술)'를 마시기
도 한다. 일본의 제사는 이 세상을 방문한 신을 사람들이 맞이하여 융숭하게 대접하여 되돌
려 보내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것을 좀더 세분하면, 신을 맞이하는 의례에서 신과
인간의 교류하는 나오라이, 인간들 사이의 질펀한 잔치(주연)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술을 매개로 한 제사과정은 세속적인 연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즉, 인사를 주
고받는 단계에서 예의바르게 식사하는 단계, 그리고 마음 편하게 마시고 떠들며 한바탕 소
란을 피우는 마지막 단계로 전개된다.
일본어에 '사케니와 사카나(술에는 술안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일본요리에서 차지하
는 술안주의 비중을 무시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근세(에도시대) 일본의 요리가 사카나
요리에서 발달했을 정도로 사카나가 일본요리, 특히 식당의 전문요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18세기 에도시대에는 서민들 사이에서도 누구나 술과 간단한 사카나로 연
회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출현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이자카야(居酒屋, 선술집)'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19세기 초에는 서민형 이자카야에 비해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연회
장인 고급 요정이 유행한다. 그 후 메이지시대에 들어오면 양주를 마시는 장소로서 맥주홀
이나 카페가 등장하고, '타이쇼시대(大正, 1912-1926)'에는 양주와 아가씨들의 서비스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카페가 이른바 문명개화의 대중오락으로서 자리를 잡는다. 그
리고, 1950년대 초에는 위스키를 주로 마실 수 있는 '바'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전통적 연
회나 잔치에서 비롯된 음주문화가 서구화와 함께 새로운 형태로 변용되어 일본사회에 정착
하면서 다양한 연회용 요리(안주요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연회용 일본요리는 당연히 밥
을 먹기 위한 반찬이라기보다 술안주로서 발달한 면이 많다. "술을 마실 때는 밥을 먹지 않
고 밥을 먹었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밥과 술은 서로 같은 종류의 친화적
인 음식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밥은 술로 대체되고, 그것을 먹기 위한 반찬이 곧 안주가
된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인들은 술을 마실 때 잔을 돌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식
사 때 전용식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신이 관련된 전통적
의식에서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결혼식 때의 '카타메노자케(성혼술)'나 설날에 마시는
'토소'는 하나의 잔을 가지고 돌려가며 마신다. 또한 신사식 제사 후의 의례적 음주 때(나오
라이)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 잔을 돌리는 순서가 정해져 있으며, 멋대로 따라서 마셔서는
안 된다. 오늘날 연회 때 여성을 불러 술 시늉을 들게 하는 것은 이러한 관행이 변용된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연회 석상에서 술잔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새로운 안주가 나오는데, 이것
을 기록한 것이 오늘날의 '콘다테(獻立, 메뉴표)'의 시초라 한다.
술과 더불어 일본요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차(茶)이다. '차노유(茶湯)'와 함께
발달한 카이세키요리는 연회요리의 형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일본요리는 쌀과 술, 차의 세 가지 맛과 조화를 이루면서 형성되어 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
다. 무로마치시대(室町, 1338-1573)에 카이세키 요리법과 건축, 다기(茶器), 서화, 문학 등을
종합한 예능으로서 '다도(茶道)'가 나타났지만, 서민에게까지 차 마시는 관습이 일반화된 것
은 에도시대이다. 이 때 거리나 신사, 사찰의 입구, 도시의 극장가와 유흥가 등에는 차를 전
문적으로 취급하는 '킷사텡(喫茶店, 다방)'이라는 대중오락시설이 생긴 것이다.
일본차(綠茶)는 일본에서는 누구나 쉽게 그것도 여러 잔을 마실 수 있는 음료이다. 한국에
서는 아직 가격이 비싸고 입맛에 길들여지지 않아 대중화되지 않았지만, 일본의 식당에서는
몇 잔이라도 그냥 마실 수 있다. 일본인의 차는 식사 후의 입맛을 개운하게 하는 생리적 기
능 못지 않게 사회적 기능 즉, 차를 매개로 한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7) 식생활과 오늘의 문화
지금까지 일본인의 식생활에 대해 단순한 생명유지활동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蟁문화
적 의미가 복잡하게 함축된 생활문화라는 맥락에서 검토해 봤다. 이는 '먹는다'고 하는 인간
의 기본적 행위에 주목하여, 일본인의 음식과 생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나아가서는 타문
화에 비추어 자문화를, 자문화에 비추어 타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의 생활에 대한 이해와 태도는 한 나라나 민족의 차원을 뛰어넘어 지구적 규
모에서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래잡이'나 '쌀수입 개방'에 대한 각 나라간의 정치외교
적 마찰이 그 좋은 예이다. 고래잡이 대해서는 '보호'냐 '이용'이냐, '생존'이냐 '상업'이냐 하
는 2원적 대립개념의 틀 안에서, 각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논의가 분분하다 못해 외교적 마
찰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분쟁이나 마찰은 각 지역과 사회에 따라 서로 다른 식
품의 범주나 이용방법, 규제, 사회蟁문화적 통념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다름 아닌 문화적 마
찰인 것이다.
또 하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과정에 보여진 한일 양국의 '쌀수입개방 반대' 움짐임인데,
여기서도 '식량안보론'이나 '쌀주식문화론'이라는 생존(활)과 문화의 논리가 부각되었다. 도작
문하권에서 형성된 주식과 부식을 구별하는 개념을 구미인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다. 구미인에게 빵은 식탁에 나열하는 여러 가지 음식 중에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
서 우리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이루어지는 매일매일의 식생활이, 실은 보다 큰 세계적 시스
템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두 가지 모두 공존할 수 있는 가치체계 없는 것일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