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人天)의 안목, 보현보살이신 큰스님
보현 이종린(普賢 李鐘麟) |홍익소아과의원 원장
그리운 큰스님 (1)
어둠은 어둠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글은 광덕 큰스님의 상좌 송암 스님께서 내신 '광덕 스님 시봉 일기' 제 8 권에 실린 글입니다. 오늘처럼 화창한 봄날 30 여 년 전, 이제 막 20 대에 접어 든 저에게 봄꽃처럼 맑고 환하게 저에게 오셨다 가신 큰스님을 기리며 썼던 글입니다. 온 산하에 가득한 봄꽃을 보니 큰스님 생각이 북받쳐 올라 싣습니다. 普賢 合掌
제 인생의 봄날에 봄꽃처럼 화사하게 저에게 오셨던 스님.
보현행원을 외치시며 내 생명 다하도록 부처님께 내 모든 것을 공양 올리고자 하신 스님.
오늘처럼 화창한 봄날이면 환한 웃음 머금고 오시던
우리 '광(光)'자 '덕(德)'자 큰스님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저는 큰스님을 세 번 만났습니다.
첫 번째는 형상으로서의 만남,
두 번째는 보현행원을 통한 만남,
그리고 세 번째는 큰스님 열반을 통한 만남이 그것입니다.
큰스님을 형상으로 만나 뵌 것은 불과 서너 번에 지나지 않지만,
큰스님의 맑은 모습은 너무나 깊이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가고 아니 계신 광덕 큰스님!
큰스님께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저의 작은 그리움, 이렇게 돌아봅니다.
(1)첫 번 째 만남-어둠은 어둠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스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제가 갓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였습니다.
그 때가 아마 지금과 같은 화사한 꽃 피는 사월 봄날이었으니,
불교 학생회 첫 수련회 갔을 때 온 산에 꽃 냄새 가득한 법당 문을 활짝 열고 힘차게 들어오시던 스님이 기억납니다.
얼굴에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한없이 밝고 자비로우신 빛을 온 몸에 가득 담고 스님은 저에게 그렇게 오셨습니다.
잠깐 그렇게 뵈었던 스님은 그 해 초겨울, 대각사에서 다시 뵙게 됩니다. 유신 치하이던 당시, 호국 불교라는 우산 아래 고통 받는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던 불교계에 경종을 울리고자 서울대 불교 학생회 임원진들이 반정부 집회를 가지려는 것도 모르신 채,
이 날 스님은 "어둠은 어둠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등불을 밝힐 때 어둠은 저절로 사라진다" 라는 법문을 하셨습니다(이 말씀은 저의 평생의 좌우명이 됩니다).
그 후 학생들이 종로 거리에 나가려 할 때 그제서야 그 사실을 아시고
학생들이 다칠까봐 온 몸으로 막으시던 스님.
약하게 보이던 스님의 그 날의 또 다른 모습은 저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다음 해 선배를 따라 스님 뵈러 종로 대각사에 한두 번 더 갔던가?
환하게 웃으시며 제 이름은 안 불러 주시면서(당연하시죠. 스님은 저를 모르시니까요)
제 옆에 있던 선배 이름을 부르며 잘 왔다고 하시며 환히 웃으시던 젊은 날의 큰스님!
그 웃음 환하시던 스님의 모습이 제가 이생에서 뵈었던 형상으로서의 스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 후 고뇌가 일 때마다 잠실로 옮기신 스님을 뵈러
그 당시만 해도 허허 벌판이던 불광사로 몇 번 더 찾아 갔으나,
병환 중이어서 만나 뵙기 어렵다는 시봉 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 때마다 아픈 가슴을 안고 그냥 발 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제 선배님들 중에는 스님과 친한 분도 있었고
심지어 갈매리 보현사에서 스님을 모시고 학교를 다닌 분도 있었지만,
저는 그런 복을 짓지 못해 열반하실 때까지 다시는 스님을 뵙지 못하게 됩니다.
(2)두 번째 만남---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스님을 두 번째 뵙게 된 것은 행원을 통해서입니다.
큰스님이야 제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 계셨던 분이고 '보현행원품'을 번역하신 것도 알고 있었지만, 저는 스님이 평생 행원을 당신 수행의 근간으로 하셨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행원을 통해 다시 부처님을 만나게 됩니다.
행원은 제가 이 때까지 만났던 어떤 수행보다 뛰어난 수행법이었습니다.
행원은 일체 중생을 부처님으로 만들며 부처님 같은 삶을 우리가 직접 살게 합니다.
섬기고 공양하는 보현행원을 통해,
우리는 부처님 무량 공덕의 바다에 들어가게 되며
깨달음은 소리 없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행원은 이토록 뛰어난 수행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행원을 수행하면서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것은 행원이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뛰어난 수행이라면
선지식들께서 행원을 말씀하시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제가 과문한 탓이긴 하겠지만
주위에 보현행원을 설하시는 선지식들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름 난 선지식들께서 행원을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당연할 것입니다.
즉 행원이 별로 뛰어난 수행법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현행원은 예로부터 뛰어난 수행법의 하나로 알려져 왔고
저 역시 행원을 함으로써 그 공덕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던 터라,
행원을 말씀하지 않는 우리 불교계의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수행법을 선지식들이 설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정말 내가 잘못 알았나?
정말 나는 잘못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느끼고 있는 환희는 단지 경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저는 이런 의문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의문을 확실히 풀어 주신 분이 바로 큰스님이십니다.
저는 어느 날, 우연히 큰스님의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라는 법문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저에게 마치 우레와 같은 큰 법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행원을 말씀하시는 분이 다름 아닌 우리 '광덕 큰스님'이라는 사실은
제게 늘 떠나지 않던 행원에 대한 의문을 한꺼번에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큰스님 같으신 분이 행원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더 이상 행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이후로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더라도,
출가 고행을 하지 않더라도,
내 비록 번뇌 많고 어두운 범부 중생에 지나지 않지만
'보현행원으로 세간 속에서도 해탈을 이룰 수 있으며,
일체의 보현행을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으로써 반드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저는 보현행원으로 꼭 보리를 이룰 것입니다.
*註: 보현행원-불교에는 성불을 뒤로 미룬 체
일체 중생의 해탈을 위해 사시는 성자들(菩薩이라 부릅니다)이 많이 나옵니다.
지혜를 상징하시는 분이 문수보살이시라면, 자비를 상징하는 분은 관세음 보살이십니다.
보현 보살은 부처님을 모시는 대표적인 두 분 보살님 중 한 분으로,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보현보살이 일상 생활에서 스스로 성불하며
또한 이웃과 더불어 함께 성불하는 법을 일러주신 것이 보현행원인데,
행마다 원을 가지고 하라는 뜻입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는 그러한 행원의 구체적인 열 가지 사례가 실려 있습니다.
(3)세번째 만남-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리
마지막으로 스님을 뵈온 것은 불광사 보광당에서입니다. 스님의 열반을 알린 조간 신문은 저에게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습니다.
황급히 불광사 보광당에 달려 갔을 때 한 눈에 들어 온 스님의 영정...
그 환한 모습은 제가 이십 여 년 전 봄날에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스님! 이제야 제가 왔습니다..."
스님은 제가 누군 줄 아실 리도 없고
저 또한 스님에게 있어서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그런 사람이겠지만,
삼 배를 드리며 저는 그렇게 스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삼 배를 드리는 도중에 어찌나 눈물이 솟아 나오는지...
그것은 다름 아닌 아쉬움과 통한의 눈물이었습니다.
내가 좀더 일찍 발심했더라면!
내가 좀더 일찍 행원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제 가슴을 후려쳤던 것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큰스님께 행원을 공양 올릴 수도 있었고 큰스님의 깊고 크신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제가 어리석고 게으른 탓에 그냥 스님을 보내 드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스님을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발심하고,
또 발심한 후에도 정진을 게을리 한 탓에 행원을 늦게 알아
큰스님께 공양 한 번 못 올리고 그냥 떠나 보내 드리고 말았으니
어찌 그 회환이 깊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연은 부질없는 것이라,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어려운 법.
언제 어느 회상에서 다시 스님을 만나 뵐 수 있으며,
언제 또 스님 모시고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다행이 아직은 이른 때라, 오신 분들이 많지 않아 저는
큰스님께 청정수 한 잔은 올려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한 잔의 청정수를 올리며,
다시는 못 만나 뵈올 '광(光)'자 '덕(德)'자 큰스님께 저의 작은 원을 공양 드렸습니다.
"큰스님! 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듯,
반드시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어
이 땅에 큰스님 못다 하신 행원의 노래, 꼭 울려 퍼지게 하겠습니다..."
그 때 올린 저의 원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으나,
내 생명 역시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똑같은 무량 공덕 생명!
내가 더 큰 보리심으로 더 큰 정진 이룰 때,
금정산이 울리도록 크고 당당하신 큰스님의 모습은
우리 앞에 다시 현현하게 될 것입니다.
*註1.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
---큰스님께서는 늘, 내 모습이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나의 생명 역시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이 무한한 능력, 축복, 은혜가 가득한,
부처님과 똑같은 그런 존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마치 촛불이 비록 작고 미약하나
그 본질은 산하를 훨훨 태우는 저 거대한 산불과 조금도 다름없듯 말입니다.
우리 생명의 본질이 무한한 능력, 무한한 축복, 무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이므로,
이 사실을 믿고, 긍정하고, 그래서 찬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존재임을 알아,
스스로를 비하하며 아무렇게나 못난 중생으로 살아 갈 게 아니라,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이 그렇게 자비롭고 너그럽고 찬란하게 살아가자는 말씀입니다.
*註2. 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리!
-큰스님의 열반송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신 큰스님은 병(폐결핵) 치료하러 가셨다가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24 세 때 출가하셨는데, 범어사 뒷산 이름이 금정산입니다.
스님은 젊은 날 범어사에서 한창 공부하실 때 금정산을 자주 오르셨다고 합니다.
젊은 날 보셨던 그 푸르던 산이 열반을 앞두고 떠 오르셨나 봅니다.
덧붙인다면 여기서 금정산은,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의 본성, 본래 면목을 뜻하기도 합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광덕 스님 열반송]
울려서 法界를 振動하여 鐵圍山이 밝아지고
잠잠해서 劫前 봄소식이 劫後에 찬란해라
일찍이 形相으로 沒形相을떨쳤으니
金井山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永遠하리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첫댓글 시봉일기의 8권의 제목이 "인천(人天)의 안목" 이길래 무슨 이유인가 했었는데 보현선생님의 글이였습니다.
이 글을 전문을 다 실으려고 하니 너무 길어서 다음 주에도 이어집니다.
보현선생님께서 큰스님을 만난 인연과 보현행원을 공부하시게 된 인연에 관한 글입니다.
보현선생님께서 올리신 글을 제가 다시 편집하여 올립니다. 중간중간 註도 있어서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봐도봐도 신심이 생기며 조금이나마 나아가고 싶은 마음 솟습니다.
여러번 꼭 꼭~~~ 읽으시길 간절히 청하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 보현행원으로 보리이루리. 보현행원으로 불국이루리. 다시 한번 읊어봅니다.
미처 몰랐습니다. 보현선생님과 광덕큰스님의 형상적 만남이 그리 짧은 줄.... 울림. 파동이 번져가듯 ..인연도 감동도 퍼져가나봅니다. 보현행원의 노래도 온누리 울리길 발원하며 ~ 우리를 이리 인연지어주시는 보현선생님께도 찬탄드립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고맙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광덕스님 시봉일기는 꼭 보시길 강추합니다.
몇년 전 너무 좋아 이책 저책 사서 보고 또 보고 했던 기억들이 오늘 이자리까지 이어졌나 봅니다.
공부도 투자를 해야 한답니다.
시간 , 정열, 돈...
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밍
고맙습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보현행원으로 보리이루리. 마하반야바라밀_()()()_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