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화번공주 왕소군
경국 지색,, 나라를 기울게 하는 미인이라는 고사 성어로 중국의 경국지색 4대 미녀를 꼽으면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초선(貂蟬), 그리고 왕소군이다.
다른 미인들은 국가의 경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왕소군은 그녀의 조국, 한나라를 위해 흉노로 시집가고 그곳에서 나름 조국을 위해 의미있는 일생을 살았던 여인이었다.
기원전 200년, 중원을 통일한 한나라 고조 유방은 흉노 토벌에 나섰으나 백등산에서 흉노에게 포위되어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신하 진평의 지략으로 겨우 탈출하여 중원에 돌아 온 유방은 자신에게 직언을 한 유경을 불러 흉노 정책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유경은 간했다. “흉노를 무력으로 제압하기는 어렵습니다. 화친을 위해 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면 묵돌이 폐하의 사위가 되고 그가 죽으면 폐하의 외손자인 그의 아들이 선우가 될 것이니, 그들과 사돈이 되면 전쟁을 줄일 것입니다.”
한번 크게 혼이 난 유방은 더 이상 흉노와 싸우는게 진저리가 났다.
당시 한나라는 중원을 통일했지만 제후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태였고 내란의 후유증도 아물지 않았다.
유방은 유경의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여 흉노와 화친정책을 추진하고 한나라는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맺었다.
①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출가시킨다.
②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③ 한과 흉노가 형제의 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물론 형은 흉노였다)
④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한나라는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흉노에게 공녀를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입장으로 전락한다
유방은 여후(呂后)와의 사이에 공주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애지중지하는 딸을 묵돌에게 주긴 싫었다.
그는 황족 가운데 다른 공주를 물색해 묵돌에게 시집보냈으며 이후에도 그러한 전통은 이어졌다.
후세 중국에서는 이처럼 주변의 이민족에게 시집간 중국의 공주를 화번공주(和蕃公主)라 불렀다.
즉 오랑캐(蕃)와 평화(和)를 유지하기 위해 보내진 외교사절과 같은 공주라는 의미로 말하자면 정략결혼의 산물이 바로 화번공주였다
원제국이 고려에 시집보낸 몽골 공주들도 화번공주의 일원이었다.
묵특과 유방간의 백등산 전투 이후 흉노는 한나라에 대한 우위에 입장에 서서 70년 동안 흉노 전성시대를 열었다.
한나라는 흉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숱한 전투를 벌였으나 대부분 한나라가 패하고 흉노가 승리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전투와 화친이 되풀이되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 무제가 즉위한 이후 상황은 반전되어 일진일퇴하는 40여 차례에 걸친 전투 이후 한나라가 우위에 서고 흉노가 열세로 밀리는 형국이 된다.
그러나 양쪽의 충돌로 인해 서로에게 손실이 커지면서 필요성에 따라 화친 관계를 이어가게 됐다.
그래서 한 무제의 시대가 끝난 이후 흉노와 한나라 사이의 변경지역은 "성은 늦게 문을 닫고 소와 말들이 들판에 퍼져 있으며 개가 놀라 짖는 소리도 없고 병사도 없는" 평화의 상황이 계속됐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한 원제 때 왕소군이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가면서 더욱 긴밀해졌다.
기원전 53년 한나라 선제 치세, 유방이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맺은지 167년 흐른 시점, 흉노의 세력은 많이 약해져있었다.
엎친데 덮친 겪으로 흉노는 내분에 휩싸여 호한야 선우 진영과 질지 선우 진영으로 갈라져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한나라와 손을 잡는 진영이 유리한 고지에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호한야 선우는 선수를 쳐 한 선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질지선우에 대항하여 연합하여 주면 이후 한나라의 변방에 정주하면서 국경을 지켜줄 것을 제안한다.
결국 질지선우는 호한야 선우-한나라 연합군에 쫓겨 도망다니다가 기원전 33년 사망한다.
호한야는 기뻐하면서 기원전 33년 한원제 치세, 한조에 다시 입조했다.
한나라 11대 황제 원제는 집권 말기인 기원전 38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린다.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으며 왕소군, 본명 왕장(王嬙)도 18세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왕소군 상상도]
그러나 왕소군은 입궐 후 5년간 단 한 번도 황제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서시, 초선,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 4대 미녀로 꼽힐 정도로 미모가 출중한데도 간택되지 않은 것은 뇌물관행 때문이었다.
원제는 후궁이 많아 일일이 신상을 파악할 수 없었음으로 화공으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해 책으로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서 한 명을 지명해 침실로 불러들이곤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후궁들은 화공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을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로비했다.
왕소군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왕소군이 뇌물을 주지 않자 모연수는 일부러 그녀를 밉게 그려 놓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원제의 눈에 띄일 기회를 잡지 못했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고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선우를 환대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했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그녀들의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한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로서는 종실의 공주가 아닌 한미한 궁녀를 보내면 전혀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 생각하고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했다.
호한야는 왕소군을 지목했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애가 어디 숨어있었지??'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었고 원제는 혼수준비를 위해 사흘 말미를 달라고 요구했다.
원제는 왕소군과 미앙궁에서 식음을 전폐한 채 사흘 밤낮을 보낸 뒤 흉노 땅으로 그녀를 보내줬다.
작별하면서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이라는 칭호를 내려줬다.
그리고 화공 모연수는 참형에 처했다.
[모연수가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왕소군 모습, 원제가 쳐 죽일만 하다]
절세미녀와 함께 몽골로 향하는 호한야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으나 정작 왕소군의 마음은 슬프고 착잡했다.
왕소군이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장안(長安)을 한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왕소군은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흉노로 시집가는 왕소군]
믿거나 말거나,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하여 왕소군의 미모를 ‘낙안’(落雁)이라고 칭하게 된다.
시인들은 그녀의 애달픈 삶을 노래했는데 당나라 측천무후의 좌사였던 동방규가 쓴 ‘왕소군의 원한이라는 ‘소군원삼수'가 가장 유명하며 그 중의 한 구절인 '춘래불사춘'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고사성어이다.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어(胡地無花草)
봄이 왔으되 봄 같지가 않구나(春來不似春)
나도 모르게 옷 띠가 느슨해졌나니(自然衣帶緩)
몸이 약해진 때문만은 아니리(非是爲腰身)
흉노에게 시집간 왕소군에게는 영호 연씨라는 존호가 부여됐다.
즉 ‘흉 노를 편안하게 하는 왕비’라는 의미였다.
선우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우는 등 흉노에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궁궐에 갇혀 지냈던 소군은 자유로운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호한야 선우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으며 아들에게 이도지아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노령의 호한야 선우는 마치 어린 아이와 생명을 바꾼 듯 2년 만에 죽고 그의 친아들인 복주루약제 선우가 즉위했다.
흉노를 포함한 유목사회 풍습 가운데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아버지의 첩들을 자신의 아내로 삼는 풍습, 수혼제라는 것이 있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부인으로 받아들이는 형사취수도 여기에 해당한다.
새로 즉위한 선우가 계모인 자신을 아내로 삼으려 하자 왕소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했다.
중국에는 그 같은 풍습이 없다는 것이 그녀가 내세운 이유였다.
결국 왕소군은 한나라 황제에게 물어 보고 결정하겠다며 황제에게 사신을 보냈다.
황제가 보낸 답변은 흉노의 풍습에 따르라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소군은 젊은 선우의 아내가 됐다.
그리고 두 딸 수복거차, 당간거차를 낳았다.
복주루약제 선우는 재위 10년 만에 사망했고 그 이후 오주류약제 선우를 비롯한 세 명의 동생이 잇따라 선우에 자리에 오른다.
오주류약제 선우가 즉위했을 때 왕소군의 나이는 40세가 조금 넘은 나이였으며 그녀가 수혼제에 따라 동생 3명과 부부관계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흉노의 풍습으로 당연한 일이어서 사서에 실리지 않은 지도 모른다.
왕소군은 72살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한 셈이다.
흉노에서 살았던 소군을 중국에서는 애처롭게 생각하고 비운의 여인이라고 불렀다.
중국이 가진 윤리의 잣대로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혼인 생활을 하고 척박한 오랑캐 땅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장강 유역의 호북성 출신인 그녀가 추운 초원의 땅에서 지내면서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해서 가엽게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딸을 낳아 얼굴이 예쁘면 흉노로 보내질 것을 두려워해 일부러 얼굴을 망가뜨리기도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왕소군은 흉노와 화친을 이룬 공으로 그의 형제들은 한나라에서 높은 관직을 받고 사신으로 흉노를 여러 번 다녀갔다.
또 두 딸은 한나라 황실을 자주 다녀가기도 했다.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서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간 왕소군, 공주는 아니지만 실제로 화번공주와 같은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날아가던 기러기가 땅에 내려앉을 만큼 (落雁) 아름답웠던 왕소군은 다른 미녀들이경국지색, 나라를 기울게 만든 부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과는 달리 나라를 지켜주는 데 기여하고 자신도 의미 있는 삶을 산 미인이었다.[출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화번공주 왕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