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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명수필 감상 / 수필문학 2002년 3월호]
고요한 마음 자리 잡아주는 삶의 나침반 - 김영배 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읽고 -
글. 윤승원
존경하는 어른의 귀한 저서를 받으면 '요 부분은 언젠가는 다시 읽게 되리' 싶어 밑 줄을 그어 놓는다.
논강(論江) 김영배 선생님의 수필집 『돌 하나에도 짐이 될세라 』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의지 하고 싶은 마음」은 몸이 편치 않은 사람뿐 아니라 건강한 젊은이도 자신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메시지가 담겨있어 여러 군데 밑줄을 그어 놓았다.
내가 아는 이 분은 글도 좋지만 인품은 더 훌륭하신 분이다. 그 인품이 이 글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금은 뜻하지 않은 환후를 얻으셨지만, 그 동안 열정적이고도 왕성한 문필활동을 해 오신 분이다.
언젠가 출판 기념회에서 남들이 그토록 작품에 대한 찬사를 거듭하건만 자신은 오로지 '잡문만 써 왔다'고 한사코 고집하는 모습을 보면서 '완숙한 곡식의 고개 숙임'. 그 겸허의 전형을 보았다.
이 작품은 언뜻 보면 환자의 글이다. 그러나 이 분의 다정다감한 면모를 아는 나는 행간에서 외로움과 회한보다는 따뜻한 인간애를 읽는다. 생전에 아내에 대한 병간호가 그토록 지극 정성이었건만, 지금은 이 노 환자에게는 안타깝게도 따뜻한 손길의 반려자가 곁에 없다.
수필가는 그렇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현실적인 나의 고통은 먼 옛날에 내가 저질러 놓은 인과응보적 고통이요, 업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백미(白眉)는 여기에 있다. 병석에서 TV로 비리 청문회를 보면서 '나는 42년 8개월의 근속 대가로 받은 돈을 겨우 30평 아파트 한 채를 사는데 쏟아 붓고 말았다'면서. 백낙천(白樂天)과 조소선사(鳥巢禪師) 의 대화를 떠올린다.
'착한 일은 고루해야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은 삼가 하여 행하지 말되, 마땅히 그 행위에 앞서 뜻을 조촐하게 간직하여만 한다.(諸惡莫作 衆善奉行 淨其意).'
교육자라는 가장 보람 있는 직업으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작품을 써 온 원로 수필가는 그 많은 성과와 업적을 대견해 하기보다는 고요한 마음자리 잡는 '정행(定行)' 의 자세로 오로지 지난날 자신의 행위만을 반성하고 있다.
거동 불편한 노인의 병석 철학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살이의 고뇌를 담아 올곧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나침반과 같은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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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수필문학》의 기획연재물《내가 읽은 명수필》(2002년 3월호)에 실린 글이다.
김영배 선생님은 수필 전문지에 실린 필자의 졸고를 보시고 곧바로 전화를 주셨다.
"치안 일선에서 삼 천 만의 불침번으로 수고하시는 윤 선생이 나 같은 낙서장이의 글을 그렇게도 과분하게 평해주시니, 영광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당신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시면서 오히려 '삼 천 만의 불침번'으로 고생하는 필자가 틈틈이 글을 쓰는데 대한 격려의 말씀을 더 많이 해주셨다.
◆ 자신을 늘 낮추는 겸허한 인품
선생님이 살아오신 인생이 그랬다.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늘 낮추고 남을 높여준다. 충청도 선비의 온후한 인정이 몸에 밴 분이다.
말씀뿐 아니라 그 분의 글에서도 그런 달관된 인품이 묻어난다. 그런 인품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책을 늘 가까이 하고, 틈만 나면 글을 쓰고, 깊은 사색을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품성일 것이다.
▲ 생시에 필자에게 보내주신 김영배 선생님의 저서
수필집 《돌 하나도 집이 될세라》(현대수필작가대표선집), 《정한나무의 연륜》,《사랑이 맞닿은 지평》,《강촌에서 띄우는 사연》,《쑥 잎의 찬가》등 주옥같은 수많은 수필집과 시조집 《지등(紙燈)하나 걸어 놓고》,《출항의 아침》 등 필자의 책장에도 선생님의 저서가 많이 꽂혀 있다.
◆ 고인의 제자인 김홍신 작가의 흥미로운 일화
그 분의 정년퇴임 기념문집을 펼치니, 그 분의 제자인 인기작가 김홍신 씨의 이런 일화 한 토막이 흥미를 끈다.
『은사 김영배 선생님을 만난 것은 2학년(논산 대건고)때였다. 첫 인상이 그리 편한 분은 아니었다. 매서워 보였고, 원칙론자였고 깐깐하게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김영배 선생님은 비교적 인기가 좋은 선생님이었다. 강의가 재미있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푸짐하게 해주는 선생님이었다.(중략)
어느 날 작문시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하얀 백지 한 장씩을 나누어주었다. 50분 안에 '계절'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써보라고 했다. 우리들은 모두 비명을 내질렀다. 나라고 별별수 있었으랴.
40여분쯤 지났을까. 내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부여잡은 손길이 있었다. 김영배 선생님이었다.
"넌 의과대학에 가지 말고 국문과에 가서 소설가가 돼야 한다."
그 날 김 선생님은 나를 교단으로 불러내어 내가 쓴 수필을 낭독하게 했다. 훌륭한 수필이어서 낭독하게 한다는 첨언까지 했다. (중략) 내가 의과대학에 실패한 사연 중에 하나는 분명 김영배 선생님이었다.』
(김홍신 작가의 글 / 김영배 선생 정년퇴임 기념문집 '다시 출항의 아침에' 208쪽)
원망하는 듯하지만 실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이 은근히 깔려있는 글이다. 그 '고마움'이란 선생님의 당시 남다른 작문 지도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훌륭한 인품까지도 포함하여 존경하고 있는 것으로 독자들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수필계에 큰 족적 남기신 어르신의 남다른 문학열정
선생님은 교육자로서, 수필가로서, 시조시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기셨다. 나는 그분의 글도 좋지만 후배 문인들을 대하는 자상함과 따뜻한 인품을 더 존경해 왔다.
▲ 김영배 선생님이 필자에게 보내주신 육필서신 - 꼭 원고지에 쓰는 글씨도 달필이지만 편지 내용도 보통 형식적으로 쓰는 편지가 아니다. 자상함과 인정이 물씬 배어난다.
각종 문학단체 활동에서, 또는 선생님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서 그런 인품은 비단 필자만이 간직해 온 존경심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오늘 그 분의 빈소에서 만난 수많은 문인들을 통해서 새삼 느꼈다.
80 춘추(春秋)이심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20대 청년 못지않았다. 그만큼 아직도 순수한 문학 열정이 식지 않아 중앙이든 지방에서 발간하는 문학지든 펼쳐보면 그 분의 왕성한 작품을 자주 대할 수 있었다.
그 만큼 쓰시고 싶은 글이 아직도 많기만 한 분인데, 그 많은 글감을 놔 두시고 어찌 잠드셨을까 실로 안타깝고 허전하기만 하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 2009. 11. 14. 윤승원
필자 윤승원 / 충남 청양 출생. '한국문학' 지령200호기념 지상백일장 장원 당선. KBS수필공모 당선, '경찰고시' 최우수 작품상, '경찰문화대전' 금상수상, '공무원문예대전' 행자부 장관상, 수필집 <삶을 가슴으로 느끼며>, <덕담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우리동네 교장 선생님>, <부자유친>, <아들아, 대한민국 아들아> 한국문인협회회원. 대전·충남수필문학회 회장. 대전 대덕경찰서 정보관 |
첫댓글 선배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작가의 뜻이 은은히 울려퍼집니다. 잔잔한 시냇물의 청초함처럼, 살랑이는 깊은 숲속의 솔바람처럼 느껴집니다. 강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돌이켜봐도 <내가 읽은 명수필>기획연재 글에 논강 김영배 선생님의 작품을 선정하여 감상문을 쓴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훌륭한 인품의 교육자이자 문필가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