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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말씀
예루살렘의 초대 신자 공동체에서 사도들은 ‘많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면서 주님을 전합니다.(제1독서) 이는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났기에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새로운 삶으로, ‘부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직후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 가운데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하고 인사하시자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크게 기뻐합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도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아서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것조차도 마다했던 것 같습니다.
적대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려고 유다 땅으로 가시려 할 때, 스승을 기꺼이 따라나섰던 제자가 바로 토마스였습니다. 그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하면서 머뭇거리던 다른 제자들을 독려했습니다. 이렇게 토마스는 스승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충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랬기 때문에 스승의 비참한 죽음에 더 크게 상심하여 두문불출했던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스승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남다른 충정 때문에 크게 상심한 제자를 남다른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토마스가 원하던 대로 해 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믿음의 걸림돌을 치워주십니다. 동시에 그의 믿음이 한층
더 굳건하게 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의심을 극복한 토마스는 주님을 증거하는 데에 일생을 바칩니다.
우리 역시 토마스처럼 하느님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혹은 너무 원통한 일을 당하게 되면 ‘하느님이 정말 계신가?’하고 의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을 풀어줄 수 있는 증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명한 징표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징표가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시는지, 존재하신다면 과연 선하고 전능하신 분인지 의심이 들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께, ‘죽었었지만,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분’(제2독서)께 간절히 청하면 좋겠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태양이 비치지 않을 적에도 태양을 믿게 하소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적에도 사랑을 믿게 하소서.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적에도 하느님을 믿게 하소서.”(서울교구 주보)
묵상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새로운 육신을 얻으셨음에도 상처를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그 상처는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입으신 것이고, 그러기에 그 상처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상처에서 비로소 부활의 영광과 승리를 바라보았던 토마스 사도처럼 우리도 비천한 빵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 모시며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을 찬미합시다.
오늘의 말씀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8)
알아봅시다
1. 전례-인사와 인도
십자성호를 긋고 난 후 사제는 모인 공동체에게 인사합니다. 보통의 대화는 인사로 시작합니다. 인사로서의 대화는 확실히 좋은 것입니다. 대화 없는 교회 전례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찬례 안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이러한 대화는 신앙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기본 입장입니다. 미사를 거행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자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제든 공동체든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 신자들로서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이 우리 대화의 상대자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대화는 공동체와의 인사로써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아침, 저녁으로 ‘안녕하십니까?’ 하고 거의 기계적으로 하는 일반 사회생활의 인사와는 전혀 다른 큰 축원을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는 일반 집회 행사가 아니고 교회의 거룩한 전례이기 때문에 그 분위기에 맞는 성경 말씀으로 인사합니다.
현행 미사통상문에는 ㈎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 “은총과 평화를 내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등 세 가지 인사 양식과 위령 미사 때는 ㈑ “믿는 이들에게 희망과 평화를 가득히 내리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는 고유 인사 양식이 있는데 모두 사도 바오로의 편지 첫머리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전례 및 편지 인사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은총이 교우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하는 인사말입니다. 따라서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복 인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공동체는 대응인사로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응답할 수 있게끔 구성되어 있습니다. 총지침은 이 인사가 중요한 신비와 결합되어 있음을 일러줍니다. : “사제는 인사를 하며 모인 공동체에 주님의 현존을 알린다. 이 인사와 백성의 응답으로 함께 모인 교회의 신비가 드러난다.”(50항) 이 집회에 주님이 함께 계심을 인사로 표시합니다.
이 같은 의미 부여와 함께 미사경본은 개인적이면서도 따스한 인사말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사제가 조금 긴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면 전례 시작 때 모인 공동체와 자신과의 결속감을 드러내고 자기의 좋은 원의를 표현하고 싶은 시간은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 인사가 온갖 세상사를 언급하거나 우스갯소리로 표현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례의 참석자들 중에는 적지 않는 사람들이 온갖 걱정과 고통 또는 슬픔을 안고 자신들의 운명에 위로와 힘을 찾고자 왔다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거리와 객관성을 지키도록 요구됩니다.
그런데 항상 ㈎, ㈏, ㈐ 양식과 같이 규정된 축원을 비는 말로 인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누가 과연 이와 같이 고정된 인사의 말을 이해하겠는가? 또 이러한 인사말이 특히 미사경본에서 그대로 읽혀질 때 누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겠는가? 예, 물론 이러한 반문과 비판의 소리에는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인사말이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데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 자체가 이러한 말들을 얼마만큼이나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사제의 인사 양식들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신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사제에게 「또한 사제와 함께」하고 답례를 할 때 이도 역시 「당신 안에도 주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아닙니다. 사제는 이 인사로써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여기 계심에 대한 의식을 불러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이 인사는 우리에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언해 줍니다.
문제는 많은 사제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습관적으로 더 냉정하게는 아무 정성 없이, 타성에 젖어, 무미건조하게, 1년 365일 하나의 양식만으로 변화도 없이 마냥 읽어 내려간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 상대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딴 곳을 보거나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인사가 되겠습니까? 사제가 이러한 인사의 의미를 살리려면 미사의 인사말 정도는 암기하여 교우들을 바라보면서 인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얼굴을 보지도 않고 인사하는 것은 어색합니다. 또한 주어진 세 가지 양식만이라도 변화를 주어 사용한다면, 더 나아가서 전례시기에 따라 다양한 성경의 인사말로, 예를 들면 사순시기에는 “올바른 회개를 선사하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여러분과 함께”,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미구에 오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부활시기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등으로 변화를 준다면 신자들의 눈과 귀는 번쩍 뜨일 것이며 아주 자연스레 “또한 사제와 함께” 하고 응답할 것입니다.
공의회는 우리가 성체의 표지 외에도 예수님이 현존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다른 외적 표지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그리스도의 현존을 표현하는 외적 표지들이 빵과 포도주뿐이 아니라, 여기 모인 공동체도 바로 그 표지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미사에 모일 때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전례행위, 더욱 명확히 말한다면 미사 전례 안에서보다 더 확실하게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의 혼란에서 빠져나와 교회에 오며 아마도 그 중 대부분이 서로 알지 못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성당에 들어와서 우선 제대와 감실을 바라보며 절을 하고 현존하시는 주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진정 내적으로 집중하고 모여 있어야 하고 주님 친히 우리 중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사말을 할 때 사제는 두 팔을 펼치는데 이는 포옹하는 행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몸짓입니다.
미사 인도 및 안내
인사에 이어 그날 미사전례의 주제를 알려주는 짧은 인도가 따라 올 수 있습니다.(총지침 50항) 이 인도 부분은 특히 주일, 축일, 성인 축일, 기념일 등과 세례, 혼인, 장례 등의 예식 미사, 특별한 행사 미사 등에 필요할 뿐 아니라, 사목적으로 대단히 유익합니다. 인도하는 말들이 첫 강론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대부분의 본당에서는 미사 시작 때 친절하게도 그 미사의 지향을 알려 주는데, 미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잔치이자 제사입니다. 따라서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미사를 자기들 미사로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교회의 오랜 관습에 따라 미사 예물을 사제에게 바치고 개별 지향을 신청할 수 있고, 사제는 그 지향에 따라 미사 중에 개별적으로 기도합니다. 미사 예물이란 이렇게 특별히 기도하는 사제에게 감사의 표시로 바치는 감사 예물입니다. 따라서 사제가 미사 지향을 알릴 의무는 없습니다. 주보나 지향판을 이용하면 될 것입니다. 미사예물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는 사목자가 많습니다. 하느님은 다른 방법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제들이 때로는 지나치게 과잉 친절을 베풀고 신자들은 오해에 근거하여 무리하게 요구하기도 합니다.(대구교구 월간 빛)
2. 교황의 모토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토는 “자비로이 부르시니” (miserando atque eligendo)이다. 이는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는 복음 이야기에 관한 베다 성인의 강론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에 고해성사를 받은 다음,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고 로욜라의 이냐 시오 성인의 모범을 따라 자신이 사제직으로 부름 받고 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3. 교황의 팔리움
교황의 전례적 표지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흰 양털로 짠 팔리움 이다. 팔리움은 착한 목자인 주교의 상징인 동시에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어린양의 상징이다. 현재 교황의 팔리움은 폭이 넓고 큰 양모 천으로 만든 띠에 붉은 십자가를 배치한 형태이다. 교황 팔리움에 배치된 십자가의 붉 은색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의미한다.
4.하느님의 자비 주일
예수 부활 대축일의 다음 주일, 곧 부활 제2주일은 전통적으로 ‘사백주일’로 불리었다. 예수 부활 대축일에 세례 받은 이들이 ‘영혼의 결백’을 뜻하는 흰옷을 입고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인 부활 제2주일에 벗었기 때문이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면서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유머
골프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었다.
어느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고 맑은 주일날, 갈등을 하다 결국 몸이 아파 못 간다는 전화를 교회에 하고 골프장으로 향했다.
이를 본 천사가 하나님께 보고했다. “저 목사를 혼 좀 내줘야 하지 않을 까요!”
하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골프장에 온 목사, 1번 파 4 홀에서 힘찬 스윙을 하자 볼은 뒤에서 부는 바람을 타더니 무려 350야드나 날아가 그린 위에 떨어졌다. 이어 볼은 데굴데굴 굴러 홀컵으로 들어갔다. 알바트로스 였다.
목사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놀라고 흥분했다.
천사는 뭔가 잘못 돼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느님께 따졌다. “하느님 뭔가 잘못된 것 같네요. 벌을 주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하느님은 미소를 지으며 천사에게 말씀하셨다.
“한번 생각해 보아라! 주일에 골프 친 걸 누구에게 자랑하겠니? 평생 1번 있을까 말까 한 이 사실을 말 못하는 그 고통을…"
손석준 엘리야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