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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7일 금요일
[(녹)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으라며,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한다(복음).
제1독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3,1-8
형제 여러분, 1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2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3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4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서 존중되어야 하고,
부부의 잠자리는 더럽혀지지 말아야 합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자와 간음하는 자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5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7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4-29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강직한 올곧음과 헤로데 임금의 비열한 나약함 사이의 대조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과 권력과 탐욕과 향락을 따라 사는 사람들 사이의 대조, 자신보다는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모든 정의를 외면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조, 두려움 없이 권력자의 죄악을 고발하는 사람의 결연한 외침과 순간의 기분대로 경솔한 맹세를 남발하면서 체면이나 원한에 이끌려 의인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 사이의 대조입니다. 모든 이에게 회개를 요구하던 요한은 임금에게 맞선 결과가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올지 따지지 않고 그를 꾸짖습니다.
우리는 자주 불의를 고발하고 바로잡고자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이 피해를 보지 않으면 ‘나와 상관없음’을 선언하고 외면합니다. 그런데 사실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자매들인 우리는 서로의 일에 상관없는 사이가 아닙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우리가 마귀하고만 아무 상관이 없을 뿐 모든 인류와 상관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타박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부당한 것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도우면서 그 상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언자들입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요한의 혀를 영원히 침묵시켰다고 믿었지만 그 혀는 오늘날까지도 교회 안에서 “옳지 않습니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폭군은 요한의 머리를 베었지만 지금도 하느님의 예언자들 안에서 되울리는 그의 소리는 베지 못하였습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이토록 참혹한 야만의 시대, 흔들림없이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의인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안타깝게도 우리네 인류 역사 안에 참혹한 사건들은 거듭 반복됩니다. 폭력적이고 교활한 악인의 등장과 승승장구,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의인들과 선인들의 등장과 무고한 죽음이 그렇습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하시는 공평하신 하느님께서 어찌 그리 끔찍한 현실을-의인의 고통과 죽음-허락하시는지, 정말이지 이해가 안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만 봐도 그렇습니다. 저토록 무례하고, 저토록 사악한 악의 무리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작당을 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데, 정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어찌 이리 여전히 침묵하고 계시는지, 대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냐고 따지고 싶은 요즘입니다.
오늘 복음을 장식하는 세례자 요한 케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평생 주님의 길을 미리 닦는 선구자로서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대변자로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구원의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최종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무고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에 묘하게도 한 사악한 여인의 모략과 간계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감추고 싶은 과거의 비리와 악행을 정확히 파악하고 공공연하게 경고한 세례자 요한에 대해 강한 앙심을 품고 있었던 헤로디아의 증오와 복수심이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어찌 이리도 오늘 우리의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는지 오싹한 느낌마저 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토록 참혹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희망해야 마땅합니다. 지금은 비록 악이 활개를 치고 악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하느님의 선은 언젠가 반드시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진리를 증언하다가 박해를 받고 무고하게 고통받고 죽어간 의인들의 생애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은 오랜 인류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부끄럽고,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이토록 참혹한 야만의 시대, 단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적으로 진리를 증언하고 계시는 의인들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항상 그분들 고난의 여정에 끝까지 동반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루빨리 짙은 안개가 활짝 걷혀 세상만물의 형체가 제 빛깔을 발하듯이, 어서 빨리 진위가 가려져,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날뛰는 무리들이 무대 뒤로 조속히 사라지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걸 느낍니다. 병자성사를 받은 형제님이 다음 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보통 장례미사는 선종 후 3일 후에 하게 됩니다. 장례미사가 예정된 날은 제가 몇 달 전에 약속한 날이었습니다. 약속을 변경하려고 생각했습니다. 항공권도 예약했고, 숙소도 정했지만, 장례미사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족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고인의 가족이 한국에서 오기 때문에 장례미사를 늦추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미안하지 않도록 일정을 조정해 주셨습니다. 약속도 지킬 수 있었고, 장례미사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원하는 걸 채우려고 하면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법으로 거두어 가십니다. 아합왕은 힘과 권력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합왕의 잘못을 심판하셨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었던 노인들이 수산나를 욕보이려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을 보내셔서 노인들의 욕망을 심판하셨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옳은 말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사람의 방법으로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헤로데는 체면 때문에 의로운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울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난 사람 중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2024년 12월에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국방부 장관은 군을 동원했습니다. 장관들에게는 비상계엄에 해야 할 임무를 주었습니다. 치밀한 작전과 대통령의 권한으로 비상계엄은 성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법으로 비상계엄을 해제하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국회로 달려온 국회의원들이 있었습니다. 맨몸으로 총을 든 군인들을 막아선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부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국회는 비상계엄 해제를 결의하였고, 비상계엄은 5시간 만에 해제되었습니다.
공수처와 검찰은 헌법을 위반하고, 국헌을 문란하게 한 군인들을 수사했습니다. 법원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에 대해서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공수처의 소환 조사에 대통령이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영장 집행은 경호처의 반발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직무가 정지되었지만,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법원은 2차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이번에는 경호처의 직원들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대통령은 체포되었습니다.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법 앞에는 평등하다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예상되는 길이 있습니다. 국회에서 탄핵당한 대통령에 대해서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하면 대통령은 파면되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하면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할 것입니다. 헌법재판소는 법과 원칙에 따라서 결정하리라 믿습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건강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 두렵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나도, 그래도 나는 안심하리라. 환난의 날, 그분은 나를 당신 초막에 숨기시고, 당신 천막 은밀한 곳에 감추시며,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세우시리라.” 오늘은 서울대교구의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새 사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엊그제 같은데 저도 벌써 사제가 된 지 34년이 지났습니다. 지나온 발걸음을 보면 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저를 지금까지 사제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오직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사제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제는 이슬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는 험한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와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굳센 믿음이 있다면, 다윗처럼 자기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친다면, 베드로 사도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제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힘을 주실 것입니다.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새 사제들이 주님을 따르는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합니다.
주님!
새 사제들이 겸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맡겨진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성실함을 주소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제가 되게 해 주소서.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한 한걸음이
선한 한걸음으로
이어지고
악한 한걸음이
악한 한걸음으로
이어지니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참된 한걸음이
참된 한걸음으로
이어지고
헛된 한걸음이
헛된 한걸음으로
이어지니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의로운 한걸음이
의로운 한걸음으로
이어지고
불의한 한걸음이
불의한 한걸음으로
이어지니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푸르른 한걸음이
푸르른 한걸음으로
이어지고
빛바랜 한걸음이
빛바랜 한걸음으로
이어지니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떳떳한 한걸음이
떳떳한 한걸음으로
이어지고
부끄러운 한걸음이
부끄러운 한걸음으로
이어지니
지금 내딛는
한걸음에 달렸다
오늘의 성인
성 테오도로 (Theodore)
활동년도 : +319년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 헤라클레아(Heraclea)
같은 이름 : 데오도로, 데오도루스, 떼오도로, 떼오도루스, 테오도루스
소아시아 지방 폰투스(Pontus)의 헤라클레아 주민인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또는 테오도로)는 리키니우스(Licinius) 황제군의 장군이자 폰투스와 인근 지역의 지방장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고문을 받고 리키니우스 황제의 명에 의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테오도루스는 가끔 '테오도루스 장군'이라고도 불리며 그리스인들이 '가장 위대한 순교자'라고 부르는 4명의 순교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아마세아(Amasea)의 성 테오도루스 티로(Theodorus Tiro, 11월 9일)와 동일인물로 보인다.
성 에지디오 마리아(성 요셉의)(Aegidius Mary of Saint Joseph)
신분 : 수사
활동연도: 1729-1812년
같은이름 : 아이기디오, 아이기디우스, 에지디우스, 자일스, 지르, 질르
성 요셉의 에지디오 마리아 :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가난한 사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평수사로 잘 알려져 있는 에지디오(Aegidius Mary of St. Joseph Francis Anthony Postillo, 1729-1812)는 이탈리아 아풀리아(Apulia) 지역의 타란토(Taranto)에서 태어났으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가족과 이웃들은 소박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며, 그는 고향에서 밧줄을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았다.
1754년에 그는 나폴리(Napoli)에 있는 알칸타라(Alcantara)의 성 베드로 맨발의 작은 수도회(프란치스코회)에 수도자로 지원하였다. 그는 정식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어려워 수도회는 그를 평수사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에지디오’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로 서원한 에지디오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그 지방의 신학교에서 일하는 짐꾼과 문지기 소임을 받았다. 에지디오는 자기가 맡은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연민의 정과 자비심은 그를 나폴리 시 변두리 지역과 나폴리 시 외곽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게 하였다.
신학교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은 에지디오의 경건한 신앙심과 성실한 봉사활동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고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에지디오 수사는 환자들을 돌보고 간호하는 데 탁월한 솜씨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있는 수도원으로 찾아왔고 그는 그런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돌보아 주었다. 그는 다친 사람들과 병자들로 인해 매일 매일을 분주하게 보냈고 그런 중에라도 틈만 나면, 나폴리 시 경계선 주변의 아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 수도회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성인의 정신적인 유산, 곧 프란치스코 성인이 나병환자를 만났을 때 행했던 그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의 도움을 청하는 나환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씻어 주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 도움을 청하여도 이를 거절한 적이 없었다.
에지디오는 80세가 넘도록 깊은 연민의 정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1812년 2월 7일 나폴리에서 에지디오가 기도하는 중에 숨을 거두었을 때,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에지디오의 장례식에는 어마어마한 군중이 몰려와 그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하였다. 에지디오가 죽은 다음 즉시 그의 행적과 그가 추구한 정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1888년 교황 레오 13세는 에지디오를 복자품에 올렸고 1996년 6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에지디오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대표자로 대우받을 만한 영예를 지닌 분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겸손한 사람으로 그의 뛰어난 사랑과 성덕은 나폴리와 현대 교회에 영원히 기억될 모델입니다. 에지디오 수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성 요셉의 에지디오 마리아의 축일은 2월 7일이다.
성 루카(Luke)
신분 : 은수자
활동연도 - +946년경
같은이름 -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성 루카(Lucas, 또는 루가)의 별명은 '타우마투르구스'(Thaumaturgus,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며 그리스 출신이다. 그러나 출생지는 아이이나(Aegina) 섬이고, 사라센인들의 침공으로 그리스 중북부 지역인 테살리아(Thessalia)로 이주하여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열심하고 순종 잘하는 소년이었고, 양떼를 돌보거나 들일을 거들며 살았다. 그는 가끔 걸인을 먹이기 위해 자신이 굶거나 자기 옷을 벗어 헐벗은 이에게 주곤 하였다. 그 때문에 부친의 분노를 산 적이 많았다고 한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들일을 그만두고 수도자가 되려는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으나 군인들에게 붙잡혀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성 루카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자,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또다시 수도자가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스(Corinthos) 교외의 요안닛사(Joannitsa) 산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서 18년을 살았다.
그는 항상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살았지만 때로는 유혹과 밤새도록 씨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통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가 임종한 자리는 나중에 성당이 되었는데 소테리온(Soterion)이라 부른다. 소테리온은 기적의 장소라는 뜻이다.
복자 비오 9세 교황, OFS
신분 : 교황
활동연도 :1792~1878
같은이름 : 비우스,피오,피우스
교황(재위 : 1846-1878).
1792년 이탈리아에서 출생. 1819년 서품, 교황청 해외 주재 사절로 칠레에서 근무(1823∼1825년), 1827년 대주교, 1840년 추기경을 거쳐 1846년 자유사상가로서의 명성과 더불어 압제적이었던 그레고리오 16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민족적 단합을 지지하였으나 1848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부하자 이탈리아 혁명군에게 쫓겨 교황청을 떠났으며 프랑스군이 로마를 함락했을 때 교황청에 다시 돌아왔다.
그 후 정치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포기, 1859년 로마냐(Romagna)를, 1860년에는 움브리아(Umbria)와 마르체스(Marches)를 잃고 1870년 로마가 함락된 후 구아란티법에 의해 교황의 모든 세속 주권을 빼앗겼다.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영성 및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성과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 밖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교계제도를 회복시키고(1850, 1851년), 유럽과 아메리카의 제(諸) 정부들과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많은 새로운 교구 및 선교 중심지를 탄생시켰다.
또한 성모의 무염시태 교리를 정의하고(1854년), 현대의 합리주의, 범신론, 종교적 자유주의 및 반가톨릭적 형태의 현대철학들을 단죄하여 가톨리시즘을 수호하는 데 노력하였다(1864년).
(가톨릭대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