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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정통 신앙을 따르는 고트족 교회에 그들의 고유한 언어로 전례를 거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야만인들도 그리스도를 공경했다는 사실에 명백히 매료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불린 이교인의 소명 의식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는 교회를 보편적으로 이해했기에 로마제국에 국한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은 온세상에서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요한에게 사목적으로 실질적인 경쟁자가 있었으니, 바로 마차 경주와 연극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연극은 고전 비극과 희극이 아니라, 고대 말엽에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경망스러운 볼거리였다. 원형경기장에서 행해지는 대단히 인기 있는 경마와 마차 경주를 구경하느라 신자들은 미사 참석을 소홀히 하였으며, 이 때문에 때로는 성당이 텅텅 비었다. (316쪽)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콘스탄티 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뒤 곧바로 자신의 관구를 복음의 원칙에 따라 쇄신하려 하였다. 요한은 교구 재정만이 아니라 성직자단 구성원도 심사했는데,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그는 성직자에게 소박한 생활 방식과 스스로 모범적인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요한은 똑같은 기준을 자신에게도 적용하여,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처럼 황실과 같은 화려한 주교의 삶을 소박한 생활 방식으로 바꾸었다. 또한 공식적인 연회 개최를 아무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재산을 성대한 연회와 화려한 건축물에 지출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였으며 그렇게 하는 경우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요한은 교회와 관련된 문제 때문에 수도에 청원하러 온 주교들에게 기꺼이 숙식을 제공했으나, 물론 그 수준은 소박했다. (317쪽)
또한 요한은 부패하고 타락한 성직자들에 게 모범적으로 생활하라고 경고하였다. 넥타리우스 주교가 유화적으로 다스렸던 탓에, 성직자 평신도 할 것 없이 도덕이 해이해져 있었고, 성직자들의 행실이 문란해져 있었다. 팔라디우스는 요한이 부제 두 명을 해직했다고 전한다. 한 명은 살인, 또 한 명은 간음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317-318쪽)
그의 또 다른 관심사는 성직자의 생활 방식이었다. 요한은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성직자들이 금욕생활을 하는 여인들과 혼인하지 않고 함께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폐단을 그는 단호히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318쪽)
☕ 아직 성직자들의 독신제도가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때는 사제들도 결혼을 했다.
수도승들의 삶은 요한이 추구한 이상들과 크게 어긋났다. 요한은 그들에게 더 이상 거리에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명령 했다. 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수도승들이 도시 안에 체류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물론 2년 뒤 철회되었지만 말이다. (318쪽)
요한은 설교에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생활 원칙들을 선포하면서 부자들에게 그들의 재산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이미 안티오키아에서 사람들이 보석으로 장식된 금 성작이나 금실로 짠 제대포 등을 기증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기념비를 세우는 관습을 격렬히 공박한 바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초의 성찬례를 거행하신 식탁도 은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하느님께 필요한 것은 금 성작이 아니라, 금처럼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것이었다. (319쪽)
그는 복음 가르침에 따라 황실의 사치와 허영, 불의와 탐욕에 용기 있게 맞서면서 가난한 이들의 타고난 권리를 옹호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소유물과 교회에 사용하려고 남겨 둔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여행자들을 위하여 팔았다. 또한 병원과 여행자 숙소, 구빈원을 세웠으며, 올림피아스와 같은 상류계급 귀부인들의 도움을 받아 여자 봉사자들과 과부들이 행하는 사회사업을 재조직하였다. (318쪽)
교외에 나병 환자 병동을 건립하려던 그의 계획은 반대에 부딪혔다. 병동 예정 부지 부근에 별장을 갖고 있던 대지주들의 항의가 거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한은 교회가 걸어갔던 사회복지사업 이라는 전혀 새로운 길을 충실히 따르면서 자신의 계획들을 추진해 나갔다. 요한의 위대한 본보기는, 카이사리아 외곽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신도시를 세운 바실리우스(†1379)였다. (319-320쪽)
확실히 요한은 자신의 공동체를 쇄신하고 개혁하려는 작업에서 모든 이를 자기편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성직자와 공동체 사람 일부에게서 저항이 없지 않았다. 힘없는 신자들과 일부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서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을 지닌 그 밖의 사람들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 었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행동하는 교회정치가가 아니라 정직과 성실이 몸에 밴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하고 순수한 원칙적인 인물이 었으며, 다른 이들에게 가끔 직설적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설교자였다. (320쪽)
제국 수도의 주교로 요한은 국가와 관련된 문제들에도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했고 교회정치적 사건들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402년 요한에게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테오필루스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장로 이시도루스와 이른바 네 명의 ‘키다리 수도승들’, 또 그들의 동료 수도승 오십여 명에게 이단적 오리게네스주의라는 명목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추방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서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팔레스티나를 거쳐 그곳에 왔다. 요한은 이들이 청한 도움을 제공하였으며, 황제는 그들의 고발에 따라 테오필루스를 콘스탄티노플로 정중히 소환하여 요한이 재판장인 교회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게 하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테오필루스는 맨 먼저 안티오키아에서 요한이 펼친 활동을 뒷조사하게 했다. 그 뒤 살라미스의 주교이자 이단 사냥꾼인 에피파니우스(†403)를 수도로 가게 했으며, 그곳의 신앙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암시를 하면서 반격을 가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처음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테로필루스는 요한을 재판관에서 피고인으로, 자신을 피고인에서 고발인으로 역할을 바꿀 음모를 꾸몄다. 테오필루스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요한의 설교를 변조하고 가짜 고발 사유들도 모았으며, 요한의 반대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곧, 개혁 조치에 동조하지 않은 콘스탄티노플의 성직자들, 성직매매로 해임되거나 요한이 경고하는 말이 정도를 벗어났다고 생각한 타지에서 온 주교들, 사치와 방종을 비판하는 그의 설교가 자신을 겨냥했다고 느꼈을 뿐 아니라 겸손하라는 주교의 권유에 기분이 상한 에우독시아 황후, 허영과 사치에 관해 신랄한 비판을 들은 상류사회의 여인들이 그의 반대자였다. 테오필루스는 403년 8월에 이르러서야 부주교 29명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그는 “나는 주교를 면직시키러 간다”라고 자신의 여행 의도를 분명히 밝혔다. (321-322쪽)
☕ 성직자가 성직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부끄러운 사건이다. 성직자라고 해서 다 성직자는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른 거짓 성직자도 있다.
요한의 반대자들만 참석한 교회회의에서 소송의 결말은 두고 볼 것도 없었다. 요한의 답변을 듣기 위해서 그를 소환하였지만 요한은 그에게 적대적인 교회회의의 구성 때문에 자신에 대한 단죄가 이미 결정된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세 번에 걸친 최고(催告)가 있음에도 출두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주교직은 여지없이 박탈되었으며 황제는 추방 판결에 서명하였다. 그의 공동체 대부분이 반대했음에도 얼마 뒤 요한은 추방되었으며, 보스포루스해협 건너편 비티니아에 있는 어느 농장까지 갔다. (322-323쪽)
다음 날 ‘황실의 침실에서 일어난 불행한 일’, 곧 황후의 유산이 하늘의 불길한 전조로 해석되어 주교의 추방 명령이 취소되었고 황제는 요한을 다시 불러들이게 하였다. 승리의 기쁨에 차서 그는 수도로 돌아왔으며, 그의 적수 테오필루스는 달아나듯이 떠났다. 요한은 그 뒤에도 "다시 헤로디아스가 미친 듯이 날뜁니다. … 다시 세례자의 머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라고 자극적인 말들로 황후를 비판하여 그녀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에우독시아의 지지를 확실히 받는 요한의 반대자들은 요한의 면직을 황제가 승인하도록, 테오필루스와 동방의 많은 주교에 게 도움을 청하였다. 황궁은 341년 안티오키아 교회회의 결의문을 근거로 요한을 내쫓으려는 테오필루스의 계략에 동조하였다. (323쪽)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404년 4월 17일 부활절 이전에 요한에게 그의 공동체를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요한은 이를 거부하여, 자신이 맡고 있는 대성당에 들어갈 수 없었다. 부활절 세례 예식을 방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세례반 및 교회를 폐쇄하였다. 이 때문에 요한은 콘스탄티우스의 목욕탕에서 3,000명의 예비신자에게 세례식을 베풀기 위해 부활 전야 세례 미사를 거행하려 하였으나 군인들이 들이닥쳐 강제로 미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요한은 자택에 연금되었다. 곧바로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요한의 핵심 반대자 네 명, 곧 아카키우스와 세베리아누스, 안티오쿠스, 키리누스가 황제를 알현하고,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요한 주교를 추방시켜야 비로소 공공질서가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404년 6월 9일 황제는 최종적인 추방령에 서명하였다. (323-324쪽)
☕ 뛰어난 사람에게는 늘 시기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백성 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대성당 옆에서 추종자들과 작별을 한 뒤, 항구로 가 그곳에서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그사이에 요한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미 추방된 날에 대성당과 원로원 건물을 폐허로 만든 화재의 책임을 요한과 그의 추종자들에 게 씌웠다. (325쪽)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유배지를 통지받은 뒤 안키라를 거쳐 마침내 404년 9월 20일 추방지인 제2 아르메니아에 자리한 쿠쿠수스에 도착했다. 안티타우루스산 1,400미터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매우 황량한 벽지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그는 확실히 많은 추종자도 반대자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325쪽)
쿠쿠수스에 도착했을 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소아시아의 산악 지대를 거쳐 두 달 이상 걸린 여행으로 인한 병과 고통에 관해 올림피아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한 달 내내 아니 그 이상 나는 고열과 싸워야 했으며, 이런 상태로 길고 힘든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게다가 아직도 위병을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의사도 없고 따뜻한 목욕물도 없습니다. … 온 사방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이사우리아 사람들에 대한 공포를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325-326쪽)
서방의 교회는 그저 바라보지만은 않았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는 호노리우스 황제(395~425)에게, 그의 형제 아르카디우스 재위 때 추방된 총대주교 요한을 위해 중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때 파견된 서방 주교들의 사절단은 동방에서 저지되었으며, 데살로니카 교회회의에서(소송)사건을 궁극적으로 뚜렷하게 밝히려는 계획은 요한의 모든 추종자에게 공허한 희망으로 끝나 버렸다. (326쪽)
팔라디우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교회가 안티오키아에서 아르메니아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요한의 다정한 설교가 안티오키아에서 울리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황제를 꼬드겨, 407년 봄에 그를 흑해의 동쪽 해안에 있는 외딴곳이며 불모지 카우카수스산맥의 지맥에 있는 피티우스로 추방하였다. (327쪽)
407년 9월 14일, 요한은 몸 상태가 몹시 좋지 않은 것을 느끼고는 병사들에게 출발을 늦춰 달라고 간청했지만 이 간청은 거부되었다. 요한은 5킬로미터를 더 걸어가고는 탈진하였다. 병사들은 상태가 몹시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실리스쿠스 경당으로 그를 옮겨 갔다. 옛 관습에 따라 임종의 자리에서 그는 흰색 수의를 입었으며, 성체를 모신 다음 "하느님은 모든 일에서 찬미받으소서. 아멘”이라는 감사 기도와 함께 폰투스 지방의 코마나에서 사망하였다. 사망할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쯤이 었다. (327-328쪽)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제국과 교회의 관계에서 박해 시대의 피의 증인에 관한 이해를 이미 바꾸어 놓았다. 그는 순교자 개념을 이렇게 논증하였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어떤 사람에게 명령하였을 때, 그가 제물 대신 차라리 목숨을 바치면, 그는 순교자가 됩니다. 그뿐 아니라 죽음을 초래하는 어떤 적절한 명령을 따를 때 이것도 명백히 순교입니다 ” 그의 말대로 그는 동시대 사람들에게도 신앙을 위한 피의 증인으로 생각되었다. "신참 순교자는 311년 죽임을 당한 고참 순교자 바실리스쿠스 옆에 매장되었다.”(328쪽)
안티오키아부터 콘스탄티노플에서 주교직을 거쳐 추방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요한크리소스토무스의 생애 전 과정은 교회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이래 교회와 국가의 유착을 통해 출세를 하려는 어떤 열망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 교회“라는 상황에서, 복음을 구실로 삼아 자신의 이득을 취한 모든 세력의 희생물이 되었다. 수도의 주교로 결정했을 때처럼 황궁은 그의 추방 때에도 관여 했으며, 요한은 이렇다 할 만한 저항도 없이 이를 견뎌냈다. (328-329쪽)
새 유배지로 이동하는 도중에 죽었음에도 교회 내부 경쟁의 희생물이 된 “순교자”의 복권을 위한 노력은 곧 바로 나타났다. 특히 서방의 교회들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면직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인노켄티우스 교황은 412년 그의 명예를 회복했다. (329쪽)
동방에서도 분위기가 급변하여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0-450)는 자기 부모 아르카디우스와 에우독시아가 무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주교의 유해를 438년 1월 27일 코마나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해 오게 하였다. 그의 유해는 사도 교회에 매장되었다. 다음 시대에 그의 명성은 점점 더 올라갔다.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460)는 그에 대한 찬양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손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유약해졌지만 칠현금은 은총 때문에 온 세상에 울려 퍼졌습니다.” (329쪽)
테오필루스의 조카이자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키릴루스(†444)는 이미 네스토리우스와의 논쟁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을바른 가르침의 증인으로 끌어대었으며, 신학의 권위자로 여겼다. 네스토리우스는 428년 9월 26일 처음으로 전례 중에 장엄한 의식을 통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성인으로 공경하였다. 제7차 보편 공의회(787)는 성화상 공경을 뒷받침하기 위한 진정한 증인으로 요한의 위치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성화상 공경에 관해 이런 의견을 표명했다면, 도대체 누가 성화상 공경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329-330쪽)
계시의 위대한 해석자로 그는 점점 더 신학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어 동방 교회는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1042~1055) 이래 대 바실리우스, 나지 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그를 최고의 성직자로 존경한다. 서방 교회는 그를 1568년부터 아타나시우스와 대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공경하고 있다. (330쪽)
베네치아인들은 1204년 악명 높은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그곳에 안치되어 있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유해를 약탈하여 로마로 옮겼다. 요한의 유해는 1626년 5월1일 이후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다. (330쪽)
그는 서방의 아우구스티누스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그리스 교부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저서들은 널리 퍼져 나갔고 라틴어와 곱트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조지아어로 번역되었으며, 훗날 거의 모든 현대어로 옮겨져 전 교회에서 그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다. (330-331쪽)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한평생 세상과 사회를 그리스도교 정신이 실천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난과 노예제도를 극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구원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331쪽)
사람이 다른 사람의 구원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질 수도 없으며, 교회는 사회에 존재할 이유를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구체적 실재에 관심을 기울이며, 신자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극단적 형태들이 4세기에 때때로 드러나곤 했는데,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를 완화시켜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형성하려 하였다. (331-332쪽)
그가 안티오키아학파의 그리스도론적 사고방식에 동조하여 그리스도 인성의 실재성과 완전성, 특히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요한은 인간의 역사를 이런 완전성을 향한 인간 의지의 투쟁의 역사로 보았으며, 그 완전성을 통해 새로운 창조에 이른다고 여겼다. 이 학파의 관심과 가르침이 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일상생활의 사목적인 내용과 많이 연관되어 있었
던 만큼, 요한의 설교와 강해들이 확실히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호소들을 많이 담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호소 뒤에는 하느님 께서 말씀의 선포 안에 현존하신다는 확신이 분명하게 깔려 있다. (332-333쪽)
요한은 말씀 선포를 자신의 사목 활동의 중심 요소로 여겼다. 다시 말해, 말씀 선포를 통해 신앙에 관한 모든 문제를 신자들에 게 할 수 있는 한 명 백하게 답변하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임무라고 보았다. 그는 설교에서 이 임무를 독창적으로 행하였다. 이 방법을 통해 그는 공동체 삶의 중심인 전례와, 무엇보다도 전례에서 설교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내적 조건들을 만들어 내었다. 일상의 삶 ― 여기에서 요한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핵심 계명을 따르는 것이었다 ―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 전체를 전례로 만들 수 있으며, 자신의 본보기를 통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 줄수 있다. 그는자신의 삶을 통해 이런 본보기를 실질적으로 입증한 교부였다. (333쪽)
첫댓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초의 성찬례를 거행하신 식탁도 은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하느님께 필요한 것은 금 성작이 아니라, 금처럼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것이었다.
베네치아인들은 1204년 악명 높은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그곳에 안치되어 있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유해를 약탈하여 로마로 옮겼다.
요한의 유해는 1626년 5월1일 이후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한평생 세상과 사회를 그리스도교 정신이 실천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