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상아탑』 6호, 1946. 5)
[어휘풀이]
-칡범 : 몸에 칡덩굴 같은 어룽어룽한 줄미늬가 있는 범.
[작품해설]
‘해’의 시인이요, 자연 교감의 정신을 불러일으킨 박두진의 섯 시집 『해』의 표제가 된 이 작품은 8」15 해방이라는 벅찬 기쁨 속에서 민족의 웅대한 기대와 민족의 이상을 구가하던 시기에 씌어졌다. 이 시는 ‘해’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광복의 기쁨을 제시하는 한편, 어둠이 걷힌 ‘청산(靑山)’에서 광명한 조국의 미래사, 민족의 낙원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시인의 뜨거운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광복이라는 무한한 자유와 기쁨 속에서는 모든 생명들이 서로 갈등을 빚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이 평화롭게 화해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둠’ · ‘달밤’ · ‘골짜기’ · ‘칡범’ · ‘짐승’은 악(惡)과 추(醜), 강자(强者)의 이미지를, ‘해’ · ‘사슴’ · ‘청산’ · ‘꽃’ · ‘새’는 선(善)과 미(美), 약자(弱者)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시인은 이들의 대화합을 추구하며 사랑과 평화가 충만한 이상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시적 화자는 생명의 근원이며 창조의 어머니인 ‘해’가 돋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화자는 복받치는 희열(喜悅)로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조국광복의 신천지를 예찬하는 동시에, ‘달밤’으로 표상된 민족의 오랜 슬픔을 배척한다. 그리하여 그는 희망찬 미래의 조국을 상징하는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라고 외치며, ‘사슴’과 ‘칡범’, ‘꽃’ · ‘새’와 ‘짐승’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사는 영원한 평화와 공존공영의 ‘고운 날’을 꿈꾼다. 그 ‘고운 날’은 결국 ‘해가 솟은 청산’으로 자연과 인간이 합일되는 이상향이자, 민족의 영화로운 역사가 펼쳐질 해방된 조국 강토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이 시에서는 당시대적(當時代的) 조국 해방의 기쁨이 영시대적(永時代的) 이상향의 추구로까지 연계 · 발전되고 있어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시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조연현은 이 작품을 가리켜 “한국 서정시가 이룰 수 있는 한 절정을 노래했다.”고 평하고 나서 “박두진은 이 한 편의 시로써 유언 없이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고 극찬한 바 있다.
[작가소개]
박두진(朴斗鎭)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40년 『문장』에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낙엽송(落葉頌)」, 「의(蟻)」, 「들국화」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56년 제4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70년 3·1 문화상 수상
1976년 예술원상 수상
1981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정년 퇴임
1984년 박두진 전집 간행
1989년 제1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해』(1949),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하얀 날개』(1967), 『고산 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속 수석열전』(1976), 『야생대(野生代)』(1981), 『에레미야의 노래』(1981), 『포옹무한』(1981), 『박두진시집』(1983), 『박두진-한국현대시문학대계 20』(1983), 『박두진전집』(1984), 『별들의 여름』(1986), 『그래도 해는 뜬다』(1986), 『돌과 사랑』(1987), 『일어서는 바다』(1987), 『성고독』(1987), 『불사조의 노래』(1987), 『서한체(書翰體』(1989), 『가시면류관』(1989), 『빙벽을 깨다』(1990), 『폭양에 무릎 꿇고』(1995), 『숲에는 새 소리가』(1996), 『고향에 다시 갔더니』(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