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스쿨은?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벤 넬슨이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대학 교육의 혁신을 위해 설립했다. 캠퍼스가 따로 없고, 모든 강의는 100% 온라인으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대학 본부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1년간 공부한 뒤 2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서울 부에노스아이레스 런던 타이베이 베를린 등 세계 각국의 도시에서 거주하며 공부한다. “차세대 지도자를 육성하려면 세계의 많은 도시에서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는 취지다. 2014년 개교 이래 아이비리그보다 입학하기 어려운 대학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예영씨를 비롯해 미네르바스쿨 학생들이 마침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입학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1년을 보낸 뒤 서울을 거쳐 다음은 인도에서 지낸다고 했다. 지난여름 인턴십을 했던 회사에서 진행한 컨퍼런스가 베이징에서 열려 참석한 뒤 막 귀국했다는 예영씨의 대학생활은 보통의 대학생들과 사뭇 달랐다.
“미네르바스쿨은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 가장 큰 매력을 느꼈는데, 기대했던 대로 생활하고 있네요. 서울에서는 카카오그룹 미래전략팀과 함께 앞으로 우리 세대의 주류 트렌드가 무엇일지 조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요. 세계 최대의 숙박 공유 플랫폼인 에어비앤비나 스마트폰 앱으로 승객과 차량을 이어주는 우버와 같은 공유경제, 소셜 데이팅앱 같은 네트워킹의 변화 등을 조사하고 있는데, 학교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만나는 모든 경험과 네트워크가 정말 다이내믹합니다. 하하.”
대형 강의와 암기식 공부, 거품 속에 갇힌 느낌
UCLA에서의 전공은 국제학이었다. 나중에는 로스쿨에 진학할 생각이었다. 미국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좋은 성적을 받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학에 진학하려는 열망은 미국 역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해진 직업을 답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요. UCLA에 입학하기까지 저도 그 길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죠. 하지만 미네르바스쿨에 와서 샌프란시스코의 스타트업 기업들이 펼치는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나니 이제는 정해진 직업이나 길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영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바꾼 이유입니다.”
걱정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미네르바스쿨에 재도전하기로 마음먹었던 데는 첫 번째 지원에서 만난 친구들의 생활을 SNS로 접한 영향이 컸다. 당시 텍사스주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미네르바스쿨 학생들이 팀으로 참가해 프레젠테이션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은 “거품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시험 기간이면 밤늦게까지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지만, 살아 있는 지식은 아닌 듯했다.
“부모님과 자주 대화를 나눴어요. 네가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 길을 가라고 하셨죠.”
미네르바스쿨은 입학 시험도 남달랐다. 한국의 수능 격인 SAT도 보지 않고, 인지 능력을 자체적으로 평가하는 시험과 작문, 구술 면접 등으로 치러졌다. 그만큼 합격 여부를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지원자의 진짜 능력과 미래 가능성을 보는 느낌이었다고.
“돈도, 휴대폰도 없는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 살면서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해결해갔는지 같은 질문에 오래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바로 대답해야 했어요. 고교 시절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활용해 성장해왔는지 확인하는 느낌도 받았고요. 미국에서도 SAT 성적이 지원자의 가정환경이나 경제력과 연관성이 매우 크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는데, 저 역시 공부를 하면서도 이런 시험이 과연 나의 능력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거든요. 미네르바스쿨의 교육 철학은 새로운 상황에 마주했을 때 과거에 배운 지식을 어떻게 적용할지,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입학 시험에서도 그 점을 중시하는 것 같아요.”
기술의 진보에도 변함없이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
미네르바스쿨은 영어로 진행되는 온라인 강의뿐 아니라 교육과정도 독특하다. 1학년은 전공 구분 없이 동일한 교육과정을 밟는다. 비판적 사고력, 창의적 사고력, 효과적인 소통 능력과 협업 능력의 네 가지 역량을 통해 모든 학문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를 훈련한다. 2학년부터 사회과학, 자연과학, 계산과학, 경영, 예술·인문학으로 나뉜 세부 전공을 선택하며, 3학년은 전공을 기반으로 더 깊이 공부하고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캡스톤(Capstone) 과정’을 거친다. 4학년 때는 창업 등의 과정을 통해 학부 기간에 학습한 결과물을 현장에 적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예영씨가 경험한 교육은 어땠을까.
“이 설명만으로 체감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좀 더 쉽게 표현해보면 정보 그 자체를 습득하기보다,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여러 복잡한 단계가 있잖아요. 일단 첫 번째 단계에서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야겠죠. 그 자체가 하나의 ‘스킬’이라면, 이를 여러 과목에 계속 적용해보는 식이에요. 역사에도, 컴퓨터공학에도, 비즈니스에도 적용해볼 수 있겠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있어 소통과 협업은 필수이고요. 다리를 짓듯이 문제를 해결하기까지의 과정을 단계별로 밟아나가는 훈련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훈련의 힘을 체감한 경험이 있었다. UC버클리대학에서 열린 해커톤(해킹과 마라톤의 합성어로, 팀을 이뤄 마라톤을 하듯 긴 시간 동안 시제품단계의 결과물을 완성하는 대회)에서 예영씨가 속한 팀을 비롯해 미네르바스쿨 학생들이 1~3등을 모두 차지한 것.
“젊은 세대에 잘 어필하지 못하는 비즈니스의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과제였는데, 먼저 문제의 원인부터 분석한 뒤 방법을 찾아나가는 방식으로 풀어갔어요. 귀엽고 젊은 느낌을 주면서도 다양한 계층과 쉽게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든 뒤 젊은 세대가 많이 찾는 푸드트럭을 이용한 사업 모델을 구상했죠. 우리는 평소 수업으로 늘 익숙했던 방식인데, 의외로 이렇게 발표하는 팀이 거의 없더라고요. 기존의 대학에서 마케팅이나 브랜드를 배우는 방법은 이와 다르기 때문일 거예요.”
미네르바스쿨에는 학생들이 세계 각국의 도시로 이동할 때마다 현지 기업이나 기관과 협업을 통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전문 인력이 따로 있다. 예영씨가 한국에서 카카오그룹과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지원에 따른 것이다. 이런 실무 경험의 가치를 인정한 기업들이 3~4학년 학생들에게 일찌감치 입사 제안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지금 사회는 예상이 힘들 만큼 빠르게 변화하잖아요. 직업의 소멸과 생성도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고요. 우리가 미네르바스쿨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은 어떤 기술적 진보와 사회 변화에도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역량인 것 같아요. 초등학생 때 한국에 잠시 들어와 생활한 적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공부에 대한 압박감을 너무 심하게 받고 있다는 점이 충격적이었어요. 꼭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미국도 마찬가지죠. 어떻게 하면 시험을 잘 치르고, 대학에 잘 갈 수 있는지에 매몰되기보다 배움 그 자체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교육이 지금 세대에게는 더 중요해졌다고 생각해요. 제 선택도 그 때문이었고요.”
몇 년 전 인터뷰했던 한 혁신학교 졸업생의 토로가 떠올랐다. ‘지식의 상아탑’을 기대하며 간 대학이건만, 대형 강의실에서 받아쓰기로 바쁜 수업을 들으면서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이라는 얘기였다. 미네르바스쿨의 교육은 아직 진행형이지만, 우리 교육은 지금 어디쯤에 와 있을까? 예영씨와의 만남이 던져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