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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덩굴 작가 작품론
Ⅰ. 머리말
한글학자 밝덩굴은 극작가이자 수필가이며 시조시인이다. 우리글 한글을 아끼고 다듬는 일에 평생을 다 바친 국어교사다. 중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수필, 시조, 소설, 희곡, 가족문집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작가가 다루는 작품의 소재는 어머니, 아버지, 가족, 고향, 이웃사랑, 한글사랑 등으로 요약된다.글의 형태가 수필이던 시조이던 소설이던 그 소재는 한결같다. 그의 사상과 창작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작가는 최초 연극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연극무대에서 주인공을 도맡았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에는 희곡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다.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는 여러 편의 희곡을 창작하고 연출을 맡아 극작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작가는 문학의 또 다른 장르인 수필 쓰기에 관심을 가졌다.
1989년, 작가는 한국수필의 정회원이 되었다. 작품 ‘어머니’ 외 두 편이 한국수필에 실리면서 추천 완료로 수필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 작가는 시조 창작에도 열정을 보였다.
1993년, ‘분단의 한 백령도에 서서’를 전우신문에 게재하면서 시조 쓰기에 진력하였다. 2002년,서울문학 봄호에 작품 ‘흰 날개 섬’이 당선되어 시조시인의 명예를 안았다.
1990년, 작가는 수원문인협회의 전신인 제6대 경기문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이어 경기수필문학회, 경기시조시인협회, 기전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을 역임하여 경기도는 물론 우리나라 문학발전에 공헌하였다.
작가는 한글이름운동을 펼치면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한글 사랑의 뜻이 유달리 큰 작가는 한글이름 짓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자녀 5남매의 이름을 모두 한글로 지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열 글자의 한글 이름 ‘박차고나온노미새미나’는 아들의 이름이다. 한글이름운동으로 나라 안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작가 밝덩굴의 문학 활동은 한마디로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우리의 옛말을 다듬고 되살려 표현한 흔적이 여실하다. 토속적 이미지 전달과 해학적 수단의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
Ⅱ. 작가 작품론
1. 작가론
밝덩굴의 본명은 박병찬朴丙贊이다. 족보에 등재된 이름은 박신희이며 호는 ‘저 건너’이다. 1939년 3월 5일, 아버지 박성문朴聖文, 어머니 이양성李陽城의 막내아들로 출생하였다. 고향집의 주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좌방리 49번지다.
고향에서 오가국민학교와 예산중학교를 마치고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이어 건국대학교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경기대학교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작가는 중고등학교 국어교사의 길을 걸었다. 수원여자고등학교 주임교사, 용호고등학교 교감, 성포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하였다.
교육부 제7차 교육과정 고둥학교 교과서 국어문학 편찬심의위원, 전국참고서출판위원회, 고등학교 학습자료 심사위원, 경기도교육청 학생 교원 필독도서선정위원을 지냈다. 한국문인협회 경기도 지부장,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장, 경인시조시인협회 회장, 기전향토문화연구 회장을 역임하였다.
한글학회 정회원으로 한글학회 회관 건립추진위원, 한글이름 펴기 모임 으뜸 빛 회장을 지냈다.경기도 문화예술 위원, 9급 지방행정직 공무원시험 출제위원, 수원화성행궁복원 추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성포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면서 정부포상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문학상으로 한국문인상(본상), 경기예술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퇴임 후, 법무연수원, 한남대학, 한경대학, 협성대학에 외래 교수로 출강하였다. 국어순화, 교양국어, 수필 창작, 교양한문 등의 국어 과목을 강의하였다.
수필집으로 『잃어버린 달』 외 6권, 시조집으로 『달그림자』를 펴냈다. 희곡으로 <봉숭아 사랑>외 여러 편을 썼고, 언어 집으로 『샘이 나는 한글이름』 외 2권의 책을 썼다. 2017년 12월, 팔순에 이르러 자신의 문학 활동을 정리하는 『밝덩굴 문학전집』을 펴냈다.
작가의 부친 박성문은 예산군 삽교면에서 서점을 운영했다. 그 후 세 가지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 세 가지 일이란 첫째는 침술과 약방으로 동네 의원을 지냈고, 둘째는 서당을 열어 동네 학동들을 훈도하였으며, 셋째는 문맹이 많았던 동네 사람들의 민원을 처리하여 주었다. 그러나 돈 한 푼 받지 않고 막걸리 한 잔이나 가을에 조금 받는 감사 표시가 전부였다. 그러기에 동네에서는 어린 밝덩굴을 끔찍이 보호하고 떠받들어 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린 밝덩굴을 보면 ‘아이구 우리 의원님 아드님!, 훈장 어른 아들!, 박 생원 자제님!’ 이라 부른 것이다. 어린 왕자 밝덩굴 탄생의 축복을 여실히 말해준다.
밝 시인은 이렇게 보호받고 자라서인지 몸도 마음도 약했다. 일제 때에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갔지만 늘 울고 다녔단다. 빨리 걷지 못하는데다 멀리서 학교 종소리가 들리면 6학년 언니들이 업고서 뛰었단다. 학교생활의 적응도 늦었다고 했다. 동급 학생들에게 얻어맞아 병이 나기도 하고 잔병치레 하느라 1학년을 중퇴하였다. 결국 3년을 쉬고 해방 다음 해인 9살 때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하였다.
밝 시인이 문학에 눈을 뜬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고 한다. 연극 『팔려 가는 당나귀』에서 혹부리 영감 역을 맡으면서부터 문예 감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5학년 때는 재학생 대표로 송사를, 6학년 때는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하였다. 실로 밝 시인의 연극 활동은 문학의 씨앗이 되었다. 그 활동의 개략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1949년 오가국민학교 학예회 연극 『팔려가는 당나귀』에서 혹부리 역을 맡았고, 1954년 예산중학교 무한예술제 연극 『이슬』에서 박팽년 역을 맡았다.
1957년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재학 시절, 공주시 신흥침례교회 성탄절 행사에서 성극 『크리스마스 벨』을 창작하여 주연과 연출을 맡았다. 1959년 추석 행사에서도 연극 『봉숭아 사랑』을 창작하고 주연과 연출을 맡아 공연하였다.
1964년, 대학축제 『대학극』 공연에서는 연출 보를 맡았고, 1963년 광수중학교 예술제에서 연극 『집나간 막둥이』를 창작하고 연출하였으며, 1974년 강화여자종고 예술제에서 연극 『시원한 바람』을 창작하여 연출을 맡았고, 1975년 강화여자종고교 어버이 날 행사에서도 연극 『칠선의 후예』의 창작과 연출을 맡아 공연하였다.
이렇듯 예술의 시작은 희곡이었으나, 대학에서는 문학 동아리 ‘흑운문학회黑雲文學會’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대학신문 학보에 다양한 글을 게재하였으며 다방 등을 빌려 시화전을 열었다. 그 중 학보에 실린 수필 ‘그 여인은 외로울 것인가’는 처음 원고료를 받은 것이어서 잊혀 지지 않는단다.
지금까지 밝 시인이 펴낸 책과 받은 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필집으로 『잃어버린 달』 1984년, 『아버지와 한겨울』 1989년, 『백령도를 한번 가보세요,마음이 울적할 땐』 1998년, 『이즈음 문득 생각나는 고운 손』 2001년, 『부뜰 어머니의 사과』 2007년 등이 있다.
둘째, 희곡집으로 『봉숭아 사랑』 1958년, 『크리스마스 벨』 1957년, 『집 나간 막둥이』 1963년,『시원한 바람』 1974년, 『칠선의 후예』 1975년 등이 있다. 가족 문집으로 『새미나가 아무 것이나 막 먹으려 해요』 2001년 등이 있다.
셋째, 언어 집으로 『우리말 순화의 어제와 오늘』 1989년, 『샘이 나는 한글 이름』 1994년, 『한문의 이해』 2007년 등이 있다.
넷째, 시조집으로 시조 76편을 모아 2014년 고려사에서 발행한 『달그림자』가 있다.
지금까지 받은 상으로는 『수원문학대상』 1995년, 『경기문학인상』 2001년, 『경기예술대상(문학)』 1989년, 『한국문인상(본상)』 2008년, 『박두세문학상』 2011년, 『국제예술대상(문학)』 2016년 등을 받았고, 2001년, 37년간의 교단생활을 마치며 정부포상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경기문학』 제11집은 1990년 12월 20일 발간됐다. 1990년은 경기문인협회 제6대 밝덩굴의 임기가 시작된 해로 1966년 수원문인협회가 창립된 때로부터 기산하면 24년째가 된다.
책은 표지를 포함해 294쪽, 송가는 2,000원이었다. 제자는 소당 이수덕이 쓰고, 표지화는 경성대학교 예술대 교수 고수길이 그렸다. 지부장 밝덩굴은 「이 해를 보내면서」라는 제하의 글로 창작의 의미와 회원들의 분발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목적이 있는 것은 작품 발표일 것입니다.오랜 산고 끝에 출산한 창작을 발표하는 순간만큼 떨리고 기쁠 때는 없을 것입니다. 회원님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시상의 영감이 떠올랐답니다. 이것을 구성하는 시간이 사흘이나 걸렸구요, 또 이것의 시어나 제재, 소재들을 찾기 위해 대상이 되는 부산 등지에 묵으면서까지 여행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낳은 자식이니 얼마나 대견하고 기쁘겠습니까. 아마, 작가는 이런 멋에서도 보람과 살만한 가치를 찾는 것 같습니다.
…다가오는 1991년의 새해는 더 큰 꿈을 안고 새로운 진력을 다짐해 봅시다.”
이 책에는 이색적인 특집 「작품이야기」가 실렸다. 송효숙의 「지조 겸비한 향토의 필봉-작가 안익승 선생의 글을 보면서」, 양승본의 「추운 겨울에도 따뜻해지는 정」, 오칠선의 「본질의 문학-나의 작품」, 윤공보의 「풍류의 달인에게-심창섭의 문학」, 윤수천의 「견고한 고독의 시인-장순금 님에게」, 정운엽의 「삶의 본질적 究明문학-김순자의 시 정신, 결벽성을 중심으로」등 6편이다.
이밖에 제6회 경기문학상 수상작품인 조석구의 시 「우울한 상징」, 김우영의 시 「겨울, 수영리에서」가 소개되고, 정한용의 평론 「희망인가 절망인가」가 실렸다.
『경기문학』 제12집은 1991년 12월 15일 발간됐다. 그런데 이 책은 다음의 몇 가지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경기문학』으로는 최종호라는 점이고, 둘째는 「문협 경기도지부장」 시대가 종료되는 기념비적 동인지라는 점이다.
『경기문학』의 전신은 『화홍문학』이었다. 화홍문학은 문인협회 수원지부 시절(지부장 안익승)인1979년에 창간호를 발간한 이래 1981년 7월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문인협회 경기도지부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제4집까지 펴냈다. 그러나 도지부(지부장 이창식)로 바뀐 지 3년째가 되는 1984년에 이르러 경기문단의 대표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제호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중론에 따라 『경기문학』으로 개제하고, 1991년까지 통권 12집을 출간했다.
1991년 11월 예총 정관 개정에 따라 「문협경기도지부」는 「문협경기도지회」로 개편되었다. 1981년부터 1991년까지 존속했던 경기도지부가 시·군지부 협의체인 「문인협회 수원지부」로 바뀌었다.이에 따라 『경기문학』도 『수원문학』으로 개제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결국 초대 안익승(1981-1982), 2대 이창식(1982-1986), 3대 이재영(1986-1988), 4대 윤수천(1988-1990), 5대 밝덩굴(1990-1991) 지부장 시대가 끝나게 되는데 이는 인위적이라기보다는 시대적 변화의 결과였다.
이런 변화를 의식했는지, 『경기문학』 제12집은 그 규모가 매우 방대했다. 제호는 소당 이수덕이 쓰고, 표지 그림은 한국화가 우당 이길범이 그렸는데 무려 414쪽에 달했다. 이는 1979년 『화홍문학』 창간호 이래 최대의 부피였고 기획도 남달랐다. 지부장 밝덩굴은 『경기문학』 제12집에 「장안문 돌다보니」라는 권두시를 썼다.
「장안문 돌다보니」
장안문 돌다보니 세월은 날고
온길 되돌아 억년을 꼽아도
수염 난
그 언저리는
깎을수록 흔적터고
한웅큼 씨뿌려 푸른 싹 보노라니
기쁜 맘 앞서가는 그대의 고마운 정
버얼써
내 그리움에
주막촌만 떠돈다.
『경기문학』 제12집에는 故 정운엽 시인 추모 특집을 마련하였다. 특집란에는 밝덩굴의 「선생,눈 고이 감으오」, 서 벌의 「우리 다시 만나 어울리리」, 유 선의 「아우님 영전에」, 윤수천의 「정운엽의 인간과 문학」, 임병호의 「찰나의 소멸을 노래하다」가 실렸다. 훗날의 자료로 삼기 위해 『경기문학』 최종호(통권 12집)에 실린 회원 68명의 명단을 옮긴다.
지부장 밝덩굴 수필, 부지부장 이덕선 수필, 부지부장 정운엽 시조, 감사 강양옥 수필 감사 김윤배 시, 이사 김우영 시, 이사 송효숙 수필, 이사 이호광 소설, 이사 임병호 시, 이사 조석구 시, 시분과위원장 구자룡 시, 소설분과위원장 김현탁 소설, 아동문학분과위원장 김효진 아동문학, 시분과위원장 유 선 시조, 수필분과위원장 이홍구 수필, 평론분과위원장 정한용 평론, 사무국장 양승본 소설, 사무차장 정남수 소설, 사무차장 진순분 시, 회원 강대욱 수필, 권오진 소설, 김동극 아동문학,김성자 시, 김순자 시, 김애자 시, 김학규 소설, 김훈동 시, 민성훈 시, 박건웅 시, 박명자 수필, 박효석 시, 밝덩굴 수필, 송효숙 수필, 신건자 수필, 신웅순 시조, 심창섭 수필, 안익승 수필, 안희두 시,오칠선 시, 유옥순 시, 윤공보 수필, 윤대철 수필, 윤수천 아동문학, 음정순 수필, 이동구 수필, 이만종 수필, 이상묵 수필, 이재영 수필, 이창식 수필, 이춘우 시, 이학재 수필, 임득호 수필, 임성자 수필, 임영순 아동문학, 임옥순 아동문학, 임종삼 소설, 임화자 수필, 장기두 시, 장석향 시, 장순금 시, 정규호 수필, 정방전 시, 정수자 시조, 정재희 시, 지승복 시, 채명화 시, 최영선 시, 최창현 아동문학, 현윤길 시조, 홍승표 시조.
1992년, 수원문인협회는 제1회 수원문학상을 시상하였다. 대상과 작품상, 신인상을 시상한 수원문학상은 명실상부한 향토문학상이 되었다. 특히 수원문학상 신인상은 서울을 비롯한 국내 유수의 신인상보다 당선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문단에서 나왔다.
1995년 12월 22일, 수원문학상 심사위원회는 제4회 수원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하였다. 수원문학상 대상은 수원문단 발전에 헌신적으로 기여한 회원을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작품상은 한 해 동안 우수작품을 발표하였거나 저서를 출판한 회원을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심사위원회는 제4회 수원문학상 大賞에 수필가 밝덩굴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수필가 밝덩굴은 수원문인협회에 참여한 이래 한국문인협회 경기도 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수원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다. 수원문학상 대상 시상식은 1995년 12월 29일에 가졌다. 심사평은 임병호 시인이 발표하였다. 밝덩굴은 수상 소감을 한 편의 시조를 곁들여 노래하였다.
좋을 글을 쓰려고…
좋은 글을 쓰려고…
고운 맘 가득 담아
문학상 타라시니
예부터 부끄럽긴
지금도 마찬가질세
그렇군,
좋은 글 쓰자.
“또 한 번 읽어야지”
나는 텔레비전을 즐겨 봅니다. 그 중에서도 이야기로 엮어지는 영화나 드라마가 비중을 많이 차지하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겸하여 떠오르는 생각은 배우들의 화려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내가 한번 배우가 되어보는 겁니다.
지금 웃으셨지요? 키가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품으로 배우가 돼요? 그러지 마십시오. 배우,탈렌트를 보니 웃기는 짜장면이 더 많더라고요.
하여튼, 누구를 쳐다보고, 무엇인가 말하고, 어떤 짓을 해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지요. 어떤 문학이든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무엇의 생각이요, 아무 것의 꿈이지요. 내가 배우가 되어 싶어 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것도 그 꿈의 실현일 수 있습니다.
당신! 그러면 글 쓰는 사람만 꿈이 있고, 우리는 꿈이 없단 말이오? 잠깐,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아, 그 이야기 방법이 이 지면은 문인들의 이야기니까 그렇지, 사람은 어느 분야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진-밝덩굴 문학선집 |
2. 작품론
1) 수필은 따뜻하고 청아해야한다
밝덩굴의 수필은 따뜻하다. 그의 수필은 고려청자처럼 맑고 청아하다. 수필을 蘭과 鶴과 靑瓷硯滴에 비유한 피천득의 작품론과 궤를 같이 한다.
연적은 문방사우의 하나이다. 글을 쓰고자 벼루에 먹을 갈 때 필요한 도구이다. 글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이 연적에 담을 맑은 물이다. 그의 수필은 청자처럼 고상하고 연적에 담긴 물처럼 맑다. 상선약수(上善藥水)에 다름 아니다.
작가는 한국수필에 추천 완료되어 수필가의 길을 걸었다. 작품 ‘어머니’ 외 두 편이었다.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박승훈 님의 <추천사>와 작가의 <당선 소감>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새롭게 되새겨본 작가의 의도가 귀하다. 앞으로 밀도 있는 문장력으로 힘써주기 바란다. <추천사>
내가 전철을 타고 갈 때 마지막 칸을 선택하는 습관은 우연만은 아닐 성 싶다. ‘만학의 기쁨’이 그것이다. <당선 소감>
작가의 대표작은 2017년 12월 31일 출간한 『밝덩굴의 문학선집』에 담겨있다.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수필 <어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어머니가 어디선가 주워온 ‘조개돌’에 대한 추억이다.돌을 탐석하는 사람들은 돌을 水石, 또는 壽石으로 부른다. 수만 년 강물에 씻겨 둥근 얼굴을 한 모습이거나 생명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여긴다.
작가는 어머니가 장독대에 두고 아끼던 ‘조개돌’에 무한한 애정을 가진다. 아기들이 어머니의 체취가 나는 옷자락에 매달리는 애착과도 같다. 둥글게 갈마 된 얼굴 닮은 둥근 돌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그래서 현관 앞에 놓아두고 出畢告 反畢面을 하는 것이다.
수필 <부뜰 어머니의 사과>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작가의 고향마을을 지키는 부뜰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토속적인 이름 부뜰이는 부엌에서 낳은 아이라서 그리 지은 이름이다. 마당에서 일할 머슴이라고 마당쇠로 지은 것과 같은 이름이다.
작가의 어머니 연배인 부뜰이 어머니는 작가의 집 앞을 늘 지나다녔다. 커다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바삐 방물장사를 다녔다. 그러다 10살 난 밝덩굴을 길에서 만나면 정답게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다. 장차 과수원을 하게 되면 사과를 많이 먹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부뜰이 어머니는 한 마을에 사는 밝덩굴이 자신의 아들처럼 귀여웠던 것이다. 그래서 광주리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물장수를 다니는 부뜰이 어머니의 광주리에는 밝덩굴에게 나누어 줄 사과가 없었다.
5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다. 부뜰이 어머니도 이미 81세의 할머니가 되었다. 밝덩굴 또한 60세가 넘은 초로의 농부가 되어 고향을 찾게 되었다. 고향 땅에 과수나무를 심는 어느 날, 부뜰이 어머니는 작가를 찾아와 젊은 날의 기억을 회상한다. 그러면서 당신의 젊은 날에 밝덩굴에게 건네주고 싶었던 사과를 가져온다. 부뜰이 어머니가 가져온 다섯 알의 사과는 쭈글쭈글했다. 그러나 그 맛은 젊은 날의 사과처럼 달콤새콤했다. 작가는 부뜰이 어머니의 사랑에서 당신 어머니의 사랑을 추억하는 것이다.
수필 <아버지와 한겨울>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다. 아버지의 보살핌에 대한 고마움이다. 시골 농부였던 작가의 아버지는 농한기인 한겨울에 오히려 더 바쁘셨다. 의원(鍼術)이라서 환자 치료에 바쁘셨고, 한학자(漢學者)라서 글 모르는 사람이 물어 와 바쁘셨고, 훈장(訓長)이라서 마을의 학동을 가르치느라 바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막내아들을 위해서 짬을 내셨다. 한겨울이면 칼날썰매와 호랑무늬방패연을 만들어 아들을 기쁘게 하셨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바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선물하셨다. 아들로 하여금 푸른 하늘에 높이 나는 호랑이 꿈을 꾸게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한겨울의 추억이지만 전혀 춥지 않다. 바쁘다고 불평하는 오늘의 부모세대에게 전하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말씀이다.
수필 <계수 아버지> 또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다. 작가는 아주 오랜만에 고향 마을 후배인 계수를 만나 회포를 푼다. 중국집 배달원을 시작으로 한중음식점의 사장이 된 계수를 만나 소주를 마신다. 못 배운 후배 계수의 무던한 삶에서 그의 배불뚝이 아버지를 추억한다.
기실 배불뚝이였던 계수 아버지의 배는 똥배였다. 기름진 음식을 먹어 툭 불거진 북한 김부자의 배가 아니었다. 먹을 것이 없어 허접한 음식을 양껏 먹어 뱃고래가 커진 똥배였다. 그렇지만 계수 아버지는 동네에서 가장 일 잘하는 사람이었다. 궂은일과 험한 일을 가리지 않고 도맡아 하는 배불뚝이 아버지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죽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계수 아버지를 무척이나 그리워하였다. 그는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우리들의 아버지이었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고향 후배 계수를 만나 술잔을 나누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자네 아버지는 자네를 낳고 휘 맑은 달을 쳐다보면서 그 곳에 계수나무를 심은 거구먼!자넨, 꼭 자네 아버지이고, 자네 아버지는 꼭 자넬세 그려.....!
수필 <봄이 오면 생각나는 다리>는 고향에 대한 사랑이다. 작가를 길러준 고향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이 글에 등장하는 ‘영나다리’는 고향마을을 대표하는 이미지이다. ‘영나다리’를 건너 학교에 다니던 추억, ‘영나다리’ 밑에서 멱을 감던 추억, ‘영나다리’ 아래서 참외서리를 하다 들켜 불벼락을 맞던 추억들이 소중하다. 작가의 고향을 대표하는 ‘영나다리’는 부산 사람들이 사랑하는 영도다리를 연상시킨다.
수필 <가족>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작가는 십이지장궤양의 네 번째 재발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격무, 스트레스, 헬리코박터균의 원인으로 길에서 쓰러져 객사할 위기를 겪었다. 그때 그를 살린 것은 주변을 내달리던 어느 목사의 봉고차였다. 가족도 아닌 이웃이 그의 목숨을 살렸던 것이다.
작가는 아주대학교병원의 응급실로 급히 실려 갔다. 때마침 응급실에는 작가의 제자인 김성희 간호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승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우리 선생님 죽어요. 살려주세요!”
김 간호사의 외침에 병원 의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래서 작가는 살았다. 이웃사람들의 따뜻한 사랑으로 사선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래서 작가는 이웃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봉고차가 피투성이로 얼룩져도 괘념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다. 서울 동문교회 이 웅 목사,이수영 권사의 가족 사랑을 보았다. 하느님의 이웃 사랑 가족 사랑을 보았다. 작가가 말하는 가족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수필 <형제의 사랑으로>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작가는 고향마을의 지 씨 어른으로부터 받은 훈육을 기억한다. 그 중에서 때때로 형제의 우애를 떠올린다. 외지에 나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기억이다.
이후, 고향 마을의 지 씨 어른으로부터 받은 훈육은 작가의 삶의 지표가 되었다. 피를 나눈 혈족의 형제가 아니라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모두 형제라는 것이다. 신이 창조한 지구에 사는 우리는 형제이고, 형제는 마땅히 우애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지 씨 어른이 전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형무의복兄無衣服이면 제필헌지弟必獻之하고, 제무음식弟無飮食이면 형필여지兄必與之라.
-형에게 의복이 없으면 동생은 반드시 드려야 하고, 동생이 먹을 것이 없으면 형은 마땅이 주어야 하느니라.- 이건, 꼭 형제자매에 한한 게 아니라, 우리 인류가 다 형제라 생각하면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게지.”
수필 <한글이름운동을 하면서>는 한글에 대한 사랑이다. 한글이름운동은 서울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가 펼친 사업이었다. 1976년 백만 한글이름 갖기 사업으로 시작한 ‘고운 이름 뽑기’ 아홉 번째 행사가 끝난 후였다. 이 행사에 참가한 학부모, 국어학자, 교사, 한글이름 연구가 등 83명의 이름으로 출범한 운동이었다.
한글이름운동의 결과는 한아름(선물), 고우네(의상실), 타미나(화장품), 부티나(보세점), 어깨동무(잡지), 실버들(다방), 샘터(잡지), 엄마손(한식집), 즈려밟고(신발가게), 힘나라(체육사), 새싹길(길 이름) 등의 이름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기상청에서는 태풍 이름을 개미, 나리, 노루, 수달, 너구리, 나비 등의 한글로 짓고 시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한글 쓰기는 현재 쇠퇴하는 단계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한글 쓰기는 성장하는 단계로 보인다. 폴란드는 ‘세종대왕고등학교’, 영국은 ‘세종학당’ 이라는 이름의 한국어 학교를 운영한다. 그런가하면 인도네시아 ‘찌아찌아’ 족은 한글을 국어로 삼았다. 세계 43개국 90개소가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작가는 이런 현상을 경계하여 한글이름운동에 앞장선 것이다.
수필 <어제, 오늘은 있는데…> 또한 한글 사랑이다. 그 사랑을 ‘희망’이라는 낱말 하나로 대변한다. 작가의 한글 오염에 대한 걱정은 아주 작은 일에서 비롯한다. 우리나라 전매청에서 판매한 담배 ‘희망’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담배 ‘희망’의 맛이 순수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희망’을 사려고 자주 담배 가게에 들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담배 가게 주인에게 ‘희망 있어요?’하고 물으니 ‘희망 없어요.’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희망이 있느냐는 작가의 물음에 희망이 없다는 대답을 자주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희망이 없다니?’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하는 사람이나 희망이 없다니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자꾸 야릇한 뒷맛을 느꼈다는 것이다. 하물며, 누가 ‘우리 민족에겐 내일이 없다.’ ‘우리 민족에겐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느끼시겠습니까? 하고 독자에게 반문한다. 이 작품은 국어사랑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노력하는 작가의 오늘을 대변한다.
2) 시조는 우리의 노래다
밝 시인의 시론은 우리말글을 살리는 시조 쓰기이다. 밝 시인이 시조쓰기로 돌아오기까지는 무려 50년이 걸렸다. 중학교 때 시조가 좋아 습작을 하다가 교지에 시조원고를 투고했었다. 그런데 그만 아쉽게 탈락 되어 시조쓰기를 접었다. 그러나 시조에 대한 향수는 끝내 버리지 못하다가 1986년, 수원여자고등학교에 개설한 『수원상설 시조학교』에서 시조 짓기 강의를 하면서 시조 창작을 다시 시작하였다.
밝 시인은 2002년 서울문학 봄호에 신인상으로 당선되었다. 등단 작품은 ‘한적골 하숙생이 한 자리에 모여’, ‘혼자 남던 날’, ‘흰 날개 섬’ 등이다. 환갑을 넘긴 늦은 나이의 신인상이었으나 대기만성의 등단이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시조는 <흰 날개 섬>이었다. 심사위원 원동은, 전영택 님의 〈심사평〉과 작가의 <당선 소감>은 다음과 같다.
<흰 날개 섬>
까나리 살내음 추억으로 젖 담으며
하이얀 모래밭 햇살로 밟타면
버얼써 흰 날개섬은 용기포 들문이다.
햇살 따라 나선 눈이 용기 원산 앞에 서면
철조망으로 묶어놓곤 지뢰가 터진단다
저기도 우리 땅이라 붉게 타는 해인데.
박신희 님은 5편의 작품을 보냈는데, 모두가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데다가 감칠 맛 나는 표현력과 아름다움, 상의 흐름이나 전개에 무리가 없어 상당한 수련을 쌓은 듯 노력한 솜씨가 돋보인다. 주제가 다소 단조롭기는 하나 삶의 깊이를 꿰뚫어 보는 번득임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번의 당선을 계기로 더 한층 정진이 있으시기를 바란다. 〈심사평〉
고향 찾기의 기쁨 -문학 공부를 하면서 제일 먼저 한 장르가 시조였습니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교지를 내면서 원고를 모집한다기에 투고했습니다. 몇 달 후 교지가 나왔지만 내 작품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당선 소식은 내 모교에서 또 교지를 내면서 졸업생들에게 원고 투고를 희망한다면 이제 내 작품이 게재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이는 실로 50년 만의 ‘고향’ 찾기의 기쁨입니다.
심사위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당선 소감>
밝덩굴 시인의 작품은 경인시조문학이 발행한 사화집에 실리면서 빛나기 시작한다. 1997년 8월27일, 도서출판 대한에서 발행한 경인시조문학 제9사화집이다. 제9사화집에 〈우리 아버지〉, 〈고향길인데〉, 〈흰 날개 섬〉, 〈장안문 돌다 보니〉, 〈하늬〉, <바다에서〉, 〈약수터 가는 길〉 등 무려 7편이 실렸다.
제10사화집에 〈분단의 한 백령도에 서서〉, 〈분꽃〉, 〈달그림자〉, 〈민들레〉, 〈기러기 꿈〉, 〈무수리 바라보며〉, 〈옛 친구가 뵈더이다〉 등 6편이 실렸다. 제11사화집에 〈고향길 200리〉, 〈한적골 하숙생이 한 자리에 모여〉, 〈그 많던 비문 비사〉, 〈금붕어가〉 등 4편, 제12사화집에 〈외할머니〉, 〈혼자 남던 날〉 등 2편, 제13사화집에 〈점괘 여는 날〉, 〈토종꿀을 사고파〉, 〈너희는 푸른색 교복〉, 〈요옹타, 장하구나〉 등 4편, 제14사화집에 〈자주색 감자〉, 〈사랑만으로〉, 〈오 필승 코리아〉 등 3편이 실렸다.
제15사화집에 〈유선 시인의 고향〉, 〈청양고추 송〉 등 2편이 실렸다. 제16사화집에 〈고향가네〉,〈인권〉 등 2편, 제17사화집에 〈눈길〉, 〈불효자〉, 〈어머니 냄새〉, 〈귀뚤이야! 오라고 해야 하느냐〉,〈그렇게, 가르친 거죠〉 등 5편, 제18사화집에 〈고향에 부치는 편지〉, 〈옥수수〉, 〈산자락, 내 쉴 곳〉 등 3편, 제19사화집에 〈탱자 가라사대〉, 〈아, 영월의 지리탑아〉 등 2편, 제20사화집에 〈2008년 9월의 일기〉 1편이 실렸다.
제21사화집에 〈이 가을에〉, 〈아버지의 노래〉 등 2편이 실렸다. 제23사화집에 〈외로운 친구〉, 〈 가출한 흙염소 이야기〉 등 2편, 제24사화집에 〈바람개비〉, 〈어떤 성묘〉, 〈그대 있어서〉 등 3편 제25사화집에 〈금붕어〉, 〈수원천을 걷는데〉, 〈손주께임·1〉, 〈손주께임·2〉, 〈한적골 하숙생이 한 자리에 모여〉 등 5편이 실렸다.
제26사화집에 〈그리고, 따뜻한 봄비〉, 〈2014년, 긴 여름〉, 〈설날 아침〉, 〈한가윗날의 모의〉, 〈못 오를까?〉 등 5편이 실렸다. 제27사화집에 〈반딧불이 사랑〉, 〈질경이의 생〉, 손주 께임-7〉, 〈갑자 을축〉, 〈고목이 쓰러지면서〉 등 5편, 제28사화집에 〈광교산 들문 예절〉, 〈광교호수렛길〉, 〈아, 9회 말!〉, 〈천둥소리 큰 것은〉, 〈다람쥐 혼자서〉 등 5편, 2017년 제29사화집에 <착한 달걀 찾는다며>, <호박꽃>, <광옥 진산光獄鎭山 오르며>, <비와 늙은이와 빅게임>, <사랑해야지 정말 사랑해야지>등 5편이 실렸다.
2016년, 작가는 첫 시조집 『달그림자』를 발간하였다. 경기시조문학이 발행한 사화집에 실린 68편에 8편을 더하였다. 작가는 『달그림자』에서 평생의 시조사랑을 새로운 형태의 시조로 실험하였다.
시조는 곧 시詩다. 우리나라 전통 율격의 정형시이다. 시조의 형태에서 단시조는 시조의 중심이 되는 3장 6구 12소절로 구성되고, 연시조는 한 제목 아래 두 수 이상인 형태이며, 엇시조는 초, 중,종장 가운데 어느 한 장이 5~7어절로 이루어진 형태이고, 사설시조는 연시조의 형태에서 초, 중, 종장 가운데 어느 한 장이나 3장 모두가 단시조보다 8음보 이상 길어진 형태의 시조이다.
이 외에 절장시조는 3장 가운데, 어느 한 장이나 두 장이 생략된 시조를 이르고, 옵니버스시조는 한 편의 연작시조 속에 단시조, 연시조, 사설시조, 절장시조 등 다양한 시조형식을 모두 아우르는 혼합 형태의 시조를 말한다. 그 밖에도 동시조, 기행시조 등의 형태로 나뉘기도 한다. 이러한 시조의 새로운 형태를 밝 시인은 시조집 『달그림자』에서 실험하였다.
시조집 『달그림자』는 자신의 삶의 현실적 체험에서 건져 올린 새로운 심상이다. 작가의 인생 역정을 여실히 그려놓은 걸작들이다. 작자가 밝힌 〈시작노트〉의 기록 그대로다. 전 5부로 나뉘어 각 부마다 한 편씩의 〈시작노트〉를 달아놓은 것이 특색이다.
제1부 ‘나 살던 곳’에 13편, 제2부 ‘어머니 냄새’에 16편, 제3부 ‘광교호반을 걸으며’에 13편, 제4부 ‘달그림자’에 16편, 제5부 ‘보람의 길’에 18편으로, 단형시조가 32편, 연형시조가 35편, 장형시조가 6편, 절장시조가 1편, 옵니버스시조가 2편이다. 모두 76편의 시조를 묶어 아름다운 기와집 한 채를 건축해 놓았다. 우리 시조문단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부별로 한두 편씩 골라 작품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제1부는 <나 살던 곳> 즉 고향이다. 타향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고향에 대한 그리운 향수가 없을 수 없다. 3수의 장형시조로 한편을 구축하여 고향 가는 노정을 아기자기하게 그려놓은 ‘고향 가네’, ‘고향 길 200리’, ‘고향에 부치는 편지’, ‘고향 길인데’, ‘산자락 내 쉴 곳’ 등 모든 작품들이 하나같이 고향에 대한 짜릿한 향수를 함축하고 있다.
고향길 200리
고향 길 200리는 비둘기호라야 잘 맞는다.
붓들 어매 무수 팔던 얘길 듣다 보면
여기는 호도오 과자 능수버들이 보이고,
기찻길 200리는 천안부터 문뎅이다.
저렇듯 때려도 아프잖는 상천데
여럿이 치어다 뵈는 빨간 산 능금뎅이.
삽다리 200리는 예산의 끝이라서
생각은 만 리를 타고 눈짓은 한 걸음 땅인데
칙칙 폭 묵은 소리에 문 밖에선 어머니가.
각 수의 초, 중, 종장들이 첫 구나 둘째 구처럼 ‘고향 길 200리 〉 기찻길 200리 〉 삽다리 200리’,그리고 ‘비둘기호 〉 천안 〉 예산’과 같이 기묘한 점강법에 의한 향수의 심상 가까이로 이끌어 간다.
첫 수에서는 비둘기호를 타고 가며 ‘무수 팔던 / 얘길 듣다 보면 // 여기는 / 호오도 과자(천안) /능수버들이 보이고’
둘째 수의 ‘천안부터 문뎅이다 / 치어다 뵈는 / 빨간 산 능금뎅이’
그리고 셋째 수에서는 ‘생각은 만 리를 타고 / 눈짓은 한 걸음 땅인데 / 칙칙 폭 / 묵은 소리에 /문밖에선 어머니가’ 자식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이미지 처리를 아주 딴판인 것처럼 ‘환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시조를 창작하는 기발한 힘이다. 상상의 공간이나 기발한 창조적 능력이 없으면 졸작밖에 보여주지 못한다. 시적 대상인 하나의 세계를 마음대로 주물러서 이미지를 한번 뒤집거나 전혀 다른 상상의 교묘한 유기적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수법이다. 이렇게 현실적 체험을 시적 체험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능력이다.
제2부는 <어머니 냄새>다. 잊을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코끝이 시큰한 모정과 그리움의 혈연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그리고 손자까지도 길게 뻗어가고 있다.
어머니 냄새
내 아내는 어머니를 닮았다 꼭 닮았다
아내가 긁어모은 누룽지 손 훔칠 때
어릴 적 어머니 손이 사탕으로 감돈다.
여성들은 모성애가 짙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본능적인 사랑만으로는 자식을 잘 키울 수가 없다. 의지와 감정의 힘이 합쳐서 모성애를 다듬어 그 폭을 넓혔을 때 비로소 바람직하다. 어머니의 마음이 맑고 밝지 못하면 자식을 올바르게 키울 수 없다. 어머니가 어질고 총명하고 굳센 의지를 지녔다면 입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자연적으로 좋은 감화를 받아 성실하고 올바르게 자란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 냄새’라고 생각된다.
위 시조의 초장에서 ‘내 아내는 어머니를 닮았다 / 꼭 닮았다’고 강조해놓고, 중장에서 ‘아내가 긁어모은 / 누룽지손 훔칠 때’라고 사변을 일으키고, 종장에서는‘어머니 냄새’ 즉 ‘어릴 적 / 어머니 손이 / 사탕으로 감돈다.’고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렇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쉬운 글이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뜻이나 생각은 바다보다 깊고도 넓다.
제3부는 <광교호반을 걸으며>이다. 부제가 암시하듯 작자의 생활주변의 체험에서 건져 올린 심서들이다. ‘화성을 밟으며’, ‘장안문 돌다 보니’, ‘수원 천을 걷는데’, ‘광교산을 오르며’, ‘물길 따라 산길 따라’, ‘약수터로 가는 길’ 등이 그러하다.
광교호반을 걸으며
그리움이 가득한 날 나는 산길을 걷네
광교호수 푸른 물에 천둥오리 천천둥둥
금붕어 떼 지어 뻐끔뻐끔 하늘만을 마시네.
저어기 울긋불긋 옷단장하고 걷는 사람도
얼마를 걸었는가 그리움이 보이는지
의자에 흔들 앉아서는 먼 그네를 타고 가네.
‘광교호반을 걸으며’에 대하여는 저자의 〈시작 노트〉로 대신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광교호반을 걷는다. / 둘째 딸 글이 나와 걷는다. 암癌 환자끼리 걷는다. / 천둥오리, 금붕어, 산책하는 사람이 그리움을 기다린다. / 하나님, 아프지 않게 해주십시오.그리운 사람 보게 해 주십시오. / 그네에 그 꿈을 실어 날아 본다.
제4부는 시조집의 표제인 <달그림자>로 저자의 인생 역정을 암시하는 중심부이다. 여기서 <달그림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자는 시작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대전역에서 젊음을 기차에 실었습니다. 누군가가 간 이 길을 나도 갑니다. 서울역을 향해 말이지요. 내 여정은 희미하지만 ‘ 달그림자’입니다. 막아서는 것이 많겠지만, 그 흐림 안의 달의 실체는 분명합니다. 이 여정만큼은 내 향向이 하늘에 오르고 싶은 거지요. 어떻게 말입니까요? 그것은 ‘짜임’으로 한 ‘도식적 시화圖式的 詩化’로의 내 안의 보임입니다.
이 시에 나타나는 실제 지명(역)을 동서남북으로 연결하여 십자十字를 썼구요. 왔다 갔다 하는 ‘관계’, 그리고 낭만, 튼튼함이 있습니다.
이제 기차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대전역-군포역-서울역’은 내 생애의 길이 만큼입니다. 군포역은 현 시점인 용호고등학교 교감 시절입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생生에 대해서 나에게 다시 묻고 싶었습니다.
이 글로 미루어 보건대, ‘달그림자’=‘작자의 인생역정’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달그림자’란 시조는 과연 무엇을 형상화 했는가? 그 연시조를 살펴보기로 한다.
달그림자
플랫 홈에서 달 이름 부르며 이별 칸을 탔었지
(대전 발 0시 50분)
차창에 맺힌 무서리를 세월로 엮어 걸면서
그렇게 사십 년을 좇아갔는데
군포역에서야 달 이름 본다.
양재역으로 가서는 헬스를 하고 싶다
상록역으로 가서는 산성공원을 거닐고 싶다.
서울 역, 몇 정거장 앞에서 서성이는 달그림자.
‘달그림자’의 첫수에서 ‘플랫 홈’은 저자의 인생역정(기차)의 출발점이고, ‘이별 칸’은 고향을 등짐을 유추한다. ‘(대전 발 0시 50분)’은 ‘잘 있거라 나는 간다’란 노랫말에서 인용한 것이 남다르게 기발하다. ‘사십 년’은 고향을 등지고 전전한 기간이다. 비로소 ‘군포역에서야 달 이름을 본다’는 입신의 상징이다. 즉 용호고등학교에서의 교감시절이라고나 할까.
둘째 수의 초, 중장에서는 미래의 소망을 담고 있고, 종장에서는 현재의 자신의 위치(수원)를 나타내는 유추다. 즉 ‘서울역, 몇 정거장 앞(수원)에서’ 서성이는 자신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달그림자〉는 행간마다 많은 의미를 숨겨 둔 함축과 생략, 유추와 상징, 강조와 변화 등등의 묘미를 살려 내었고, 행간 속에는 알게 모르게 작자의 삶의 이야기가 녹아 구슬처럼 반짝이고 있다.
제5부는 <보람의 길>이다. 작자가 살아오는 동안 여러 가지 행사나 축하 등 기념이 될 만한 시조18편을 모아 놓았다. 그중에 ‘바람개비’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예산문학회 심포지엄에서’란 부제가 달려 있고 그 아래 다음과 같은 〈시작노트〉가 기술되어 있어 대신한다.
바람개비
고향 길 담 모퉁이에 매달린 바람개비
딱 앞에 멈춰 서도 벌 떼 소리는 그치지 않고
동네의 귀가 되어서는 쉬지 않고 돌았구나.
예산문학회에서 시 낭송을 해달라고 했다. 일정이 얼마나 빠듯하든지 내 차례가 빠졌다. 사람들이 없는 담모퉁이에 가서 몇 번이고 음독했지. 그리고 출연료가 날아간 것을 안타까워했는데, 회장이 나를 부른다.
“통장 번호를 말씀해 주시지요.” / -기분이 ㅋ ㅋ ㅋ / 바람개비는 참 좋은 이장里長이다. / 2012. 5. 19
밝덩굴 시인의 시조집에 실린 76편의 시조는 색다르다. 다른 시인들의 시조집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쓸 수 있을까? 낱말의 적절한 선택과 특이한 형태와 배치가 새롭고 남달랐다. 그래서 시조는 행간의 공간을 즐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독자들에게 경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집 <달그림자>는 작가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몇 줄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시조시인의 삶의 궤적이요, 시조이며, 발자국들이다. 이제 여행길을 감돌아 고향을 찾아가는 즐거운 이야기들로 고래 등 같은 한 채의 기와집을 지었다.
다음은 경기신문 2015년 12월 〈아침산책〉에 발표되었던 작품 ‘그대가 밟고 간 눈길’이다. 작가의 작품과 시인 권월자의 해설을 소개한다.
그대가 밟고 간 눈길
동구 밖 산등성이 눈길 따라 따라나섰다
그대가 손 흔들며 눈 그렁턴 지평선
발자국 녹을까 보아 햇볕부터 가렸다.
밤새 눈은 내리고.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방문에 서로가 나누었을 눈빛이 시리다. 동구 밖 산등성이 눈길에 뚜렷이 새겨지던 흔적, 발자국. 눈물 그렁그렁한 채로 햇볕을 막아서는 슬픈 몸짓에 가슴이 먹먹해온다.
필자는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이 흔하디흔한 일이며, 떠나야만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이제, 진실한 사랑은 밟고 간 발자국마저도 고스란히 가슴에 품는 것임을 안다. 기다림의 시간들을 함께 걷는 것으로 승화한 아름다운 사랑이다. <권월자 시인>
밝 시인은 삶의 현실적 체험을 어떻게 시조로 표출하였는가? 직설적으로, 또는 비유나 은유적으로, 때로는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표출하든 간에 그래도 삶은 아쉬운 것이고 삶의 미련은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과 생각과 느낌 등을 용해시켜서 쓴다. 다시 교묘히 배합하고 재구성하여 우리 시의 가락에 얹어 별빛처럼 반짝이고 햇살같이 빛나는 시조를 빚는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삶의 현실적 체험에서 건져 올린 새로운 심상의 미학(美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시 문단의 현실은 어떠한가? 1928년경, 해외문학파가 도입한 자유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우리의 전통 문학인 시조를 등한시하는 풍토가 존재한다. 또한 우리의 노래 시조를 가르쳐서 깨우치면 곧바로 자유시로 등단하는 기상천외한 일이 부지기수였다.
우리 겨레가 왜, 어째서 그럴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밝덩굴 시조시인은 그렇지 않다.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선각자여서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면이 참으로 훌륭하다.
시조는 큰 깨달음을 고승이 남긴 사리와도 같은 구슬이다. 짧은 형식이면서도 하고자 하는 바를 아담하고 산뜻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조는 현대 우리 민족시로서 하나도 손색이 없는 문학이다. 우리 시조문단은 이를 가꾸고 보급시켜 세계화에 이르게 할 책임이 크다. 실로 시조는 우리민족의 얼과 정서와 사상과 생활전체가 한데 어우러져 탄생한 전통 시이다. 그러기에 전 국민이 모두 이에 동참하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Ⅲ. 맺음말
한글학자이자 수필가인 밝덩굴은 처음에 시조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수필로 등단하여 대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작가는 그리운 고향을 잊지 못해 다시 시조로 등단하였다.
실로 시조를 쓰는 일은 영혼을 담금질하는 과정이다. 어떤 이는 머리를 짜는듯하다는 고통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하나의 사물에 숨어 있는 의미를 캐내어 시어로 표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그것은 독자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목적을 가진 때문이며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산문이 아닌 까닭이다.
훌륭한 수필과 시조는 독자의 정서를 흔드는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필자의 상상력을 최대로 동원한 구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필과 시조는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표현이며 그 의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작가가 감당해야할 과제라고 본다.
청아한 수필로 주변을 따뜻하게 하고도 새로이 시조의 지평을 여는 작가의 문채를 빈다. 작가가 창작하는 새로운 작품들이 독자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주기를 기원한다.
〈참고문헌〉
● 밝덩굴, 『밝덩굴 문학선집』 디자인신원, 2017.
● 유선, 역대 경기시조 회장 작가작품론 2 『기전문화 19집』, 디자인신원, 2017.
● 밝덩굴, 시조집 『달그림자』, 고려사, 2014)
● 허영자 외 2, 『한국시대사전』, 을지출판공사, 2011.
● 밝덩굴, 경기문학 11집, 경기문인협회, 1990.
● 밝덩굴, 경기문학 12집, 경기문인협회, 1991.
● 경인시조, 『사화집 제2호∼제28호』, 한국문연 외,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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