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간척은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 육지보다 더 많은 전답을 가졌는데 논 25.89km2, 밭 2.57km2, 임야 11.45km2이다. 광복 당시에 8,644명이 그리고 한국전쟁 뒤에는 더 많은 피난민이 몰려온 곳이다. 1965년에 1만 2443명에 달하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최고의 인구를 가졌던 때로 보인다.
교동도는 한강하구인 임진강과 예성강이 흘러와 바다와 만나는 합류점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은 강화군 교동면이지만 8.15 해방 전까지만 해도 강화읍보다는 거리상 가까운(약 12km 정도) 서해도 연백을 생활권으로 삼았다.
6 · 25동란 이전의 교동도는 이북 해주와 인천 사이를 연결하는 4개의 정기연락선으로 왕래하는 자유지대였으나 전란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그 당시는 도로가 발달하지 못해서 배를 이용하는 해상로가 최고의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접경지역인 까닭에 도선인 여객선은 일몰 한 시간 전에 운항이 중단된다. 그 이후에는 다른 대절선마저 오갈 수 없다. 분단의 현장임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다.
교동도 북단의 말탄포구에서 강 건너로 마주보면 2km 전방에 북한 땅 연백군이 빤히 바라보인다. “전쟁이 곧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잠시 머물렀지”하며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사람들, 고향땅을 쳐다보는 주민들이 어느 곳보다 많이 살고 있다.
옛집의 골목길까지 훤히 보이는 고향은 지호지간이건만 현실적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경계의 지점을 넘어서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며 날아가는 새들의 신세가 마냥 부러울는지 모른다.
6.25 전쟁 중 1.4후퇴 때는 육로가 막혀 연백군 연안읍 군민들은 고향과 가장 가까운 교동도로 피난을 와서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이제는 서해도 연백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은 교동도가 두 번째 고향이 되었다. 바다 저쪽 연안읍이 손짓하듯이 뚜렷하게 보이는 곳이 봉아가미 마을이다. 실향민들은 내 고향이 지금은 어떻게 변하였는지 눈을 감은 채 그리움과 한숨으로 얼룩진 눈물을 삼킨다. 북녘에서 온 수많은 실향민이 있지만 연백군민들처럼 바로 눈앞에 고향을 두고서도 못 가는 망향의 정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더 애절하고 진하다.
연백군뿐만 아니라 개풍, 개성, 옹진 등 지형적으로 교동도와 가까운 지역 출신 실향민들이 이곳으로 건너와서 향수를 달래며 살아가고 있다. 전란 당시 피난민 중에 연백군민들만 해도 5만 명이나 되었다 한다. 현재는 강화읍과 교동도 등지에 4천여 명(후손까지 합쳐서)이 살고 있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각각 생업의 터전을 찾아 전국으로 흩어져서 살지만 고향 생각은 변함없고 항상 통일의 염원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고향의 뿌리를 잊지 못하는 70대 실향민들은 젊은이들의 고향의식이 희미해진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고 한다. 강화읍내와 교동도에는 연안식당, 연백양화점, 연백고무신집, 연백가구점, 백천집 등등 연백군 출신들이 경영하는 것임을 짐작케 하는 간판들이 곳곳에 쉽게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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