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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동문 한용걸 신부의 삶, 채플을 울리다.
-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우선적 선택
- 사회적 약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그들의 요청에 귀 기울이는 환대와 경청
- 세번째로 일상에서 환경을 지키는 삶
한신 청년학도 여러분
저는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을 섬기는 비영리 법인 함께걷는길벗회 이사장이며 성공회 신부입니다.
채플에 초대해 주신 존경하는 총장님과 교목실장님을 비롯하여 묵묵히 한신을 지켜오신 교직원여러분께도 졸업생 동문으로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한신과의 인연
지금부터 사십년전 이 광활한 양산리 벌판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입니다. 82년에 역사철학계열에 입학해서 91년에 철학과로 졸업했어요. 80년대는 워낙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활화산 처럼 불타올랐던 시기라 그속에 휩쓸려 대학생활도, 철학공부도 제대로 못했어요. 아스팔트 강의실에서 청춘을 보냈습니다.
1988년에 고향 춘천으로 낙향했다가 입학한지 십년되는 91년에 졸업장을 받았으니 그다지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제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먹을게 없어 (사실은 돈이 없어) 늘 배가 고팠어요. 검은머리 장발에다 옷차림은 군복을 물들인 검은 작업복만 입고 다녔는데 장발은 멋도 좀 낫지만 멋부릴려고 장발을 한게 아니고 머리를 단정히 깍을 경제적인 여유조차도 없었어요. 그땐 아침을 제대로 먹어보는게 큰 바램 이었는데 어쩌다 학교앞 한신식당서 시레기 된장국밥 한그릇 사먹고 나면 배가 그득하니 종일 흐믓했었죠 . 그날은 부러울게 하나 없었죠. 자취하던 친구들과 인사가 “아침은 먹었니” ? 였어요. 밥은 못먹고 국수나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 했지만 언제나 씩씩했어요. 모든학생이 어려운 자취생활을 한건 아니고 학교앞 자취촌에 저와 몇몇 손꼽히는 개털들이 있었죠.
그래도 학교앞에서 데모가 벌어지면 학우들과 스크럼짜고 양산벌로 달려나갔죠.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학우들의 함성과 자욱했던 최루탄 연기 그리고 돌과 화염병이 날던 학교앞 황구지천변에서 한신 청년학도의 사랑과 우정이 피어났죠. 한신의 청춘들이 밤별처럼 빛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우선적 선택
1) 오늘 제 강연의 요지와 핵심은 아래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우선적 선택.
둘째로 사회적 약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그들의 요청에 귀 기울이는 환대와 경청
세번째로 일상에서 환경을 지키는 삶 입니다.
저는 30년 동안 자폐증상을 가진 발달장애인들과, 오갈데 없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과 법인[함께걷는길벗회]와 공동체[섬김의집]를 설립하고 인천 제물포에서 노숙인과 노인을 위한 [제물포밥집]을 하며 통일 운동을 하는 [인천통일로] 라는 단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것은 한신에서 가난한 철학도로 살았던 시절에 결정지워 졌습니다. 내 청춘의 날 내 시선이 멈춘곳이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었어요.
여름방학때 학교 뒤 농장 가서 농약치는 알바를 하고 나서 돈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친구들 데려다가 자취방에서 카레를 한솥 가득 끓여 주면서 “ 이담에 내꿈은 커다란 가마솥에 카레를 가득끓여 가난한 이들에게 팍팍 퍼주는게 내꿈이 야” ~~~그랬어요, 근데 말대로 됬어요.
한신 철학과 4학년이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끝나고 그해 가을 고향 춘천을 낙향 민주화운동 청년 단체를 만들고 삼년지내다 다시 서울로와서 성공회 사제 양성기관인 사목신학연구원을 마치고 성공회 성 프란시스 수도원에 입회 했어요. 일년후 거기서 나와 인천 동구 수도국산 아래 속칭 똥고개 라는 빈민가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판자집 하나 얻어서 빈민가의 삶을 몸으로 살았습니다.
1994년 빈민가에 들어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우선적 선택’ 이란 화두를 안고 [섬김의 집]을 설립하고 노숙인과 행려병자 알콜중독자 늙고 병든 성매매 여성 등 어찌해 볼수 없던 갈곳없는 이들과 한집에서 살았어요. 서른세살 때였죠.
초창기에 이일로 깊숙이 들어선 계기가 있었어요. 1994년 여름일거에요. 송림동 산동네 꼭대기에 엄청 큰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 담장밑에서 신음하던 40대 초반의 남자를 만났어요. 한쪽다리가 짧은 장애인이셨는데 쓰레기가 가득한 방에 신음하며 누워있었죠. 가정동 인천 세브란스병원으로 데려갔어요. 가슴을 열어보니 고름이 가득했어요. 다시 꿰메고 나서 그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날밤 제 품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돈도 없고 누가 장사치를 사람도 없고 해서 관을 사다가 염을 하고 수의를 입혀 화장을 해서 그분의 아이와 함께 월미도에 뿌렸지요 이십칠년전 얘기에요. 그를 뼈를 바다에 뿌리고 돌아와 그 쓰레기 집을 치우는데 일요일이었나봐요. 담장너머 교회에서는 아름다운 찬송소리가 들렸지요. 괴로웠어요.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더 깊숙이 빠져 들었지요.
1997년에 IMF 구제금융 사태로 회사가 도산하고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칠 때 실업자를 위한 밥집을 시작했어요. 그후 [함께 걷는 길벗회] 라는 비영리법인을 설립하고 장애인 부모교육과 여성 교육을 통해 장애아동 보조교사사업을 했지요. 2001년 전국 처음으로 실험적으로 시행하고 관련 몇몇의 단체와 법적 제도화하는 일을 추진했어요. 현재 초·중·고에 있는 교육 보조원들이 바로 그 제도의 산물이에요. 왜 이런일을 했냐고 자문자답한다면 그 시설들과 그 직업군이 필요했어요. 일전부터 발달장애인들 돌볼 교육센터 설립하고 장애인 무상교육 운동을 했죠. 사실 나는 늘 꿈을 꾸었어요. 사람들은 나를 이상주의자라고 했어요. 그러나 꿈꾸며 사는 것이 내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내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왔어요.
'근데 왜 장애인의 삶에 관심을 가졌는가 ?' 부모님 얘기 에요.
어머니는 일제때 일본군 위안부를 피해 열여섯에 삼팔선 이북 양구로 시집가시고 열여덟에 큰형님을 낳으셨죠. 얼마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4후퇴때 월남하셨어요. 월남하던 길은 어머니 고향 양평으로 가던 길이었죠. 아버지 형제들은 홍천 삼마치고개를 넘어오는데 야밤에 검문하던 미군이 쏜 총을 다리에 맞고 들것에 실려 여주 신륵사 근처 난민수용소로 갔어요. 그곳에서 운좋게 의사를 만나 치료를 받았고 그후 상이자가 되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어요. 그때 임신중이던 어머니는 아버지 총맞은 다리를 치료하며 머무른 난민수용소에서 큰누나를 낳고 먹을것도 부족하여 영양실조로 시각 장애가 왔어요. 그후 어머니는 맹인이 되었어요.
그후 휴전이되자 피란민 수용소서지내다 춘천으로 돌아오셨죠. 장애를 가졌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히 사셔서 우리 다섯자녀들과 사촌형제 둘까지 일곱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어요.
아버지는 성실함과 책임감 그 자체셨지요. 아버지는 신앙인이 아니셨어요. 내 어릴적 아버지가 새 양복에 새 구두를 사신고 처음으로 동네 딋편 운교동 성당 가셨던 날 아버지의 새구두를 누군가 신고간 거에요. 양복에 슬리퍼 신고 돌아오셨죠. 실망한 아버지는 성당을 비롯해 어디도 가지 않으셨어요. 그 일로 아버지는 '예수 믿는 도둑놈들' 이라고 하셨다.
여러 의미가 함축된 말이에요. 이 말씀은 외려 평생 내 마음의 경계가 되는 등불 말씀이 되었어요. 어머니는 이렇게 항상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십자가를 의지하고 살면 부자가 되거나 출세를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살면 가난하다. 옥살이도 하고 급기야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한다” 고 하셨어요. 너는 기왕에 성공회 신부가 되었으니 네 십자가를 지고 가난한 이웃을 섬기라 하셨어요. 어머니는 팔십세까지 [섬김의 집]에서 사시며 평생 약자들을 보살피고 [섬김의 집] 가족을 돌보시다 여든 둘에 하늘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반전이 있으신 분이세요.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으로 평생을 사셨지만 바른판단과 자립을 강조하셔서 타인에게 조금도 신세 지지 않는 정갈한 분이셨죠. 항상 호탕하게 큰소리로 웃으셨지요. 또 춤을 잘추셔서 도로또. 지루박. 차차차. 춤 형식의 경계를 넘어 모든 춤을 잘 추셨어요. 우리집 마루서 쌍나팔 전축 틀어놓고 동네 어머니들끼리 추셨지만 언젠가 동네 어머니들과 천일관으로 춤솜씨 확인 받으러 원정 나가신적도 있으세요. 그날 이후 아버지들이 춤추는 어머니들 경계를 늦추지 않으셨단 후일담 입니다.
그렇듯 어머니의 존재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세상사에 막힘이 없고 작은 이해관계에 걸림없이 인생을 큰 산, 넓은 바다처럼 사셨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장애인이셨다는 빛과 그늘이 나를 이길로 가게한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2020년 코로나 19로 급식소 [제물포 밥집]시작
사실 밥집 무료 급식소 운영은 처음이 아니에요. IMF 시절 국가가 부도나서 실업자들이 거리를 헤멜때였어요. [섬김의 집]에서 우리밀 국수를 삶아 공원으로 가져가서 모여있던 실업자들에게 나눠 드렸어요. 구제금융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분들에게 뭔가 작으나마 힘이 되고 싶었어요. 그후 김대중 정부 마지막 시기에 IMF 구제금융이 끝나고 7년간 했던 밥집도 문을 닫았어요.
다시 무료밥집을 열게 된 것은 2020년 늦여름 입니다.
코로나19 발생후 홀몸 노인과 노숙인들이 의지하던 무료급식소도 문을 닫았지요. 그 때문에 조손가정의 어린이들, 노숙인과 홀몸 노인들이 굶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제물포 밥집]을 시작하게 됐어요. 처음엔 [섬김의집] 주방서 주먹밥을 만들어 거리에 나서 전철역 주변 노숙인들께 전했어요. 몇 달 하다가 1호선 제물포역 근처에 '제물포밥집'을 열고, 본격적으로 밥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두 세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시작했는데 지금껏 모두 3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삼년째 이끌고 나갑니다.
나눔 방식은 무제한-테이크아웃(Take-out)'입니다.
한 사람이 식사하면 20분 정도 걸리지만, 먹을 거리를 미리 준비했다가 에코백에 나눠드리면 한사람당 1분이면 되요. 훨씬 많은 이들에게 나눌수 있죠. 하루 3시간 동안 손님들이 원하는 만큼 도시락과 간식과 마스크와 마실거리 등을 나눠드립니다. 홀몸 노인들, 손주들과 사시는 어르신들 계시고, 전철역 주변 벌집과 노숙인들이 주로 이용하세요. 우리 밥집의 나눔방식은 천편일률적인 배급이 아니라, 받는이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방식입니다. 그릇이 수가 많든 양이 크든 그분들이 원하는 만큼 다 나누려고 합니다. 받는 이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거지요. 당신들이 필요한 만큼 그릇을 가져오시는 거예요. 금·토·일 3일 동안 가득 받아 가면 일주일 식사가 해결돼요. 대부분 멀리서 전철 타고 오시는 분들이신데, 딸랑 도시락 하나만 드릴 수는 없잖아요. 밥 잡숫지 못하고 오신분들 밥을 드시고 싸가지고 가지요.
쌀은 한달 1톤 정도 들어요. 밥집에 쌀이 바닥나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어요. 쌀이 떨어질 만하면 다시 채워주십니다. 지난 달에 쌀이 떨어졌는데 착한 이웃들이 4톤의 쌀을 보내 주셨지요. 우리는 그쌀을 창고에 쌓아두지 않고 지역 공동체안에 필요한 이들에게 나눴지요. 곳간에 쌓아두지 않고 나눠드리면 나눔의 기적이 일어나죠.
사람만이 사과 한알도 쪼개어 나눠 먹을 줄 압니다. 주는 사람 받는 사람 구분도 없어야 해요. 보낸 사람들이 '밥집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겠다'고 해요. 보통 받은 사람이 고마우니까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후원자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겠대요. 그런데 하느님의 셈법은 이게 맞아요.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도구가 되고 의지처가 되는 거죠 .
사랑하고 베풀면 기뻐요. 그런데 사랑하고 베푼다면서 바라는게 있으면 괴로움이 생겨요. 보상심리를 내려 놓아야하는데 한 마음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댓가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봉사하시는 분들도 후원하시는 분들도 내 좋아 하는일 이니 후원도 봉사도 덕이 되려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즉 덕을 베풀고 되돌려 받으려는 마음이 없어야 진짜에요. 하늘나라의 기쁜 잔치에 참여하는 일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에요. 천국 식탁에 초대받은 이는 거지 나자로 였잖아요. 부자들은 천국가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 뚫기보다 어려워요. 부자 젊은이가 예수께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으니 예수께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셨지만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을 내려놓치 못한채 슬픈 얼굴로 돌아갔잖아요.
봉사자들은 손님을 섬기고, 후원자도 봉사자를 섬기고 밥집 손님은 봉사자들과 후원자들에게 마음을 나눠주고 섬기는 이와 섬김 받는 이가 둘이 아니에요, 서로 섬기면 그게 평등이고 사랑이며 존중이에요. 모두 다 같은 입장에서 만나 자신과 이웃을 위해 봉사합니다. 누구도 봉사에 대해 어떤 댓가를 주거나 받지 않아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큰 댓가가 주어져요. 봉사의 댓가인 보물을 발견해도 좋고 못 찾아도 그만입니다. 다만 조건을 달지 않고 댓가를 바라지 않고 봉사한다면 더 큰걸 얻을 수 있지요.
환경을 지키는 삶, 지구적 환경시민에 대하여
매주 1천2백 여명에게 도시락 나눔을 하니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가 쓰레기 산을 이뤄요. 쓰레기가 산처럼 쌓이는걸 보며 환경 공해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죠. 고민 끝에 SNS를 통해 '집에서 쓰지 않는 식품 보관 용기나 텀블러, 에코백 등을 제물포 밥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죠.
전국에서 응답이 왔고 덕분에 쓰레기 발생 안되는 급식을 나눠줄 수 있게 됐지요. 밥집 손님들도 처음에는 씻어오고 가져오는게 불편했다지만 지금은 깨끗이 씻어온 다회용 용기와 텀블러를 내밀면서 "쓰레기도 줄고, 내가 먹은 건 내가 씻고 관리하니 뿌듯하다“ 고 해요.
부가적인 효과로 의류·신발, 방한용품 지원도 함께와서 인천, 서울역, 영등포 벌집 용산역 등 노숙인과 빈민가에 많은 양을 지원할수 있게 되었죠. 자원 재활용하고 서로 온정을 나누고 환경 보호, 자원 순환 쓰레기 제로 운동으로 연결되요.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환경을 생각한 밥집의 작은 변화가 지구를 지키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칠 거에요.
[성장]이란 유혹에 대하여
이 일을 하면서 돈도 있어야 하고 조직도 커야 한다는 [성장]이란 유혹이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한번에 정리 할 수는 없지만 제 마음속 안에서 의도적으로 [성장]에 대한 경계를 했습니다. 삶이 나락에 빠진 이들의 불행을 팔아서 나눔을 크게 하려는 욕심에 대하여 의도치 않게 우러나오는 마음의 경계였어요.
한마디로 조직이 커지는 것, 재산을 많이 가지려는 것, 영향력을 확대 하려는 것에 대한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한번 넘어간다고 끝나는게 아니라 평생 따라 다닙니다.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는 욕구는 인간의 본질상 당연한 거지만 반면에 내안에 숨어있는 악마가 노리는 꼼수에요. 내가 뭔가 큰일을 해야 하고, 대단한 일을 할수 있다는 만용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뭔가 보여주겠다는 건 내안에 웅크린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가르치신 것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 이었습니다. 그 연민은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길... 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축복과는 거리가 먼 고난의 길이었죠. 가난한 이들과 중증의 장애를 가진 이들과 저의 서른해 동안의 삶은 엎어지고 자빠지고 부끄럽고 안타깝고 충만했고 가슴시린 갈짓자 여정 이었습니다.
밥집 오시는 손님들, 머리로 가난을 이해하기 보다는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겪는 살아있는 관계를 맺고자 했어요. "가난한 이들과 입장의 동일함"이 나와 저 분들과 '만남의 이유' 라고 믿어요. 어찌해 볼수없는 중증의 장애인들과 삼십년 한지붕 아래 어울려 살았습니다. 신심이 높아 그런것도 아니고 인간애의 위대한 헌신과 남다른 봉사정신으로 이렇게 산것도 아닙니다. 늘 도마처럼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울고 웃는 사제이며 그리 사는 것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아닌가 해요,
강연을 마치면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이렀습니다. 저는 가난한이들을 향해 나의 삶을 나눔으로서 인생의 행복을 찾고자 했습니다. 청년 학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수 있는 길벗이 되길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비를 맞아주는 벗들이 된다면 여러분의 삶은 의미있을 것입니다. 후배님들과 그 길에서 자주 만나서 많이 웃고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한신이란 공동체를 이뤄가는 모든 구성원들 위에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