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서일지(2024.07.04~07.25)*
<7월 19일 금요일>
소설이 가진 힘
소와 경쟁하는 개구리와 같아서
이제 자네, 배가 터질 것이네
-나쓰메 소세키, <그 후>
1
우리 곁의 소녀들
썸머는 이제 아홉 살의 어린 소녀다. 이야기를 주로 이끌어가는 나는 썸머의 언니로 열여섯 살이다. 나는 동생을 아주 사랑한다. 오래 전 아이 적의 작은 손을 잡으며 ‘이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고 결심을 했을 정도로 동생 썸머를 사랑한다.
이 집의 문제는 아빠와 엄마가 조금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어 아이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사 술을 좋아하는 아빠는 주변의 가상화폐 사기에 넘어가 곧 아파트를 팔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이고, 엄마는 시쓰기에 푹 빠진 채 감상에서 좀체 헤어 나오질 못한다.
동생 썸머는 잘 모르지만 나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위기에 봉착했음을 학교나 뉴스 등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동생이 애처롭다. 썸머는 학교에서 가르쳐줬다며 ‘탄소 발자국’이라든가 ‘음식물 폐기처리’ 등에 대해서 기민하게 반응하며 실천하는 모습이 집안 일로 걱정이 많아져 소극적인 나보다 낫다. 그런 나를 동생은 불안한 듯 관찰하기도 한다. 나는 부모님을 비롯해 모든 어른들이 믿음직스럽지 않다. 미래는 정상적으로 다가올지…….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도 그렇지만 이 작품 속에서도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들의 소녀는 살아가는 일에 벌써 어른 못지않게 관심이 많다. 어쩌면 그건 소녀다운 호기심에서 시작됐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작품 속에서건 현실에서건 마음이 아파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 어른들은 이런 전 지구적인 기후 위기의 징후들에 봉착해서 제대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해결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인가.
불안하고 두렵기는 어른인 나도 매한가지다.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내가 지구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어른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나마 전 지구적으로 인식은 같이 한다는 데서 불안을 덜기는 하겠지만, 썸머와 같은 주변의 어린 소녀들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표정을 바라볼 때마다 안쓰러운 표정이 아니기를 빌 뿐이다.
이건 소설이 가진 힘이다!
<썸머의 마술과학>, 최진영,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중에서
2
음미할만한 지식
-기독교는 ‘신 자신이 이 땅으로 내려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신 씻었다는 가르침’을 통해 차별 없는 구원의 길을 열었다. 종래의 철학이 ‘정신의 귀족주의’였다면 기독교의 가르침은 ‘복음의 평민주의’였다고 난바라는 말한다. 이 기독교에서 모든 기존의 가치가 전복됐다. ‘이제까지 스스로 현명하다고 했던 자가 현명하지 못한 자가 되고, 가치 없는 자가 가치 있는 자가 되는 세계’를 열어 보인 것이다. 기독교는 무력하고 소외된 자들이 모인 ‘사랑의 공동체’였다.
(고명섭, 《생각의 요새》, <국가와 종교의 불행한 만남 : 「국가와 종교」 - 난바라 시게루>중에서)
-한반도 근현대사상사의 흥미로운 점은 동학이 보여준 대로 종교가 변혁 사상 형성에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는 사실이다. 서구의 근대 사상이 기독교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세속화 운동 속에서 성장한 것과 달리, 한반도에선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여 민족종교가 발흥한 것이 이런 차이를 빚었을 것이다.
(고명섭, 《생각의 요새》, <척사파와 개화파 사이 개벽사상가들 : 「개벽의 사상사」 - 백영서 외>중에서)
-마루야마는 후쿠자와가 남긴 가장 큰 족적을 “모든 형태의 ‘혹닉’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짧은 문장으로 설명하는데, 후쿠자와의 전용어라 할 ‘혹닉’이라는 말 속에 일본 정신의 미성숙과 전근대성이 요약돼 있다고 본다. 이 혹닉 상태에서 거들먹거리는 일본의 미래를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그 후》에서 “소와 경쟁하는 개구리와 같아서 이제 자네, 배가 터질 것이네”라는 말로 예고했다.
(고명섭, 《생각의 요새》, <마루야마 사상의 건축 현장 : 「전중과 전후 사이 1936~1957」 - 마루야마 마사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