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은혜
고전15:50-54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를 제거하면 그 위의 구조는 완전히 몰락합니다.
그들이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복음뿐입니다(2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하지 않으면 그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신성한 종교의 구원에 대한 진리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마음속에 확고히 간직해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계속 고수하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단지 일시적인 믿음이 되고 맙니다. 만일 우리가 부활을 부인하면 예수를 믿는 믿음의 고백도 헛것이 됩니다.
기독교를 믿는 믿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이 부활의 도를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진리를 확립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서 잠든 자들의 첫 열매로서 자신을 일으키셨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안에 잠든 그들도 부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이것이 진리를 확증하는데 사용한 바울의 첫 번째 논지입니다. 그리고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을 병행하여 설명합니다.
죽은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죽고 부활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공로를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은 것같이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 것이란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첫 열매로 부활하셨으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23절) 는 그와 함께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할 모든 사람은 예수의 공로로 부활하게 되며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구원이 들어온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에는 질서가 있음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 순서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는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첫 번째 열매들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모든 성도들이 다 죽을 것이 아니며 또한 모두 변화하리라고 말합니다.
썩어질 것으로부터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52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신자들도 반드시 죽은 자들과 같이 변화를 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 거룩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51절)
‘혈과 육’과 ‘하나님의 나라’, ‘썩은 것’과 ‘썩지 아니한 것’은 대립되는 두 개의 개념입니다. 전자는 불완전한 것이요, 죄 아래 있는 것이며, 인간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자는 완전한 것이요, 거룩한 것이며, 인간을 복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자와 후자는 양립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전자는 유한하며 스스로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전자가 죽어서 썩어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할 때에만이 그것이 가능케 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재림 때까지 살아 혈육을 입고 있는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바울은 설명했습니다.
‘비밀’이란 감춰진 하나님의 계획으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드러내신 계시, 곧 장차 일어날 신비로운 섭리를 지칭합니다(마 13:11; 롬 11:25; 고전 2:7; 4:1).
성도의 부활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잠 잘 것이요’는 성도가 육체적 죽음 상태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풀이하면 ‘다 죽을 것이 아니요’라는 의미가 됩니다.
부활에 관한 하나의 비밀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일으켜 새 몸을 입히실 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나팔’은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소리로 최후의 순간이 왔음을 선포로 이와 동시에 성도의 부활은 깜짝할 사이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짧은 시간 사이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둘째 : 영생을 얻습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52절)
나팔소리가 나면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육체가 변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몸은 썩을 육체입니다. 우리 육체는 죽게 되어있고 죽으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행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인류의 가장 큰 적은 죽음입니다. 인류 역사상 죽음을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피라밋을 세운 이집트의 왕들도, 불로초를 구하고 만리장성을 쌓던 진시황도, 세계를 재패하던 알렉산더 대왕도, 스탈린도 모택동도 김일성도 죽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인류의 존경을 받는 성현들도 죽었고, 위대한 예술가들도 죽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다 평등합니다. 인간이 DNA의 비밀을 풀었다고 자랑하지만 죽음을 이긴 자는 없습니다.
아담 이후로 죽음을 스스로 이긴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으십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하나님의 은혜도 죽음 자체를 맛보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장사되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 뿐 아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6) 하셨습니다.
이미 죽은 성도들의 육체는 땅에서 썩고 그 영혼은 하나님 앞에 천사들과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부 부활체로 변하게 됩니다.
부활을 논리적인 순서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논리적인 순서를 언급한 것일 뿐, 성도의 부활은 사실상 한 순간에 일어나기 때문에(51절) 시간적인 순서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셋째 : 의인으로 영광이 있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절)
‘썩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거의 같은 의미이나 전자는 육신의 죽음을, 후자는 전인격적인 죽음을 나타낸다는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라는 표현은 성도가 부활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성도의 부활은 불가항력적이고 필연적임을 의미합니다.
한편 본문은 42, 43절의 내용을 다시 언급한 것인데, 42, 43절에서는 부활을 ‘다시 사는 것’으로 표현한 반면 여기서는 ‘입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입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옷을 입는다는 의미로, 부활하는 성도는 헌 옷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옛 몸을 벗어 버리고 새 몸으로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썩음’이나 ‘죽음’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발생 되는 결과입니다.
그리고 죄의 지배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멸망하는 것을 성경은 상징적으로 ‘사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자기 백성을 썩을 것에서 썩지 않는 것으로, 죽을 것에서 죽지 않는 것으로 만드셨으니 사망은 결국 그 효력을 상실하며 멸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망의 멸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되어 모든 성도들의 부활로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