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눅 24장 13-23,29-32절
설교제목 : 눈을 열어 보기
의심하는 도마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봄날의 화사함을 시샘하기라도 하듯 미세먼지가 우리의 시야를 가렸습니다. 흐릿함 속에서 마음의 맑음으로 넉넉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의 그림은 종교화를 주로 그렸던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의 거장인 카라바조Caravaggio의 “성 도마의 의심”(The Incredulity of Sainy Thomas, 1602)입니다. 그는 강렬한 명암(새로운 명암법, chiaroscuro)은 빛과 그림자, 선과 악, 삶과 죽음이라는 대극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던 화가였습니다. 인물의 세세한 표정까지 그려내는 극적인 사실주의적 묘사가 두드러진 장면입니다. 도마의 이마는 많은 주름이 잡혀 있고, 예수의 상처 난 가슴을 의심어린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왼편에 있는 예수는 도마의 손목을 붙잡고 도마를 이끌어서 예수님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만지게 합니다. 실제 성서에는 이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카라바조는 도마가 회의와 의심을 넘어 상처난 예수의 가슴과 접촉하게 하려는 듯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황하며 마음의 의심을 품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눅 24:39)”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간파한 듯합니다.
“나를 만져 보아라!” 만짐으로써 의심과 두려움은 신뢰와 희망으로 변합니다. 신앙은 체험으로써만 품을 수 있는 신비입니다. 어떤 지적인 작업과 이해, 혹은 설득만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접촉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의심하는 도마의 손을 붙잡아 가슴에 상처에 접속하게 하시듯, 때로 우리의 손을 붙잡아 그분의 상처난 가슴을 만지게 하십니다. 부활절 이후 의심과 두려움을 넘어서 주님을 만지는 경험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 두려움과 실망, 의심이 희망과 신뢰로 변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은 빈 무덤에서 흰옷 입은 천사로부터 부활 소식을 듣고 놀라며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사도들은 여인의 말을 어처구니없는 말로 치부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에서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며 그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얼마나 부활의 사건이 당혹스럽고 믿기 힘든 것임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사도들 중 익명의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를 향해 가는 있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길을 가면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예루살렘에 있었던 소란스런 사건을 전하듯, 예수가 어떤 분이었고, 그들이 품고 있었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합니다.
“... 그(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이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18b). ...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21a).”
당시 유대인들이 바로 보던 예수는 별볼일 없고 천한 변방의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예수는 주류사회와 기득권계층을 흔들고, 대중들을 떠들썩하게 한 괴짜같은, 눈에 가시같은 예언자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행동과 말씀에 있어서 힘 있는 예언자로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의 부정부패를 청결하고, 로마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킬 분으로 여기며 그분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예루살렘에서 이루고자 하는 혁명과 자유, 평화와 이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하며 고향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의 길은 일종의 퇴행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진하며 행동하던 그들의 삶과 에너지가 후퇴하여 다시 고향집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는 헬라어로 ‘엠마우스’인데, 히브리어로 ‘옘’(온천, 따뜻한 봄)입니다. ‘옘’은 ‘욤’(낮, 날, 일평생, 생일, 영원히)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엠마오는 ‘따뜻한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따뜻한 샘의 여정으로 후퇴하여 삶을 다시 회복하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의에 빠져 퇴행하는 듯 보이는 온천으로 향하는 길은 다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여정입니다. 겉보기에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퇴보하여 뒷걸음치는 듯한 우울과 방향상실, 무기력에 빠지는 일도 때로는 전진을 위한 후퇴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열린 눈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한 예수님이 나타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며 함께 걸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에 따르면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눈이 가려졌다는 말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떠 있지만 예수님을 알아챌 수 있는 내적 시각을 갖지 못한 상태입니다. ‘눈 뜬 장님’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눈이 있지만 볼 수 없는 상태는 의식적으로 사물을 포착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사물을 흘려보낼 때 나타납니다. 또한 투사가 일어날 때 전형적으로 발생합니다. 사람이 투사가 일어나면 무의식적으로 신비적 참여상태가 일어나고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입니다. 투사가 발생하면,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려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보고자 하고, 내가 기대하는 것을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대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의식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융의 말을 빌어, 변형된 가치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수반되는 일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변환된 가치를 포착하는 것은 열린 눈이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마음의 뜨거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쉽게 그것을 수긍하고 알아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눈을 열어놓을 수 있었던 동인을 발견합니다. 엠마오에 거의 도착했을 때 예수는 더 멀리 가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며(강권하여, 개역개정) “저녁 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29)”하면서 그 둘은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음식을 내어주어 함께 식사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여러분,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며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려하는 적극적인 마음이 바로 눈이 뜨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낯선 자를 밤에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함께 빵을 나누려는 환대의 마음에서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과 충동, 이기심은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눈을 멀게 합니다. 그러나 함께 하려는 마음, 낯선 것을 환대할 수 있는 마음에서 우리는 진정한 부활한 주님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집니다.
눈이 떠질 때 비로소 길을 걸어오는 도중에 들려주신 그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개역개정)”
특별한 만남에는 이런 뜨거운 감동, 따뜻함이 있습니다. 참된 진리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우리에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만남과 가슴 설레게 하는 말씀 속에 주님의 현존이 드러날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부활절 이후에 우리에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만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눈이 떠지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차린 후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33a)”
엠마오로 가는 그 둘은 왜 예루살렘으로 갈까요? 복음서마다 복음서 기자가 집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다르고 독자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기 다른 목소리와 풍경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가리킬 때도 사도라고 지칭합니다.
예루살렘의 뜻은 ‘예루’와 ‘살렘’의 합성어로, 예는 ‘터’, ‘기초’ 또는 ‘기초를 둠’이라 의미이고, 살렘은 ‘평화’, ‘평강’인 ‘샬롬shalom’의 동일한 어근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 ‘평강의 기초’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평화의 터를 온전히 세울 있는 곳을 향하여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기독교인과 교회의 사명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도성, 평화의 터를 세우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위헤서 대극의 갈등 속에 인간과 하나님, 하늘과 땅, 의식와 무의식 간에 평화를 세운 위대한 사명입니다.
지난 주 꿈에서 나는 은퇴한 원로 목사님과 영상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선교사들이 세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실 장소의 한 귀퉁이에 책상을 놓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곳에서 일어게 되셨는지 질문하는데 무언가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교의 역사에서 선교사들은 부정적으로 토착문화를 파괴하고 잔인하게 압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긍정적으로 학교와 병원을 세워서 평등과 생명을 지킬 수 있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 꿈은 교회의 미션과 저의 미션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하는 꿈이었습니다. 교회의 선교와 저의 선교는 바로 평화를 이루어내는 일일 것입니다. 샬롬의 땅, 예루살렘을 일구어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선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상징적으로 평화를 위한 길이자 평화의 터를 재건하는 여정이었습니다. 부활절 이후 평화의 터를 다시 세우는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나 자신과 내 안의 무의식적인 요소롸 평화를 일구어 내고, 외부세계에서도 평화의 터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여정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