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오늘은 말레이 반도의 서해안에 있는 - 지금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 이 말래카를 떠나서 동해안의 해변도시 메르싱까지 간 뒤 티오만 섬으로 가는 배를 타야한다. 그러니까 오늘은 하루 종일 이동해야 하는 날인 것이다. 장거리 이동을 하는 날은 힘이 든다.
6시에 배낭을 꾸렸다. 말레이지아는 우리나라와 한시간의 시차를 두는 나라이다. 그러니까 여기 6시는 아직도 컴컴하다. 7시가 되어야 날이 새는 것이다. 배낭을 싸고 난 뒤에는 방을 깨끗이 정리해 둔다. 나는 이런 것을 철저히 지키는 편이다. 같이 자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구를 하므로 어떤 분들은 힘들어 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것을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쫌생이다. 하지만 내 견해는 확고해서 내가 배낭을 매고 다니는 이상은 어지간하면 실천할 생각이다. 일종의 한국인 이미지 관리인 셈이다.
6시 50분 경이 되어 우리가 배낭을 매고 나올때에는 아직 게스트 하우스 주인도 일어나지 않은 시각이다. 다른 쪽 출구를 사용하여 매낭을 매고 나오니 거리엔 사람들이 조금씩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17번 버스를 타기 위해 거리로 나왔는데 차들이 인정사정없이 달린다. 인적이 뜸한 시간이어서 그런지 차들이 기를 쓰고 속도를 올리는 것이다. 도로에 신호등도 없고 횡단보도가 없으니 길 건너기가 난감하다. 목숨걸고 길을 건너야 했다.
어이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길을 건너고 보니 반대편 버스 정류장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메르데카 대로를 따라가서 버스 정류장을 찾으란다. 이런....... 8시에 메르싱으로 가는 버스가 있으므로 그전에는 반드시 장거리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가야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여기 도로가 일방통행이란 사실을 깜박하고 버스 정류장을 찾아 헤매다가 달려오는 17번 버스를 발견하고는 정신없이 달려가서 버스에 올랐다.
12킬로그램이나 나가는 큰배낭을 뒤에 매고 다시 작은 배낭을 앞에 매고 달려야 했던 가련한 내 팔자여! 우리 팔자여! 버스에 올라타고 보니 학생들만 소복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학교에 가는 모양이다.
그래도 얘들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아이들보다는 늦게 나서지 싶다. 학교 앞 음식점에는 아침을 해결하려는 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온 동네 골목을 다 누비고 다니더니 비로소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게 아닌가? 아이구머니나, 일났다. 일났어.....
이제 돌아서서 원래 왔던 길로 다시 나가면 터미널에는 언제가는가 말이다. 우리의 속타는 심정을 알리없는 기사는 느긋하기만 하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얼마나 잘 가는지 모른다. 8시차를 놓치면 터미널에서 몇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고 메르싱까지 간다고 해도 이번에는 배시간을 맟출 수 있을지가 의문스럽다.
티오만 섬은 육지에서 5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섬이다. 그러니 두시간은 걸려야 된다고 봐야한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우리가 가려고 하는 해변은 끝에서 두번째 해변이니 온갖 해변을 다 거쳐가면 목적지에는캄캄한 밤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큰일이다. 이러니 내 속이 다 타는데....... 드디어 터미널 건물이 보였다. 7시 57분이다. 이제 3분이 남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58분이다. 2분 남았다. 그냥 배낭을 매고 냅다 뛰었다.
여긴 시내버스 터미널이니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옆 건물까지의 거리는 약 50미터라지만 밖에서 밖으로 뛰는게 아니고 실내를 뛰어서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버스표도 사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영어가 안통한다. 우와, 정말 속이 다 탄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매표구가 안보인다. 여기 표파는 시스템은 저번에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여기저기 해매다가 간신히 매표구를 찾아가니 8시 1분이다. 그냥 외친다.
"메르싱!"
표파는 아줌마가 시계를 힐끗 보더니 한마디 한다.
"슬로우, 슬로우.... 캄 다운(진정하시고.....)......"
그러더니 이 아줌마가 휴대전화를 꺼낸다. 그렇지! 아마 막 출발하려는(아니면 출발했을지도 모르는) 버스 기사에게 전화를 하리라. '야폰니즈'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 다섯명이 있는데 태우고 갈것이냐고 묻는 것 같다. 그래, 이때는 일본인 행세나 하자 싶다. 우리가 다섯명인데 빈 좌석이 있을지가 문제다. 한참 통화를 하더니 표를 끊어준다. 살았다. 나가 보란다.
"아줌마, 고마워요!"
감사 인사를 뭐처럼 날리고 승강구로 뛰어갔더니 기사가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짐칸에 배낭을 던져놓고 버스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다 쳐다본다. 이러땐 한마디 해주어야 한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시계를 보니 8시 5분이다. 우리가 누구냐? 하는 일이 모두 다 기막히게 잘 풀리고 잘되는 환상의 여행팀이 아니더냐?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어휴, 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이제 버스는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쪽으로 달리다가 나중에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리라. 창가로는 짙은 밀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나라도 이젠 고속도로가 군데군데 만들어져 있다. 버스 차체가 크고 좋은데다가 도로 사정까지 좋으니 여행 자체가 편안한 것이다. 조금 있으려니까 기사가 DVD를 틀어준다.
그런데 말이다. 모니터는 LG인데 영화는 장동건이 악당으로 등장하고 이정재가 수사관으로 등장하는 한국 영화 <태풍>이 아니던가? 자막은 영어와 말레이지아어로 깔린다.
우와! 이 통쾌무비!! 이럴 수가 다 있는가 싶다. 그렇다. 경제력과 군사력은 강해야 하고 문화는 고급이 되어야 한다. 갑자기 말레이지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영화에 빠져 들어가는 말레이지아 사람은 더욱 더 사랑스러워 보였고....... 백인 아이들도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버스는 줄기차게 달린다.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지만 그냥 줄기차게 달렸다. 중간에 쉬는 것도 잘 없이 마구 나가기만 했다.
생산직원 구한다는 광고가 나타났다. 그래, 우리도 한때 저런 시절이 있었지..... 아직 일류 국가도 아닌데 이제는 모두 다 고급이 되어서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일은 아무도 안하려고 하는 시대가 되었지.
대학을 졸업하면 마구 취직이 되던 시대가 있었지. 관리직원을 수천명 단위로 모집하던 거짓말 같은 시대가 있었지. 신입사원 0000명 모집! 이런 광고가 신문 지면을 화려하게 메우던 거짓말 같은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이 나라는 에어컨에 대해 강력한 원한이 있는게 틀림없다. 왜 그렇게 세게 틀어 제끼는지 모르겠다. 소름이 좌악 좌악 돋는다. 나를 따라 같이 여행해보기 위해 4년간이나 기다려온 경주 청년은 너무 괴로워 하더니 결국은 버스가 잠시 멈추는 틈을 타서 짐칸에 넣어둔 자기 배낭에서 겉옷을 가져와서는 덧입고 버틴다.
저렇게 약한 청년이 아닌데.... 이때 이 청년은 배탈 설사로 인해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얼마나 고생했을까를 생각하니 미안하기 그지 없다. 내가 참 어리석은 인간이란 생각이 들어서 이직도 너무 미안하기만 하다.
버스 안에는 모기도 날아다니고 심지어는 개미떼들이 창틀을 따라 대 이동을 하기도 했다. 잘못하면 모기와 개미의 습격을 받겠다싶어 나는 결국 중간에 버스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가야 했다.
그런 고생을 해가며 메르싱에 도착했다. 12시 10분이다. 차를 세우고 나서 운전기사가 한마디 한다.
"메르싱입니다. 티오만 가는 분들은 여기서 내리세요."
아니? 터미널까지 안들어가고 왜 여기서 차를 세우고 난리란 말인가? 론리 플래닛에 보면 주의 사항으로 이런 일이 메르싱에서는 일어날 것이니 내리지 말고 터미널까지 가라고 되어 있던데..... 이럴때 황당해진다. 왜냐고? 같이 타고 있던 백인아이들도 우르르 내렸기 때문이다.
걔들은 우리보다 정보가 밝은 아이들인데 와아 내려버리니 내가 혼란스럽다. 할수없이 나도 따라 내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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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오늘은 말레이 반도의 서해안에 있는 - 지금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 이 말래카를 떠나서 동해안의 해변도시 메르싱까지 간 뒤 티오만 섬으로 가는 배를 타야한다. 그러니까 오늘은 하루 종일 이동해야 하는 날인 것이다. 장거리 이동을 하는 날은 힘이 든다.
6시에 배낭을 꾸렸다. 말레이지아는 우리나라와 한시간의 시차를 두는 나라이다. 그러니까 여기 6시는 아직도 컴컴하다. 7시가 되어야 날이 새는 것이다. 배낭을 싸고 난 뒤에는 방을 깨끗이 정리해 둔다. 나는 이런 것을 철저히 지키는 편이다. 같이 자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구를 하므로 어떤 분들은 힘들어 하기도 한다.
이제 돌아서서 원래 왔던 길로 다시 나가면 터미널에는 언제가는가 말이다. 우리의 속타는 심정을 알리없는 기사는 느긋하기만 하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얼마나 잘 가는지 모른다. 8시차를 놓치면 터미널에서 몇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고 메르싱까지 간다고 해도 이번에는 배시간을 맟출 수 있을지가 의문스럽다. 티오만 섬은 육지에서 5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섬이다. 그러니 두시간은 걸려야 된다고 봐야한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우리가 가려고 하는 해변은 끝에서 두번째 해변이니 온갖 해변을 다 거쳐가면 목적지에는캄캄한 밤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고생을 해가며 메르싱에 도착했다. 12시 10분이다. 차를 세우고 나서 운전기사가 한마디 한다. "메르싱입니다. 티오만 가는 분들은 여기서 내리세요." 아니? 터미널까지 안들어가고 왜 여기서 차를 세우고 난리란 말인가? 론리 플래닛에 보면 주의 사항으로 이런 일이 메르싱에서는 일어날 것이니 내리지 말고 터미널까지 가라고 되어 있던데..... 이럴때 황당해진다. 왜냐고? 같이 타고 있던 백인아이들도 우르르 내렸기 때문이다. 걔들은 우리보다 정보가 밝은 아이들인데 와아 내려버리니 내가 혼란스럽다. 할수없이 나도 따라 내렸는데.....
그런데 말이다. 모니터는 LG인데 영화는 장동건이 악당으로 등장하고 이정재가 수사관으로 등장하는 한국 영화 <태풍>이 아니던가? 자막은 영어와 말레이지아어로 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