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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13. 體系第十三
청운 추천 0 조회 105 16.09.07 16: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體系第十三


【해제】

강유위는 자연계 산천의 형태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달아나고 가파르며, 맑고 질탕하며 각각 형상이 같지 않고, 사람 또한 민족에 따라 각기 다르고 면목도 같지 않으며, 서체 또한 이와 같아 각각 근원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질로 말하면, 이것들은 오히려 또한 일치한다.  여기에서 강유위는 해서의 여러 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가지를 나누어 근본을 살펴보고, 원류에 따라 자세하게 체계를 나열하였다.


【원문】

傳曰, 人心不同如其面然, 山川之形亦有然. 余嘗北出長城而臨大塞, 東泛滄海而觀之?(1), 西窺鄂漢, 南攬吳越, 所見名山洞壑, ?(2)??無一同者, 而雄奇秀美, 逋?淡宕之姿雖不同, 各有其類. 南洋島族, ?泰西亞非利加之人, 碧睛墨面, 狀大詭異, 與中土人?殊, 而骨相?瑋(3)精緊, ?奇肥厚仍相同. 夫書則亦有然. 


【해석】

『춘추좌씨전』에 이르기를 “사람의 마음이 서로 다른 것은 그 얼굴이 그러한 것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산천의 형태 또한 그러함이 있다.  내가 일찍이 북쪽으로 만리장성을 나와 큰 요새에 임하였고, 동쪽으로 푸른 바다에 배를 띠우고 지부를 보았으며, 서쪽으로 악ㆍ한나라를 엿보았고, 남쪽으로 오ㆍ월나라를 보았다.  본 바의 명산과 골짜기는 높고 험준하며 심원하여, 하나도 같은 것이 없으나 웅장하고 기이하며,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달아나고 가파르면서 맑으며 질탕한 자태가 비록 같지 않으나 각각 유형이 있었다.  남양도의 민족 및 서양ㆍ아프리카 사람들은 푸른 눈동자와 검은 얼굴로 형상은 크고 기이하며, 중국 사람과 매우 달랐다.  그러나 골상이 기이하고 뛰어나면서 정묘하고 단단하며, 맑고 기이하면서 살지며 두터움은 여전히 서로 같다.  대저 글씨 또한 그러함이 있다.


【주석】

(1) 之?(지부) : 이를 또한 ‘지부(芝?)’라고도 하는데, 산동성 복산현(福山縣)에서 동북쪽으로 35리 떨어진 곳에 있다.  『사기ㆍ진시황본기(史記ㆍ秦始皇本紀)』에서 “진시황 28년에 지부에 올라가 돌을 세웠다[二十八年, 登之?立石].”라고 하였다.

(2) ?(금희) : ‘금(?)’은 산이 높고 험준한 모양이고, ‘희()’는 ‘희(?)’와 같으니, 산이 험한 것으로 『정자통(正字通)』에 보인다.  『문선ㆍ장형ㆍ남도부(文選ㆍ張衡ㆍ南都賦)』의 이선(李善) 주에서 ‘금희(??)’는 산이 서로 대하여 위험한 모양이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산세가 험준하고 웅장하며 기이한 경관을 형용한 말이다.

(3) ‘사고본’ㆍ‘화정본’에는 ‘?’, ‘상해본’ㆍ‘호남본에는 ’?‘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瑋(괴위) : 이는 또한 ‘괴위(?偉)’라고도 하며, 기이하고 뛰어나며 아름다운 것을 가리키니, 조식(曺植)은 「주부서(酒賦序)」에서 “내가 양웅의 「주부」를 보았는데, 말이 매우 아름다웠다[余覽揚雄酒賦, 辭甚?瑋].”라고 하였다.  


【원문】

?楷之始, 濫觴(1)漢末, 若谷朗, ?休, ?寶子, 枳陽府君, 靈廟, 鞠?雲, 弔比干, 高植, 鞏伏龍, 秦從, 趙, 鄭長猷造像, 皆上爲漢分之別子(2), 下爲?書之鼻祖者也. 太樸之後, 必繼以文, 封建之後, 必更郡縣. 五德遞?(3), 勢不能已. 下逮齊隋, 雖有參用?筆者, 然僅如後世關內(4), 徒存爵級, 與分地治者, ??(5)殊疆矣. 今??書諸體之最古者, 披枝見本, 因流溯源. 


【해석】

해서의 시작은 한나라 말에서 남상하였다.  <곡랑비>ㆍ<부휴비>ㆍ<찬보자비>ㆍ<지양부군비>ㆍ<중악숭고령묘비>ㆍ<국언운묘지명>ㆍ<조비간문>ㆍ<고식묘지명>ㆍ<공복룡조상기>ㆍ<진종조상왕은당제명>ㆍ<조형조상기>ㆍ<정장유조상기>는 모두 위로는 한나라 팔분서의 갈래이고, 아래로는 해서의 비조가 되는 것이다.  크게 소박한 이후 반드시 화려함으로 이어지고, 봉건 이후는 반드시 군현으로 바뀐다.  오덕은 번갈아 변천하고, 형세는 그칠 수 없었다.  아래로 제ㆍ수나라에 이르러 비록 예서 필법을 섞어 운용한 것이 있으나 겨우 후세 관내후와 같이 한갓 작위의 등급만 존재하고 땅을 나누어 다스리는 이는 경계와 지경이 다를 뿐이다.  지금 해서의 여러 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들어서 가지를 나누고 근본을 보며, 흐름으로 인하여 원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주석】

(1) 濫觴(남상) : ‘상(觴)’은 고대에 술을 담는 기물이었고, ‘남상(濫觴)’은 본래 양자강ㆍ황하의 발원지 물이 매우 얕고 적어 단지 술잔을 띠울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순자ㆍ자도(荀子ㆍ子道)』에서 “옛날 양자강이 민산에서 나왔는데, 처음 나올 때 근원은 잔을 넘치게 할 수 있었다[昔者江出於?山, 其始出也, 其源可以濫觴].”라고 하였다.  이후 이것으로 사물의 시작을 비유하였다.

(2) 別子(별자) : ‘별자(別子)’는 고대에 천자ㆍ제후의 장자 이외의 아들을 가리켰다.  여기에서는 각 비는 한나라 팔분서의 갈래임을 일컫는 말이다.

(3) 五德遞?(오덕체선) : ‘체(遞)’는 순차이니 하나가 다른 하나와 접하는 것이다.  ‘선(?)’은 ‘선(禪)’과 통하니 선양 또한 변천이란 뜻이다.  

    ‘오덕체선(五德遞?)’은 즉 ‘오덕종시(五德終始)’ㆍ‘오덕전이(五德轉移)’와 같은 말이다.  전국말기에 음양가 추연(鄒衍)은 수ㆍ화ㆍ목ㆍ금ㆍ토의 다섯 물질 속성의 상생상극이 끝나면 다시 시작된다는 순환 변화로 역사에서 왕조의 흥망성쇠를 비유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해서가 예서를 대신한 것은 필연적 추세임을 비유한 말이다.

(4) 關內(관내후) : 『한서ㆍ백관표주(漢書ㆍ百官表注)』에서 ‘’라 부름이 있는 것은 경기에 거주하는 것이고, 국읍(國邑)이 없음을 말한다고 하였다.  후세에 이것으로 유명무실함을 비유하였다.

(5) ‘사고본’에는 ‘?’, ‘상해본’ㆍ‘화정본’ㆍ‘목이본’에는 ‘界’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원문】

記曰, 禽獸知有母而不知有父. 野人曰, 父母何算焉. 大夫及學士則知有祖. 今學士生長於書, 亦安可不知厥(1)祖哉. 故凡書體之祖, 與祖所自出, ?箸於篇. 


【해석】

『예기』에 이르기를 “금수는 어미가 있음을 아나 아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야만인이 이르기를 “부모는 여기에서 어찌 따지는가?”라고 하였다.  대부 및 학사는 조상이 있음을 안다.  지금 학사는 글에서 나고 자랐으니, 또한 어찌 그 조상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무릇 서체의 조상은 조상이 나온 바와 더불어 나란히 책에 기록한다.


【주석】

(1) 厥(궐) : 이는 ‘기(其)’와 같으니, 『상서ㆍ우공(尙書ㆍ禹貢)』에서 “기주 그 흙은 오직 흰 토양이고, 그 세금은 위에 두며, 그 땅은 중간이다[冀州厥土唯白壤, 厥賦唯上錯, 厥田惟中中].”라고 하였다. 


【원문】

葛府君碑額, 高秀蒼渾, 殆中?正脈, 爲?書第一古石. 梁石闕其法嗣, 伯施(1)?臣其繼統也. 同時, 有蜀漢景耀八石弩?銘, 正書字如黍米大, 渾厚蒼整, ?臣麻姑壇(2)似之, 可爲小楷極則. 此後正和太和(3)之弩體亦相近. 又有太康五年(4)楊紹瓦, 體勢與?鶴銘同, 雜用草?, 此皆正書之最古者也. 


【해석】

<갈부군비액>은 예스럽고 수려하면서 굳세고 혼후하여 거의 채옹의 정맥으로 해서에서 제일 오래된 돌이다.  <양석궐>은 그 법을 이었고, 우세남ㆍ안진경이 그 정통을 이었다.  같은 시대에 촉한의 <경요팔석노기명>이 있었는데, 해서의 글씨는 마치 기장과 쌀 같은 크기로 혼후하고 굳세며 정제되어 안진경의 <마고선단기>와 같으니, 소해서의 법칙을 삼을 수 있다.  이후 정화ㆍ태화 연간(227-233)의 쇠뇌 서체 또한 서로 가깝다.  또한 태강 5년(284)의 <양소와>가 있는데, 체세는 <예학명>과 같고 초예를 섞어 운용하였으니, 이는 모두 해서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주석】

(1) 伯施(백시) : ‘백시(伯施)’는 우세남(虞世南)의 자이다.

(2) 麻姑壇(마고단) : 안진경의 <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에는 크고 작은 두 종류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작은 글씨의 <마고선단기>를 가리킨다.

(3) 正和太和(정화태화) : ‘정화(正和)’는 자세하지 않고, ‘태화(太和)’는 삼국시대 위 명제인 조예(曹叡)의 연호(227-233)이다.  

(4) 太康五年(태강오년) : ‘태강(太康)’은 진 무제인 사마염(司馬炎)의 연호(280-289)이니, 태강 5년은 284년이다.


【원문】

枳陽府君體出谷朗, ?茂渾重, 與今存鍾元常諸帖體意?似. 以石本論, 爲元常第一宗傳, 太祖文皇帝神道, 暉福寺?其法嗣, 定國寺, 趙芬殘石, 王輝兒造像其苗裔(1)也. 李北海(2)毫鋪紙上, 亦源於是, 石室記可見. 後此能用?筆者寡矣. 


【해석】

<지양부군비> 형체는 <곡랑비>에서 나와 풍요롭고 무성하면서 혼후하고 중후하며, 지금 존재하고 있는 종요의 여러 첩의 형체ㆍ필의와 매우 닮았다.  각석의 탁본으로 논하면, 종요가 첫 번째 종주를 전하였고, <태조문황제신도궐>ㆍ<휘복사비>는 참으로 그 법을 이었으며, <정국사비>ㆍ<조분비잔석>ㆍ<왕휘아조상기>는 그 후예이다.  이옹이 붓털을 종이에 펴는 것 또한 이것에서 근원하였으니, <단주석실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후 풍요로운 붓을 운용할 수 있는 이가 적었다.


【주석】

(1) 苗裔(묘예) : 후대의 자손으로 『이소(離騷)』에서 “전욱 고양씨의 후예이여[帝高陽之苗裔兮].”라고 하였다.

(2) 李北海(이북해) : 이옹(李邕, 678-747)은 당나라 문학가ㆍ서예가로 자가 태화(泰和)이고 강도(江都, 지금의 강소성 揚州) 사람이다.  그는 급군(汲郡)의 북해태수(北海太守)를 지냈기 때문에 ‘이북해(李北海)’라 불렸다.  성품이 강직하여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았고, 뒤에 이임보(李林甫)의 질투로 곤장을 맞아 죽었다.  이백ㆍ두보 등과 교유가 있었고, 글씨는 창신이 있었다.  그의 창신은 ‘이왕’을 배워 그대로 닮지 않고 장점만 취하여 자신이 풍격을 완성한 데에 있다.  당나라 이양빙은 그를 ‘서중선수(書中仙手)’라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녹산사비>ㆍ<이사훈비>ㆍ<이수비>ㆍ<단주석실기> 등이 있다.


【원문】

?龍?與靈廟碑陰同體, 渾金璞玉, 皆師元常, 實承中?之正統, 梁石闕所自出. 穆子容得暉福之?厚, 而加以雄渾, 自餘惠輔造像, 齊郡王造像, 溫泉頌, 臧質皆此體. 魯公專師穆子容, 行轉氣勢, 毫髮畢肖, 誠嫡派也. 後世師?者, 亦其遠胄(1), 但(2)奉別宗, 忘原籍之初祖矣. 


【해석】

<찬룡안비>는 <중악숭고령묘비음>과 같은 서체로 제련하지 않은 금과 다듬지 않은 옥과 같다.  모두 종요를 스승으로 삼았고, 실제는 채옹의 정통을 이었으며, <양석궐>에서 나온 것이다.  목자용은 <휘복사비>의 풍요롭고 두터움을 얻어 웅건하고 혼후함을 더하였다.  이외에 <혜보조상기>ㆍ<제군왕원우조상기>ㆍ<온천송>ㆍ<용산공장질묘지명>은 모두 이 서체이다.  안진경은 오로지 목자용을 스승으로 삼아 행의 전환과 기세, 붓털까지 모두 닮았으니, 진실로 적자의 유파이다.  후세 안진경을 스승으로 삼는 이 또한 먼 후예이나 다른 종주를 받들어 원적의 처음 조상을 잊었다.


【주석】

(1) 胄(주) : 이는 원래 제왕 혹은 귀족의 후예를 가리켰으나 이후 널리 후예를 가리킨다.

(2) 但(단) : 이는 특별히 혹은 그러나라는 뜻이니, 조비(曹丕)는 「여오질서(與吳質書)」에서 “공의 몸은 표일한 기가 있으나 아직 굳세지 않을 뿐이다[公幹有逸氣, 但未?耳].”라고 하였다.


【원문】

弔比干文瘦硬峻?, 其發源?遠, 自尊楗?斜來, 上與中?分疆而治, 必爲崔浩書, 則衛派也. 其裔胄大盛於齊, 所見齊碑造像百種, 無不瘦硬者, 幾若陽明之學, 占斷?明矣. 


【해석】

<조비간문>은 파리하고 굳세면서 험준하고 가파르며, 발원은 아주 멀어 <존건각비>ㆍ<개통포사도각석>으로부터 나와 위로는 채옹과 경계를 나누어 다스렸으니, 반드시 최호의 글씨가 된즉 위씨의 유파이다.  그 후예는 제나라에서 크게 성하여 제나라 비와 조상기 백 종에서 보이는 것은 파리하고 굳세지 않음이 없으니, 거의 왕양명의 학문이 명나라 말기를 독점한 것과 같다.



【원문】

惟?脩羅碑加雄?之態, 靈塔銘簡靜?和, 獨饒神韻, 則下開龍藏而胎?孕薛者也. 朱君山超秀, 亦其別子. 惟定國寺圓照造像, 不失?肥, 猶西魏派, 稍?(1)三尺(2)耳. 至隋賀若誼碑, 則其嫡派, 龍華寺乃弱支也. 


【해석】

오직 <준수라비>는 웅강한 자태를 더하였고, <영탑명>은 간결하고 고요하면서 살지고 온화하여 홀로 신운이 넉넉하였을 뿐이니, 아래로는 <용장사비>를 열어 주고 저수량을 배태하고 설직을 잉태하였다.  <주대림묘지명>은 초탈하고 빼어났으니, 또한 다른 갈래이다.  오직 <정국사비>ㆍ<원조조상기>만이 풍요롭고 살짐을 잃지 않았으며, 서위 유파와 같이 조금 법도를 초월하였을 뿐이다.  수나라의 <하약의비>에 이른 것은 적자 유파이고, <용화사비>는 약한 갈래이다.


【주석】

(1) ?(질) : 본래는 뒤의 수레가 앞의 수레를 초월한다는 뜻이었으나 인신하여 ‘초월’로 사용하였다.

(2) 三尺(삼척) : 이는 법률을 가리키니, 옛날에 법률조목을 3척 길이의 죽간에 썼던 까닭에 법률을 ‘삼척법(三尺法)’이라 일컬었고, 이를 간단히 ‘삼척(三尺)’이라 하였다.


【원문】

觀孟達法師, 伊闕石龕, 石淙序, 瘦硬若屈鐵, 猶有高曾矩?. ?得於龍藏爲多, 而採虛於君山, 植幹於賀若誼. 薛稷得於賀若誼, 而參用貝義淵肆恣之意(1). 誠懸雖云出歐, 其瘦硬亦出魏元預賀若誼爲多(2). 


【해석】

<맹달법사비>ㆍ<이궐석감명>(즉, <伊闕佛龕碑>)ㆍ<석종시서>를 보면, 파리하고 굳셈이 마치 철을 구부린 것 같아 오히려 고조ㆍ증조의 법도가 있다.  저수량은 <용장사비>에서 얻음이 많고, 허함을 <주대림묘지명>에서 채용하였으며, 줄기를 <하약의비>에서 세웠다.  설직은 <하약의비>에서 얻고, 패의연의 방종한 필의를 섞어 운용하였다.  유공권은 비록 구양순에게서 나왔다고 말하나 파리하고 굳셈 또한 <위원예조상기>ㆍ<하약의비>에서 나온 것이 많다.


【주석】

(1) 薛稷得於賀若誼, 而參用貝義淵肆恣之意(설직득어하약의, 이참용패의연사자지의) : 이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마땅히 설요를 가리킨다.  설직이 쓴 비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승선태자비> 머리의 표제, 꼬리의 연월 및 비음에 이름을 쓴 것과 같을 뿐이니, <패의연>과 같지 않다

此當指薛曜, 若薛稷書碑, 可見者唯昇仙太子碑首標題, 碑尾年月, 及碑陰銜名耳, 與貝義淵不類.


(2) 出魏元預賀若誼爲多(출위원예하약의위다) : 이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당나라 비에서 오직 <장종시서>만이 <하약의비>와 가장 가까울 뿐이다[唐碑惟張淙最近賀若誼].”라고 하였다.  


【원문】

唐世小碑, 開元以前, 習?薛者最盛. 後世帖學, 用虛瘦之書益寡, 惟柳沈之體風行, 今習誠懸師石經(1)者, 乃其雲?(2)也. 


【해석】

당나라의 작은 비는 개원(713-741) 이전에 저수량ㆍ설직을 배우는 것이 가장 성하였다.  후세 첩학은 허하고 파리한 글씨를 운용함이 더욱 적어 오직 유공권ㆍ심전사의 서풍이 유행하였으며, 지금 유공권을 배우고 <개성석경>을 스승으로 삼는 것은 운손ㆍ잉손이다.


【주석】

(1) 石經(석경) : 이는 <개성석경(開成石經)>을 가리킨다.  당 문종 태화 4년(830)에 국자감 정담(鄭覃)의 건의를 받아들여 애거회(艾居晦)ㆍ진개(陳?)ㆍ단강(段絳) 등 4명에게 나누어 쓰게 하여 7년 뒤 개성 2년(837)에 완성하였다.  표제는 예서이고, 명문은 해서이며, 글씨는 구양순ㆍ우세남 서풍이 주를 이루었다.  내용은 『주역』ㆍ『상서』ㆍ『시경』ㆍ『주례』ㆍ『의례』ㆍ『예기』ㆍ『좌씨전』ㆍ『공양전』ㆍ『곡량전』ㆍ『효경』ㆍ『논어』ㆍ『이아』 등 12종의 경서와 『오경문자(五經文字)』ㆍ『구경자양(九經字樣)』을 114개의 돌 양면에 새겼다.  명문은 228면, 1면에 8열로 총 650,252자이다.  완각 후 장안성 국자감 안 태학의 강경당(講經堂) 양쪽 회랑에 세웠다.  북송시기 철종 원우 5년(1090)에 여대충(呂大忠)에게 명하여 부학북용(府學北墉, 지금의 서안비림)으로 옮겼다.  명나라 가정 34년(1555)에 섬서성 대지진으로 훼손된 것 이외에 기본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규모는 동한시기의 <희평석경(熹平石經)>과 위나라의 <정시석경(正始石經)>보다 크다.

(2) 雲?(운잉) : 이는 즉 운손(雲孫)과 잉손(?孫)으로 멀어진 자손을 가리킨다.


【원문】

石門銘飛逸奇渾, 分行疏宕, 翩翩欲仙, 源出石門頌孔宙等碑, 皆夏殷舊國(1), 亦與中?分疆者, 非元常所能牢籠也. 六十人造像, 鄭道昭, ?鶴銘乃其法乳(2), 後世寡能傳之. 蓋仙人長生, 不食人間煙火, 可無傳嗣. 必不得已, 求之宋之山谷, 或嘗得大丹學飛升(3)者, 但力薄, 終未能??漢耳. 


【해석】

<석문명>은 날고 표일하면서 기이하고 혼후하며, 행을 나눔은 성글고 질탕하며, 훨훨 날아 신선이 되고자 하고, 근원은 <석문송>ㆍ<공주비> 등에서 나왔으니, 모두 하ㆍ은나라 옛 나라이다.  또한  채옹과 경계를 나누었으니, 종요가 속박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육십인조상기>ㆍ<정문공비>ㆍ<예학명>은 그 법을 전하였으나 후세 이를 전할 수 있는 이가 적었다.  대개 신선은 오래 살고 인간이 연기와 불에 구운 것을 먹지 않으며, 후사를 전함이  없다.  반드시 부득이하여 이를 구한 것이 송나라의 황정견으로 혹 일찍이 크게 단학을 얻어 비승하였으나 힘이 적어 마침내 하늘을 달릴 수 없었을 뿐이다.


【주석】

(1) 皆夏殷舊國(개하은구국) : 이는 근원에서 나옴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2) 法乳(법유) : 불가에서 법사(法嗣)를 서로 전하는 것을 ‘법유(法乳)’라 일컫는다.

(3) 飛升(비승) : 도교에서 신선의 신앙을 선양하고, 수도하는 사람이 신선이 되어 승천할 수 있다는 말을 하였던 까닭에 ‘비승(飛升)’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 구절은 황정견이 <석문명>을 배워 매우 얻은 바가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원문】

偶見端州石室, 有宋人劉起題記, 點?奇逸, ?石門裔孫也, 不圖於宋人見之. 


【해석】

우연히 <단주석실기>을 보았는데, 송나라 사람 유기의 제기가 있었고, 점과 획은 기이하고 표일하며, 참으로 <석문명>의 후손으로 송나라 사람이 이를 보는 것에 도모하지 않았다.  



【원문】

始興忠武王碑與?遵同體, 茂密出元常, 而改用和美, 幾與今吳興書無異. 而筆法精?, 加(1)有妙理, 北朝碑實少此種. 惟美人董氏志娟娟靜好, 略近之. 至唐人乃多採用, 今以吳興故, 千載盛行. 今日作趙書(1)者, 實其苗裔, 直可謂之?遵體也. 


【해석】

<시흥충무왕비>는 <조준묘지명>과 같은 서체로 무성하고 긴밀함은 종요에서 나왔으나 온화한 아름다움으로 고쳐 운영하여 거의 지금의 조맹부 글씨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필법은 정미하고 뛰어났으며, 묘한 이치를 더하였으니, 북조의 비는 실제로 이런 종류가 적다.  오직 <미인동씨묘지명>만 아름답고 고요하며 좋으니, 대략 이와 가깝다.  당나라 사람에 이르러 많이 채용하였고, 지금 조맹부 때문에 천 년간 성행하였다.  오늘날 조맹부 글씨를 쓰는 이는 실제로 그 후예이니, 곧 <조준묘지명> 서체라 일컬을 수 있다.


【주석】

(1) ‘사고본’에는 ‘加’, ‘상해본’ㆍ‘화정본’ㆍ‘호남본’에는 ‘如’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2) 趙書(조서) : 이는 조맹부의 서체를 가리킨다.



【원문】

始興王碑意象雄?, 其源亦出衛氏. 若結體峻密, 行筆英銳, 直與率更皇甫君碑無二, 乃知率更專學此碑. 竇?謂率更師北齊劉珉, 豈劉珉亦師此邪. 蓋齊書峻整, 珉書想亦?修羅之類, 而加結構耳. 凡後世學歐書者, 皆其孫曾也. 


【해석】

<시흥충무왕비>의 이미지는 웅강하고 근원 또한 위씨에서 나왔다.  결체는 험준하고 긴밀하며, 행필은 아름답고 날카로운 것 같음은 곧 구양순의 <황보군비>(즉 <皇甫誕碑>)와 더불어 둘도 없으니, 이에 구양순이 오로지 이 비를 배웠음을 알았다.  두기는 “구양순은 북제의 유민을 스승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는데, 어찌 유민 또한 이를 스승으로 삼았겠는가?  대개 제나라 글씨는 험준하고 정제되어 유민 글씨의 생각은 또한 <준수라비>의 유형일 것이고, 여기에 결구를 더하였을 뿐이다.  무릇 후세 구양순 글씨를 배우는 이는 모두 그 손자ㆍ증손자이다.  



【원문】

楊大眼, 始平公, 魏靈藏, 鄭長猷諸碑, 雄?厚密, 導源受禪, 殆衛氏嫡派. 惟筆力橫?, 寡能承其?者. 惟曹子建碑, 佛在金棺上題記, 洞達痛快, 體略近之, 但變爲疎朗耳. 


【해석】

<양대안조상기>ㆍ<시평공조상기>ㆍ<위령장조상기>ㆍ<정장유조상기> 여러 비는 웅강하고 두터우며 긴밀하여 <수선표비>를 근원으로 하니, 거의 위씨의 적자 유파이다.  오직 필력이 뛰어나 그 실마리를 계승할 수 있는 이가 적다.  오직 <조자건비>ㆍ<불재금관상제기>만 통달하고 통쾌하며, 형체가 대략 이와 가까우나 변하여 성글고 또렷하였을 뿐이다.



【원문】

唐碑雖主雄?, 而無人能肖其筆力, 惟道因碑師大眼靈藏, 東方朔?贊, 金天王碑師長猷始平, 今承其統. 


【해석】

당나라 비는 비록 웅강함을 주로 하였으나 그 필력을 닮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도인법사비>만 <양대안조상기>ㆍ<위령장조상기>를 스승으로 삼았고, <동방삭화찬>ㆍ<금천왕비>만 <정장유조상기>ㆍ<시평공조상기>를 스승으로 삼아 지금 그 전통을 이었다.



【원문】

韓魏公(1)北岳碑, 專師?贊, 嚴重肖其爲人. 帖學盛興, 人不能復爲方重之筆, 千年來幾於夔之不祀(2)也. 


【해석】

한기의 <북악비>는 오로지 <동방삭화찬>을 스승으로 삼아 엄중함은 그 사람됨을 닮았다.  첩학이 흥성하자 사람들은 다시 모나고 중후한 글씨를 쓸 수 없어 천년 이래 거의 기나라가 제사지내지 않은 것처럼 북비의 전통이 중단되었다.  


【주석】

(1) 韓魏公(한위공) : 한기(韓琦, 1008-1075)는 송나라 학자로 자는 치규(稚圭)이고 상주안양(相州安陽, 지금의 하남성에 속함) 사람이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인종 때 추밀직학사로 있으면서 범중엄(范仲淹)ㆍ부필(富弼) 등과 함께 추밀부사가 되었고, 영종 때 우복야에 임명되어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저서로는 『안양집(安陽集)』ㆍ『업하총묘유문(?下?墓遺文)』이 있다.  

(2) 夔之不祀(기지불사) : 이는 원래 조상에게 제사지내지 않는 것을 가리켰는데, 여기에서는 첩학의 흥성으로 말미암아 북비의 전통이 거의 중단하였음을 일컫는 말이다.  

    ‘기(夔)’는 주나라 때에 있었던 나라 이름으로 또한 ‘외(?)’ㆍ‘귀(歸)’라고도 쓴다.  지금의 호북성 자귀현(?歸縣) 동쪽에 있었으나 기원전 634년에 초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원문】

張猛龍, 賈思伯, 楊?亦導源衛氏, 而結構精?, 變化無端. 朱?河(1)?華山碑脩短相副, 異體同勢, 奇姿誕譎, 靡有常制者, 此碑有之. 自有正書數百年, ?萃而集其成, 天然功夫, ?臻(2)?頂, 當爲碑中極則. 信本得其雄?, 而失其茂密. 殷令名包文該頗能學賈思伯(3), 其或足爲嗣音歟. 


【해석】

<장맹룡비>ㆍ<가사백비>ㆍ<양휘비>는 또한 위씨를 근원하였으나 결구가 정미하고 뛰어나며 변화의 실마리가 없었다.  주균은 “<서악화산묘비>의 길고 짧음은 서로 어울리며, 형체는 다르고 필세는 같으며, 기이한 자태는 변화무쌍하고, 일정한 제도가 없는데, 이 비는 있다.”라고 하였다.  해서가 수백 년 있음으로부터 집합되고 이룸을 모아 천연과 공부가 나란히 절정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비에서 지극한 법칙이 되었다.  구양순은 웅강함을 얻었으나 무성하고 긴밀함을 잃었다.  은령명ㆍ포문해는 자못 <가사백비>를 배울 수 있었으니, 혹 족히 소리를 이은 것이 되지 않겠는가?


【주석】

(1) 朱?河(주사하) : 주균(朱筠, 1729-1781)은 청나라 학자이며 서예가로 자는 미숙(美叔)이고 호는 죽군(竹君)ㆍ사하(?河)이며, 대흥(大興, 지금의 북경에 속함) 사람이다.  벼슬은 한림원시독학사에 이르렀고, 후진을 양성하여 대진(戴震)ㆍ홍량길(洪亮吉)ㆍ장학성(章學誠)ㆍ왕중(汪中)ㆍ황경인(黃景仁) 등의 문하생이 있었다.  『명대척독소전(明代尺牘小傳)』에서 서예와 육서는 수나라 이전의 체가 있었다고 하였고, 손성연(孫星衍)은 전서체를 잘 썼다고 하였으며, 동생 주규(朱珪)는 “서예는 하나같이 육서를 근본으로 하여 자연스럽고 굳세며 아리땁다[書法一本六書, 自然勁媚].”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사하문집(?河文集)』ㆍ『을축집(乙丑集)』ㆍ『안휘금석지(安徽金石誌)』 등이 있다.

(2) 臻(진) : 이는 이르다 또는 도달하다는 뜻이니, 『시경ㆍ북풍ㆍ천수(詩經ㆍ北風ㆍ泉水)』에서 “빠르게 위나라에 이르렀다[?臻於衛].”라고 하였다.  

(3) 殷令名包文該頗能學賈思伯(은령명포문해파능학가사백) : 이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은령명과 안씨는 친척 관계가 있으니, <배경민비>에서 안진경이 채취한 것이 있을 것이나 <가사백비>의 이음이 되기에 부족하다.  포문해의 <연공송>은 대략 목자용이 쓴 <태공여망비>의 필의가 있다.

殷令名與顔氏有連, 裴鏡民碑魯公似有採取, 不足爲賈思伯之嗣. 包文該?公頌, 略有穆子容之意.


    은령명(殷令名)은 당나라 서예가로 진군(陳郡, 지금의 하남성에 속함) 사람이다.  서화에 뛰어났고, 편액을 잘 써서 유명하였다.  그가 쓴 보제사(普濟寺)의 편액은 후세에 법식이 되었다.  637년에 쓴 <배경민비>는 필법이 정묘하여 구양순ㆍ우세남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비를 쓸 때의 벼슬은 행상서금부원외랑ㆍ건안현개국남이었다.

    포문해(包文該)는 당 현종(재위기간, 712-756) 때 사람이다.  그가 742년에 쓴 <연공송>은 당나라 비문에도 불구하고  육조의 법도를 전하고 있어 필의가 질박하고 중후하다.



【원문】

李超碑體骨峻美, 方圓?備, 然方筆較多, 亦出衛宗. 司馬元興, 孟敬訓, 皇甫?, 凝禪寺體皆相近. 解伯達造像亦有奇趣妙理, 兼備方圓, 爲北碑上乘. 至隋宋永貴, 唐于孝顯, 李緯, 圭峰, 亦其裔也(1). 


【해석】

<이초묘지명>의 형체와 골격은 험준하고 아름다우며, 방필과 원필을 아울러 갖추었으나 방필이 비교적 많고, 또한 위씨의 종주에서 나왔다.  <사마원흥묘지명>ㆍ<맹경훈묘지명>ㆍ<황보린묘지명>ㆍ<응선사비> 형체는 모두 서로 가깝다.  <해백달조상기>는 또한 기이한 정취와 묘한 이치가 있고, 겸하여 방필ㆍ원필을 갖추었으며, 북비에서 뛰어났다.  수나라 <송영귀묘지명>과 당나라 <우효현비>ㆍ<이위묘지명>ㆍ<규봉비>에 이르는 것은 또한 그 후예이다.


【주석】

(1) 亦其裔也(역기예야) : 이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응선사비> 옛날 탁본을 보았는데, 신채가 빛나 최근 탁본과 비교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이초묘지명>과 같으면서도 일가의 권속이 아닐 따름이다.  <우효현비>는 구양순 필의가 있고, <이위묘지명>은 저수량의 필의가 있으며, <규봉비>(즉 <定慧??碑>)는 유공권 필의가 있으니, 모두 대략 같으면서도 멀리 미치지 못한다.  배휴의 체는 유공권과 동시이고 자못 이름이 있었으나 반드시 서로 스승관계가 아니며, 형세가 자연스럽게 서로 가까웠을 따름이다.

余嘗見凝禪寺舊拓, 神采逈非近拓可比, 但與李超似非一家眷屬. 于孝顯有歐意, 李緯有?意, 圭峰有柳意, 皆略似而遠不及. 裴體與柳同時, 而頗有名, 未必相師, 勢自相近耳.



【원문】

高湛, 劉懿, 司馬昇, 法生造像, ?華麗美, ?祖鍾風. 敬顯?獨以渾逸開生面, 李仲璇則以駿爽騁逸足(1), 凝禪寺則以峻整暢元風(2). 


【해석】

<고담묘지명>ㆍ<유의묘지명>ㆍ<사마승묘지명>ㆍ<법생조상기>는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아울러 종요 풍을 종주로 하였다.  <경현준비>(즉 <敬史君碑>)는 홀로 혼후하고 표일한 것으로 새로운 면모를 열었다.  <이중선수공자묘비>는 준마가 상쾌하고 빠른 발로 달리는 것 같다.  <응선사비>는 험준하고 정제되며 유창하여 세속을 초월한 풍모가 있다.


【주석】

(1) 逸足(일족) : 이는 발이 빠르다는 뜻이니, 부의(傅毅)는 「무부(舞賦)에서 “좋은 준마가 발이 빨라 흔들거리고 업신여기며 앞질렀다[良駿逸足, ?揮凌越].”라고 하였다.

(2) 元風(원풍) : 이는 현풍(玄風)이었으나 강희제의 이름을 휘하여 ‘원풍(元風)’이라 하였고, 원래는 청담한 기풍을 가리켰으나 여기에서는 세속을 초탈하고 표일하며 구차하지 않음을 비유하였다.  『세설신어ㆍ문학(世說新語ㆍ文學)』에서 “처음 『장자』의 주를 단 사람이 수십 명이었는데, 그 요지를 궁구할 수 없었다.  향수의 옛날 주 이외에 뜻을 해석하는데, 묘한 분석과 기이한 이름으로 크게 현풍이 밝았다[初, 注莊子者數十家, 莫能究其旨要. 向秀舊注外爲釋義, 妙析奇致, 大暘玄風].”라고 하였다.  



【원문】

龍藏集成, 如??連錢(1), 生香異色, 永興傳之, 高步風塵(2)矣. 唐初小碑, 最多此種, 若張興, 王留, 韋利涉, 馬君起浮圖, ?其?續, 流播人閒. 吳興香光, 亦其餘派也. 


【해석】

<용장사비>의 집성은 마치 고대 궁문에 장식한 연환문과 같이 향이 나고 색깔이 기이하였는데, 우세남이 이를 전했으며 세속을 초월하여 당시의 독보였다.  당나라 초의 작은 비에 이러한 종류가 가장 많으니, <장흥묘지명>ㆍ<왕류묘지명>ㆍ<위리섭묘지명>ㆍ<마군기부도기>는 나란히 그 실마리를 이어 사람 사이에 전파하였다.  조맹부ㆍ동기창은 또한 그 나머지 유파이다.


【주석】

(1) ??連錢(청쇄연전) : ‘청쇄(??)’는 고대 궁문에 장식한 것으로 연환문(連環紋)을 새겼다.  여기에서는 집대성자를 비유한 말로 사용하였다.

(2) 高步風塵(고보풍진) : 이는 세속을 초월하여 당시의 독보라는 뜻이다.



【원문】

高植體甚渾勁, 殆是鍾法. 王偃王僧, 微有相近, 然渾古過甚, 後世寡傳, 惟魯公差有其意耳. 


【해석】

<고식묘지명>의 형체는 매우 혼후하고 굳세며, 거의 종요 필법이다.  <왕언묘지명>ㆍ<왕승묘지명>은 조금 서로 가까움이 있으나 혼후하고 예스러움이 지나치게 심하여 후세 전한 이가 적으니, 오직 안진경만이 조금 그 필의가 있을 뿐이다.



【원문】

張黑女碑雄?無匹, 然頗帶質拙, 出於漢子游殘碑, 馬鳴寺略近之, 亦是衛派. 唐人寡學之, 惟東坡獨肖其體態, ?其苗裔也(1). 


【해석】

<장흑녀묘지명>의 웅강함은 짝이 없으나 자못 질박하고 졸함을 띠고 있으며, 한나라 <자유잔석>에 나왔고 <마명사근법사비>가 대략 이와 가까우니, 또한 위씨 유파이다.  당나라 사람은 이를 배움이 적었는데, 오직 소식만 홀로 그 형체와 자태를 닮았으니, 참으로 그 후예이다.


【주석】

(1) ?其苗裔也(진기묘예야) : 이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식의 벼슬과 뜻은 안진경에 있고, 문호는 서호이니 <묵묘정시>를 보면 알 수 있으니, 반드시 <마명사근법사비>를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장흑녀묘지명>은 그때 아직 출토되지 않았으나 마침내 앉아서 진짜 장물이 나타나 얻었으니, 아마도 소식 또한 서로 보고 웃으며 변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東坡職志在平原, 門庭則季海, 觀墨妙亭詩可見, 未必學馬鳴寺. 張黑女爾時更未出土, 然竟坐以眞贓現獲, 恐坡公亦相視而笑, 不能置辨也.



【원문】

吳平忠(1)字大逾寸, 亦出元常, 而勻淨安整, 細觀蘇慈碑布白著筆, 與此無異. 以此論之, 蘇慈亦非?碑, 不得以其少雄?氣象非之. 唐貞觀十四年(2)于孝顯碑, 勻淨亦相似, 以證蘇慈, 尤可信與舍利塔皆一家眷屬. 自唐至今, 習干祿者師之, 於今爲盛, 子孫千億, 等於子姬(3)矣. 


【해석】

<오평충후소경신도동궐> 글씨 크기는 1척이 넘고, 또한 종요에서 나왔으며, 고르고 깨끗하면서 편안하며 정제되어 자세히 <소자묘지명>의 포백과 필획을 나타낸 것을 보면, 이것과 다름이 없다.  이것으로 논하면, <소자묘지명>은 또한 가짜 비가 아니니, 웅강한 기상이 적다고 하여 아니라 할 수 없다.  당나라 정관 14년(640)의 <우효현비>는 고르고 깨끗하여 또한 서로 같으니 <소자묘지명>을 증명해주고, 특히 믿을 수 있는 <사리탑명>과 모두 일가의 권속이다.  당나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간록체를 배우는 이는 이를 스승으로 삼는데, 지금에 성함은 자손이 천억이니 상ㆍ주나라의 후예가 많은 것과 같다.



【주석】

(1) 吳平忠(오평충후) : 이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양나라 동궁학사 공경통이 왼손으로 반대로 쓰는 반좌서를 창조하여 ‘중중청한체’라 불렀다.  <오평충후궐>의 반좌서는 반드시 남긴 자취가 아닐 것이다.  『법서요록』에 보인다.

梁東宮學士孔敬通創反左書, 號衆中淸閑體. 吳平忠侯闕反左書, 未必其遺迹也. 見法書要錄.


정표(鄭杓)ㆍ유유정(劉有定) 또한 『연극병주(衍極幷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반좌서는 양나라 동궁학사 공경통이 만들었다.  당시 자리에서 묻는 말에 답하면서 아는 이가 없었는데, 유원규가 이를 알고 마침내 ‘중중청한법’이라 불렀다.

反左書, 梁東宮學士孔敬通作. 當時坐上酬答, 無有識者, 庾元規見而識之, 遂呼爲衆中淸閑法.


(2) 貞觀十四年(정관십사년) : 정관은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연호(627-649)이니, 정관 14년은 640년이다.

(3) 子姬(자희) : ‘자(子)’는 성씨이니, 『통지ㆍ씨족략(通志ㆍ氏族略)』에서 “자씨는 제곡의 아들 계가 자상에 봉해지고 성씨 자를 하사받았다[子氏, 帝?之子契, 受封子商, 賜姓子].”라고 하였다.  

    ‘희(姬)’ 또한 성씨로 황제가 희수(姬水)에 거주하였을 때 성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주나라 사람은 황제 이후 후직(后稷)을 조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또한 성이 희씨이다.  여기에서 ‘자희(子姬)’는 넓게 상ㆍ주나라의 후대를 말하고, 후예가 많다는 뜻을 비유하였다.



【원문】

慈香造像體出夏承, 其爲章也, 龍蟠鳳舞, 縱橫相涉, 闔闢相生(1), ?章法之?軌(2)也. 其用筆頓挫沈著, 筋血俱露, 北碑書無不骨肉停勻, 筆鋒難驗, 惟此碑使轉斫折, ?縱逸宕, 其結體飛揚綿密, 大開宋明之體, 在魏碑中, 可謂奇姿詭態矣. 


【해석】

<자향조상기> 서체는 <하승비>에서 나왔는데, 장법은 용이 서리고 봉황새가 춤추며, 종횡으로 서로 섭렵하며, 닫고 여는 것이 상생하니, 참으로 장법의 뛰어난 규범이다.  용필은 머무르고 꺾으며 침착하여 근과 혈을 함께 드러내어 갖추 었다.  북비 글씨는 골과 육을 멈추어 고르지 아니함이 없고, 필봉은 증험하기 어려운데, 오직 이 비만 사전(使轉)이 자르고 꺾으며, 무르익게 방종하고 표일하며 질탕하다.  결체는 날아오르고 면밀하여 크게 송ㆍ명나라 서체를 열어 주었으니, 위비에서 기이한 자태라 할 수 있다.


【주석】

(1) 闔闢相生(합벽상생) : ‘합(闔)’은 닫고 합한다는 뜻이고, ‘벽(?)’은 연다는 뜻이다.  『주역ㆍ계사상(周易ㆍ繫辭上)』에서 “한번 닫고 한번 여는 것을 변이라 일컫는다[一闔一?謂之變].”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닫고 여는 것이 상생한다는 뜻이다.

(2) ?軌(절궤) : ‘절(絶)’은 ‘다한다, 가장이다, 독특하다’는 뜻이고, ‘궤(軌)’는 법도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가장 뛰어난 규범이라는 뜻이다.



【원문】

優?王平整薄弱, ?無滋味, 大似唐人書, 然亦可見魏人書, 已無不有矣.  


【해석】

<우전왕조상기>는 평정하고 박약하며, 맛이 전혀 없어 크게 당나라 사람 글씨와 같으나 또한 위나라 사람 글씨를 볼 수 있어 이미 있지 아니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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