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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름 받은 백성의 여정
출애굽은 우리 입장에서는 애굽을 나온 것이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이다. 인생이 그러하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들어온 것이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는 본토와 친척을 떠나서 왔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나는 하나님 부름을 받아서 왔다.”고 말한다. 출애굽은 우리 입장에서 애굽을 나온 것이므로 출애굽기는 부름받은 백성의 여정이다.
성경은 모든 것을 우리의 필요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통해서 무엇을 찾는 것이 종교라 하고 하나님의 필요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 우리에게 오신 것, 이것을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이 오시고 우리는 가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것은 정확하지 못하다. 사람마다 환경과 입장이 다르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시는 것은 일정하다. 모든 민족에게 다 똑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인간적으로 보면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시는 입장에서 보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완전하고 우리가 찾아가는 것은 불완전하다.
이상향을 사람이 찾아가는 것이 불교다. 왕실에서부터,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에서 출발했는데 현상을 보니 너무 엉망이니까 그것을 벗어나겠다고 출발한 것이 불교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거기는 실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의 시작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조건 의심하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의심하라고 한다. 의심을 한 사람이 불교에 들어가지 의심이 없으면 불교에 들어갈 일이 없다. 무언가 내 인생을 찾고 싶다는 사람이 불교를 찾는다. ‘나를 찾아 떠나는 길’, 과연 참 나는 누군가, 이것을 찾는 것이 불교다. 법당에 가 보면 벽에 심우도라는 그림이 있다.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그림이다. 불교는 그런 원리로 되어 있다. 그에 비해 기독교는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잘사는 사람도 있고 못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가 많은 아이를 보면 ‘그 얘는 교회 다녀야 되겠다.’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전도하러 가면서 일부러 문제 있는 사람만 찾아간다. 거기 가면 말이 먹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먹고 잘사는 사람에게 가면 할 말이 없어서 오히려 기가 죽어서 돌아온다. 그럴 일이 아니다. 잘먹고 잘사나 못먹고 못사나 하나님이 보시기는 똑같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이지 세상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문제를 해결하러 가면 어떤 사람에게 가면 할 말이 없게 된다. 나보다 더 잘먹고 잘사는 사람을 보면 기죽어서 돌아온다. 그건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문제를 겨우 해결하려고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불러내서 나온 사람들이다. 말짱히 잘사는 사람도 부르심을 받았다. 왜 부름받았는가? 세계가 다르니까 부름받은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동산 안의 세계와 동산 밖의 세계는 다르다. 동산 안에 있을 때의 인간과 동산 밖으로 나온 인간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을 세대별로 구분하면 아담이 동산 안에 있을 때의 세계와 동산 밖에 있을 때의 세계로 구별된다. 동산 밖에 나와서는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고 가인은 후손을 낳아 칠대 손 라멕에 이르렀는데 거기까지가 한 단원이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고 했듯이 라멕에 와서 벌로 마치는 세계가 절정에 달하게 된 것이다. 이 세대는 보복의 세대, 억울함을 푸는 세대다.
그 다음 세대는 셋으로부터 시작해서 노아까지 이르는 세대다. 그 세대는 홍수로 끝났는데 홍수로 끝난 것은 네피림 시대를 의미한다. 사람이 천사와 결합해서 놀라운 사람들이 된 것이다. 위대하고 놀랍고……, 세상으로 말한다면 성공한 셈이다. 그것이 한 세대다. 그 다음에 노아가 낳은 아들들이 바벨탑으로 가는 것이 또 한 세대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 마지막 세대에서 부름받은 사람이다. 노아의 세 아들이 퍼져서 인종이 퍼졌고 그 중 하나가 바벨로 갔는데 그 속에서 부름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부름받은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의 계열이다. 우리는 누군가? 부름받은 계열에 속한 사람들이다. 어떻게 해서 교회에 왔든 간에 하나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부름받은 사람이다.
세상에 같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러면 혼란이 생긴다. 지금 기독교가 이것이 구별이 안되서 혼란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다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로서는 부름받은 백성과만 관계된다. 부름받지 않은 백성은 아직 어떻게 하시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지만 어떻게 하시는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 일을 보면 ‘아니,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 있느냐?’ 이런 일이 있다. 아프리카에 가서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그런 일이 많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구제한다고 목숨걸고 나가서 도우려고 하나 그것은 세대적인 구별이 안돼서 그러는 것이다. 부름받은 백성, 이것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고 전혀 다른 길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과 능력의 지팡이와 대변자 아론을 동반하게 하여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셨다. 불러내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모세를 부르신 것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과 똑같다.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땅에 찾아오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다. 하나님이 찾아온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찾아와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거기에 하나님의 영이 찾아오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이 시작된 것이다.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까지가 한 단원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성경은 항상 한 단원마다 전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 전체가 발전하는 것에 불과하다. 열매가 맺히면 처음 열매는 맛이 없어서 못먹는데 차근차근 맛있게 익어간다. 익는 과정이 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도 사람의 어떠함에 따라 단원이 생긴다. 사람이 없던 데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 한 단원이고 그 사람을 동산에 두셨다는 것이 첫 번째 단원이다.
신학자들의 책을 보니 문제는 근원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신화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근원이 분명치 않고 근원이 분명치 않으니까 돌아갈 데도 분명치 않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 하나님을 믿고 ‘좋다. 큰 도움이시다.’라며 좋다 했는데 십자가에 가면 꽉 막혀 버린다.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사람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내주셨다고 해석한다. 말이 안맞는다. 그런 사랑은 세상에 없고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해 왔지만 인문학이 발달하니까 점점 희미해졌다. 사람이 잘사니까 별로 소중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이 감동이 안된다.
기독교는 지금 십자가에 와서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많이 퍼졌지만 인생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없다. 옛날에는 천당이 해답이었는데 지금은 천당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니 세상에 해답을 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내세관이나 말세론이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할 수 없다. 기독교가 답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세론이나 예수님이 재림한다던가 하는 것밖에 내놓을 수 없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맨날 말세가 온다고 했다. 이천 년대가 되면 지구 종말이 온다고 했고 부흥회를 한다고 난리였다. 이천 년이 되면 무슨 일이 생긴다고 전 세계적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했고 오늘 갔다가 내일 바로 온다고 했으니까 이천 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천 년이 넘어서 미국에 가 보니까 부흥회 포스터가 싹 없어졌다. 말세가 온다던 이천 년이 지나니까 말세론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다 사라져 버렸다. 모두 헛다리를 짚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길을 모르고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한참 인기 있는 때는 그런 사람들 인기가 대단했다. 뉴욕 권도상 형제도 우리를 만나기 전까지 말세론자를 집에 모셔놓고 있었다. 그만큼 열심이었다. 그 사람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나를 만나서 그 사람과 떨어졌다.
하나님은 세대별로 역사하셨다. 그러므로 세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름받은 세대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부름받은 사람의 조상이지 믿음의 조상이 아니다. 아브라함보다 믿음 좋은 사람이 많다. 부름받은 세대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개인이다. 개인이니까 율법이 필요없다. 혼자 사는데 무슨 율법이 필요하겠는가. 율법이 생겼다는 것은 사회화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 속에는 법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상태에 빠졌다. 창세기 1장 2절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고 창세기 6장에는 네피림이 되었다고 했고 그래서 홍수가 났다고 했다. 언제든지 이렇게 되어 다음 세대가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애굽에 내려가서 처음에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빠져서 마지막에는 노예상태가 되었다. 어디까지 갔느냐 하면 사내 아이는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바로가 볼 때 이스라엘이 자꾸 늘어나면 애굽에 위협이 되겠으니까 사내 아이를 낳으면 다 죽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 극단적인 때에 모세가 나온 것이다. 한 세대가 끝나면 그 다음 세대가 나오는데 그 다음 세대는 항상 구원이 필요한 세대다.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게 구조가 되어 있다. 모세를 부를 때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였던 것이다.
왜 꼭 그럴 때 시작하시는가? 그럴 때가 아니면 불러도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잘먹고 잘사는 데 가서 “우리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하면 누가 나오겠는가. 못살겠으니 나온 것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육신적으로 볼 때는 가난은 불행이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앉은뱅이, 절름발이, 눈먼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예수를 먼저 만났다. 그 이유는 멀쩡한 사람은 예수가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눈이 있는 사람은 눈을 뜰 필요가 없고 걸어다니는 사람은 일어날 필요가 없다. 예수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인기가 있었다. 그 시대를 개혁하기 위해서혁명 운동을 한 사람이어서 사람들이 좋아했다. 요즘은 세례요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데 70년대 박정권 때는 기독교인에게 예수보다 세례 요한이 훨씬 인기가 있었다. 예수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이었고 세례 요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보적이어서 백성을 선동하는 세례 요한이 더 가치 있게 보았다.
세례 요한이 처음에는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했지만 옥에 갇혀서 헤로디아의 일로 직언을 하다가 옥에 갇혀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다. 옥에 갇혀서 내일 모레 하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 같은 사람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을 하고 시골로 내려가 버리셨다.
전혀 다른 세계다. 세상에서 “고쳐야 된다. 개혁해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런 사람에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떴다고 전하라고 하셨으니 억장이 무너지지 않았겠는가. 감옥에서 세례 요한이 그 말을 듣고 과연 ‘야, 메시야다.’라고 깨달았겠는가, ‘내가 믿었더니 실망이네.’ 하고 죽었겠는가?
우리는 그런 일을 현실적으로 보았다. 우리 시대에 그런 일이 많았고 어떤 목사는 감옥에도 갔다. 그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용기있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헛일이라고 말했다. 쌍방이 서로 좋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옥에 간 쪽은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예배당에서 주여, 주여 하고 있으면 되느냐.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자기들만 천당 간다고 하면 되느냐?” 했고, 예배당 파는 헛일인데 괜히 한다며 비난했다. 우리 젊은 시대에 그러했다.
이번에 신교수님도 사랑방에 그런 글을 써놓았는데 그분은 불란서 혁명 때처럼 자발적인 운동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도 학생 때 참여했는데 이제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선동에 의한 것이었지 불란서 혁명처럼 자발적인 운동이 아니라고 알았다는 것이다. 진즉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늦게 알아서 후회된다고 써 놓았다. 그 당시 사실이 그러했다. 우리 같은 사람은 힘이 없어서 나서지 못했지만 힘 있는 사람들은 광화문 앞에서 데모했다.
두 세계가 있다. 우리는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과 능력의 지팡이와 대변자 아론을 동반하게 하여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셨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은 ‘I am ~(나는 ~이다).’라 하셨다. 이것은 be 동사형의 어떤 분이라는 뜻이다. 이름은 모르고 단지 be, become처럼 어떤 상황이 오면 무엇이 되는 분이라는 뜻이다. 형체가 없으니까 그런 상황을 만나봐야 그분의 이름을 알지 그렇지 않으면 모르는 분이다.
그런데 그것이 엄청난 능력이다. 어둠에서는 빛이 되고 길이 없을 때는 길이 되고 생명이 없을 때는 생명이 된다. ‘I am ~.’, 이것은 무한한 능력이다. ‘I am ~.’, 여기는 못붙일 것이 없는 무한한 능력이다. 그 이름을 모세에게 주신 것이다.
이름을 주신 것은 명령이라는 뜻이다. 대장의 명령, 왕명을 받고 왔다면 대단한 것 아닌가. “왕명이다.” 하면 대신이었던 사람도 나와서 마당에 엎드려야 한다. 왕명이라며 사약을 받으라고 하면 북향사배하고 사약을 마셔야 했다.
그런 의미도 되고 더 깊게는 ‘I am ~(나는 ~ 이다).’이신 분이 함께 한다는 뜻이다. ‘네가 ~이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네가 이렇다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엄청난 능력을 받은 것이다. 모세는 무슨 일을 행할 때 보면 자기가 했다. 하수를 피가 되기도 했고 메뚜기가 애굽 온 땅을 덮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일어나 걸으라.” 하시면 앉은뱅이가 걸었다. 그 이름 때문이다. 베드로도 그러했다. 성전 문에 앉아서 손을 벌리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하자 걸었다. 이름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다. 그냥 김 아무개, 이 아무개 같은 이름이 아니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바로가 모세를 보고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가! 신이 아닌가!’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를 보고도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은 신이 아닌가! 사람이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는가.’ 했던 것이 바로 그 이름이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자의로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다. 그 말이 이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이런 사람을 보냈는가? 우리를 불러내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가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적이다. 나만 겨우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 섰다. 바로와의 첫 번째 대결인 것이다. 모세는 바로에게 “우리는 3일 길쯤 나가서 여호와께 제사(예배)를 드려야 하니 백성을 내 보내 달라.” 하였으나 쉽게 보내 주지 않았다.
바로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모세를 알았던 바로였으면 당장 “저놈 잡아라.” 했겠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서 모세를 모르는 바로는 어이 없는 소리라며 “네가 누군데 나에게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했을 것이다.
바로는 엄청난 사람이다. 애굽은 대단히 정세가 안정된 곳이다. 우리는 비가오고 바람이 불면 하늘님을 찾았다. 비가 오면 시골에서는 비가 오신다고 했다. 얼마나 비가 필요하면 그러했겠는가. 천재지변이 많아서 자식들에게 조심하라고 했고 농사를 지어도 잘될지 못될지 모르는데 애굽은 천재지변이 없어서 왕조가 수 천년을 유지했다.
모세의 요구에 바로는 “여기서 해라. 뭐하러 삼일씩 나가야 하느냐.”고 했고 모세는 ” “아니다. 우리는 꼭 광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래서 싸움이 붙었다. 한두명도 아닌데 바로가 쉽게 보내주겠는가. 그래서 열 번을 접전을 했는데 그래도 안들으니까 마지막에 유월절로 대결하게 되었다. 유월절이 마지막 대결이다.
유월절의 내용은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이다. 이것을 방 안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한집 식구가 다 먹어야 했다. 우리 집 식구가 두 사람뿐이면 옆집과 합해서 먹어야 했다. 어린양 한 마리를 다 먹어야 했던 것이다. 남겨두면 안되고 완전하게 먹어야 했다.
먹고 남겨 두면 안된다. 십자가 예수를 먹고 남겨두면 안된다. 백프로 먹어야 한다. 백프로 먹지 않아서 지금 기독교가 제대로 안되는 것이다. 희한하게 백프로 먹어야 했다. 뼈는 꺾지 말고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살코기는 문을 잠그고 백프로 먹어야 했다. 우리는 예수를 백프로 먹어야 한다.
유월절로 대결한 것이다. 방안에서는 이 괴상한 짓을 하고 있고 바깥에서는 죽음의 사자가 온 애굽을 휩쓸어서 장자를 다 멸했다. 왜 장자인가? 장자는 기력의 시작이다. 사람의 능력의 시작이 장자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을 쳤다는 뜻이다. 정 반대의 역설이다. 어린양의 고기로 장자의 능력을 친 것이다. 이런 이상한 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의 전쟁도 같은 전쟁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가 어떻게 세상을 이기겠는가.
기독교는 좋은 것만 가져갔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 세상에 없는 것만 가져갔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많기 때문에 세상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인간이 발달해서 다 잘되고 있는데 하나님이 사랑해 줄 필요가 없다. 조금 있으면 전기 자동차가 나오고 운전을 안해도 되는 차가 나온다. 앞으로는 사고도 안날 것이다. 지금 연구 중인데 곧 나온다고 한다. 엘에이 최황수 형제가 지금 그 연구를 하고 있다. 상대방 차가 내 차에 닿기 전에 10Cm 간격을 좁히려고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머지 않아 운전면허가 없어도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퇴출되고 말 것이다.
다윗은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왔다.” 하고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 장군을 쓰러뜨리고 그의 목을 베었다. 골리앗은 조그만 놈이 막대기를 들고 쫓아오는 것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청히 내려다 보고 있다가 물맷돌에 맞았다. 그것이 무기라고 생각했으면 방패도 있고 칼도 있는데 가만히 있었겠는가. 골리앗은 ‘저것이 뭐하는 짓인가?’ 하며 보고 있다가 이마에 맞고 당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신나는 이야기다. 공연히 신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신나는 이야기다. 물맷돌 하나로 적장을 무너뜨렸다니 신이났지 박격포를 쐈다고 하면 신났겠는가.
이 무기가 무엇인가. 이 무기가 ‘I am ~(나는 ~이다).’이다. ‘I am slingstone(나는 물맷돌이다).’ 필요할 때는 물맷돌이 되는 것이다. 그의 무기는 그 이름(I am ~.)으로 던진 다윗이 양들을 지키려고 짐승들을 쫓아내던 그 물맷돌(어린양)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이 물맷돌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이다. 유월절 밤에 바로를 굴복시킨 무기는 어린양(물맷돌)이다. 참 신기한다. 유월절로 바로를 굴복시켰다. 할렐루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한 것은 한 집안에 한 마리뿐인 그 양, 일년 된 수양이다. 다윗은 물맷돌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는 굴복하고 백성은 나와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다.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이런 사실이 있다면 얼마나 통쾌하겠는가. 이런 실존적 사건이 있다면, 지금 이런 사건이 있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출애굽의 비밀은 유월절에 있다. 출애굽에서 마지막 대결한 무기가 유월절이다. 일본이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원자폭탄 하나에 무조건 항복했다. 전 미국의 능력을 집약한 것이 원자폭탄이었듯이 하나님 백성의 유일한 무기는 유월절 어린양이다.
유월절의 중심은 어린양이다. 그 능력은 양의 피와 살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으면 그 후에 양의 피와 살은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되었겠는가. 이 양의 피와 살은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성막에서 매일 번제단에 드려졌다. 이 피가 없이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성막에서 매일 번제로 드려졌다.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고 매년 첫날에 절기로 지켜졌다.
이스라엘 달력은 유월절이 첫날이다. 유월절을 첫날로 하는 달력, 성력이 이스라엘의 달력이다. 우리도 농사짓는 집에는 절기가 있으니까 음력을 써야 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기를 지켜야 하니까 자기들 달력을 따로 썼다. 유월절을 그 해의 첫날로 삼으라고 되어 있다. 유월절은 영원한 규례로 선포되었다.
그런데 무서운 말이 있다. 먹지 않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이다. 유월절을 먹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못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엄격하게 했겠는가. 유월절 어린양과 관계되지 않은 백성은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월절 양을 먹지 않으면, 유월절에 참여하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이다.
안상홍이라는 사람이 세운 ‘하나님의 교회’라는 데서는 유월절을 내세운다. 성경에 주일을 지키라는 말은 없지만 유월절을 지키라는 말은 있는데 왜 안지키느냐고 한다.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했는데 왜 안지키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안상홍에게 갔다. 그 세력이 굉장하다. 내가 있던 교단 이름이 ‘대한 기독교 하나님의 교회’였는데 안상홍이 사방에 ‘하나님의 교회’라는 간판을 붙여서 할 수 없이 수십 년 쓰던 그 이름을 포기하고 한신측 장로교회라는 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구에도 하나님의 교회가 여러 군데 있다. 유월절 하나 가지고 그만큼 세력이 커졌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본다면 그들의 말이 맞다.
그 후에 이스라엘은 번제를 드리게 되었고 그 해의 첫날을 삼았으며 영원한 규례로 선포했다. 만일 유월절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저주가 붙었다.
그러면 지금 유월절이 무엇인가? 잘 생각해 보자. 성찬식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분들은 해 봤겠지만 성찬식은 그날 하루뿐이다. 잘못 먹으면 안되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된다고 한다. 요즘 큰 교회에서는 하얀 천으로 화려하게 해놓고 장로 집사들이 가운을 입고 나와서 그럴싸하게 성찬식을 행한다.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살과 피가 중요하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저녁에 유월절을 지키셨다. 자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으로 제자들에게 나눠주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먹을 것이라 하셨다. 왜 이런 일을 했겠는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막14:25). 그 말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시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그 전까지는 못먹지만 하나님 나라가 올 때는 다시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화체설을 주장한다. 떡을 먹으면 예수님의 몸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 떡이 내 속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미사를 꼭 드려야 한다. 미사를 안드리면 큰 죄다. 천주교에는 대죄와 소죄가 있는데 고해성사로 그냥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있고 벌금을 내고 회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죄가 있다. 그것이 떡을 안먹는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떡을 먹으러 가야 한다. 다른 것은 안해도 떡만 먹고 가면 된다. 상징이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개신교에서는 일 년에 한 번이나 두 번 성찬식이라는 것을 하는데 천주교는 화체설이니까 매주 먹어야 한다. 요즘은 신부가 손에 주는데 옛날에는 입을 벌리면 넣어주었다.
내가 있던 교회에 성찬식을 하는 교회에 다니던 자매가 들어왔다. 결혼했기 때문에 우리 교회를 먼저 일 년 나와 보고 아니라고 생각되면 가도 좋다고 신랑과 계약을 했던 것이다. 그 자매는 일 년 동안 잘 나왔고 아무 문제도 없었다. 어느 날 신랑이 혼자 오기에 “왜 오늘 혼자 옵니까?”라고 물으니 “오늘이 약속한 그날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모두 놀랬다. 그 자매는 일 년 동안 한 번도 예배를 못드렸던 것이다. 그에게 설교 듣는 것은 예배가 아니고 떡을 먹어야 예배였다. 의식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실제적인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 예수를 어떻게 먹는가? 기념으로 먹는가, 떡으로 먹는가? 아니다. 실제로 그를 먹어야 한다. 실제로 먹는 것은 어떻게 먹는 것인가? 이것은 내려오지 못하는 그를 먹는 것이다. 그 외에는 먹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다.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 밖에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예수가 없다.
다른 예수는 먹을 수 없다. 감히 어떻게 먹겠는가. 그래서 제자들은 ‘곤란하다. 선생님 살을 어떻게 먹는다는 말인가?’라고 했다. 육신적으로, 종교적으로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겠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먹는다는 문제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한다.
먹는다는 말은 지방교회에서 쓰기 시작한 말이다. 그 사람들은 매일 먹어야 한다고 한다. 먹고 마셔야 한다고 한다. “한번 호흡할 때 주 마셔. 아멘.” 이런 식으로 공기처럼 마신다고 한다. 생각일뿐이지 그래서 먹어지겠는가. 생각으로 무엇을 못하겠는가. 생각 갖고는 안된다.
실제적인 살과 피, 그것은 예수의 죽으심이다. 그것밖에는 먹을 수 없다. 먹으면 연합이 된다. 먹어놓고 나면 하나가 된다. 그와 연합되어 한 새 사람, 한 새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
‘어디서 새 피조물이 되겠는가?’ 하면 또 행위를 보게 된다. 저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되었는가? 무엇이 기준인가? 행위가 기준이 되면 도로 율법이 된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먹으면 바로 새 사람이 된다. 내 운명이 바뀐다. 나는 전에 만분의 일이라도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만분의 일이라도 내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빼 버리면 죽은 것이다. 자유의지의 문제다. 그런데 예수를 보고 나면 자유의지가 소용없다. 거기서 자유의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십자가에 못박히면 자유의지가 소용없다.
지금 세상에서나 기독교 안에서나 이성주의자들은 자유의지가 마치 인간의 생명인 것처럼 생각한다. 자유 의지는 어떤 생명에서 발생한 결과지 결코 생명이 아니다. 사랑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러하다. 생명에서 발생한 것이다. 자유 의지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죽으면 자유의지도 없다.
자유의지 문제는 신학적으로도 중요하다. 모든 신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최고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전에 더 큰 의지를 만나면 인간의 자유 의지는 아무 소용없다고 했다. 바둑을 두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고수를 만나면 빤히 보면서 진다. 내 돌을 방어하면서 집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바둑이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두어도 뒤로 가서 계산해 보면 다 죽어 있다. 내 의지, 이성, 의지는 소용없다. 더 큰 것을 만나버리면 아무것도 안된다. 그래서 나는 사탄의 의지보다 더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졌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히면 내 의지는 아무 소용없다. 거기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의지가 아닌 다른 의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새로 태어난 사람의 의지라야 되지 옛 사람의 의지로는 안된다.
의지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짐승들도 다 자기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목을 매 놓으면 빠져나가려고 난리를 친다. 그것이 자기 자유의지다. 그러나 목을 매 놓아서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 사람만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물은 다 자유의지가 있다. 하지만 더 큰 의지를 만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계장은 과장 앞에서 자기 의지가 소용없다. 과장이 하라는대로 해야 되지 계장 갖고 되겠는가. 그러니까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아니, 자유 의지가 있는데…….’ 하는 사람은 직장생활을 못한다. 늘 직장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가장 쉬운 것을 모르고 자유의지가 하나님인 줄 알기 때문이다.
새 피조물 안에 새 자유의지가 있다. 돼지도 자유의지가 있고 소도 자유의지가 있다. 무슨 자유의지인가. 이것이 문제다. 새 피조물 안의 자유의지다. 거기서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가 된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다. 그것은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자유 의지인데 개의 자유의지를 갖고는 사람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아무리 개에게 자유를 주고 한 방에서 같이 자도 개는 사람의 세계를 모른다. 한 새 사람, 한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 하였다. 새것의 자유의지라야 되지 옛날 자유의지로는 안된다.
자유 의지로 기독교인의 생활을 하려니 얼마나 어려운가. 기독교인 생활을 하고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야 되니 얼마나 어려운가. 예수님만 따라가야 되는데 되겠는가. 자유의지가 없으면 괜찮은데 자유의지가 있으니까 세상에 굴복할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자유 의지라야 하나님 나라가 된다. 옛날 자유 의지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 피조물의 자유의지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저절로 하나님 나라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다. 아멘. 할렐루야!
그 백성의 유일한 무기는 어린양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슨 무기가 있겠는가.
김정은이 왜 미사일을 준비하는가. 죽지 않으려고 미사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건이 되면 15분이면 끝나버린다고 한다. 섣불리 굴다가는 큰일난다. 종전선언을 하자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전시작전권 반납하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가. 남북평화회담을 하자고 하지만 가능하겠는가. 우리 마음대로 안된다. 우리는 휴전 당사국이 아니다. 전시작전권이 미국에게 있기 때문에 중국, 인민군, 유엔군 셋이 해야 한다. 그런데도 큰소리를 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앉고 설 자리를 알고 말을 해야 되지 만용이다. 우리가 그런 힘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홍해에서 갈라섬
모세는 두 번째로 바로를 홍해에서 만났다. 은금패물까지 받아서 애굽을 잘 나왔는데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놓고 보니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쫓아왔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 차라리 애굽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광야에 나와서 죽게 되었다며 홍해 앞에서 벌벌 떨었다.
그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 하였다. 이것도 ‘I am ~.’이다. 여기 와서는 또 다른 것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바다를 갈라서 육지같이 왔던 것이다.
이것도 요즘 과학시대에는 비판이 많다. ‘어떻게 바다가 갈라졌겠는가. 거기는 바다가 아니었을 것이다. 물이 별로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아무 재미도 없다. 그러려면 성경을 뭐하러 보겠는가. 여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홍해를 가른 것은 여호와의 바람이다. 동풍이 불어 바람으로 물을 갈라서 물벽이 생겼다고 했는데 바람(프뉴마)은 여호와의 영을 상징한다. ‘I am ~(나는 ~ 이다).’이신 하나님이 ‘나는 바람이다.’가 된 것이다. 얼마나 재미있는가! ‘I am ~.’이신 분이 갑자기 ‘I am 바람.’이 된 것이다. 주일학교 때는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는데 이제 보니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다. ‘나는 ~이다.’이신 하나님이 바람이 되신 것이다.
바다는 갈라져서 물 벽이 되었고 백성들은 그 길로 다 통과했다. 이백만이 통과하려면 길도 넓어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을 것이다. 요즘 과학적인 시대에서 도저히 해석이 안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경험이다. 이런 일이 전부 우리 인생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이래서 성경을 보는 것이다. 이런 일이 없으면 성경은 동화책도 아니고 신화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해석되는 사건이다.
한국 역사도 이렇게 해석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었다. 함석헌 씨 같은 분이 이렇게 해석하려고 했지만 재료가 없어서 안됐다. ‘성서 조선’이라는 잡지도 있었고 무교주의자들은 한국 역사도 이스라엘 역사도 그러니까 같은 것 아니겠느냐고 했는데 아무리 해석해도 재료가 없다. 이런 해석이 안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가 신기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뒤를 쫓던 애굽의 기병들은 물에 잠겨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죽었다고 하려다가 너무 잔인해서 물에 잠겼다고 했다. 처음에는 몰사했다고 썼는데 물에 잠겨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고쳤다. 문학적으로 기왕이면 이렇게 말하면 좋지 몰살당했다고 하면 시장바닥에서 하는 소리 같다. 점잖게 하니 훨씬 좋다. 뒤졌다는 말보다 돌아가셨다는 말이 좋다. 잠들었다는 말이 얼마나 좋은가.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을 듣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다.
오늘 우리의 구원은 바로 여기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구원은 여기서 해석이 된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유월절 어린양)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다밑 비밀한 그 곳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고
뒤쫓는 군대 물리쳐……(찬송가 446장).”
여러분이 이 찬송의 가사를 만들어 보기 바란다. 뒤쫓는 군대를 물리쳤고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피곤한 줄 몰랐다니 얼마나 재미있는가. 큰 바위 밑에 나를 숨기셨다니 얼마나 좋은 노래인가! 나는 가끔 바깥에 나가 앉아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운다. 얼마나 감동적인 노래인가! 바위 밑에 나를 숨겨 주셨다. 주 손으로 덮으셨다. 손으로 가려서 안보이게 만들어 주셨다. 나는 이런 일을 보았다. 직접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을 보았다. 이것이 내 노래다.
어린양의 살과 피, 여호와의 바람!
다시는 애굽 사람을 보지 않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홍해가 없으면 언제 또 애굽 사람들이 올지 모른다. 말 타고 금방 올 수 있는데 홍해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바로는 무조건 항복했다.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광야는 거친 곳이다. 바람이 불면 갑자기 모래산이 생긴다. 바람이 세니까 사람이 거기 묻히면 죽어 버리는 무서운 곳이 광야다. 그러나, 그래서 바로가 없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금방 산이 되었다 웅덩이가 되었다 하니까 바로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길이다. 비록 땅이 거칠다 해도, 비록 내 환경이 거칠다 해도 바로가 없다. 이것이 인생의 행복이고 안전이다. 항상 바로 때문에 숨 죽이고 ‘어떻게 하면 될꼬…….’ 하던 세상인데 바로가 없는 세상이 온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바로가 없는 세상으로 온 것이다. 여기는 바로가 없다. 바로가 없는 세상으로 부르신 것이다.
대신 누가 있는가. 여호와, ‘I am ~.’이신 분이 있다. 바로가 없고 여호와가 계신 곳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여기는 여호와가 있는 곳이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래서 나는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 죽으니 사나 거기 있어야 한다. 매를 맞아도 거기서 맞고 고난을 당해도 거기서 당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신다. 매를 맞아도 집에서 아버지에게 맞으면 되지만 밖에 나가서 깡패에게 맞으면 죽는다. 바로는 깡패다. 아기를 입양해서 키운다고 하다가 때려 죽인 여자가 뉴스에 나왔다. 매를 맞아도 집에서 아버지에게 맞아야 되지 그런 여자를 만나면 망한다.
계시록 21장 1절에는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였다. 바로는 그 바다 속에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까 이제는 다시 바다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22장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를 보니 그 통치의 보좌 밑에서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고 하였다.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 다시는 밤이 없고 눈물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다. 그것이 바로 이 세계다.
이스라엘은 광야로 나왔지만 그래도 광야가 그곳으로 가는 길이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광야가 그곳으로 가는 길이고 저쪽으로 가는 길은 바벨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어쩌다 내가 이 길로 부름받았는지 모르고 여러분은 어쩌다 이 길로 왔는지 모른다. 여러분이 어쩌다 온 것이지 돈이 있어서 왔는가, 명예가 있어서 왔는가. 온다고 왔는데 와서 보니 이곳이다. 나도 어쩌다 보니 이곳에 왔다.
그때 나는 거기를 떠나야 하는데 떠날 수가 없었다. 길이 없으니까 떠난다는 생각마저도 못했다. 그런데 친구가 나를 불러서 나는 얼씨구 좋다 하고 나왔던 것이다. 나갈 생각도 못한 사람이 나갈 길이 생겼던 것이다. 나는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생각도 안해보았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지금 가는 곳이 어딘지 생각도 안해보았다. 일단 나가야 했다.
그래서 그 뒤로 한번도 뒤를 돌아본 적이 없다. 뒤돌아볼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앞으로 가지 않으면 죽으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특공대가 그런 것이다. 앞으로 가지 않으면 죽으니까 가야 하는 것이다. 일선에서 전쟁할 때 뒤로 도망치면 헌병들이 지키고 있다 총살을 해 버렸다. 그러니 차라리 앞으로 가다 죽어야지 도망치다 총살당하면 되겠는가. 총살당하는 것보다 싸우는 것이 나으니까 싸운 것이다. 전쟁이 그런 것이다. 나는 앞으로 가지 않으면 갈 데가 없었다. 뒤돌아볼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
내가 돌아볼 데가 많았으면 얼마나 망설였겠는가. 성격이 그런 사람이니까 가다 생각하고 가다 생각할 사람이다. 순택이가 나보고 목사님하고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한다. 한번 한다고 했으면 그냥 해야 되는데 했다가 또 바꾸고 또 바꾸니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나도 순택이 성질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일을 하다 보면 그렇게 하게 된다. 어떻게 처음부터 다 알겠는가. 모르니까 하다 보면 늘 ‘이렇게 바꾸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격이 그렇다.
그런 사람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 길이 얼마나 완전한 길인가. 나는 한 번도 뒤돌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니 오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뒤돌아보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못가도 가면 뒤돌아 볼 필요가 없으니까 오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진짜 한 번도 뒤돌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뒤로 와서 보면 해석이 되는데 너무 감사하다. 내가 쫓겨났든지 밀려났든지 하여간 뒤로 와서 보면 복이다.
처음에는 한번 쫓겨난 것이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4년을 버텼던 것이다. 내가 무슨 힘으로 버티겠는가.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버텼지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못버텼을 것이다. 교회에서는 나가라고 하면 그만이다. 교역자는 교회에서 그만두라고 하면 당장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서 나를 보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4년을 있었지 내 힘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바깥에서는 나를 보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 교단에서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그냥 나가라고 하면 그것이 법이었다. 그분의 말 한마디가 법이었다. 그런데도 4년을 버텼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든든하게 도와준 사람이 두 사람 있었다. 나는 평생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엉겁결에 용감한 사람, 대단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 교회를 나올 때 돈 한푼도 없었다. 어쩌려고 그랬던지 몰라도 도저히 더 이상 있으면 안되겠어서 나왔다. 그런데 그분들이 돈을 모아서 세 사람이 누우면 딱 맞을 방 한 칸 얻을 돈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길이 열렸다. 나는 CCC에 들어가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나오니까 길이 열려 있었다. 너무 신기하다. 내가 만일 일찍 나왔어도 못갔을 것이고 한 달만 늦게 나왔어도 못갔을 것이다. 딱 그 기회에 나왔다. 어찌 그렇게 나오고 싶었는지 교회도 안되고 나도 안되고 다 안되겠다 싶어서 나왔다. 오랫동안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 주에 생각해서 주일 날 발표했다.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 결정했다. 4년 동안 하도 지쳐서 그랬는지 잡는 사람도 없었다. 그 기회를 맞춰서 나왔고 그래서 CCC에 들어갔는데 그때 외부에서 사람을 모집한 것은 CCC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고 한다. 자체 내에서 사람을 키워서 썼지 절대로 외부 사람은 안받는 곳인데 그때 무슨 사건이 생겨서 갑자기 외부 사람을 모집했던 것이다. 그 기회를 내가 몰랐는데 거기 들어가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니 신의 한수라고 하는 것이지 사람이 생각하겠는가.
부름받은 사람에게는 신묘막측한 일이 있다. 그 사람에게 알맞은 길이 다 있다. 부름받은 사람은 딱 그 사람에게 맞도록 맞춤형 구속이 있다. 너무 신기하다.
유월절에 대해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후편을 계속하겠다